모진영(毛振永)이라는 이름표를 단 호동문화발전공사 소속의 기사가 모는 인력거를 타고 다시 발걸음을 향한 곳은 광화사(鑛化寺)라는 사찰이었다. 700여 년 전에 창건되어 네 번의 중수를 거쳤다는 규모가 크지 않은 그 사찰은 호동 사람들의 영혼의 안식처라고 했다. 그 지역 주변에 10개의 사원이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광화사라고 했다. 중수 때마다 하나씩 세워졌다는 돌 거북 등 위의 비석이 인상적이었다. 어디엔가 ‘법륜상전(法輪常轉)’, ‘불법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뜻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광화사의 앞쪽에는 호호(戶湖)라는 인공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는 자금성 쪽으로 연결된 전호(前湖), 북해호(北海湖), 서호(西湖), 남호(南湖) 등의 호수와 이어지고 그곳으로부터 10여Km가 떨어져 있는 이화원(頤花圓)의 곤명호(昆明湖)와는 운하로 연결되어있다고 했다. 자금성의 후원인 어화원(御花園)으로부터의 선상 행차가 이화원까지 가능했다는 것이다.
승용차와 인력거 한 대가 간신히 비껴갈 수 있는 호동의 골목길을 따라 우리는 호동의 사람들이 사는 더 작은 골목과 집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전호(前湖)의 다리가 있는 곳부터는 골목이 워낙 좁아 걸어서 동네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집은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명과 청대의 사람들이 살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했다. 문루 위쪽에 튀어나와 있는 문양이 든 기둥의 숫자가 두 개면 그 집은 중인(中人)의 집이고 그 숫자가 네 개가 되면 그 집은 고관대작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중인이나 고관들의 가옥이 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집 대문의 양 문설주에는 ‘만사여의전가락(萬事如意全家樂)’, ‘출입평안(出入平安)’, ‘일범풍순(一帆風順)’ 따위의 글귀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호동의 이곳은 말하자면 우리의 북촌(北村)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호동의 사람들은 그간의 여러 차례의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겪으며 한편 퇴락하고 누추해진 모습이었지만 따스한 숨결과 은은한 고풍이 느껴지는 아늑한 골목길과 지붕 낮은 집들이 있는 동네에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국가의 영욕에 더 민감해하는 것일까. 어느 인력거엔가는 ‘향항명천경미호(香港明天更美好)’라는 깃발을 나부끼며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2주 전쯤 영국으로부터 되돌려 받은 홍콩의 반환을 기뻐한다는 의미의 깃발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호동에서는 공왕부화원(恭王府花園)도 둘러보았다. 공왕부학원은 명나라의 제7대 황제의 아우였던 공(恭, Gong) 왕자의 주거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북경음악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그날의 여행은 호수의 갓길을 따라 먼저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옴으로써 마칠 수 있었다. 답사 여행을 마친 시각은 이미 점심이 기운 시간이었다. 더운 날씨에 지치기도 하고 시장기도 많이 느껴졌지만 얼마 후면 곧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중국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인상 깊게 둘러볼 수 있었다. 우리의 경우라면 개발의 뒷전에 밀려 일찌감치 사라지고 말았을 평범한 역사적 흔적의 공간이 그곳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데 대해 적지 않은 안도감, 편안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것과 옛것이 별다른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 새것 속에 옛것의 무게 있는 향기가 깃들어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누구나 중국으로부터 쉽게 느낄 수 있는 이른바 대국적인 기질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나라의 토양과 인문 사회 환경이 가져다준 산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무엇이든 큼직하고 넓고 많은 것들이 그들의 마음가짐을 비교적 넉넉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여러 가지 말들을 하게 되지만 그들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한마디의 말 둘이 있다. ‘만만디(Manmandi, 慢慢的)’와 ‘차뿌뚜어(Chabutuo, 差不多)’. ‘서두를 것이 뭐 그리 있느냐?’는 뜻의 만만디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의미의 차뿌뚜어를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극히 평범하게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외에도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고래로 중용(中庸)이나 조화(調和)와 같은 절제의 미덕은 물론 그들이 ‘꽌시’라고 말하는 관계(關係)와 미엔쯔, 면자(面子)라고 하는 소위 체면을 중시해 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중국인들의 마음가짐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확실한 자기 계산과 주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재화를 귀하게 여기며 신용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재화의 거래나 신용에 있어서만큼은 분명한 자기 기준과 원칙으로 매우 엄격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
이는 필경 그들의 오랜 삶의 경험 속에서 체득한 생명과도 같은, 그들의 생존을 지켜주는 귀중한 자산일 것이다. 그것은 무쌍한 사회적 변혁과 정치적인 격변이 쉬지 않고 반복되는 어지러운 삶 속에서 그들이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곳은 가족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바탕 이외에 재화나 신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아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유구함과 그간에 겪은 온갖 영욕의 역사가 만들어낸 그들 본연의 속성이 아닐까.
베이징 여행의 맨 마지막 날 들렀던 곳은 오후의 비행기 시간을 잡아놓고 쉽게 들러 볼 수 있는 시내 중심부의 천안문광장 근처에 있는 박물관이었다. 천안문광장 동 측에 자리하고 있는 중국의 국립박물관은 남쪽에 있는 남관인 중국역사박물관(中國歷史博物館)과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북관인 중국혁명박물관(中國革命博物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두 박물관에는 중국의 유구하면서도 한때는 찬란하기도, 또 다른 때는 파란만장하기도 했던 그들의 삶과 문화, 역사의 모습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대만으로 많은 유물과 문화재가 옮겨갔다고는 하지만 역시 귀중해 보이는 수많은 유물과 문화재들이 본토에도 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시대별로 잘 정리된 전시관은 오랫동안 강대한 나라를 건설해 나왔으면서도 몰락과 부흥을 누구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게 반복해온 그들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중국 근세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는 혁명박물관은 새삼스레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기조차 치욕적인 수모와 고통, 또 다른 영욕의 삶을 살아온 대국, 중국 근세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삶도 어찌해서 그토록 할퀴고 찢겨서 상처받으며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됐을까! 그런 아픔과 고통이 있었기에 현대의 중국이 더욱 활기 있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워낙 크고 넓어서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국립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공항을 향해 나오는 길에서 바라보는 베이징의 모습은 참으로 힘과 활기가 넘치는 느낌이었다. 비좁은 공항에서 느낄 수 있는 기분은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패배했던 역사 속에서, 또 고통스러웠던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은 분명 그들의 소중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계속...) (2003.9.24.)
첫댓글
생도 시절 중국어 시가에 들은 '차부뚜어' - 큰 차이 없다. 작은 것 가지고 따지지 마라. 뭐 이런 뜻으로 이해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리고 면자-체면 중시는 며칠 전에 누군가의 글에서 봤는데, 그분은 중국인들이 면자, 즉 체면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예로 삼국지를 보면 전쟁터에서 두 장수가 마주 보고 처음에는 온갖 큰소리를 치다가도 막상 붙어서 힘이 달리면 줄행랑을 놓는 장면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 글을 읽으면서, 전쟁터란 원래 그런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중국하면 만만디, 과장 등의 생각이 드는데, 거기다 면자, 차부다 등도 있군요. 사진과 함께 잘 봤습니다.
북경 시내만 잠간 들른 적이 있었는데, 주변 유적지에 대한 설명 잘 읽었습니다. 시간와 여건의 제약으로 다 보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글과 동영상을 통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지요. 4대 문명의 발상지이며 유규한 역사와 유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외교 문화의 선진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고 생각되네요.
순우가 여행한 2003년은 장쩌민이
등소평의 개혁ㆍ개방을 이어받아
베이징 모습이 활기찻으나 시진핑
3연임으로 모택동 복고주의는 중
국경제의 원동력이 상실되었어요
순우의 많은 기행문이 부러워요
1981년 가을 학기에 미국으로 유학 온 중국학생을 만난 게 저로서는 첫 상면이었지요. 미중관계 정상화 이후 중국학생의 미유학이 본격적 궤도에 오를 즈음이었으니. 그때로부터 40 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을 평가하자면 실로 괄목할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러나 공산체제는 불변이며 인권탄압은 여전하다는 점에서 등소평의 소원은 반밖에 이루지 못한 것 같애요. 국내 빈부의 격차 해소와 정치체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 풀어야할 숙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유구함으로 보면, 우리 만주와 한반도도 못지 않죠. 기록이 남아 있지 못한 아쉬움이 많죠.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석기시대가 더 많이 알려지고 있죠. 중국은 공개 못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