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안식처, 산 자의 소원 상자
영화 《파묘》는 무당인 화림(김고은 분)과 봉길(이도현 분)이 미국 LA에 거주하는 부호로부터 ‘기이한 의뢰’를 받으며 시작한다. 의뢰의 내용은 집안에 대물림되어 오는 유전병을 해결해달라는 것. 저택의 주인인 할아버지는 어딘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휠체어에 앉아있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의뢰인의 아이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 이상한 병을 앓고 있다. 멀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의뢰인 역시 그의 형이 정신질환으로 세상을 뜬 이후 알 수 없는 두통과 환청에 시달리는 중이다. 화림은 이 모든 일의 원인으로 조상의 묫자리가 편안하지 않아 생긴 묫바람을 지목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최고의 풍수사 상덕(최민식 분)과 장의사 영근(류해진 분)을 영입해 묘를 이장하기로 한다.
〈영화 《파묘》의 한 장면〉 (출처: ㈜쇼박스)
이때 화림이 말하는 묫바람은 무속적 관념으로, 조상의 묘가 불길하거나 편안하지 못한 곳에 놓여 있어 망자의 혼이 안식을 취하지 못해 살아있는 후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죽은 조상이 후손의 꿈에 등장하여 누운 자리가 불편하다고 하소연하는 데에 그치는데, 《파묘》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생을 달리한 조상이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21세기 미국에 있는 어린 증손자에게까지 영향을 줄 만큼 강력한 한(恨)으로 묘사된다.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 소장 『명산록(名山錄)』. 안동과 그 인근지역의 명산 길지가 기록되었다.〉
(출처: 디지털 장서각)
무덤은 한자로 음택(陰宅)이라고 지칭된다. ‘택(宅)’은 집이라는 뜻이고 여기에 빛/이승을 뜻하는 ‘양(陽)’과 반대 개념인 음지/저승이라는 뜻의 ‘음(陰)’이 붙어 만들어진 단어로, ‘죽은 자의 집’이라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땅의 기운이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당나라 문인 왕발(王勃)이 쓴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는 등왕각이 위치한 남창의 지리를 설명하며 ‘인걸지령(人傑地靈)’ 즉, ‘사람이 걸출하며 땅이 영험하다’라고 묘사한 바 있는데, 땅의 신령한 기운이 해당 지역에 뛰어난 인물들을 낳는다는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같은 자리에 같은 위치로 집을 세우고 살아도, 어떤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고꾸라지며, 어떤 지역에서는 왕후장상을 끝없이 배출하고 어떤 지역은 평범한 인간군상만이 그득하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낳는 것일까?
고민 끝에 사람들은 땅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 땅의 기운을 읽어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그러한 결과로 만들어진 학문이 바로 ‘풍수(風水)’이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좋은 길지(吉地)에 주거지를 정하는 방책을 양택 풍수, 죽은 사람들이 머물 망자의 주거지인 묘를 좋은 자리에 쓰는 방책을 음택 풍수라고 한다. 사람(산 자와 죽은 자를 아우른)이 머물 수 있는 ‘터전’을 세우는 것이 땅의 기운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방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18세기에 등장하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는 지리서로 분류되지만, 한편으로는 살만한 곳 즉, 복거지(卜居地)를 소개하는 풍수서로 분류할 수 있는데 ‘터전’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가진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예전(禮典), 「산송(山訟)」〉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로 나누어져 있지만 두 가지 풍수법에 담긴 소망은 하나이다. 특별한 자리를 통해 현재의 삶에 복이 오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의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고 강하게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조선에 오면 유교적 가치인 ‘효(孝)’와 결착되어 더욱 굳건한 형태로 발전한다. 조선 중기 이후 각 문중마다 기운이 좋은 산에 터를 잡고 조상의 묘지를 모아 매장하는 선산(先山)을 하나씩 두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분묘 주변의 땅에 대한 점유권 획득이라는 경제적인 효용과, 제사 의례의 편의성을 고려한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가문에서의 위계에 따라 묘지를 더하며 길지를 점거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면 유력 가문이 집칸을 늘려가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으로 그 위세를 과시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으니, 길지라는 것이 금세 동이 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후대의 앞길을 열어줄 좋은 땅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 품어봄 직하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묫자리를 두고 각종 싸움이 발발하게 되고 관아의 송사를 통해 판결을 요하는 사례도 빈번했으니 이름하여 ‘산송(山訟)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산송은 때로 지나치게 격렬해져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당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으로는 경북 성주의 박효랑 사건을 들 수 있다.
〈박효랑 사건이 수록된 『이향견문록』, 「박효녀」〉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709년 사건은 대구의 박경여가 자신의 할아버지 무덤을 성주 박수하의 선산 근처에 쓰면서 시작된다. 박경여는 청안현감을 지낸 이력이 있는 유력자로 성주의 현감 및 감사 등과 인연이 있는 유력자였으며 박수하는 5대째 성주 땅에서 살고 있던 향반이었다. 선산에 다른 이의 묘소가 세워진 것을 발견한 박수하는 송사를 제기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러자 박경여는 소나무를 베고 묘비를 세우는 등 본격적으로 조부의 무덤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이에 격분한 박수하가 박경여의 노비들을 구타, 박경여는 박수하를 관에 고발한다. 관아에 이송된 박수하는 심문 과정에서 그동안의 울분을 담아 감사 이의현과 박경여가 인척 관계라는 점을 들어 조사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것이 감사의 신경을 건드려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된다.
심한 형벌 끝에 풀려난 박수하가 7일 만에 사망하게 되며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집안 간의 산송 문제에서 부모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으로 긴박하게 전환된다. 박수하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큰딸인 박문랑은 아버지의 사망 원인이 박경여의 투장(남의 산이나 묫자리에 몰래 묘를 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조부의 무덤을 파내 박경여를 부르고자 한다.
“나는 약한 여자라 멀리 다른 지역까지 가서 원수의 배에 칼을 꽂아 넣을 수가 없다.
지금 원수 조부의 무덤이 여기에 있으니,
차라리 무덤을 파내 그 시신을 불태워 원수를 이곳에 오게하여 찔러버리리라!”
[我以弱女不能遠涉他鄕, 剚刃讎腹,
而今讎之祖墳在此, 我寧掘其墓焚其尸, 以致讎來而刃之也!]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박효녀(朴孝女)」)
이 말을 외치고 문랑은 열 손가락에 피가 흥건하도록 손으로 박경여 조부의 시신을 파냈다고 한다. 산소를 두고 벌어진 갈등이 두 집안을 같은 하늘 아래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원수로 만든 것이다. 박경여 조부의 무덤 위로 피 맺힌 문랑의 손가락과 시신을 삼킨 화마가 이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수백의 노비를 데리고 온 박경여 측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문랑이 사망한다. 이를 이어받아 둘째 딸인 박효랑이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왕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고하는 격쟁(擊錚)을 벌이면서 이 사건은 서울에 떠들썩하게 알려지게 되었고, 다양한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광정(李光庭, 1552~1627)의 「석유소불위행(昔有蘇不韋行)」,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의 『삽교집(霅橋集)』,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등을 들 수 있다.
박효랑의 이야기는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길지’란 목숨을 걸고 쟁투해야 하는 실존적 차원의 문제로, 왕실이나 유력가와 같은 몇몇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사안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 조선 후기 야담에 등장하는 묫자리를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는 길지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기대하고 욕망하던 바를 보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영화 《명당》〉 (출처: 주피터필름)
어떤 선비에게 풍수를 잘 아는 친척이 있었다. 선비는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그 친척을 모셔다가 묫자리를 얻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아들들이 몇 차례에 걸쳐 방문을 청하지만 오겠노라 말만 하고 풍수가는 올 기미가 없다. 이때 어리석고 게을러 집안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어린 종이 나서서 풍수가를 모셔 오기로 하고, 아들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에 종을 보낸다. 풍수가의 집에 당도한 어린 종은 칼을 휘둘러 가며 풍수가를 을러 선비의 집으로 향한다. 풍수가와 어린 종의 여정 중에 진짜배기 풍수가는 바로 어린 종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풍수가는 종의 지시를 받아 선비의 장지를 정해주고 그 대가로 어린 종을 데려가게 된다. 이후로 풍수가와 어린 종은-영화 〈명당〉에서 박재상(조승우 분)과 구용식(유재명 분)이 그랬던 것처럼-한 팀이 되어 이런저런 길지를 정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재물을 벌어들이게 된다.
어느 날 어린 종은 풍수가에게 그가 임종할 때가 되면 자신이 와서 묫자리를 정해주겠노라고 말하고 훌쩍 떠나 버린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등장해 산지를 알려주는데, 이때 풍수가의 장지로는 ‘아들 셋을 낳아 그 아들들이 귀하게 되는 자리’를 그 부인의 장지로는 ‘남이 주는 재물로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자리’를 정해준다.(『청구야담(靑邱野談)』 「지관이 우매한 사내종의 말을 들어 산소를 정함[定佳城地師聽癡僮]」) 이 대목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묫자리를 통해 ‘자손’, ‘영달’, ‘재물’과 같은 욕망을 염원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은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길일을 잡아 묘 구덩이를 열었을 때였다.
거사가, “수재께서는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우리가 자식 된 몸으로 후사가 끊기는 인륜을 저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불효가 막심합니다. 배필을 얻는 게 가장 급하답니다.”
(『청구야담』, 「거사가 묫자리를 점지하여 고운 아내를 얻게 해줌[得美妻居士占穴]」)
풍수를 잘 보는 것으로 유명한 성 거사가 며칠 내 이어지는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거처를 내어준 가난한 형제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길지를 정하며 원하는 바를 물어보는 대목이다. 이에 형제는 배필을 얻게 해달라고 청했고, 성 거사는 천금을 든 미인이 찾아오는 자리를 점지해 준다. 그 후 그의 말처럼 미인과 결혼해 부자가 된 형제를 다시 찾아온 성 거사는 대대로 과거급제자가 배출될 수 있는 자리를 점지해 준다. 앞서 이야기에 등장한 ‘자손’, ‘영달’, ‘재물’이라는 욕망이 여기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기산 김준근(金俊根, ?~?)의 풍속화 《효자거묘사는모양》〉 (출처: 덴마크 국립박물관)
야담에 보이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이 외에도 몇 가지의 공통점을 보인다. 별 볼 일 없던 사람이 아주 유능한 풍수가였다던가, 평범한 사람들이 풍수가에게 작은 은혜를 베푼 것이 길지라는 보답으로 이어진다던가, 몰래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주로 종이나 노비-이 예정된 길지에 몰래 투장하여 복을 가로챈다든가 하는 등이다. 이러한 발복이 비교적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곱씹다 보면 묫자리를 둘러싼 이야기들에선 조상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한 효심보다는 조상을 매개로 땅의 기운을 듬뿍 받아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답 없는 인생을 뒤집으려는 절실함이 느껴진다. 요즘으로 치자면 조상님이 꿈에 나와 로또 번호를 알려주기를 기원하는 격이랄까? 그렇다고 하면 묘지는 죽은 자의 안식을 핑계로 현재의 우리들이 ‘잘’ 살기를 희구하는 강한 욕망을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집필자 소개최진경
동국대학교에서 「조선시대 관청계회문학 연구」라는 주제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 『正祖時代 ‘復讐殺人’의 양상과 그 의미: 『추관지』 復讐殺人 판례를 중심으로』, 「15세기 관료 문인의 ‘한양’ 이미지」 등이 있다. 사람과 제도, 문학의 관련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고전문학이 현재의 삶과 조우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