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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시대별 연대기 1801순조1(40세)
1801년 순조1 신유
40세 유배1년
1월 10일,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가 내려짐.
정순왕후의 본격적인 남인 공격이 시작되는데, 순조실록 1월 10일자에는,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민호(民戶)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편성하는
호적법,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적조(戶籍條)에, “서울과 지방에 5호를 1통으로 하고,
통에 통주(統主)를 둔다.”라고 하였음) 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
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262) 하도록 하라.” 고 했음.
다시 말해 천주교 박해를 위해 엄금교서를 내린 것인데, 그녀의 오라비 김관주가 경연관으로
발탁되고, 이후 2월 5일 비변사 제조, 2월 10일에 이조참판으로 승진하며 천주교 사냥에 앞장 섬.
이후, 대대적인 검거와, 엄청난 천주교인들이 살육 당하는데,
이때 약종은 죽음을 결심하고 천주교 관련된 성물과 문서와 편지들을 책롱(冊籠)에 넣어
옮기기로 했음. 책롱은 처음 포천의 홍교만의 집으로 갔다가 수색이 두려워 아현동 황사영
집으로 가져가기로 결심함. 황사영은 맏형 약현의 딸 명련의 남편으로 약종에게 조카사위인데
과거도 포기하고 전교에 몰두하고 있었음. 약종은 충청도 남포 출신의 머슴 임대인에게
책롱을 맡겼는데, 임대인이 나무장수로 가장하여 솔잎으로 싸서 운반을 개시함.
1월 19일, 임대인이 옮기던 중 한성부의 별육금란(밀도살을 적발하는 관리)이 지나다가 임대인의
책롱에 밀도살 된 쇠고기가 있는 줄 알고 관아로 끌고 가 결국 들킴.
1월 29일, 이유수와 윤지눌이 약용에게 책롱 사건에 관한 편지를 보냄. 약용이 잔뜩 긴장
하며 서울로 들어옴. 이때 이조판서 윤행임이 방안을 제시했는데, 한성부 판윤 이익운(남인)
과 의논하여 지평 유원명에게 자신과 천주교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상소를 올리게 하자고
제안함. 약용은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거절함.
2월 2일, 포도대장 이유경 자리에 신대현이 임명되면서 책롱 사건을 조사했는데, 예상외로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고문하지 않고 배교하는 자는 모두 석방조치함.
결국 최필공, 최필제 형제와 총회장 최창현, 임대인만 남게 됨. 신대현은 더 이상의 체포를
미루자 노론들이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탄핵하며 신대현을 함께 공격함.
크게 노한 정순왕후가 신대현을 가두고 최필공 형제등 네 사람을 의금부로 압송.
2월 8일, 전 승지 약용과 약전(당시44세), 전 공조판서 이가환(당시 60세), 전 현감 이승
훈(당시 46세), 홍낙민(당시 50세)이 집에서 의금부 금리들에게 체포당하여 옥에 갇힘.
그 후 10일부터 네 사람은 국문을 당함.
그 외, 권철신(당시 66세), 홍교만(당시 65세), 강완숙(당시 41세)과 아들 홍필주 이기양,
오석충(吳錫忠), 김건순(金健淳), 김백순(金伯淳) 등이 차례로 투옥되고 그 외, 약 300명의
교도들이 잡혀 와 의금부에 하옥 됨.
2월 9일, 삼사에서 이미 죽은 채제공을 격렬하게 탄핵 함.
같은 날, 사헌부에서 노론 벽파가 남인 세 거두 지목-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이 천주교인이라는
이유.
탄핵 내용 : 정조실록 : 이가환은 흉악한 무리의 여얼(餘孼)로서, 화심(禍心)을 포장하여 원망을
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유혹하고는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구입
(購入)해 온 요서(妖書)를 그 아비에게 전하고, 그 법을 수호하기를 달갑게 여겨 가계(家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은 본래 두 추악한 무리와 마음을 서로 연결하여 한패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종적이 이미 드러나자, 진소(陳疏)하여 사실을 자백한 다음 온갖 말로 실언(失言)하였는데,
아무도 몰래 요악한 짓을 꾀함이 도리어 전보다 심하여 천청(天聽)을 속였으니 사리에 어둡고
완악하여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라며 공격함.
잡혀 온, 이가환, 이승훈, 약용, 홍낙민을 심문하기 위해 국청이 설치됨.
이때 서용보는 우의정, 김조순은 형조판서, 병조판서 서정수, 좌의정 이시수, 영의정 심환지,
영중추부사 이병모, 사헌부 장령 이안묵, 대사간 목만중 등이 위관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2월 10일, (국문은 2월 10일부터 26일까지 쉼 없이 가해 짐)
1차 국문의 심문자는 영부사 이병모, 판의금부사 서정수, 지의금부사 이서구, 동의금부사 윤동만,
한용탁 등 모두 노론 벽파들이였음.
이때 김조순은 순조(純祖) 즉위 후(1801) 병조 판서 · 이조 판서 ·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순조 2년(1802)에 총융사(摠戎使) · 양관 대제학
(兩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 해에 딸이 순조의 비(純祖妃 : 순원왕후(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훈련대장 ·
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고 철종 때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어린 순조를 30년간이나 보좌했는데, 지나치게 너그러운 성격 탓에 아들 좌근(左根)의
소실인 나주 기생 나합(羅閤)의 손아귀에서 국사가 농락되는 폐풍을 낳기도 하였다.
목만중이 대왕대비의 특명으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주도하고, 이가환(李家煥)을 직접 추국하기도 하였다.
심문 당한 내용은 약종의 신상을 고발도록 했는데, 약용과 약전은 살기 위해선 자신들은 천
주교를 버렸지만 약종은 아직도 천주교도라고 고발해야 했음. 약용은 죽음을 각오하고 말
했는데, 위로는 감히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오직 한 번의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함. 위관이 교주와 예배 장소를
남김 없이 고하면 죄가 공으로 바뀔 것이라 고할 것을 권하지만, 약용은 실제로 어디서
누가 하는지 모른다고 답함. 그리고 국청의 죽음의 땅이니 어찌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을
가리켜 말하겠느냐며 답함. 약전도 결코 심문 도중 약종을 발고하지 않았음. 계속 발고를 권하는
위관들 앞에 약용은, 형제 사이는 천륜이 중하거늘, 어찌 감히 혼자 착하려고 하겠습니까? 오직
죽기만을 원합니다. 라고 했음. 당시 약현은 벼슬을 멀리하여 노론의 눈 밖에 있던 인물이라 체포
당하지 않고 무사했지만 황사영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노심 불안에 떨고 있었음. 이날 , 두 사람은
추국신장 30대 맞고 골병 듬.
2월 11일, 2차 국문에서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냐는 심문에 약용은 사학하는 자들은 저의
원수입니다. 만일 10일을 기한으로 표교를 입회시켜 보내 준다면 사학의 소굴을 잡아서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했으며 또한 조카사위인 황사영도 사학을 했는데 그는 죽어도 배교
하지 않을테니 조카사위라 하더라도 곧 원수입니다. 라고 함.
이때 약용이 황사영을 심하게 비난한 것이 나중에 목숨을 건지게 되는 계기가 됨.
약용이 이때 천주교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던 점들.
1. 황사영을 심하게 비난했던 점.
2. 과거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로 천주교를 완전히 버렸다는 점.
3. 그 후 약용에게 천주교 관련된 그 어떤 문적이나 진술이 없었다는 점.
4. 약종이 약전과 약용이 교화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언급한 점.
5. 약종의 진술을 듣고 약종을 비난했던 점.
결국 1, 2차 국문에도 약용과 약전의 혐의가 거의 없는데다 같은 날 자수한 약종을 약용
이 비난했는데, 이미 약용은 약종이 더 이상 살아 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를 비난하는
것이 곧 약전과 약종 자신을 위한다고 여겼던 것임. 이것이 유리하게 작용함.
(스토리 : 국문 당하는 약용이 약종을 떠올리며 용서를 빌며 형을 비난하고, 약종은 용서의
수준을 넘어서 흔쾌히 그의 행동을 받아줌)
그날 이후, 약용은 사헌부에 보석되어 처분을 기다리는데, 이병모와 심환지가 차례로 찾아
와 곧 무죄로 석방될 것이라며 위로함. 하지만 이때 서용보는 극렬하게 사형을 주장하고
있었음. 이어서 형틀에서 풀어주고 사헌부 안에서 편히 있게 해주었다. 여러 대신들이 모여
의론을 하고 있었는데 옥사의 위관(委官)인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자네는 앞으로 무죄
로 풀려날 걸세. 음식도 많이 들며 몸을 아끼시게”라고 했고,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쯔쯔, 혼우(婚友)가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라고 했다. 지의금(知義禁) 이서구(李書九),
승지 김관주(金觀柱) 등도 공정히 판결하여 용서될 거라고 했고, 국문할 때 참관했던
승지 서미수(徐美修)가 은밀히 기름 파는 노파를 불러다가 재판 소식을 나의 처자에게 전해
주라고 하면서 나의 죄질은 가벼워 죽을 걱정은 없으니 식사를 하게 하여 살아나게 하라고
시킨 일까지 있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가 무죄로 풀어줄 것을 의론했으나 오직 서용보(徐
龍輔)만이 고집을 부려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유배형으로 결론난다.
2월 28일, 19일 만에 풀려나지만 무죄 석방이 아니었음. 서용보의 주장으로 유배형에 처해
짐. 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결정 됨.
풀려나기 전날 밤, 옥중에서 꿈결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蘇武)는 19년도 참고 견디
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했었다. 옥에서 나오던 때
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옥에 있던 것이 꼭 19일이었다. 이후 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기술
하기를,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옴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경신년(1800) 벼슬길에서 물러
나던 때로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라는 씀.
한편,
2월 11일, 당시 明道會長 약종(아오스딩)은 옷 위에 십자가를 걸친 채 목숨을 각오하고 마재에서
서울로 올라옴. 도중에 금부도사 한낙유가 자신을 잡으러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치는데, 약종이
자신이 그 인물이라며 자수함.
국청이 설치되고, 약용과는 다른 곳에서 약종의 본격적인 심문이 이어짐. 약종은 천주교가
정학으로 알았지 사학으로 알지 못했다. 또한 주문모의 거처를 묻는 심문에도 이 지방에는
없다며 잘라 말하며 끝내 그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음.
그러자 같이 잡혀 온 강완숙과 아들 홍필주에게 주문모 처소를 대라며 고문하기 시작하지
만 끝내 발설하지 않음.
약종은 정순황후의 하교가 잘못이라고 항의했는데 불경죄까지 추가되었음.
이날, 1차로 신장 13대 맞고, 2차 심문에 그의 형제들의 여죄를 추궁하기 시작했는데,
너는 병오년(정조10, 1786)에 중형(약전)에게 사학을 배웠느냐? 는 질문에 아니오,
네 일기에 따르면 병오 3월 중형의 말에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 정말 아니냐?
맞다, 하지만 중형은 유학에 빠져 지금은 아니다. 라고 말함.
국청에서 약용이나 약전처럼 약종을 고발도록 심문하듯이 약종도 심문 도중 약용과 약전의
천주교 전적에 대해 고발도록 압력을 당했지만 약종은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
의 편지 얘길 했는데,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둘째형과 막내가 함께 천주교를 배우려하지
않아 한스럽다 고 했음이 밝혀짐. 노론은 더 이상 약용과 약전을 공격할 빌미를 찾지 못하
고 차마 둘의 사형을 주장하지 못함.
국청에 자리했던 대신들과 금오 당상이 약종을 처형해야한다고 주청함. 정순왕후는 더 많
은 천주교도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처형을 반대함.
(약종의 신앙 고백 내용 : 1권 23P, 2권 70P)
또한 이가환(당시 60세)은 곧 정승이 될 인물이었기에 노론은 극렬하게 목숨을 노렸는데,
가환은 끝까지 천주교를 버렸다고 주장함. 그는 자신이 충주목사로 부임 중에 사학도들을
고문했으며, 생질이 이승훈한테 사학의 서책을 빌려 봤지만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파
한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 이후 멀리 했다고 했음.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노
론들과 정순왕후의 공격을 더 이상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말하길, 正卿의 몸으로서
이런 지목을 받았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니 옥관들은 드디어 승복
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가환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여겨 곧바로 음식
을 거절하고 먹지 않다고 6일 만에 정신을 잃고 옥사했음.
2월 24일, 시신의 목을 베어 내거는 기시(棄市)가 결정되어 이가환과 다른 처형자들의
목이 성문 밖에 내걸림. 이가환이 실제로 천주교에 그 본심을 두었는지는 애매한 상황임.
이들의 뒤를 이어, 다른 잡혀온 교도들도 일일이 국청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는데,
일찍이 사망했던 권일신의 친형 권철신은 65세의 나이로 국청에 끌려 와 물고를 당한 끝
에 결국 사망함. 철신은 인격 그 자체였는데, 우연히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고르게 나누어 천한 사람들까지 함께 먹었기에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동화되어
고을 백성들이 모두 사모하여 그 소문이 멀리 퍼졌던 인물이었음.
권철신의 외숙인 포천 양반 출신 홍교만도 잡혀 왔는데, 그의 딸이 약종의 아들 철상과
결혼한 사이니 약종과 사돈으로서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다 서소문 밖에서 사형 당함.
정철상은 약종이 체포된 후 감옥 근처에서 옥바라지 하다가 2월 26일 약종이 사형 당한
날 잡혀와 4월 2일에 같은 장소에서 사형 당함.
반면 그의 동생 하상(바오로)과 정혜(엘리자벳)는 겨우 목숨을 구했는데, 38년 후 신부 영입
운동을 펼치다 잡혀 같은 장소에서 참수 당했으니 약종의 식구는 모두 순교함.
부친과 형 정철상(丁哲祥)이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 하상의 나이는 7세였다. 모친 유소사(柳
召史)와 누이동생 정정혜(丁情惠)(1984년 정하상과 같은 날 시성되어 카톨릭교회의
성인(聖人)이 됨. 1925년 복자로 시복되고 1984년 5월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편 채제공, 이가환의 뒤를 이어 남인 영수 급으로 머물고 있던 이기양(정조 때 사간원
대사간, 승지 역임, 순조 초에도 승지 역임)도 잡혀와 고문을 당했는데, 기양의 차남 이방억
은 이가환의 딸과 결혼한 사돈지간이었음. 이때 국청에서 반병신이 되어 석방되지만 일 년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함.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역임중에 정조의 권유로 배교한 홍낙민
도 잡혀왔지만 결국 배교를 거부해 사형 당함.
그 외, 중인도 있었는데, 약용이 금정찰방 시절 체포했던 이존창도 있었음. 정조 23년 천주
교를 확실히 버렸다는 감사의 보고에 의해 석방됐지만 이날 잡혀와 고문을 받고 사형 당함.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이 인도되었으나 이틀 뒤 공주로 다시 이송되어서 그
곳에서 참수로 집행됨. 노론이 이존창이 천주교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내린 이유는
충청도 사학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처사였음.
천주교의 거두였던 다른 중인 최필공도 이때 사형 당함. 당시 최필공은 이전 배교하자 정조
가 배려하여 혼인과 함께 평안도 심약관(궁중에 헌납하는 약재를 심사하는 혜민서의 관원)
으로 임명한 후 줄 곧 그 일에 종사하다 이날 잡혀와 사형 당함.
다른 중인 최창현은 주문모를 밀고했다가 실패한 후 자신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여삼의 밀고로 잡혀 왔는데, 신장을 맞은 후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벌떡 일어나 십계명을
외웠을 정도로 지독한 신자였음. 약종과 함께 사형 당함.
을사 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형조에 연행된 후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으며
중인이라는 이류로 고문을 끝에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병사했던 김범우의 친
동생인 김현우(金顯禹), 김이우(金履禹)도 이때 순교함.
약전, 약용은 유배형 판결 - 약전, 전라도 신지도, 약용, 경상도 장기현 (송시열 유배지)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이승훈, 약종이 수레에 끌려감. 도중에 약종이 구경꾼들에게
물을 요청
하자 관리가 꾸짖었는데, 약종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요.
라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비웃지 말라. 천주를 위한 죽음은 당연하다. 우리의
슬픔은 즐거움으로 변하겠지만 당신들의 웃음은 슬픔으로 바뀔 것이다. 라고 했고, 또한
형틀에 머리를 댈 때 거꾸로 목덜미를 대고 하늘을 봤음. 깜짝 놀란 망나니가 기겁하여
혼줄이 나 벌벌 떨었는데, 칼이 빗나가는 바람에 반쯤 잘렸지만 약종은 벌떡 일어나 성호
를 크게 손짓한 후 다시 엎드렸다 함.
이때 세계 천주교 선교사상 최초로 자진하여 영세를 받은 이승훈도 참수형으로 순교.
마침 같은 날, 조카 철상, 하상, 딸 정혜가 은신처에서 체포당함.
약전, 약용은 두 사람 시신 수습 못함.
한편, 주문모는 교세 확장 중, 정순왕후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던 시기에 강완숙의 집에
기거 중이었는데, 그 후 전동에 사는 과부 김씨 행랑채-북악산-2월 20일 양제궁(폐궁,
또는 경희궁으로 불림)으로 피신했음. 그곳에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
느리 신씨가 거주 중이었음.-이틀 후, 23일 북쪽으로 달아남(청나라로 가기 위함)-가던
도중 양떼를 버리고 어딜 가느냐는 신의 계시를 받고 돌아옴-3월15일 의금부에 자수함.
3월 15일, 주문모의 심문이 도중 은언군 처 송씨, 며느리 신씨가 관련된 것을 알게 된
노론 벽파는 안 그래도 사도세자라면 병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그의 혈육을 없앨 수 있는
기회라 여김.
3월 16일, 송씨와 신씨에게 사약을 내림. (이후 정순왕후는 은언군도 5월 29일 독약을 내려
살해함.) 조정은 주문모가 청나라 사람임을 알고 놀라 그냥 출국시키자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4월 19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형에 처하기로 결정함.
4월 19일, 주문모 참형에 처해짐.
5월 22일, 강완숙 역시 궁녀 출신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 등 다른 여성 네 명과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와 함께 처형당함. 같은 날, 다른 곳에서 이국승이 사형 당함.
5월 24일, 윤점혜, 정순매가 다른 곳에서 사형 당함.
5월 2일, 고광정이 사형 당함.
(신유박해 사망자 종합 정리 : 약 500명 사망 또는 유배)
결국 그들 중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
되어짐.
3월 13일(음) 여주 성문밖에서 5명이 순교하였는데, 그들은 원경도(元景道), 임희영(李喜永),
최창주(崔昌周), 이중배(李中培), 정종호(鄭宗浩)등이다.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1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 난 순교자는 유한숙(愈汗淑)과 운유오(尹有五)였음.
4월 2일(음)에는 또다시 6명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약종의 아들 철상 (哲祥)과 최필공의
사촌인 필제(必悌)와 중인 정인혁(鄭仁赫), 그리고 여교우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
와 이합규(李 逵) 등이었음. 2월 말(음) 남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참수 또는 옥사, 유배됨
으로써 끝난 것으로 보였던 박해는 3월12일(음) 주문보 신부 의 자수로 가열됨.
강완숙도 2월 24일(음) 아들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잡혀, 궁녀 강경복(姜景福), 전 궁녀
문영인(文營仁),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 4명의 여자들과 최인철(崔仁喆), 김현우(金顯禹),
이현, 홍정호 모두 8명이 5월 24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함께 사형선도를
받은 고광성(高光晟), 이국승(李國昇), 윤점혜(尹占惠), 정순매(鄭順每) 등 4명은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7월에 들어서서는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와 김종교 (金宗敎)가 순교하였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많이 체포되었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 됨.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가 잡
혀왔는데,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히지만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됨. 유관검이 고문을 받는 동안, 양박청래가 발설되
고, 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과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
(金有山) 옥천희(玉千禧) 등이 곧 사형을 언도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음) 능
지처참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 즉 <척사윤음>(斥邪倫音)이 반포됨으로 서 공식적으로 신유
박해는 거의 끝으로 치달았는데, 이미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경도, 변득중,권문등 15명
이 12월 26일(음) 순교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의 일가친척들이 12월 28일(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신유박해는 끝을 맺었다.
이들 중 유항검의 아들로서 특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동정 부부 유중철과 이순이다. 두 부부는 사형 당할 때까지 남녀의
본능마저 누르며 끝까지 동정을 지켰는데 10월 9일, 유중철은 동생 문철과 함께
교수형으로, 이순이는 12월 28일, 참수형으로 목이 잘렸는데, 하얀 피가 나와 오늘 날에도
천주교인들의 존망의 대상으로 불려지고 있다.
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 가 약 100명, 그리고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
합 500명선에 달하였다. 그 후에도 살아남은 교인들은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
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 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노론(老論) 시파(時派)의 일부로
윤행임(尹行恁: 다산과 동갑, 당시 이조판서와 양관대제학. 신지도로 유배, 곧 풀려나와
전라도 관찰사 역임. 이후 김조순 상소로 참형 당함),
서유린(徐有隣: 1738년생, 당시 한성부판윤을 지냄. 경흥으로 유배되어 현지에서 사망),
김조순(金祖淳:1765년생, 박해 당시 집에서 칩거 당함. 1802년 딸이 순조비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가 되고 영안부원군의 칭호 받음. 이 후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세력이 됨.
이들을 처벌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은 노론(老論) 벽파(僻派)가 주동세력인데,
심환지(沈煥之), 서용보(徐龍輔), 김관주(金觀柱), 권유(權裕), 김달순(金達淳) 등이 있음.
남인(南人) 공서파(攻西派 - 서학을 공격)도 벽파와 연합하여 공격했는데
홍의호(洪義浩), 이기경(李基慶) 등임.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중 신유박해 당시 시복 청원자로는 주문모(야고보), 윤유오(야고
보), 윤운혜(루치아), 윤점혜(아가타),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정광수(바르나바),
그리고 세계 천주교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동정부부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가
있으며 그 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최창현(요한) 최필공(토마스)정철상(가롤로)강완숙(골롬바)홍필주(필립보)
이외 38명의 순교자 있다.
조선 천주교 4대 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 - 순조 - 노론 벽파에 의한 대대적 정치적 박해 정약종, 이승훈,
주문모 순교, 정약용, 정약전 유배
1839년의 기해박해 - 헌종 -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프랑스 선교사 순교
1846년의 병오박해 - 헌종 - 김대건 신부 순교
1866년의 병인박해 - 고종 - 최대 규모의 박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명 순교.
=>병인양요의 원인
2월 28일
숭례문에서 3리 떨어진 석우촌에서 약전, 약용 형제는 가족들과 이별을 고함.
석우촌의 이별이라는 詩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는데,
한말은 남쪽으로 가고, 또 한 말은 동쪽으로 가야 하네.
숙부님들 머리엔 백발이 성성하고, 큰형님 두 뺨엔 눈물이 줄을 잇네.
뒤돌아보지 말고 가야지, 다시 만날 기약이나 새기면서 (석우촌의 이별)
약용의 부인 홍씨, 학연, 학초 3남 농장이 나와 눈물로 이별을 고함. 유배지로 이동 시작
3월 2일, 죽산과 기흥을 거쳐, 충주 하담에 도착하여 정재원 묘소 앞에서 통곡.
3월 9일, 새재를 넘어 문경을 지나 장기현에 도착. 장기현은 130여 년 전 숙종 1년(1675),
노론 영수 송시열이 유배된 곳. 약전도 며칠 후, 신지도에 도착.
경상도 장기(지금의 경북 영일군)의 유배지는 軍校이자 농사꾼인 마산리에 사는 성선봉의
집이었는데 방은 좁고 천장은 낮았음. 이 때 지은 시 (2권 98P)
이 인생 그르친 것 책인 줄 깊이 알아 書卷深知誤此生
남은 생애 맹세코 책과의 정리 끊으렸더니 餘生逝與割恩情
마음속엔 그 뿌리 갈아 없애지 못해 心根苦未消磨盡
이웃 아이 역사책 읽는 소리 누워서 듣는구나. 臥聽隣兒讀史聲
처음에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힘들어하였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저술 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장기에 도착하자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고 ���삼창고훈(三倉詁訓)을 연구해 내고
���이아술(爾雅述)��� 6권을 저술하였고 수많은 시를 읊으며 스스로 걱정과 근심을 견디며 지냈다.
이때 마을에선 약용이 곧 병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집에서 보내준 의서 몇 권과
약초를 직접 처방하여 완쾌됨. 명의라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줄을 이어 부탁하기를,
이곳은 병들면 무당굿을 하여 낫지 않으면 뱀을 먹고, 그래도 안 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말에 자극 받아 약용이 직접 의서를 저술하게 됨. 이때 저술한 책이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의술서였는데, 상편은 색병(色病 성병)에 관한 내용이었음.
주로 치료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처방을 모아 놓은 실학적이며 애민적인 저서임.
그 외,『爾雅述』6권과 『己亥邦禮辨』등을 지었으며, 여름에는 『百諺詩』를 이룩함.
이후, 부지런한 백성들 보며 열심히 일하는 것에 비해 항상 가난한 것은 관과 지배층의 수
탈 때문이라고 생각함.
약용은 노론 영수 송시열을 제향하는 죽림서원을 찾아 노론과 감정 없음을 알리고 싶었으나
노론 영수의 서원에 남인 유배객은 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거부당함.
한편, 황사영(당시 27세 알렉시오)의 도피 또한 파란 만장했는데, 2월 13일 조정에서 황사
영 체포령이 내려짐. 이때 연동에 사는 변득중 집에 기거, 강환숙 도움으로 홍필주 집으로
피해감.
2월 15일, 정동 송재기 집에서 사흘 간 기거, 장기 도피를 위해 김의호와 상의하던 도중
상주를 가장하기로 하고 상복을 입고 수염을 깎고, 창의문을 빠져나와 平丘驛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면 덕소리)에서 김한빈을 만나 그의 소개로 여주, 원주를 거쳐 제천의 배론
리 김귀동의 집에 도착, 황사영이 머물 토굴을 파서, 지붕 위로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처럼 가장했음.
2월 26일, 그의 체포에 광분한 조정에서 포도청으로 다시 체포를 독촉함.
2월 29일에는 정순왕후(대왕대비)가 10일 이내로 황사영을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림.
4월 17일, 함경도 장진부사 이여절이 황씨 성을 가진 사학도를 잡아 40여 차례 주리를
틀어 황사영이라는 자백을 받았는데, 함경감사 이병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감영 뜰에서
다시 추핵하자 황기운으로 밝혀져 분개한 대왕대비가 이병정을 태안군으로 유배 보냄.
5월 20, 대비가 다시 체포를 독촉함.
5월 말, 제천 배론에 있던 황사영은 김한빈을 시켜 서울의 상황을 7일 후에 들었는데,
천주교 형제들의 학살 소식에 비참해 했음.
그는 살육의 전말을 베이징 주교에게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함.
저의 토마스(황심)등은 눈물을 흘리며 주교님께 호소합니다. 로 시작하는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 임.
백서의 내용은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황제로 하여금 조선에 서양 선교사를
받으라고 권하는 칙서를 보내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주문모를 비롯해 수많은 교인들
의 박해와 신앙에 관한 내용이었음.
또한 재일(齋日)에 관한 내용도 있는데, 재일은 소재와 대재로 나뉨. 당시 천주교회법은
만 7세부터 죽을 때까지 매주 금요일은 고기를 먹지 않는 소재였고, 사순절의 금, 토요일과
성령 강림, 성모 승천, 모든 성인의 날 등은 만 21세부터 60세까지 매일 한 끼씩만 먹는
대재였음. 이 재일의 계율을 지키면 특이하게 보여 체포될 수 있으니 이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음.
게다가 백서에서 황사영은 조정에서 천주교를 해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았는데, 하
나는 당파끼리 논쟁이 심하여 이런 것을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자료로 삼기 때
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아는 것은 오직 송학(주자학) 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천지간의 큰 괴변으로 보기 때문이다. 라고 여겼음.
8월 26일, 토굴로 황심이 찾아와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해주고 다음 날 춘천으로
되돌아갔는데 약 20일 후 체포됨.
9월 15일, 황심이 체포당하여 엄청난 고문이 시작됨.
9월 26일, 고문에 못이긴 황심이 황사영의 거처를 발설하고 맘. 황사영은 자신의 거처를
아는 신도들에게 일이 극단에 이르면 자신을 밀고하라 고 말해 왔지만 황심이 열흘이나
그의 거처를 숨긴 것은 거의 초인적인 인내였음.
9월 26일, 같은 날, 배론으로 달려간 포졸들이 황사영을 체포함으로서 백서가 발견되자
조정은 환호함.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불리었고, 16세 때 정조 14년(1790) 사마시에 급제해 진사가 되어
정조를 만났는데, 정조가 말하길, 20세가 되면 나에게 오너라, 어떻게든 일을 시키고 싶다.
라고 말했음. 출세가 보장됐지만 바로 그해, 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바뀜.
처음부터 천주교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주변엔 신도들로 가득 차 자신도 자연히 교도가 됨.
약현의 첫부인은 이벽의 누이, 황사영의 셋째 동서는 약종과 함께 사형당한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이었음.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국청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하기 시작하는데, 황사영 체포와 함께
쾌재를 불렀던 홍낙안, 이기경, 서용보 등은 약용이 사영의 처삼촌이니 더 이상 빠져 나갈 수
없다하여 다시 죽이려는 계략을 세움. 홍낙안은 사헌부 집의가 되어 권한이 막강했음.
10월 13일, 홍낙안과 사간원 헌납 신구조가 연명으로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황사영 백서 제작 배후에 약용, 약전, 이치훈, 이관기, 이학
규, 신여권 등이 있다며 체포를 주장함.
이틀 후, 홍희운(홍낙안)은 승승장구했는데, 대왕대비는 그의 업적에 걸 맞는 처우를 하고자
동부승지에 제수하여 국책에 참여도록 조처해 줌.
며칠 후, 장기와 신지도에 들이닥친 금부도사가 약용, 약전을 붙잡아 서울로 압송했는데,
이때 두 사람은 이번엔 결코 살아남기 힘들다며 각오함.
국문장에 끌려온 두 사람에게 위관들이 황사영의 백서를 보여주며 협박했는데,
백서의 배후에 대해 심문을 받았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질 않았음. 때마침 뜻밖에 황해
도 관찰사 정일환이 돌아와 약용을 두둔하고 나서며 약용이 곡산을 다스릴 때 그의 칭송이
아직도 그곳에 자자한데 만약 사형을 노한다면 반드시 옥사가 잘못됐다는 비방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함. 결국 노론 벽파는 두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유배형에 처함.
이때 노론 벽파, 특히 홍낙안이 약용의 사형에 실패하자 울분을 터뜨림. 사헌부 집의로서
백관의 탄핵권을 가진 그도 약용과 약전의 목숨만은 어쩔 수 없었음.
11월 5일, 약용은 전라도 강진현으로, 약전은 나주목 흑산도로 유배형 확정됨.
이치훈, 이관기, 이학규, 신여권 등은 영남과 호남으로 보내 다시 유배하라고 명함.
같은 날, 국청에 끌려와 심한 고문으로 받은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 당함.
그의 가족도 불행했는데, 모친 이윤혜와 부인 정명련은 노비가 되어 거제도와 제주도 대정
현으로, 2세의 아들 황경한은 영광군 추자도로,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감.
심지어 가종(家從)이었던 육손은 갑산, 돌이는 삼수, 여종 판례는 위원, 복덕은 흥양,
고음연은 단성으로, 고음연의 남편 박삼취는 거창으로 유배 감.
다음날, 조정은 그의 집을 헐어 웅덩이로 만듬.
11월 5일, 약용, 약전이 유배길에 올랐는데, 이때 서모 김씨가 피눈물을 흘리며 한탄했음.
두 형제는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을 지날 때 눈까지 내려 심신이 비극이었음. 이때의 심정
을 표현한 시.
동작나루 서쪽의 갈고리 같은 달, 한 쌍의 놀란 기러기 모래섬을 넘네, 오늘 밤은 눈 덮인
갈대숲에서 함께 자지만 내일이면 머리 돌려 따로 날아가리. (2권 124P)
11월 21일, 두 형제는 나주읍 북쪽 5리 지점의 율정점에 이름. 율정점의 초가 주막에서
두 형제는 마지막 밤을 보내며 뜬 눈으로 밤을 샘. 이때의 심정을 표현한 시 (2권 125P)
11월 22일, 약용과 약전이 눈물의 이별을 한 후, 약용은 영산강을 건너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약전은 무안을 거쳐 흑산도로 감.
겨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을 맞이한 것은 살을 에는 찬 겨울바람과 삭막한 인심뿐이었다.
‘서학을 믿은 대역죄인’이 귀양을 오자 마을사람들 모두가 전염병환자를 보듯 다산을 피했
다.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처음에
는 외가 쪽에서도 다산을 모른 체 했다. 방을 못 구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음. 마침 동문 밖
에서 밥과 술을 파는 주막의 노파가 약용을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살도록 배려해 줌.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서회(客中書懷)’라는 시이다.
북풍에 흰 눈 휘몰아치듯, 남으로 강진 땅 한 밥집에 이르렀네. 작은 산들 다정히 바다를
가려주고, 총총한 대나무들 꽃처럼 아름답네. 따뜻한 땅 한결 더 추운 겨울 옷차림이 가볍
건만, 밤이면 수심 더해 술로서 달래네. 동백은 설이 오기 전 활짝 피어나니, 이나마 나그네
근심 한껏 씻어주네
이때 다산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학동들이 찾아옴. 당시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를 맡고 있던
아전들의 아들들인 황상, 이청, 윤창모 등이 제자로 들어옴. 그 외 다산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손병조, 황취, 황지초, 등이 찾아옴. 이때 사후까지 보은할 15세 어린 제자 황상(아명
은 山石)을 여기서 만남. 윤창모는 이 후 다산의 딸과 결혼하여 다산의 사위가 됨.
이 가운데 해배 뒤에도 교유가 이어진 제자는 황상과 이청 정도. 황상은 훗날 ‘치원유고’라
는 문집을 낼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이청은 다산과 함께 ‘대동수경’을 편찬하고 정약전
의 ‘자산어보’에 주석을 붙일 정도로 학문적으로 대성함.
이렇게 맺어진 스승-제자의 인연이 정약용이 75세에 죽을 때까지, 그리고 황상 그 자신이
생명을 다할 때까지, 그리고 양가의 후손들에게 까지 계속된다.
이후 다산이 강진읍 우두봉 기슭 보온산방에 있는 제자 황상에게 보내 한시...
제목 : 차운하여 황상의 보은산방에 부치다. (차운기황상보은산방)
찌는 더위에 당장 절로 달려가고 싶지만, 늙고 피곤해 산에 오르기가 무섭네, 모기 벼룩이
극성스럽게 덤벼, 여름밤이 어쩌면 이리도 길까, 밤이 깊어지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옷을
벗고 우물에 가 목욕하면, 시원한 바람 내 얼굴에 불어오지만, 숲이 울을 막아 그게 불만이
라네, 생각하면 그댄 구름 속에 누워 편안히 쉬니 온몸이 시원하겠구먼.
* 약용은 강진에서 18년 유배 중 강진 읍내 주막집에서 5년, 보은산방에서 1년,
제자 이청의 집에서 2년을 머문 후, 1808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에 있는 다산
초당으로 옮겼는데, 그의 학문에
다산의 시대별 연대기 1801순조1(40세)
1801년 순조1 신유
40세 유배1년
1월 10일,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가 내려짐.
정순왕후의 본격적인 남인 공격이 시작되는데, 순조실록 1월 10일자에는,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민호(民戶)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편성하는
호적법,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적조(戶籍條)에, “서울과 지방에 5호를 1통으로 하고,
통에 통주(統主)를 둔다.”라고 하였음) 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
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262) 하도록 하라.” 고 했음.
다시 말해 천주교 박해를 위해 엄금교서를 내린 것인데, 그녀의 오라비 김관주가 경연관으로
발탁되고, 이후 2월 5일 비변사 제조, 2월 10일에 이조참판으로 승진하며 천주교 사냥에 앞장 섬.
이후, 대대적인 검거와, 엄청난 천주교인들이 살육 당하는데,
이때 약종은 죽음을 결심하고 천주교 관련된 성물과 문서와 편지들을 책롱(冊籠)에 넣어
옮기기로 했음. 책롱은 처음 포천의 홍교만의 집으로 갔다가 수색이 두려워 아현동 황사영
집으로 가져가기로 결심함. 황사영은 맏형 약현의 딸 명련의 남편으로 약종에게 조카사위인데
과거도 포기하고 전교에 몰두하고 있었음. 약종은 충청도 남포 출신의 머슴 임대인에게
책롱을 맡겼는데, 임대인이 나무장수로 가장하여 솔잎으로 싸서 운반을 개시함.
1월 19일, 임대인이 옮기던 중 한성부의 별육금란(밀도살을 적발하는 관리)이 지나다가 임대인의
책롱에 밀도살 된 쇠고기가 있는 줄 알고 관아로 끌고 가 결국 들킴.
1월 29일, 이유수와 윤지눌이 약용에게 책롱 사건에 관한 편지를 보냄. 약용이 잔뜩 긴장
하며 서울로 들어옴. 이때 이조판서 윤행임이 방안을 제시했는데, 한성부 판윤 이익운(남인)
과 의논하여 지평 유원명에게 자신과 천주교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상소를 올리게 하자고
제안함. 약용은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거절함.
2월 2일, 포도대장 이유경 자리에 신대현이 임명되면서 책롱 사건을 조사했는데, 예상외로
수많은 천주교도들을 고문하지 않고 배교하는 자는 모두 석방조치함.
결국 최필공, 최필제 형제와 총회장 최창현, 임대인만 남게 됨. 신대현은 더 이상의 체포를
미루자 노론들이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탄핵하며 신대현을 함께 공격함.
크게 노한 정순왕후가 신대현을 가두고 최필공 형제등 네 사람을 의금부로 압송.
2월 8일, 전 승지 약용과 약전(당시44세), 전 공조판서 이가환(당시 60세), 전 현감 이승
훈(당시 46세), 홍낙민(당시 50세)이 집에서 의금부 금리들에게 체포당하여 옥에 갇힘.
그 후 10일부터 네 사람은 국문을 당함.
그 외, 권철신(당시 66세), 홍교만(당시 65세), 강완숙(당시 41세)과 아들 홍필주 이기양,
오석충(吳錫忠), 김건순(金健淳), 김백순(金伯淳) 등이 차례로 투옥되고 그 외, 약 300명의
교도들이 잡혀 와 의금부에 하옥 됨.
2월 9일, 삼사에서 이미 죽은 채제공을 격렬하게 탄핵 함.
같은 날, 사헌부에서 노론 벽파가 남인 세 거두 지목-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이 천주교인이라는
이유.
탄핵 내용 : 정조실록 : 이가환은 흉악한 무리의 여얼(餘孼)로서, 화심(禍心)을 포장하여 원망을
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유혹하고는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구입
(購入)해 온 요서(妖書)를 그 아비에게 전하고, 그 법을 수호하기를 달갑게 여겨 가계(家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은 본래 두 추악한 무리와 마음을 서로 연결하여 한패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종적이 이미 드러나자, 진소(陳疏)하여 사실을 자백한 다음 온갖 말로 실언(失言)하였는데,
아무도 몰래 요악한 짓을 꾀함이 도리어 전보다 심하여 천청(天聽)을 속였으니 사리에 어둡고
완악하여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라며 공격함.
잡혀 온, 이가환, 이승훈, 약용, 홍낙민을 심문하기 위해 국청이 설치됨.
이때 서용보는 우의정, 김조순은 형조판서, 병조판서 서정수, 좌의정 이시수, 영의정 심환지,
영중추부사 이병모, 사헌부 장령 이안묵, 대사간 목만중 등이 위관들로 구성되어 있었음.
2월 10일, (국문은 2월 10일부터 26일까지 쉼 없이 가해 짐)
1차 국문의 심문자는 영부사 이병모, 판의금부사 서정수, 지의금부사 이서구, 동의금부사 윤동만,
한용탁 등 모두 노론 벽파들이였음.
이때 김조순은 순조(純祖) 즉위 후(1801) 병조 판서 · 이조 판서 ·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순조 2년(1802)에 총융사(摠戎使) · 양관 대제학
(兩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 해에 딸이 순조의 비(純祖妃 : 순원왕후(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훈련대장 ·
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고 철종 때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후 어린 순조를 30년간이나 보좌했는데, 지나치게 너그러운 성격 탓에 아들 좌근(左根)의
소실인 나주 기생 나합(羅閤)의 손아귀에서 국사가 농락되는 폐풍을 낳기도 하였다.
목만중이 대왕대비의 특명으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함께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주도하고, 이가환(李家煥)을 직접 추국하기도 하였다.
심문 당한 내용은 약종의 신상을 고발도록 했는데, 약용과 약전은 살기 위해선 자신들은 천
주교를 버렸지만 약종은 아직도 천주교도라고 고발해야 했음. 약용은 죽음을 각오하고 말
했는데, 위로는 감히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오직 한 번의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함. 위관이 교주와 예배 장소를
남김 없이 고하면 죄가 공으로 바뀔 것이라 고할 것을 권하지만, 약용은 실제로 어디서
누가 하는지 모른다고 답함. 그리고 국청의 죽음의 땅이니 어찌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을
가리켜 말하겠느냐며 답함. 약전도 결코 심문 도중 약종을 발고하지 않았음. 계속 발고를 권하는
위관들 앞에 약용은, 형제 사이는 천륜이 중하거늘, 어찌 감히 혼자 착하려고 하겠습니까? 오직
죽기만을 원합니다. 라고 했음. 당시 약현은 벼슬을 멀리하여 노론의 눈 밖에 있던 인물이라 체포
당하지 않고 무사했지만 황사영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노심 불안에 떨고 있었음. 이날 , 두 사람은
추국신장 30대 맞고 골병 듬.
2월 11일, 2차 국문에서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냐는 심문에 약용은 사학하는 자들은 저의
원수입니다. 만일 10일을 기한으로 표교를 입회시켜 보내 준다면 사학의 소굴을 잡아서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했으며 또한 조카사위인 황사영도 사학을 했는데 그는 죽어도 배교
하지 않을테니 조카사위라 하더라도 곧 원수입니다. 라고 함.
이때 약용이 황사영을 심하게 비난한 것이 나중에 목숨을 건지게 되는 계기가 됨.
약용이 이때 천주교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던 점들.
1. 황사영을 심하게 비난했던 점.
2. 과거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로 천주교를 완전히 버렸다는 점.
3. 그 후 약용에게 천주교 관련된 그 어떤 문적이나 진술이 없었다는 점.
4. 약종이 약전과 약용이 교화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언급한 점.
5. 약종의 진술을 듣고 약종을 비난했던 점.
결국 1, 2차 국문에도 약용과 약전의 혐의가 거의 없는데다 같은 날 자수한 약종을 약용
이 비난했는데, 이미 약용은 약종이 더 이상 살아 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를 비난하는
것이 곧 약전과 약종 자신을 위한다고 여겼던 것임. 이것이 유리하게 작용함.
(스토리 : 국문 당하는 약용이 약종을 떠올리며 용서를 빌며 형을 비난하고, 약종은 용서의
수준을 넘어서 흔쾌히 그의 행동을 받아줌)
그날 이후, 약용은 사헌부에 보석되어 처분을 기다리는데, 이병모와 심환지가 차례로 찾아
와 곧 무죄로 석방될 것이라며 위로함. 하지만 이때 서용보는 극렬하게 사형을 주장하고
있었음. 이어서 형틀에서 풀어주고 사헌부 안에서 편히 있게 해주었다. 여러 대신들이 모여
의론을 하고 있었는데 옥사의 위관(委官)인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자네는 앞으로 무죄
로 풀려날 걸세. 음식도 많이 들며 몸을 아끼시게”라고 했고,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쯔쯔, 혼우(婚友)가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구나.”라고 했다. 지의금(知義禁) 이서구(李書九),
승지 김관주(金觀柱) 등도 공정히 판결하여 용서될 거라고 했고, 국문할 때 참관했던
승지 서미수(徐美修)가 은밀히 기름 파는 노파를 불러다가 재판 소식을 나의 처자에게 전해
주라고 하면서 나의 죄질은 가벼워 죽을 걱정은 없으니 식사를 하게 하여 살아나게 하라고
시킨 일까지 있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가 무죄로 풀어줄 것을 의론했으나 오직 서용보(徐
龍輔)만이 고집을 부려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유배형으로 결론난다.
2월 28일, 19일 만에 풀려나지만 무죄 석방이 아니었음. 서용보의 주장으로 유배형에 처해
짐. 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결정 됨.
풀려나기 전날 밤, 옥중에서 꿈결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蘇武)는 19년도 참고 견디
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했었다. 옥에서 나오던 때
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옥에 있던 것이 꼭 19일이었다. 이후 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기술
하기를,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옴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경신년(1800) 벼슬길에서 물러
나던 때로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라는 씀.
한편,
2월 11일, 당시 明道會長 약종(아오스딩)은 옷 위에 십자가를 걸친 채 목숨을 각오하고 마재에서
서울로 올라옴. 도중에 금부도사 한낙유가 자신을 잡으러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치는데, 약종이
자신이 그 인물이라며 자수함.
국청이 설치되고, 약용과는 다른 곳에서 약종의 본격적인 심문이 이어짐. 약종은 천주교가
정학으로 알았지 사학으로 알지 못했다. 또한 주문모의 거처를 묻는 심문에도 이 지방에는
없다며 잘라 말하며 끝내 그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음.
그러자 같이 잡혀 온 강완숙과 아들 홍필주에게 주문모 처소를 대라며 고문하기 시작하지
만 끝내 발설하지 않음.
약종은 정순황후의 하교가 잘못이라고 항의했는데 불경죄까지 추가되었음.
이날, 1차로 신장 13대 맞고, 2차 심문에 그의 형제들의 여죄를 추궁하기 시작했는데,
너는 병오년(정조10, 1786)에 중형(약전)에게 사학을 배웠느냐? 는 질문에 아니오,
네 일기에 따르면 병오 3월 중형의 말에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 정말 아니냐?
맞다, 하지만 중형은 유학에 빠져 지금은 아니다. 라고 말함.
국청에서 약용이나 약전처럼 약종을 고발도록 심문하듯이 약종도 심문 도중 약용과 약전의
천주교 전적에 대해 고발도록 압력을 당했지만 약종은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
의 편지 얘길 했는데,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둘째형과 막내가 함께 천주교를 배우려하지
않아 한스럽다 고 했음이 밝혀짐. 노론은 더 이상 약용과 약전을 공격할 빌미를 찾지 못하
고 차마 둘의 사형을 주장하지 못함.
국청에 자리했던 대신들과 금오 당상이 약종을 처형해야한다고 주청함. 정순왕후는 더 많
은 천주교도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처형을 반대함.
(약종의 신앙 고백 내용 : 1권 23P, 2권 70P)
또한 이가환(당시 60세)은 곧 정승이 될 인물이었기에 노론은 극렬하게 목숨을 노렸는데,
가환은 끝까지 천주교를 버렸다고 주장함. 그는 자신이 충주목사로 부임 중에 사학도들을
고문했으며, 생질이 이승훈한테 사학의 서책을 빌려 봤지만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파
한다는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 이후 멀리 했다고 했음.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노
론들과 정순왕후의 공격을 더 이상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말하길, 正卿의 몸으로서
이런 지목을 받았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니 옥관들은 드디어 승복
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가환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여겨 곧바로 음식
을 거절하고 먹지 않다고 6일 만에 정신을 잃고 옥사했음.
2월 24일, 시신의 목을 베어 내거는 기시(棄市)가 결정되어 이가환과 다른 처형자들의
목이 성문 밖에 내걸림. 이가환이 실제로 천주교에 그 본심을 두었는지는 애매한 상황임.
이들의 뒤를 이어, 다른 잡혀온 교도들도 일일이 국청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는데,
일찍이 사망했던 권일신의 친형 권철신은 65세의 나이로 국청에 끌려 와 물고를 당한 끝
에 결국 사망함. 철신은 인격 그 자체였는데, 우연히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고르게 나누어 천한 사람들까지 함께 먹었기에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동화되어
고을 백성들이 모두 사모하여 그 소문이 멀리 퍼졌던 인물이었음.
권철신의 외숙인 포천 양반 출신 홍교만도 잡혀 왔는데, 그의 딸이 약종의 아들 철상과
결혼한 사이니 약종과 사돈으로서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다 서소문 밖에서 사형 당함.
정철상은 약종이 체포된 후 감옥 근처에서 옥바라지 하다가 2월 26일 약종이 사형 당한
날 잡혀와 4월 2일에 같은 장소에서 사형 당함.
반면 그의 동생 하상(바오로)과 정혜(엘리자벳)는 겨우 목숨을 구했는데, 38년 후 신부 영입
운동을 펼치다 잡혀 같은 장소에서 참수 당했으니 약종의 식구는 모두 순교함.
부친과 형 정철상(丁哲祥)이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 하상의 나이는 7세였다. 모친 유소사(柳
召史)와 누이동생 정정혜(丁情惠)(1984년 정하상과 같은 날 시성되어 카톨릭교회의
성인(聖人)이 됨. 1925년 복자로 시복되고 1984년 5월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편 채제공, 이가환의 뒤를 이어 남인 영수 급으로 머물고 있던 이기양(정조 때 사간원
대사간, 승지 역임, 순조 초에도 승지 역임)도 잡혀와 고문을 당했는데, 기양의 차남 이방억
은 이가환의 딸과 결혼한 사돈지간이었음. 이때 국청에서 반병신이 되어 석방되지만 일 년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함.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역임중에 정조의 권유로 배교한 홍낙민
도 잡혀왔지만 결국 배교를 거부해 사형 당함.
그 외, 중인도 있었는데, 약용이 금정찰방 시절 체포했던 이존창도 있었음. 정조 23년 천주
교를 확실히 버렸다는 감사의 보고에 의해 석방됐지만 이날 잡혀와 고문을 받고 사형 당함.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이 인도되었으나 이틀 뒤 공주로 다시 이송되어서 그
곳에서 참수로 집행됨. 노론이 이존창이 천주교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내린 이유는
충청도 사학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한 처사였음.
천주교의 거두였던 다른 중인 최필공도 이때 사형 당함. 당시 최필공은 이전 배교하자 정조
가 배려하여 혼인과 함께 평안도 심약관(궁중에 헌납하는 약재를 심사하는 혜민서의 관원)
으로 임명한 후 줄 곧 그 일에 종사하다 이날 잡혀와 사형 당함.
다른 중인 최창현은 주문모를 밀고했다가 실패한 후 자신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여삼의 밀고로 잡혀 왔는데, 신장을 맞은 후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벌떡 일어나 십계명을
외웠을 정도로 지독한 신자였음. 약종과 함께 사형 당함.
을사 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형조에 연행된 후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으며
중인이라는 이류로 고문을 끝에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되어 이듬해 병사했던 김범우의 친
동생인 김현우(金顯禹), 김이우(金履禹)도 이때 순교함.
약전, 약용은 유배형 판결 - 약전, 전라도 신지도, 약용, 경상도 장기현 (송시열 유배지)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이승훈, 약종이 수레에 끌려감. 도중에 약종이 구경꾼들에게
물을 요청
하자 관리가 꾸짖었는데, 약종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하신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요.
라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비웃지 말라. 천주를 위한 죽음은 당연하다. 우리의
슬픔은 즐거움으로 변하겠지만 당신들의 웃음은 슬픔으로 바뀔 것이다. 라고 했고, 또한
형틀에 머리를 댈 때 거꾸로 목덜미를 대고 하늘을 봤음. 깜짝 놀란 망나니가 기겁하여
혼줄이 나 벌벌 떨었는데, 칼이 빗나가는 바람에 반쯤 잘렸지만 약종은 벌떡 일어나 성호
를 크게 손짓한 후 다시 엎드렸다 함.
이때 세계 천주교 선교사상 최초로 자진하여 영세를 받은 이승훈도 참수형으로 순교.
마침 같은 날, 조카 철상, 하상, 딸 정혜가 은신처에서 체포당함.
약전, 약용은 두 사람 시신 수습 못함.
한편, 주문모는 교세 확장 중, 정순왕후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던 시기에 강완숙의 집에
기거 중이었는데, 그 후 전동에 사는 과부 김씨 행랑채-북악산-2월 20일 양제궁(폐궁,
또는 경희궁으로 불림)으로 피신했음. 그곳에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
느리 신씨가 거주 중이었음.-이틀 후, 23일 북쪽으로 달아남(청나라로 가기 위함)-가던
도중 양떼를 버리고 어딜 가느냐는 신의 계시를 받고 돌아옴-3월15일 의금부에 자수함.
3월 15일, 주문모의 심문이 도중 은언군 처 송씨, 며느리 신씨가 관련된 것을 알게 된
노론 벽파는 안 그래도 사도세자라면 병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그의 혈육을 없앨 수 있는
기회라 여김.
3월 16일, 송씨와 신씨에게 사약을 내림. (이후 정순왕후는 은언군도 5월 29일 독약을 내려
살해함.) 조정은 주문모가 청나라 사람임을 알고 놀라 그냥 출국시키자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4월 19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형에 처하기로 결정함.
4월 19일, 주문모 참형에 처해짐.
5월 22일, 강완숙 역시 궁녀 출신 강경복,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 등 다른 여성 네 명과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와 함께 처형당함. 같은 날, 다른 곳에서 이국승이 사형 당함.
5월 24일, 윤점혜, 정순매가 다른 곳에서 사형 당함.
5월 2일, 고광정이 사형 당함.
(신유박해 사망자 종합 정리 : 약 500명 사망 또는 유배)
결국 그들 중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
되어짐.
3월 13일(음) 여주 성문밖에서 5명이 순교하였는데, 그들은 원경도(元景道), 임희영(李喜永),
최창주(崔昌周), 이중배(李中培), 정종호(鄭宗浩)등이다.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1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 난 순교자는 유한숙(愈汗淑)과 운유오(尹有五)였음.
4월 2일(음)에는 또다시 6명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약종의 아들 철상 (哲祥)과 최필공의
사촌인 필제(必悌)와 중인 정인혁(鄭仁赫), 그리고 여교우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
와 이합규(李 逵) 등이었음. 2월 말(음) 남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참수 또는 옥사, 유배됨
으로써 끝난 것으로 보였던 박해는 3월12일(음) 주문보 신부 의 자수로 가열됨.
강완숙도 2월 24일(음) 아들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잡혀, 궁녀 강경복(姜景福), 전 궁녀
문영인(文營仁), 문영인, 김연이, 한신애 4명의 여자들과 최인철(崔仁喆), 김현우(金顯禹),
이현, 홍정호 모두 8명이 5월 24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함께 사형선도를
받은 고광성(高光晟), 이국승(李國昇), 윤점혜(尹占惠), 정순매(鄭順每) 등 4명은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7월에 들어서서는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와 김종교 (金宗敎)가 순교하였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많이 체포되었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 됨. 유항검(柳恒儉), 유관검(柳觀儉) 형제가 잡
혀왔는데,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히지만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됨. 유관검이 고문을 받는 동안, 양박청래가 발설되
고, 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과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
(金有山) 옥천희(玉千禧) 등이 곧 사형을 언도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음) 능
지처참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 즉 <척사윤음>(斥邪倫音)이 반포됨으로 서 공식적으로 신유
박해는 거의 끝으로 치달았는데, 이미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경도, 변득중,권문등 15명
이 12월 26일(음) 순교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의 일가친척들이 12월 28일(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신유박해는 끝을 맺었다.
이들 중 유항검의 아들로서 특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동정 부부 유중철과 이순이다. 두 부부는 사형 당할 때까지 남녀의
본능마저 누르며 끝까지 동정을 지켰는데 10월 9일, 유중철은 동생 문철과 함께
교수형으로, 이순이는 12월 28일, 참수형으로 목이 잘렸는데, 하얀 피가 나와 오늘 날에도
천주교인들의 존망의 대상으로 불려지고 있다.
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 가 약 100명, 그리고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
합 500명선에 달하였다. 그 후에도 살아남은 교인들은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
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 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노론(老論) 시파(時派)의 일부로
윤행임(尹行恁: 다산과 동갑, 당시 이조판서와 양관대제학. 신지도로 유배, 곧 풀려나와
전라도 관찰사 역임. 이후 김조순 상소로 참형 당함),
서유린(徐有隣: 1738년생, 당시 한성부판윤을 지냄. 경흥으로 유배되어 현지에서 사망),
김조순(金祖淳:1765년생, 박해 당시 집에서 칩거 당함. 1802년 딸이 순조비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가 되고 영안부원군의 칭호 받음. 이 후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세력이 됨.
이들을 처벌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은 노론(老論) 벽파(僻派)가 주동세력인데,
심환지(沈煥之), 서용보(徐龍輔), 김관주(金觀柱), 권유(權裕), 김달순(金達淳) 등이 있음.
남인(南人) 공서파(攻西派 - 서학을 공격)도 벽파와 연합하여 공격했는데
홍의호(洪義浩), 이기경(李基慶) 등임.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중 신유박해 당시 시복 청원자로는 주문모(야고보), 윤유오(야고
보), 윤운혜(루치아), 윤점혜(아가타),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정광수(바르나바),
그리고 세계 천주교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동정부부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루갈다)가
있으며 그 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최창현(요한) 최필공(토마스)정철상(가롤로)강완숙(골롬바)홍필주(필립보)
이외 38명의 순교자 있다.
조선 천주교 4대 박해
1801년의 신유박해 - 순조 - 노론 벽파에 의한 대대적 정치적 박해 정약종, 이승훈,
주문모 순교, 정약용, 정약전 유배
1839년의 기해박해 - 헌종 -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프랑스 선교사 순교
1846년의 병오박해 - 헌종 - 김대건 신부 순교
1866년의 병인박해 - 고종 - 최대 규모의 박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명 순교.
=>병인양요의 원인
2월 28일
숭례문에서 3리 떨어진 석우촌에서 약전, 약용 형제는 가족들과 이별을 고함.
석우촌의 이별이라는 詩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는데,
한말은 남쪽으로 가고, 또 한 말은 동쪽으로 가야 하네.
숙부님들 머리엔 백발이 성성하고, 큰형님 두 뺨엔 눈물이 줄을 잇네.
뒤돌아보지 말고 가야지, 다시 만날 기약이나 새기면서 (석우촌의 이별)
약용의 부인 홍씨, 학연, 학초 3남 농장이 나와 눈물로 이별을 고함. 유배지로 이동 시작
3월 2일, 죽산과 기흥을 거쳐, 충주 하담에 도착하여 정재원 묘소 앞에서 통곡.
3월 9일, 새재를 넘어 문경을 지나 장기현에 도착. 장기현은 130여 년 전 숙종 1년(1675),
노론 영수 송시열이 유배된 곳. 약전도 며칠 후, 신지도에 도착.
경상도 장기(지금의 경북 영일군)의 유배지는 軍校이자 농사꾼인 마산리에 사는 성선봉의
집이었는데 방은 좁고 천장은 낮았음. 이 때 지은 시 (2권 98P)
이 인생 그르친 것 책인 줄 깊이 알아 書卷深知誤此生
남은 생애 맹세코 책과의 정리 끊으렸더니 餘生逝與割恩情
마음속엔 그 뿌리 갈아 없애지 못해 心根苦未消磨盡
이웃 아이 역사책 읽는 소리 누워서 듣는구나. 臥聽隣兒讀史聲
처음에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힘들어하였으나 곧 마음을 다잡고
저술 작업에 전념하게 된다.
장기에 도착하자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고 ���삼창고훈(三倉詁訓)을 연구해 내고
���이아술(爾雅述)��� 6권을 저술하였고 수많은 시를 읊으며 스스로 걱정과 근심을 견디며 지냈다.
이때 마을에선 약용이 곧 병사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집에서 보내준 의서 몇 권과
약초를 직접 처방하여 완쾌됨. 명의라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줄을 이어 부탁하기를,
이곳은 병들면 무당굿을 하여 낫지 않으면 뱀을 먹고, 그래도 안 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말에 자극 받아 약용이 직접 의서를 저술하게 됨. 이때 저술한 책이
촌병혹치(村病或治)라는 의술서였는데, 상편은 색병(色病 성병)에 관한 내용이었음.
주로 치료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처방을 모아 놓은 실학적이며 애민적인 저서임.
그 외,『爾雅述』6권과 『己亥邦禮辨』등을 지었으며, 여름에는 『百諺詩』를 이룩함.
이후, 부지런한 백성들 보며 열심히 일하는 것에 비해 항상 가난한 것은 관과 지배층의 수
탈 때문이라고 생각함.
약용은 노론 영수 송시열을 제향하는 죽림서원을 찾아 노론과 감정 없음을 알리고 싶었으나
노론 영수의 서원에 남인 유배객은 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거부당함.
한편, 황사영(당시 27세 알렉시오)의 도피 또한 파란 만장했는데, 2월 13일 조정에서 황사
영 체포령이 내려짐. 이때 연동에 사는 변득중 집에 기거, 강환숙 도움으로 홍필주 집으로
피해감.
2월 15일, 정동 송재기 집에서 사흘 간 기거, 장기 도피를 위해 김의호와 상의하던 도중
상주를 가장하기로 하고 상복을 입고 수염을 깎고, 창의문을 빠져나와 平丘驛 (지금의
남양주시 와부면 덕소리)에서 김한빈을 만나 그의 소개로 여주, 원주를 거쳐 제천의 배론
리 김귀동의 집에 도착, 황사영이 머물 토굴을 파서, 지붕 위로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처럼 가장했음.
2월 26일, 그의 체포에 광분한 조정에서 포도청으로 다시 체포를 독촉함.
2월 29일에는 정순왕후(대왕대비)가 10일 이내로 황사영을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림.
4월 17일, 함경도 장진부사 이여절이 황씨 성을 가진 사학도를 잡아 40여 차례 주리를
틀어 황사영이라는 자백을 받았는데, 함경감사 이병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감영 뜰에서
다시 추핵하자 황기운으로 밝혀져 분개한 대왕대비가 이병정을 태안군으로 유배 보냄.
5월 20, 대비가 다시 체포를 독촉함.
5월 말, 제천 배론에 있던 황사영은 김한빈을 시켜 서울의 상황을 7일 후에 들었는데,
천주교 형제들의 학살 소식에 비참해 했음.
그는 살육의 전말을 베이징 주교에게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 여겨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함.
저의 토마스(황심)등은 눈물을 흘리며 주교님께 호소합니다. 로 시작하는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 임.
백서의 내용은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황제로 하여금 조선에 서양 선교사를
받으라고 권하는 칙서를 보내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주문모를 비롯해 수많은 교인들
의 박해와 신앙에 관한 내용이었음.
또한 재일(齋日)에 관한 내용도 있는데, 재일은 소재와 대재로 나뉨. 당시 천주교회법은
만 7세부터 죽을 때까지 매주 금요일은 고기를 먹지 않는 소재였고, 사순절의 금, 토요일과
성령 강림, 성모 승천, 모든 성인의 날 등은 만 21세부터 60세까지 매일 한 끼씩만 먹는
대재였음. 이 재일의 계율을 지키면 특이하게 보여 체포될 수 있으니 이를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음.
게다가 백서에서 황사영은 조정에서 천주교를 해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았는데, 하
나는 당파끼리 논쟁이 심하여 이런 것을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자료로 삼기 때
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아는 것은 오직 송학(주자학) 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천지간의 큰 괴변으로 보기 때문이다. 라고 여겼음.
8월 26일, 토굴로 황심이 찾아와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해주고 다음 날 춘천으로
되돌아갔는데 약 20일 후 체포됨.
9월 15일, 황심이 체포당하여 엄청난 고문이 시작됨.
9월 26일, 고문에 못이긴 황심이 황사영의 거처를 발설하고 맘. 황사영은 자신의 거처를
아는 신도들에게 일이 극단에 이르면 자신을 밀고하라 고 말해 왔지만 황심이 열흘이나
그의 거처를 숨긴 것은 거의 초인적인 인내였음.
9월 26일, 같은 날, 배론으로 달려간 포졸들이 황사영을 체포함으로서 백서가 발견되자
조정은 환호함.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불리었고, 16세 때 정조 14년(1790) 사마시에 급제해 진사가 되어
정조를 만났는데, 정조가 말하길, 20세가 되면 나에게 오너라, 어떻게든 일을 시키고 싶다.
라고 말했음. 출세가 보장됐지만 바로 그해, 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하면서 인생이 바뀜.
처음부터 천주교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주변엔 신도들로 가득 차 자신도 자연히 교도가 됨.
약현의 첫부인은 이벽의 누이, 황사영의 셋째 동서는 약종과 함께 사형당한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이었음.
서울로 압송된 황사영은 국청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하기 시작하는데, 황사영 체포와 함께
쾌재를 불렀던 홍낙안, 이기경, 서용보 등은 약용이 사영의 처삼촌이니 더 이상 빠져 나갈 수
없다하여 다시 죽이려는 계략을 세움. 홍낙안은 사헌부 집의가 되어 권한이 막강했음.
10월 13일, 홍낙안과 사간원 헌납 신구조가 연명으로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황사영 백서 제작 배후에 약용, 약전, 이치훈, 이관기, 이학
규, 신여권 등이 있다며 체포를 주장함.
이틀 후, 홍희운(홍낙안)은 승승장구했는데, 대왕대비는 그의 업적에 걸 맞는 처우를 하고자
동부승지에 제수하여 국책에 참여도록 조처해 줌.
며칠 후, 장기와 신지도에 들이닥친 금부도사가 약용, 약전을 붙잡아 서울로 압송했는데,
이때 두 사람은 이번엔 결코 살아남기 힘들다며 각오함.
국문장에 끌려온 두 사람에게 위관들이 황사영의 백서를 보여주며 협박했는데,
백서의 배후에 대해 심문을 받았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질 않았음. 때마침 뜻밖에 황해
도 관찰사 정일환이 돌아와 약용을 두둔하고 나서며 약용이 곡산을 다스릴 때 그의 칭송이
아직도 그곳에 자자한데 만약 사형을 노한다면 반드시 옥사가 잘못됐다는 비방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함. 결국 노론 벽파는 두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유배형에 처함.
이때 노론 벽파, 특히 홍낙안이 약용의 사형에 실패하자 울분을 터뜨림. 사헌부 집의로서
백관의 탄핵권을 가진 그도 약용과 약전의 목숨만은 어쩔 수 없었음.
11월 5일, 약용은 전라도 강진현으로, 약전은 나주목 흑산도로 유배형 확정됨.
이치훈, 이관기, 이학규, 신여권 등은 영남과 호남으로 보내 다시 유배하라고 명함.
같은 날, 국청에 끌려와 심한 고문으로 받은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 당함.
그의 가족도 불행했는데, 모친 이윤혜와 부인 정명련은 노비가 되어 거제도와 제주도 대정
현으로, 2세의 아들 황경한은 영광군 추자도로,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감.
심지어 가종(家從)이었던 육손은 갑산, 돌이는 삼수, 여종 판례는 위원, 복덕은 흥양,
고음연은 단성으로, 고음연의 남편 박삼취는 거창으로 유배 감.
다음날, 조정은 그의 집을 헐어 웅덩이로 만듬.
11월 5일, 약용, 약전이 유배길에 올랐는데, 이때 서모 김씨가 피눈물을 흘리며 한탄했음.
두 형제는 동작나루를 건너 과천을 지날 때 눈까지 내려 심신이 비극이었음. 이때의 심정
을 표현한 시.
동작나루 서쪽의 갈고리 같은 달, 한 쌍의 놀란 기러기 모래섬을 넘네, 오늘 밤은 눈 덮인
갈대숲에서 함께 자지만 내일이면 머리 돌려 따로 날아가리. (2권 124P)
11월 21일, 두 형제는 나주읍 북쪽 5리 지점의 율정점에 이름. 율정점의 초가 주막에서
두 형제는 마지막 밤을 보내며 뜬 눈으로 밤을 샘. 이때의 심정을 표현한 시 (2권 125P)
11월 22일, 약용과 약전이 눈물의 이별을 한 후, 약용은 영산강을 건너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약전은 무안을 거쳐 흑산도로 감.
겨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을 맞이한 것은 살을 에는 찬 겨울바람과 삭막한 인심뿐이었다.
‘서학을 믿은 대역죄인’이 귀양을 오자 마을사람들 모두가 전염병환자를 보듯 다산을 피했
다.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처음에
는 외가 쪽에서도 다산을 모른 체 했다. 방을 못 구해 몰골이 말이 아니었음. 마침 동문 밖
에서 밥과 술을 파는 주막의 노파가 약용을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살도록 배려해 줌.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서회(客中書懷)’라는 시이다.
북풍에 흰 눈 휘몰아치듯, 남으로 강진 땅 한 밥집에 이르렀네. 작은 산들 다정히 바다를
가려주고, 총총한 대나무들 꽃처럼 아름답네. 따뜻한 땅 한결 더 추운 겨울 옷차림이 가볍
건만, 밤이면 수심 더해 술로서 달래네. 동백은 설이 오기 전 활짝 피어나니, 이나마 나그네
근심 한껏 씻어주네
이때 다산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학동들이 찾아옴. 당시 지방관청의 하급관리를 맡고 있던
아전들의 아들들인 황상, 이청, 윤창모 등이 제자로 들어옴. 그 외 다산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손병조, 황취, 황지초, 등이 찾아옴. 이때 사후까지 보은할 15세 어린 제자 황상(아명
은 山石)을 여기서 만남. 윤창모는 이 후 다산의 딸과 결혼하여 다산의 사위가 됨.
이 가운데 해배 뒤에도 교유가 이어진 제자는 황상과 이청 정도. 황상은 훗날 ‘치원유고’라
는 문집을 낼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이청은 다산과 함께 ‘대동수경’을 편찬하고 정약전
의 ‘자산어보’에 주석을 붙일 정도로 학문적으로 대성함.
이렇게 맺어진 스승-제자의 인연이 정약용이 75세에 죽을 때까지, 그리고 황상 그 자신이
생명을 다할 때까지, 그리고 양가의 후손들에게 까지 계속된다.
이후 다산이 강진읍 우두봉 기슭 보온산방에 있는 제자 황상에게 보내 한시...
제목 : 차운하여 황상의 보은산방에 부치다. (차운기황상보은산방)
찌는 더위에 당장 절로 달려가고 싶지만, 늙고 피곤해 산에 오르기가 무섭네, 모기 벼룩이
극성스럽게 덤벼, 여름밤이 어쩌면 이리도 길까, 밤이 깊어지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옷을
벗고 우물에 가 목욕하면, 시원한 바람 내 얼굴에 불어오지만, 숲이 울을 막아 그게 불만이
라네, 생각하면 그댄 구름 속에 누워 편안히 쉬니 온몸이 시원하겠구먼.
* 약용은 강진에서 18년 유배 중 강진 읍내 주막집에서 5년, 보은산방에서 1년,
제자 이청의 집에서 2년을 머문 후, 1808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에 있는 다산
초당으로 옮겼는데, 그의 학문에 흠모하던 지역 유지들의 요구에 의해 일종의 가정
교사로 들어가 18제자를 가르쳤음 (이청, 황상, 이강회, 이기로, 정수칠, 윤종문,
손병조, 황취, 황지초, 정학연, 정학유, 윤종삼, 윤종진등이 있음.
18제자는 아니지만 윤시유, 윤창모, 윤정기, 이시헌도 훈육했으며 이때 다산강학에 참여했던
제자 윤창모를 사위로 삼기도 했음)
흠모하던 지역 유지들의 요구에 의해 일종의 가정
교사로 들어가 18제자를 가르쳤음 (이청, 황상, 이강회, 이기로, 정수칠, 윤종문,
손병조, 황취, 황지초, 정학연, 정학유, 윤종삼, 윤종진등이 있음.
18제자는 아니지만 윤시유, 윤창모, 윤정기, 이시헌도 훈육했으며 이때 다산강학에 참여했던
제자 윤창모를 사위로 삼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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