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스 음악 모음
무작정 걷고 싶어 추억의 길 데블스
소울 충만했던 ‘고고70’의 진짜 주인공들
현재와 과거를 진보와 진부로 나누는 착시현상 속에 있다면, 그 이름과 등장순간부터 위험하고 파격이었던 데블스(Devils)를 당대에 놓고 본다는 것은 모종의 신기함을 동반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은 흑인음악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은 소울 밴드였다. 시작점은 인천의 신포동이었고,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영업했던 ‘캘리포니아 클럽’이었다. 밴드의 얼굴로 보컬과 기타를 맡은 김명길은 1947년에 인천 하수동에서 태어나 송현초등학교와 동인천중학교를 거쳐 인천공고까지 다닌 인천 토박이다. 또 다른 오리지널 멤버인 연석원은 황해도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랐다. 1969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데블스는 곧 인천을 넘어 파주 등지의 미군 클럽들을 돌며 연주한다. 다시 말하여, 대개의 초기 그룹사운드 밴드들처럼 ‘그들 앞에서’ 검증과 수련의 시간을 거쳤다. 새로운 전기는 제2회 ‘플레이보이배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마련되었다. 무대 한편에 관을 가져다 두고 해골이 그려진 옷을 입은 채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가수왕상과 구성상을 차지한 것이다. 무명의 밴드가 전국적인 스타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경력을 커버에 떡 하니 인쇄한 데뷔앨범을 1971년에 아세아 레코드를 통하여 발표한 데블스는 당시에 유명한 클럽이었던 ‘닐바나’에 출연하고 방송국에 진출하는 등 창대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리운 건 너’는 밴드를 새롭게 재편하면서 1974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의 얼굴이었다. 구성원들의 교체와 포지션의 이동이 있었지만 데블스의 뿌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박혀 있었다. 서양 백인 음악 위주였던 대중음악의 흐름에 아프로 아메리칸, 즉 흑인의 음악인 소울을 가요에 ‘접목’했으며, 관악기의 역할과 리듬의 힘을 살린 여러 곡들을 앞에서 인도했다. 이처럼 ‘그리운 건 너’는 가요의 정서와 흑인음악의 감성을 섞어냈고, 그럼으로써 음악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성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짧은 곡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 음반이 하나의 전설, 말 그대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음반에 쓰이기도 한 카피처럼 ‘획기적인 소울’을 선보인 데블스의 다른 곡들과 함께 있을 때에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난다는 뜻이다. 이 곡이 이 지면에 소개되는 이유는 단지 하나의 노래로서가 아니라 한 밴드와 어떤 음반의 가치를 대신하여 발언하기 때문이다. 또한 철장 뒤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밴드를 찍어놓은 오리지널 음반의 사진은 당대의 암시이자 예언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전국의 말썽쟁이 예술가들이 젊은 세대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던 1970년대 초반의 그룹사운드 열풍은 곧 강력한 냉풍을 맞을 운명이었다. '대마초 파동'과 박정희 정권의 '가요정화운동'으로 생기는 한순간에 사그라진다. 한 마음으로 민족과 국가, 그리고 건전한 미풍양속을 생각해야 마땅할 때에 덥수룩하게 머리를 기르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서양문화를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이는 세대가 어떤 이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대마초 파동은 그 이전까지는 명확하게 법에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마초를 피우던 이들을 모두 유치장으로 초대한 사건이다. 공보부는 ‘공연물 및 가요 정화 대책’을 발표했고,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심의는 더욱 엄격해진다. 그래서 이른바 ‘철창 음반’과 ‘그리운 건 너’는 남다른 바람을 불어넣는 한편, 찬바람을 예고한 셈이 되었다. 데블스의 활동기간 또한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되었고, 전해질 노래를 남겼다. 조승우와 문샤이너스가 데블스로 분한 영화 [고고70]의 주인공이 된 데에는, 금방 넘겨졌지만 훗날 다시 펼쳐보게 될 역사 한 페이지와 운명을 같이 한 밴드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출처 :음악평론가 나도원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