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종화의 화맥(畵脈), 소치 허련 선영
추사를 언급함에 있어 소치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완결할 수 없다.
이 땅의 남종문인화는 두 사람의 합벽(合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소치가 초의 밑에서 그림을 배운지 4년째 되던 1839년, 초의는 추사에게 소치의 그림을 보내 평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추사는 “아니 이와 같은 뛰어난 인재와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 즉각 서울로 올려보내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그해 8월, 소치는 서울로 올라와 월성위궁 바깥사랑에 기거하며 추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된다.
추사는 소치에게 원말 4대가의 그림을 방작한 화첩(畫帖)을 주고 폭마다 열 번씩 본떠 그리라고 했다. 소치는 추사의 가르침대로 날마다 추사에게 그림을 그려 바쳤다. 그러다 잘된 그림이 있으면 추사는 찾아오는 손님에게 한 폭씩 나누어 주면서 소치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소치의 이름이 장안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추사는 허련에게 소치라는 호를 지어주니, 원말 4대가인 황공망(黃公望, 1269~1354년)의 호인 대치(大痴)를 빌려 소치(小痴)라고 했다.
소치가 27,8세 무렵 초의스님을 찾아간 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초의는 이미 경화사족의 인사들과 널리 교유했으며 호남 유생들 사이에서도 ‘호남팔고(湖南八高)’라 불릴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소치는 초의 문하에서 3년여 간 꾸준히 시(詩)·서(書)·화(畵)를 연마한다. 그리하여 훗날 소치가 문인·명사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교양과 학식의 기본을 갖추게 되었다.
소치는 또 해남 연동의 녹우당(綠雨堂)을 방문하여 윤두서(尹斗緖)의 후손인 윤종민(尹鍾敏)에게 공재화첩(恭齋畵帖)을 빌려온다. 을 본 소치는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탄하며 몇 달에 걸쳐 이를 모사한다. “나는 비로소 그림 그리는 데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윤종민은 그림에 도움이 될 자료를 소치에게 빌려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초의가 해남 윤씨들과의 교류와 신뢰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소치의 인복은 좋을 정도가 아니라 과분할 지경이었다. 위로는 헌종(憲宗)을 모시고 그림을 그렸으니 평민 화가로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린 예는 조선의 역사에는 일찍이 사례가 없던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을 만나 극찬을 들었으며, 당대 최고의 세도가인 김홍근(金弘根)과 민영익(閔泳翊)의 상찬을 받았으니 이 또한 추사의 절찬(絶讚)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소치가 스승 추사에 대한 극진한 정성의 인과(因果)이기도 했다.
허련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고 영광스러웠던 시기는 1849년(헌종15)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때 허련은 다섯 달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헌종을 배알(拜謁)하고 헌종이 손수 내린 붓을 받아 그림을 그리는 등 일개 화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예를 누린다.
소치가 대내(大內, 임금의 大殿)에서 헌종과 나눈 이야기이다.
“그대가 세 번이나 제주에 갈 때마다 바다를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냐?”
“하늘과 맞닿은 큰 바다에 거룻배를 이용하여 왕래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소치는 세 번이나 목숨을 걸며 추사의 유배지를 찾아가 오랜 기간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했다. 소치의 방문은 단순한 위로의 수준을 넘어 추사에게 새로운 의욕을 불어넣기도 했다. 소치의 스승에 대한 정성은 추사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사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남종화의 본산인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찾아갔다.
▲ 운림산방 초입에 자리한 소치의 사촌 형 허감(許鑑) 부부 묘소.
▲ 맥로는 전면에서 진입하여 배위(配位) 묘소에 11회절, 허감 묘소에 10회절 명당을 맺었다.
▲ 첨찰산 뒤에서 내려온 맥로가 운림산방에 11회절의 명당을 맺었다.
도처가 명당판이다. 지당(池塘)의 배롱나무는 소치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운림산방은 추사가 돌아간 1856년, 49세의 소치가 첨찰산 아래 양지바른 곳에 마련한 거처이자 화실이다. 이곳은 소치 개인의 거처를 넘어 호남 남종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찍이 소치는 첨찰산을 이렇게 묘사했다.
“첨찰산은 옥주(沃州, 진도)의 모든 산들의 조봉(祖峯)이다. 그 아래 동부(洞府)가 넓은 곳에 쌍계사가 있고, 그 남쪽 운림동에 정려(精廬)를 짓고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 명명했다. (...) 그 수려한 경관은 시로 읊거나 그림으로 묘사할 만하다”
▲ 운림산방의 제자(題字)는 소치가 썼고, 대팽고회(大烹高會)등의 주련(柱聯)은 추사의 글씨를 각(刻, 새긴)한 것이다.
▲ 소치의 5대조 허세찰(許世札, 1676~?) 묘소.
소치의 5대조 허세찰(許世札, 1676~?) 묘소. 진도군 내산리.
소치 묘역 상단에 자리하며 핵심 주혈에 모셨다.
▲ 소치 허련(1808~1893) 묘소
소치 허련(1808~1893) 묘소. 5대조 하단에 자리함.
어떤 풍객은 소치의 묘소가 앞에 있는 작은 산을 안산(案山)으로 향(向)을 정했다고 하나, 초의선사가 주석했던 대흥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소치 허련(許鍊, 1809~1892)의 본관인 양천(陽川) 허씨는 조선시대의 명문가로 꼽혔다. 특히 성종년간의 허종(許琮) 허침(許琛), 대학자인 미수(眉叟) 허목(許穆) 등이 유명했다. 그러나 선대의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진도(珍島)로 이주한 양천 허씨들의 가세는 기울어 평민과 다름없는 처지였다.
소치의 28세까지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어릴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숙부가 소치의 그림을 보고는 “내 조카가 반드시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겠구나”했다고 한다.
▲ 소치 묘소 옆의 노란색 원은 장남 은(溵,1831~1865)의 묘소.
소치는 호불호의 편벽이 심한 성격이었다. 인물 좋고 재주가 뛰어난 장남 은을 편애했다. 은에게 북송시대의 미불(米芾,1051~1107 학자이자 서예가)의 성(姓)을 취하여 미산(米山)이라 불렀다. 소치는 미산에게 자신의 화풍을 계승토록 열심히 가르쳤으며 미산 또한 그림 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 때로는 아버지보다 솜씨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산은 3년을 앓다가 34세를 일기로 요절하니 소치는 큰 슬픔에 잠긴다.
▲ 위성지도에 표시한 맥로도.
전통풍수에서는 맥로는 산(맥)을 따라 흐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필자가 많은 현장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호남의 도서(島嶼)지역의 대명당들은 맥로가 산이 아닌 바다를 건너온 사례가 많다. 예컨대, 압해도의 정(丁)씨 시조 묘나 비금도의 이세돌 부친 묘소가 그렇다. 그리고 소치 묘역 또한 그렇다. 허세찰의 묘소는 묘역의 주혈로 20회절의 대명당을 맺었고, 그 하단에 있는 소치 묘소는 여기(餘氣)에 자리하지만 16회절 명당이다.
▲ 작은 미산 허형(許灐, 1862~1938) 묘소.
작은 미산 허형(許灐, 1862~1938) 묘소. 비석의 제자(題字)는 소전 손재형이 씀.
운림산방을 방문했을 때, 관리인들에게 미산의 산소를 물어봤지만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그런데 한 분이 누구와 통화를 하더니 미산의 장증손(長曾孫) 허은(許垠)선생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허선생님과 여러 차례 통화를 하면서 묻고 물어서 첨찰산 깊은 산속에 자리한 묘소를 어렵게 찾았다.
소치는 편애하던 장남이 요절하자 그림으로 자신을 이을 후계가 끊겼다고 낙담하였다. 특히 몸집이 작고 재주도 없어 보이는 넷째 아들 형(瀅)은 허드렛 일이나 시켰다. 그러나 형이 15세 무렵, 그에게 그림에 재주가 있음을 알게되자 그림 공부를 시켰고 그를 또 미산(米山)이 불렀으니 사람들은 그를 작은 미산이라고 했다. 그러나 미산은 아버지 소치가 교류한 넓은 세상과 문화 명류(名流)들을 접할 수 없었다. 아버지 그림을 반복적으로 답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미산 허형의 한계였다.
▲ 묘소의 맥로는 진도 동남방 바다에서 출발하여 첨찰산 정상을 넘어 그 일지맥인 아름다운 봉우리를 건너와 묘역으로 진입하고, 묘소는 14회절 명당에 정확히 모셨다.
묘소의 맥로는 진도 동남방 바다에서 출발하여 첨찰산 정상을 넘어 그 일지맥인 아름다운 봉우리를 건너와 묘역으로 진입하고, 묘소는 14회절 명당에 정확히 모셨다.
허형은 본인이 화가로서의 명성보다는 그의 아들 허건과 족손인 허백련에게 남종화의 화맥(畵脈)을 잇도록 한 역할에 의미를 두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추사없이 소치가 없듯, 미산없이 의재·남농이 없다”라는 말은 허형의 위상을 적절하게 지적한 대목이다.
▲ 허형의 장남 허윤대 부부 묘소.
허형의 장남 허윤대 부부 묘소.
미산 묘소 백호방에 자리하니, 미산 묘소의 여기(餘氣)에 자리한 8회절 명당이다.
배위(配位) 묘소의 역량이 다소 더 좋다.
이곳도 예외없이 멧돼지가 봉분을 훼손한 흔적이 뚜렸하다. 묘소 주위에는 울타리를 치고 묘소에 이르는 묘도(墓道)의 개설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80을 바라보는 후손마저 돌아가면 문화 선인들의 흔적조차 사라질까 조심스런 마음이다.
▲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묘소.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묘소. 무안군 왕산리. 남농기념관에서 북쪽으로 10여 킬로 떨어진 봉수산 아래에 모셨다.
남농은 미산의 넷째 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시절은 조부 소치 때와는 달랐다. 소치의 진가를 알아줬던 사회 명류들도 오래 전에 떠났고 세상도 변했다. 부친은 그림을 팔기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 화가를 낮게보는 사회적 시선과 배고픔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아들 남농의 그림공부를 한사코 반대한 이유였다.
남농은 15세의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를 입학하고 18세에 목포로 이사한다. 다른 과목에 비해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학한 이듬해 전국 소년미술 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인생항로가 정해졌다.
1930년대는 남농 그림의 출발기였다. 농촌과 들판을 다니며 새로운 방식을 시험하고 모색한다. 조부와 선친의 그림을 모사하던 전통의 수묵산수화와 동시에 근대적인 사실주의적 감각이 혼재되는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셋집 마루에서 3년간 그림을 그리다 다리에 멍이 들은 것이 동상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신안군의 도서와 바다를 경유한 맥로가 묘역 앞으로 진입하는데, 절묘하게도 남농 묘역은 모두 길흉 경계선의 안쪽에 자리하는 명당이다.
신안군의 도서와 바다를 경유한 맥로가 묘역 앞으로 진입하는데, 절묘하게도 남농 묘역은 모두 길흉 경계선의 안쪽에 자리하는 명당이다. 남농이 16회절, 부인이 19회절 명당에 자리한다. 앞에 있는 아들 부부 묘소 또한 상당한 역량의 혈처에 모셨다.
해방이 되자 국전초대작가 시절을 거친 남농은 한국화 그룹인 백양회를 창립하고 순회전시회와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화단활동을 전개한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명성이 쌓이자 목포예총 지부장으로 추대되고 지방 미술의 발전을 위해 분주한 시기를 보낸다. 남농의 산수에는 목포를 중심으로 영암·해남·진도의 산수와 다도해의 풍치가 드러난다. 남도인에게 향토적 서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60,70년대 경제 호황과 함께 그림의 수요층이 증가하면서 남농의 그림을 앞다투어 사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남농은 많은 재산을 모은 뒤에도 그의 일상은 변한 것이 없으니, 먹물 한 방울 화선지 한 장도 함부로 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목포 문화발절을 위해서는 거금을 쾌척하고는 했다.
1981년에는 수석 2천 점을 목포시에 기증했고, 1982년에는 운림산방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1985년에는 목포시 용해동에 남농기념관을 지어 소치를 비롯한 후손과 제자들의 작품을 전시하니 한국 남화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 ~ 1977) 묘소. 광주 운림동.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 ~ 1977) 묘소. 광주 운림동.
진도 출신인 의재는 소치와 같은 집안으로 어려서 미산에게 그림을 배웠고 정만조(鄭萬朝,1858~1936)에게 한학을 배웠다.
의재는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하다 그림으로 인생 항로를 변경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남화가(南畵家)였던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통적인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각광을 받는다. 1927년부터는 광주의 무등산에 정착하여 독자적 화필 생활과 문하생 지도에 전념했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는 근대적 작풍(作風)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의재는 옛법(古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신의 세계로 심화시켰으니, 그의 산수화와 문인화는 전통 남종화 정신과 기법의 철저한 계승이었다.
▲ 맥로는 의재 묘소에 머물러 명당을 맺지 않고 계속 위로 진행한다.
맥로는 의재 묘소에 머물러 명당을 맺지 않고 계속 위로 진행한다. 이러면 혈처가 될 수 없다. 의재 좌우에 모신 두 분의 아들 납골 묘소 또한 같은 상황이다. 길지로 옮겨드렸으면 하는 생각이다.
의재는 광복 직후에는 축산 농장을 경영하면서 화필 생활을 병행하였다. 1947년에는 농업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농사기술을 익히며 학업을 닦게 하는 등 사회사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1949년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國展)가 시작되자 추천 작가·초대 작가로 추대되고,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66년에는 예술원상 미술 부문을 수상하였다. 한시(漢詩)와 고전화론(古典畫論)에 통달하고 서법(書法)도 독특한 경지를 보인 시·서·화 겸전의 전형적 남종화가로서 호남 서화계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 하였다.
문건 / 강원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