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94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연중 제1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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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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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EEN3Hb_kIM (김동주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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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충만하게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통’하는 것입니다!>
시골 영감들이 주류인 저희 공동체이지만, 살레시오회 고유의 청소년 사목을 위해 다들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부터 찾아오게 될 수많은 청소년들이 머물 숙소를 준비하고, 그들이 안전하게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해변 정리정돈, 쉼터 조성, 예초 등등으로 하루하루가 분주합니다.
오늘은 저희 공동체 큰 경당을 이번 여름 오게 될 청소년들이 사용할 주 프로그램 장소로 바꾸기 위해 다들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장의자를 뒤로 밀치고, 잡동사니들도 싹 치우고, 널찍한 프로그램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공부와 세파에 지친 청소년들이 시원한 공간에서 마음껏 즐길 것을 생각하니 피곤이 싹 가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도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보시고, 껄껄 웃으시며 너그럽게 수용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형식적이고 이중적이며 경직된 것들을 도무지 수용하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참으로 딱딱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기가 막힌 사람들입니다. 귀가 막히고, 눈이 멀고, 마음이 닫히고, 영혼의 상태는 캄캄한 암흑이고, 그 어떤 조언이나 동반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이 그릇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이나 신념에 잔뜩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노선이 얼마나 웃기고 엉뚱한 것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멸망으로 향하는 길임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난 아기라고 여기고,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복음을 읽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건강하고 충만하게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통’하는 것입니다. 기가 통하고, 호흡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정신이 통하며, 영혼이 통하고, 오장육부가 원활히 통해야 만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활짝 열린 마음과 영혼으로 당신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눈이 활짝 열리고, 귀가 활짝 열리고, 마음도 활짝 열리고, 온몸과 정신이 활짝 열려, 매일 매 순간 사랑 그 자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뚜렷이 뵐 수 있는 눈을 간절히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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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도 중의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니는 아가서 저자의 절절한 모습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아가 3장 1절)
사랑하는 스승님이 너무 그리워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거리와 광장을 울며 돌아다니던 바로 그 모습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큰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녀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을 동일시 해왔습니다. 회심한 사람의 대명사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디에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죄 많은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근거가 없습니다. 복음서가 알려주는 그녀에 대한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고향은 막달라, 이름은 마리아, 한때 일곱 마귀에 시달리며 고생했으나, 은혜롭게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았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 이후 지니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그분과 사도단의 생계에 힘을 보탰다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는 것,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자였다는 것.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그에 상응하는 큰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물심양면으로 예수님과 사도단을 도왔고, 예수님 가시는 곳 마다 밀착 동행하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드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치유된 이후 그녀의 삶은 오로지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녀에게서 예수님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우리 교회는 아주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여제자라고까지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잘 나타난대로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으로 불려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께서는 ‘사도 중의 사도’라는 빛나는 칭호를 선물하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셨습니다. 꽤나 부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를 모두 털어 예수님과 제자단의 생계를 후원하였습니다. 삼엄하고 살벌했던 예수님의 처형 현장인 골고타 언덕을 성모님과 함께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껏 수습했습니다. 장례 절차를 거의 주관하다시피 했습니다. 거기다 빈 무덤을 목격한 후 그 소식을 제자단에 신속히 알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목숨을 하루 하루 부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아가던 그녀에게 기적같은 일이 생겨났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눈여겨보신 것입니다. 그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마치 거짓말처럼 그녀의 인생에서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꿈같은 봄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녀는 죽음에서 삶에로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요 존재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보여준 태도와 신앙은 제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우세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된 명백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수난의 길을 회피했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시선과 마음을 항상 예수님께로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 여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언제 어디서나 스승 예수님께 충실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 곡선이 절정에 도달했던 시절, 잘 나가던 시절, 공생활 기간에도 그분께 충실했지만, 급격히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던 수난의 시기, 특별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역시 그분께 충실했습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충실성 앞에 스승 예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사도들에 앞서 그녀에게 드러내십니다. 당신 부활의 최초 목격 증인이 되게 하시고, 가장 탁월한 복음 선포자가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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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e75iSRvs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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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뿌니'는 삶의 '빛'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위험한 아이들’(1995)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비록 여성이지만 해병대까지 나온 존슨 선생은 문제아들만 모여있는 한 반을 맡게 됩니다. 그 반의 대장은 ‘에밀리오’란 아이인데 선생님에게 성희롱까지 합니다. 처음에 존슨은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었지만, 아이들을 믿어주기로 합니다.
우선 아이들이 관심 있어 하는 특공 무술 활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게 합니다.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장 선생님입니다. 교장은 존슨 선생을 교장실로 부릅니다. 그런데 노크하지 않았다며 존슨 선생을 나무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가라테와 같은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에밀리오와 같은 반 아이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라울이라는 아이입니다. 에밀리오는 반 아이들이 존슨 선생의 뜻에 따라 착해지는 것을 눈 뜨고 못 봐줍니다. 그런데 라울은 선생님 편입니다. 둘은 정학을 맞습니다.
존슨 선생은 먼저 라울의 집에 찾아갑니다. 부모는 사고만 치는 라울 때문에 긴장을 했지만 선생님은 라울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합니다. 라울은 완전히 선생님 편이 됩니다. 라울은 머리가 좋은 캘리라는 친구와 함께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라울과 두 친구를 불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시켜줍니다.
하지만 라울만 나옵니다. 캘리와 다른 친구는 아르바이트해야 해서 식당에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울도 며칠 동안 결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레스토랑에 오기 위해 옷을 사느라고 돈을 빌렸는데 갚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라울에게 자신이 돈을 꾸어주겠다고 합니다. 단 졸업할 때 갚는 조건으로. 라울은 자기가 졸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습니다. 선생님은 라울이 졸업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존슨 선생은 이제 캘리를 찾아갑니다. 반에서 가장 머리가 좋아서 공부하면 잘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캘리는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신해서 학교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존슨 선생은 학교에 아이를 받아달라고 청합니다.
그다음엔 또 에밀리오가 문제입니다. 감옥에 갔다고 돌아온 갱단 일원이 자기 여자 친구를 뺏어간 에밀리오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밀리오는 자기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며 그 학생을 죽이려 합니다. 선생님은 에밀리오를 설득합니다. 교장 선생님에게 그 갱단 일원이 마약을 판다는 것을 말하면 그가 또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졸업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다음 날 에밀리오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노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밀리오의 말을 듣지 않고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에밀리오는 총에 맞아 죽은 상태로 발견됩니다.
존슨 선생은 충격을 받고 학교를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말립니다. 라울은 그러면 자신이 왜 졸업하라고 했느냐고 따지고 임신한 캘리는 다시 학교에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쉽게 보내드릴 수 없어요. 선생님은 우리의 빛이니까요.”
학생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스승이 빛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방황했던 이유는 자신들을 믿어주는 참 스승이 없었다는 것을. 그래서 존슨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이것으로 오늘 복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왜 마리아 막달레나가 “라뿌니!”, 곧 ‘스승님’으로 불렀는지 이해가 갑니다. 일곱 마귀에 들려 죄에 물들어 있던 마리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을 믿어주는 스승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냉담하는 어떤 자매에게서 신앙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인생엔 해답이 없어요. 안 그런가요?” 이 말 안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스승이요 빛으로 만나보지 못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인생에 답이 없기에 어둠 속에서 헤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만나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승이 없는 삶은 어둠의 삶입니다.
사자 무리가 사냥꾼에게 모조리 살해당했습니다. 새끼 사자만이 간신이 살아남았습니다. 새끼 사자는 양의 무리가 자기를 핥아주니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양의 무리와 함께 메에 메에 하며 성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자의 무리가 양의 무리를 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무리와 함께 있었던 사자의 뒤통수를 칩니다.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사자 무리의 대표는 그 사자를 물가로 끌고 가서 생김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의 고기를 먹으라고 합니다. 자기의 형제들인 양을 못 먹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먹게 되고 그때 사자의 포효를 하게 됩니다.
스승은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믿어주고 그렇게 믿도록 양식을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당신처럼 될 수 있음을 믿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자이시면서 사자인 줄 모르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오늘 예수님께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를 자신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어야 그분을 빛이요, 스승이요, 구원자로 만난 것입니다. 마리아도 이렇게 되자 제자들에게 가서 이렇게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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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루카 8,2),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 중의 하나로(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난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 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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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8-21) 이 말씀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사도들이 아니고 왜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답은 간단합니다. 사도들보다 마리아가 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들도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사랑은 사도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기서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너희도 살아 있어야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신앙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갈 때, 사도들이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일은 여자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시고 시신에 향료를 바른 사람들은 ‘남자들’입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최고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요한 19,38-40)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모실 때, 여자들이 그것을 지켜보았는데(루카 23,55), 그 자리에 사도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마리아가 발견하고 베드로 사도와 ‘다른 제자’에게 알렸을 때, 그 두 사람은 곧바로 달려가서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긴 했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요한 20,10) 왜 그랬을까? 당시 상황을 마리아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그냥 가버린 두 제자가 몹시 야속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도, 두 제자가 무덤에 마리아만 남겨두고 그냥 가버린 것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었다면,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특히 바로 옆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상태라면,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마리아보다 덜했기 때문에, 그래서 마리아보다 소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두 제자보다 컸기 때문에, 그래서 두 제자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때 두 제자가 그냥 돌아가지 않고 무덤에 남아서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리아와 함께 만나게 되었을까? 그것은 모릅니다. 어떻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일의 ‘결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셨는데, 그 일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마리아 쪽에서 이미 그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일곱 마귀’에 들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되었다는 것뿐입니다.(루카 8,2) ‘일곱 마귀’를 어떤 윤리적인 죄로 해석하고,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죄인이었던 여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성경에도 근거가 없고, 전승에도 근거가 없는 오해일 뿐입니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고, 마리아 개인에 대한 시기 질투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일곱 마귀’는 글자 그대로 ‘일곱 마귀’였거나, 아니면 ‘어떤 중병’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받았으니까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린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큰 은총을 받았다고 해서 항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큰 은총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리기는커녕 바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사람들, 즉 ‘나인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과(루카 7,14-15)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이(루카 8,54-55) 예수님께 얼마나 사랑을 드렸는지는 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 크게 감사드리기는 했겠지만, 사랑은 복음서에 기록을 남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고, 첫 선포자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먼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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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국문화와 일본문화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문화의 특징은 선을 넘는 문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情)’이라고 합니다. 선을 넘는 우리의 문화는 국악과 현대음악의 조화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선을 넘는 우리의 문화는 역동성과 다양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정치인들에게만 맡기지 않았습니다. 정당에 참여하기도 하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사명이며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명절이면 먹을 것을 나누곤 합니다. 최근의 한류 열풍은 선을 넘는 우리문화의 특징이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선을 넘는 우리의 문화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정이 지나치면 ‘간섭’이 되기도 합니다. ‘오지랖’이 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의 이런 간섭과 오지랖이 많은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선을 넘는 문화는 외적인 다양성과 역동성은 크지만 내적인 역량을 쌓는 데는 소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 문화의 특징은 선을 긋는 문화라고 합니다. 한국의 씨름은 씨름판 위에서 삼세판을 하지만 일본의 스모는 스모판에서 몰아내는 단판 승부입니다. 선을 긋는 일본 문화는 좀처럼 타인의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정치에도 좀처럼 관여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상당히 정적입니다. 사회가 정의로울 때는 평화를 유지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자기 일에 전념하기 때문에 기초과학이나 물리학에 큰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선을 긋는 문화는 사회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현대인들에게 고독과 소외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합니다. 선을 긋는 문화는 상대방의 호의에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이 원한다면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자주 넘으려는 한국의 문화는 선을 긋는 일본의 문화의 신중함과 진중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선을 엄격히 긋는 일본의 문화는 선을 넘는 한국 문화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어떤 것인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넘는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연민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뜻을 따를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을 넘는 경우가 많으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유다를 막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워 도망간 제자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막달레나 성녀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 수도 있고, 오랜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일 수도 있고,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일 수도 있고, 부정한 행위를 한 후에 잡혀온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막달레나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죄 중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지금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지고, 원망과 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받은 것 많았던 제자들이 두려움에 숨어 지낼 때,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능력과 재능은 부수적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열정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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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이 많아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도 몇 달이나 걸렸고, 오랫동안 거의 익명(?)으로 지내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당 주일학교에서는 첫날부터 제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마티아” 하고 항상 웃으면서 세례명을 불러주는 것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어렸을 때 성당 주일학교를 학교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너’로 관계를 맺고, 또한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무엇’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먼저 이름을 부르십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입니까?
어느 성인의 말씀처럼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을 감고 나를 부르시는 고마운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시지 않겠습니까? 그전에 물론 마리아처럼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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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입니다. 막달레나는 성녀의 고향을 딴 이름입니다.
갈릴래아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만나는(마르 16,1-8) 큰 은총을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척 죄가 많은 여인으로 전해집니다.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루카복음 저자는 그녀 몸 속에 마귀가 일곱 마리나 들어 있었다고 전합니다.(루카8,2) 그런데 이렇게 손가락질 받던 죄 많았던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몰라보게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가 되지요.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일생을 예수님에게 헌신하며 살기를 결심하였고,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목숨을 바쳐야 하는 위험 앞에서도 예수님 곁에 머물렀습니다.(루카 8,3)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무덤을 지키며 죽기까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믿음을 버리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인물 때문에 종종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리아'라는 인물이 6~7명이 등장하기에 오늘 기념일로 지내는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교부들의 증언과 전승에 따르면 오리게네스와 그 밖의 초기 성경학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발라 드린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루카 7,36-50)과, 마르타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루카 10,38-42), 베타니아 마을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요한 11,1-12)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은 이들을 모두 동일 인물로 간주하였고 그 후부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성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4권 '마리아, 막달라의' 참조)」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을 기억하며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렇게 그리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동산지기인 줄만 알았지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 끝까지 따라 갔으며(마태 27,55-56),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 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렸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였으며, 사랑과 투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았지만(마르15,40) 마리아 막달레나는 막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나셨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찾아 헤맨 것은 돌아가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찾았기 때문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계셔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한 곳으로만 관심을 쏟으면 다른 것은 놓치고 맙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이웃의 안타까운 점, 잘못된 점만 보고 있으면 그에게 있는 좋은 점들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크면 상대방의 좋은 모습은 놓치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아주 잘해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은 이웃이 있다면 그가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 좋아 보이는 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이웃을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과 열린 눈으로 보고 맞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니지요.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착하면 우리는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참으로 불행하게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입니다.
돈에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면 부모도 형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형제간에 의를 끊으면서까지 오로지 내 욕심만 채우고 싶어합니다. 돈만 보이고 부모도 자식도 부부도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에 대해 미움이 내게 있으면 그가 아무리 좋은 언행을 보여도 나에게는 안 보이고 무엇이든 그에 관한 것은 곱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사랑으로 출발해야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야 잘못을 덮어줄 수 있고 미운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칫 한쪽으로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생각이 기울어져서 보여도 못 보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바른 눈과 바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건강, 명예 등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여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눈 뜬 장님이 되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느라고 헛된 노력들을 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나는 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잘 알아보고 있는지 한번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웃 사람의 좋은 점도, 또 간절한 갈망도 알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이웃도 나의 필요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즈음 세상의 불행이고 비인간화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바른 눈과 바른 마음을 위해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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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을 출세시켜 줄 막강한 권력자로서의 메시야를 꿈꾸었을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목숨도 채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뻥쟁이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죽어 없애야 할 걸림돌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삶과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고 상관될 수 없는 사랑의 현장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그분의 처참한 죽음도 예수님의 끔찍한 몰골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좋은 일보다 궂은일에 아린 연민이며 상대의 못난 구석이 더 애잔하게 밟히기 마련인 것이지요.
아직 어둔 길을 달려가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은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접혀 버린 예수의 꿈도 못나게 죽어간 예수라는 청년의 비참한 모습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가 사랑했던 그 사람 이제는 잃어버리고 곁에 없는 그 사람을 잊을 수 없어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해 주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도 경악하지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으며 “왜”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보고 싶을 뿐이라는 사실을 마리아 막달레나의 곱디고운 말투로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없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고 안타깝게 울고만 있습니다. 그런데 불쑥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뜻하는 의미를 새겨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 정말 깨끗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 날 어느 제자도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직 그들의 마음이 깨끗지 못했던 이유는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을 뵙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지요.
신앙은 세상의 무엇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우리의 목적이며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남이 닦은 길을 쫒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길로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한 방법으로 찾아오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서는 무언가를 바라고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랑하고 싶어 오십니다.
복음이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처럼 그 사랑을 만나러 오신 주님처럼 이렇게 애절하기도 한 것이 주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십니까?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십니까? 아무 계산 없이 정말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그분을 생각하면 울기도 웃기도 슬프기도 아프기도 해서 토라졌다가도 도무지 돌아설 수도 내칠 수도 없어서, 너무나 그리워서 다시 어둔 새벽을 달려나가는 그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아, 그 깨끗한 마음은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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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교회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주로 창녀나 죄 많은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한 모습 외에도 예수님을 따르며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루카 8,1-3 참조),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와 그분의 장례 때에 그 곁에 머물렀던 이였습니다.(마르 15,40-47 참조) 또한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빈 무덤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한 첫 증인이며 선포자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 성녀를 일컬어 사도들이 세상에 선포할 것을 미리 그들에게 선포한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하였습니다.(「요한 복음 해설」 참조)
오랜 시간 우리가 ‘사도’에게만 의미를 두느라 ‘사도들을 위한 사도’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사도의 모습을 회복하도록 초대합니다. 그 회복은 예수님께 충실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곧 그분의 말씀과 삶에 온전히 충실하고자 하는 이, 복음에 더욱 충실해지는 이가 바로 ‘사도’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세상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고 증언하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거나 치유된 이들, 세상 안에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사도인 저의 복음 선포를 힘 있게 만들어 주는 ‘사도를 위한 사도’입니다. 더욱 충실한 사도가 되게 해 달라고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전구를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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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가 누구입니까>
요한 20,1-2.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있어
기쁘고
그가 없어
슬픕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있어
웃음 짓고
그가 없어
눈물 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있어
함께하고
그가 없어
찾아 나섭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있어
살 수 있고
그가 없어
살 수 없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가 있어
내가 있고
그가 없어
나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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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상하지 못한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기구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요, 죄로 얼룩진 상처의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 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천국을 그리워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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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갑질하는 사람,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아랫사람을 함부로 하는 사람,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인터넷 안에서 악성 댓글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을 우리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좋아하십니까? 이런 사람들과 반대의 모습, 즉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사람, 남을 배려하며 밝게 웃는 사람 등의 모습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갑질하고, 함부로 대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고, 그 밖의 부정적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칭찬과 지지를 받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욕먹으면 오래 산다’라고 하던데, 이렇게 욕 많이 먹으며 오래 산다고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특히 하늘 나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그 사람이 오히려 불쌍한 사람임을 기억하며 측은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첫 사람을 알려졌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제일 먼저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 있었고, 부활하신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하던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자마자 뿔뿔이 흩어졌고, 죽음 뒤에는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 호언장담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과 수난과 죽음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마리아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고, 당신의 부활을 처음으로 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주신 것이었습니다.
유한한 시간인 이 세상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시간인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행복을 좇겠습니까? 후자를 원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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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하면 만난다>
-예수님!-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이렇게 하느님을 찾고 목말라할 때 비로소 성인이자 참사람이요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참으로 이야기거리가 무궁무진한 성녀입니다. 사랑때문입니다. 모든 성인들이 그렇지만 성녀는 정말 ‘사랑의 성녀’였습니다. 정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지의 사랑이였습니다. 영적우정, 영적사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들의 사도’라 부르며 성녀께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사랑하면 만난다-예수님!-”, 어제 오늘의 말씀을 얼핏 읽으며 묵상하던중 떠오른 제목입니다. 너무 평범하며 자명한 진리의 발견에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면 찾게 되고 급기야 만납니다.
사랑하면 만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오늘도 역시 여러 단상들을 나눕니다. 사랑하는 자매들과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지금도 향기의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참 좋은 사랑과의 만남이었는지는 길이 남아있는 향기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오늘이 초복이네요. 습기있고 더운 여름을 보내시려면 보양식을 드셔야 하는데. 늘 건강하셔요!”
“자매님, 문자 메시지도 참 좋은 영적 보양식이랍니다!”
“아멘! 언제나 감동을 주시는 울 신부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하면 압니다. 알기에 이런 영적 보양식 같은 덕담의 문자 메시지의 교환입니다. 또한 어느 자매와의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입니다.
-“무슨 꽃이 이렇게 신비롭습니까?”
“별수국입니다.”
“자매님을 닮았네요!”-
짧은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이지만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사랑하면 만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요즘 “헤어질 결심” 영화에 대한 기사들이 넘쳐 흘러 박찬욱 감독이 어떤 분인가 “나무위키”를 출력하여 공부하듯 줄치며 읽어보니 장장 19쪽 분량이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것은 인물들에 대한 소개이며 특히 자서전이나 평전은 좋다 생각되면 눈에 띄는 대로 구입해서 읽곤 합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박찬욱 감독, 정말 천재이자 거장이었습니다. 우선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는지 불가사의였습니다.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남자, 모호필름의 대표랍니다. 모호란 단어도 재미있습니다. 한마디로 1만 영화를 본 영화광이랍니다.
정말 대작의 영화 한편에 참여하는 그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정통하지 않으면 영화가 불가능한데, 한편도 아니고 그 많은 영화 과정의 그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공동체 삶의 대가요 달인이요 참 좋은 사람임이 100% 확실합니다. 절대 참 좋은 사람이 아니곤 이런 관계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직업에서의 대가일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대가라 할 수 있는 박감독입니다. 제가 놀라는 점은 바로 이점입니다.
정말 신화적 인물이었습니다. “너나 잘해!” 바로 '친절한 금자씨' 영화에 나오는 대사도 박감독의 창안이라는 것입니다. 딸이 초등학교 숙제로 가훈을 알아오라고 했는데 즉석에서 “아니면 말고.” 써줬다는 일화도 참 기발했습니다. 무수한 일화들이 참 재미있었고 묵상감이었습니다.
새삼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이것은 손흥민 축구선수의 아버지 손정웅씨의 자서전을 읽으며 확인한 진리입니다. 전자가 영화광이라면 후자는 축구광입니다. 어느 독서광에 대한 묘사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는 평소 인문학에 남다른 호기심과 탐구를 좋아해서 책을 안은 채 잠이 드는 포서면抱書眠 환자로 살아오고 있다.’
어느 경지에 이르게 하는 이런 ‘미칠 광(狂)’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이런 미칠 광(狂)은 그대로 ‘빛날 광(光)’이 됩니다. 그렇게 좋게 미치니 달인이요 대가요 성인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이는 제가 자주 되뇌이는 말입니다.
제대로 하느님 사랑에 미친 이들이 성인들입니다. 이들중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파스카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사랑했기에, 사랑의 대가, 사도들의 사도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생전에도 늘 그림자처럼 예수님을 추종했던 성녀였기에 중요한 결정적 순간마다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 앞서 제1독서 아가서의 신부는 그대로 예수님을 그리며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나리라. 나는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 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또 하나의 아가서가 재현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에덴동산의 하와와 오늘 복음의 부활동산의 마리아 막달레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알고 묻는데 정확했습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은 새로운 부활동산의 정원지기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 만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님과의 극적 만남은 늘 읽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예수님은 드디어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흡사 양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참으로 두분의 사랑은 ‘스승과 제자’, ‘목자와 양’의 순수한 영적사랑의 우정관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어지는 장면이 이를 입증합니다. 남녀의 애정愛情이나 연정戀情을 하느님 안에서 영적 사랑의 우정友情관계로 승화시킬 때 참 아름답고 영원합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내 형제들’이란 말마디에서 예수님의 형제애兄弟愛가 빛납니다. 참으로 당신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최초로 나타나셨고 이 기쁜 소식을 당신 제자들이자 형제들에게 전한 성녀이기에 사도들의 사도라 칭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6년 마침내 오늘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키셨습니다. 약 1500년전 교황 대 그레고리오의 멋진 강론중 일부를 나눕니다.
“자, 보십시오. 인류의 죄는 생겨 나온 바로 그곳에서 제거됩니다. 낙원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죽음을 마시게 하였고, 무덤에서 여자는 남자들에게 생명을 선포하며, 죽음을 가져다 주는 뱀의 말을 전하였던 여자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류에게 언어만이 아니라 사물로도 말씀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여자의 손에서 죽음의 잔을 받아 들였으나, 너희는 여자에게서 생명의 잔을 받아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만난 성녀처럼,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으로 사랑하는 부활동산의 정원지기인 주님을 만나, 주님 사랑의 성체를 모심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혜롭고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침성무일도시 아름다운 찬미가중 한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향기론 막달라의 고운꽃이여,
예수의 사랑으로 도취된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마음들을 달궈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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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애타게 주님을 찾자!>
오늘은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8,2) 라고 소개되고 있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 속에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아마도 죽고 싶었을 마음이었고, 또한 그 큰 고통과 시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매우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인 '아가서의 말씀'처럼 자신을 치유해 주실 수 있는 분을 찾아 나섰을 것입니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아가3,2)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큰 고통과 시련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끝까지 충실하게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제자요, 협조자요, 봉사자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나는 영광을 누립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물으십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나의 구원자요 해방자이신 주님을 끊임없이 찾고, 그래서 주님을 만나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에서 해방되어, 너와 세상에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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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z9VR6xtK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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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 15)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의 울음이
터져나온다.
하나밖에 없는
주님과 우리의
사랑이다.
사랑이
사라진 삶이
가장 아픈
삶이다.
아픔의 울음을
위로하는 것또한
사랑이다.
절절함으로
가득한
한 여인을
만난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참된 사랑은
서로를 새로
태어나게 한다.
이와같이
우리또한
찾고 있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비추어 보니
이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이
부활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사랑의
길이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 기쁨을 통해
참된 사랑은
마침표가 없다.
참된 사랑은
절망한 곳에서
끊어진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한 사람의
삶이 마음의
해답을 알려주고
있다.
마음은 주님을
향하는 것이
참된 마음이다.
예수님의 시선과
예수님의
목소리에서
살아있는 부활의
기쁨을 지금
맛보게 된다.
애타게
예수님을 찾은
한 여인이
영원한 사랑을
만나는 오늘
기쁜 축일이다.
사랑을 씻어주는
진실한 사랑이며
마음을 씻어주는
진실한 마음이다.
이 사랑과
이 마음을
찾는 사람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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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비온 뒤 더욱
맑은 하늘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반성하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사랑은 부활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막을 수 없습니다.
맑은 사랑이
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한 여인의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에서
부활은 눈물어린
빛이 됩니다.
사랑으로
만나는 시간이
부활의 빛입니다.
사랑 안에 참된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을 더욱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서로를 위한
부활의 기쁨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생애 전부를
빛나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사랑할수록
십자가도 무덤도
갈릴래아도 부르심도
첫 시작도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빛나는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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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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