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6-2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1장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작정하신 설계도인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아직 일곱 째 날이 다 완성되지 않고 진행 중임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 거대한 창조사역의 완성을 위함이다. 그 일에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개인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그 작정하신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창세기는 1-11장까지 성경 전체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새로운 족보를 만들어 가신다. 그러므로 창1장은 하나님의 계획과 3장은 타락의 이야기 그리고 홍수심판으로는 본성이 바뀌지 않은 죄인들이 결국 바벨을 쌓고 심판을 면해 보려는 인간을 흩으시고(11장)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영원하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되고 있다(12장)
그러므로 창1장과 3장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야기, 그 다음 ‘태초안에'(엔 아르케)가 나오는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추적해 보는 것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창3장의 타락기사는 인간의 죄의 근원과 불행의 원인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근거이다. 거기서 인간이 죄를 범하고 사망의 종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은 결과이다. 하나님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나무의 실과를 먹기를 원하신다. 선과악의 지식의 싸움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큰 문제이다. 우리나라를 갈기갈기 찢어 당파 싸움의 회오리로 끌어넣은 것도 주자학 곧 성리학의 ’이발이냐 기발이냐‘의 실사구시에 대한 논쟁의 결과였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기복이나 신비주의의 신앙은 한쪽으로 젖혀놓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면 거의 구원의 도리에 대한 지식의 싸움이 되고 있다. 지금 율법에 대한 논쟁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담 안의 자연인은 양심이 자신의 법이고, 유대인(지금도 여전히 유대교 식의 신앙은 존재함)은 율법이 그들의 신앙의 행동강령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삶의 법이요 기준이다. 문제는 이 세 부류의 사람이 세상에 현존하듯이 우리 안에도 이 세 법이 항상 존재한다. 다만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믿음으로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엄연히 다 존재하는 법들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실사구시의 논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는 유대교를 엎어버리고 종교개혁을 이루신 분이지만 지식의 싸움으로 유대인을 녹아웃 시킨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의 죄와 사망을 담당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풀어놓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와서 이젠 죄와 사망의 종이 아니라 의와 생명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의를 밑천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 나아갈 줄 아는 자가 진리의 지식을 가진 자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중에 어떤 결함이나 부족한 것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 분의 대속의 은총에 참예하는 진보에 있어서는 개인이 서로 다르고, 또 각자가 순순히 따르느냐 얻어맞고 따르느냐는 개인의 선택일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있느냐 없어졌느냐 하는 싸움으로 밤을 새워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율법의 종이 되어 사람들에게 이용되다가 해방이 되고 난 다음 그 동안 속은 것이 분하고 이가 갈려 율법이 폐기(폐지)? 되었다고 말하는데 율법이 들으면 웃고, 사단이 들으면 피식 비웃을 얘기이다.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율법에 대한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인데 율법을 없애면 그 분의 십자가의 대속의 효력이 어디에 나타나겠는가?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 죄와 사망의 두려움은 항상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율법이 이 세상에 끼어든 것이 아닌가?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바울처럼 이젠 율법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종이 되었노라고 확실하게 증거 하고 확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이지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의 열심으로 돌아간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하기도 하고, 깨우치는 말씀을 하면서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해산의 수고를 해야겠다고 말한다(갈4:1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자유, 그 자유로 사랑의 종노릇, 다시 말하면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강력히 권하면서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상기시킨다(갈5장) 또 그는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 죽었고(롬7:4) 또 구원을 얻는 일에는 육체에 진 빚이 하나도 없으니(롬8:12) 육체를 좇지말고 성령을 좇아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어졌다고 말하지 말고 율법이 손도 못 대는 나라로 들어오라고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우선이다. 북한에 시달리는 인민에게 아무리 그 나라의 악법을 지키지 말라고 해도 안 된다. 자고 나면 또 북한천지다. 그를 구해주려면 거기서 나오라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의식과 율법주의에 잠겨있는 한국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식으로 싸우지 말고 참 진리의 복음을 계속 전하는 길이 상책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다는 말과 율법이 없어졌다는 말은 천양지차이다. 만약 율법이 없어졌다면 반 율법주의가 된다. 율법이 십자가 건너편에 있어야 죄 사함 받은 은혜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절실하게 알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율법이 없으면 회개는 어떻게 하는가? 구원의 기준이 뭔가? 죄가 있어야 회개가 있고,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만약 율법이 없으면 사단이 율법의 권능을 앞세우고 죄의 다발총을 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좇아 그 안에 숨어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죄인이 아닌데 구원의 주가 왜 필요하겠는가? 여전히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 사함과 영생을 얻도록 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만약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 빌라도에게는 큰일이다. 로마의 총독인 자신의 권위와 맞서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은 맞지만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어둠의 세대는 다 율법아래에 갇혀 있다. 율법은 그 나라의 법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는 로마의 법이 다스리듯 그리스도 밖에는 율법이 다스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법이 다르다. 그의 나라는 그의 의(마6:33)가 그 나라 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지어져가는 것이 그 나라의 법이다. 율법과 다른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갓난아이들처럼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만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벧전2:1)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이 산돌이신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가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길이며 왕 같은 제사장과 나라가 되는 길이다(벧전2:5,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독성 아래에 있을 때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선인 줄 알고 남에게 명분만 앞세우는 외식꾼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하늘의 양식을 구한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시므로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령한 양식이 영적인 진보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말씀하신다.
창1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오탐)들에게 다섯 째 날의 짐승들과는 다른 양식을 지정하셨다.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와 푸른 풀’은 현격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식의 싸움이 아니라 그 생명나무의 양식을 내가 먹고 있느냐 아니냐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 먹어야 체질이 변한다. 또 쌀뒤주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과 같이 의에 배부른 자가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마5:6-7) 바짝 마른 지식으로는 사랑을 입으로 그릴 뿐 결코 사랑할 능력을 만들 수 없다.
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요5장에서 살았으면, 요6장에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과 음료’로 먹고 마시고 살라고 하신다(요6:57) 그 분이 참 양식이요 참 음료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의의 옷이요, 먹을 양식이며 거할 처소이다. 우리의 육신이 의식주가 있는 것처럼 거듭난 영혼 또한 의식주가 있다. 만약 이 의식주가 없으면 눈멀고 벌거벗은 자이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자들은 끊임없이 그 분으로 먹으며 또한 그 분의 양식이 되어 서로 수용되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집 곧 하나님의 사랑의 집으로 지어져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