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 황정순님의 글 -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으면 좋겠어.
개울 물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 거야
잠 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 길
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을 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주욱 펴 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시킬 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
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랫동안 입맞춤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우리의 아침식사를
준비할 거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 넣고
파릇한 야채 띄워 야채죽으로 해야지
아마 당신 깔깔한 입 안이 솜사탕 문 듯할 거야
이때 나직히 모짜르트를 올려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이즐럿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찻잔 두 개에 가득 담아
이제 잉크 냄새 막 나는 신문을 볼 거야
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가야지. 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
그래 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어쩌면 그때는 창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야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작은 토담집에 삽살개도 키우고
암탉에 노란 병아리도 키우고
조그만 움막 하나 지어서 뿔 달린 하얀 염소
키우며 나 그렇게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
울타리 밑에는 봉숭아 나팔꽃 맨드라미
분꽃을 심고 집 옆 작은 텃밭에는 가지 오이
고추 열무 상추를 심어서 아침이면 싱그러운
야채로 음식을 만들고 싶어
봄엔 파릇파릇한 쑥국을 끊여 먹고,
여름엔 머리에 잘 어울리는 풀 먹인 하얀
모시옷을 입고, 가을이면 빨간 꽃잎
초록 댓잎 넣어 창호지를 바르고 싶어
겨울이 오면 잠 없는 밤, 눈 오는 긴긴밤을
당신과 얼굴 마주하며 다정한 옛이야기로
온 밤을 지새우고 싶어
나 늙으면 긴 머리 빗질해서 은비녀를 꽂고
내 발에 꼭 맞는 하얀 고무신을 신으며
가끔은 의자에 앉아 책을 보다가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어
한쪽 지붕에는 노란 호박꽃을 피우고
또 한쪽 지붕에는 하얀 박꽃을 피우며
낮에는 찻잔에 푸른산을 들여 놓고
밤이면 달 별 이슬 한 줌 담아 마시면서
남은 여생을 당신과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
봄엔 당신 연베이지빛 점퍼 입고
나 목에 겨자빛 실크 스카프 메고
이른 아침 조조 영화를 보러갈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같은영화...
여름엔 앞산 개울가에 당신 발 담그고
난 우리 어릴 적 소년처럼 물고기 잡고
물장난 해보고 그런 날 보며 당신은 흐릿한
미소로 우리 둘 깊어가는 사랑 확인할 거야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이즐럿
보온병에 담아 들고 낙엽 밟으러 가야지
젊었을 땐 하지 못했던 사진 한 장 찍을까.
예쁜 액자에 넣어 창가에 걸어두어야지
겨울엔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뜰 거야, 백화점에 가서 잿빛 모자 두 개
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볼 거야
눈이 내릴까.
그리고 그리고 서점엘 가는 거야
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들러 책을 한 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 거야. 지난날 우리 둘 회상도
할 겸, 당신 읽어주는 한 줄 한 줄에
난 푹 빠져 잠이 들겠지..
난 당신 책 읽는 모습을 보며 화선지 속에
내 가슴 속에 당신의 모습을 담아
영원히 영원히 간직할 거야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어
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 울고 싶어.
장작불 같던 내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 너무 벅찬 그때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
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살다 때로 버거워지면 넉넉한 가슴에서
맘 놓고 울어도 편할 사람 만났음을 감사드리며
빨간 밑줄 친 비밀 불치병 속앓이 털어놓아도
미안하거나 부끄럽지 않게 마음 나눌 사람
곁에 있음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요 살아 온
보람이며 살아갈 이유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고
가을 낙엽 겨울 빈 가지 사이를 달리는
바람까지 소중하고 더 소중한 사람 있어
날마다 기적 속에 살아가며
솔바람 푸르게 일어서는 한적한 곳에
사랑둥지 마련해 감사기도 드리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이렇게 살고 싶어..
♣ 현대시문학 시와 세계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