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윤동주 생가 written by 나홀로 테마 여행 |
▲ 중국 당국이 윤동주 생가를 정비(2012년)하면서 입구에 큰 표지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
中 옌볜주, 윤동주 생가 국가공인 관광지 지정 추진 서울신문 2014-08-12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가 룽징(龍井)시에 있는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의 생가를 국가공인 관광지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연변일보에 따르면 옌볜주 관광풍경구 등급평의확정위원회는 최근 회의를 열고 윤동주 생가를 ‘국가 AAA급’ 관광지로 지정하기로 했다.
중국의 국가공인 관광지는 가장 낮은 ‘A급’부터 최고 등급인 ‘AAAAA급’까지 5단계로 나뉘며 국가 차원에서 해당 관광지의 종합적인 가치와 수준을 인정한다는 의미여서 지정 시 대외홍보와 관광객 유치에 상당한 이점이 있다. 중국 당국은 지난 2012년 350만 위안(6억 원)가량의 예산을 들여 룽징의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고 표지석, 시비(詩碑), 기념관 등을 세웠다. |
▲ 도로 옆에 윤동주생가, 명동촌 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윤동주 생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 윤동주생가 입구 좌우측에 세워진 돌표석. 윤동주 생가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문화재로 지정(2007년), 표석은 2014년 세움... |
룽징시 명동촌에서 출생한 윤동주는 나운규를 비롯한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민족교육기관인 명동학교를 다니다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귀국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으로 유학했다. 그는 이듬해인 1943년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돼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옥사했다. 대표적인 항일시인인 윤동주는 17세 때부터 문학 창작을 시작해 시 119편과 산문 4편을 남겼다. |
▲ 윤동주 생가 입구 전경. 입구의 경계석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고 새겨진 부분이 우리들이 보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
중국 현지 지방정부 관계자는 12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윤동주 생가는 그동안 룽징시 문물보호단위(우리의 사적에 해당)로만 지정돼 있었는데 현재 국가급 관광지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면서 “최종 지정까지는 아직 상급(기관)의 결정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편 중국 당국은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입구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힌 대형 표지석을 세워 이를 반박하는 주장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윤동주가 나고 자란 룽징 명동촌은 중국 땅이었지만 당시 이주해온 조선인들의 생활 터전이었고 중학 이후 윤동주는 평양, 서울, 일본에서 활동하며 모든 작품을 한글로 쓴 민족시인이어서 그를 일방적으로 중국의 애국시인으로 규정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옌볜주는 윤동주 생가를 복원한 2012년 그의 유작을 모아 중문판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옌볜의 조선족 문인들은 2010년 룽징 중학교와 옌지(延吉) 시민공원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는 등 다양한 현지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
▲ 윤동주 생가는 1994년 복원 이후에 2012년에 주변을 많이 정비하였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명동교회와 김약연 기념비가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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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교회 우측 안쪽에 위치한 규암 김약연목사 기념비 |
◇ ‘북간도 대통령’ 김약연 = 명동촌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김약연을 빼놓을 수 없다. 1868년 함북 회령에서 출생한 김약연은 8세 때부터 10여년간 한학을 공부해 유학(儒學)에 통달했다. 구한말 일제의 횡포로 국세가 기우는 것을 통탄했던 그는 1899년 가족과 10여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 장재촌에 정착했다. 1901년 김약연은 자신의 호를 딴 서당 ‘규암재’를 지어 한학을 가르쳤다. 교육으로 힘을 길러야 민족의 미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 명동교회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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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촌 신앙·항일정신의 산실, 명동교회 윤동주는 1917년 명동학교 교사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한학자인 김약연(1868∼1942) 선생의 여동생 김용 슬하에서 태어났다. 명동교회 장로였던 조부 윤하현 등 가족 모두가 크리스천이었기에 윤동주 역시 신앙 속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15세까지 명동소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명동교회를 다니며 신앙과 항일정신을 함양했다. ◀ 1910년대 김약연과 명동교회 모습. 명동교회 옛 사진은 연변윤동주연구회 홈페이지에서 가져 옴. |
▲ 명동교회는 명동역사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데 광나루 방문 당시에는 개방을 하지 않아서 외관만 보았습니다. |
▲ 윤동주 생가를 정비(2012년) 이전 모습. 인터넷 사진 발췌 |
▲ 저 아래 윤동주 생가로 내려 갑니다. |
그와 가족들이 출석한 명동교회는 1909년 중국 간도지역 최초로 세워진 교회다. 창립 첫해에는 8칸 규모의 한옥이었지만 1년 뒤 김약연 등 마을 주민의 주도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현재 교회 건물은 명동역사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옥 지붕 옆 높이 매달린 십자가를 지나 교회 입구로 들어가자 명동촌 개척사와 주요 인물들을 소개한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뒤로 십자가가 그려진 강대상이 있었지만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 국민일보 기사 내용 일부 발췌 - |
▲ 명동교회에서 윤동주 생가로 내려가기 직전 공터에는 대형 돌에 윤동주 형상과 서시를 새겨 놓았습니다. |
윤동주 시인의 생가生家 진실 신길우
1. 윤동주 생가 논란에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중국 명동촌에 복원되어 있다. 전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보고서 복원한 것이니, 그 모양과 배치 형태를 현재 상태 그대로 믿고 있다. 사진으로도 찍어 나르고 소개하여 현실이 사실로 자꾸 인식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윤동주의 생가는 복원한 현재의 건물 모습이 원형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좌우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윤동주의 성장기 삶을 이해하는 데에도 지장을 준다고 본다. |
▲ 윤동주생가 내부 길옆에는 크고 작은 돌에 윤동주 시(詩)를 새겨 놓았습니다. | |
이에 현실은 현실이고 사실은 사실임을 다시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애서 이 글을 쓴다. 근거는 윤동주의 여동생인 윤혜원 여사와 부군인 오형범 장로의 몇 차례 증언 설명이다. 두 분은 2003년 내가 연변대학에 특별초빙교수로 근무할 때 몇 차례 만나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고, 내용들은 발표해줄 것을 요청받았었다. 그 중 일부 내용들은 「안 알려진, 잘못 알려진 윤동주 이야기」 등 몇 편의 글로 이미 공개한 바가 있다.
그 이후 오형범 장로는 서울에 오실 적마다 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중 몇 가지 이야기는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알려야겠다. 윤혜원(1923∼2011) 여사도 2011년 12월 10일에 작고하였고, 부군 오형범 장로도 92세로 경기도 일산 큰딸의 집에서 거동이 불편한 채 지내고 있어 생전에, 그리고 올해 윤동주 70주기를 맞아 다시 공개하고자 한다. |
▲ 윤동주 생가는 무너져서(1981년) 철거(1983년) 되었다가 현재의 건물로 복원(1994년) 되었다고 합니다. |
2. 윤동주의 생가의 원형 모습
생가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곳이다. 더구나 태어나서 자란 곳이면 평셍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 된다. 방과 마루, 마당과 우물, 나무며 울타리에 핀 꽃들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정겹고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슴에 담긴다. 나이 들고 늙어서도 뛰놀던 마당이며 뜰이며, 문과 기둥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윤동주가 태어난 생가(生家)는 당시 만주국 간도성(현재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 있었다. 용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지신향 큰길 길가이다. 작은 뚝 비탈 아래에 텃밭과 마당을 가진 기와집이었다. 이 집에서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음력 11월 17일에 출생하였다. |
▲ 윤동주 생가 본채 우측에 우물이 있으며, 복원 당시(1994년 8월 29일) 윤동주생가 옛터라는 표석도 세워져 있습니다. ▼ | |
윤동주는 이곳에서 자라고, 1932년 4월에 용정의 은진중학에 입학하여 용정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도 이 집에서 석 달쯤 먼저인 1917년 9월 28일에 태어났다. 본 생가는 팔린 뒤 1981년에 무너져 1983년에 철거되었다. 1993년 4월에 용정시에서 명동촌을 관광지로 지정하고, 지신향정부와 용정시문련과 연변대학 주선하여 해외조선족연구소의 후원을 받아서 1994년 8월에 복원하였다.
1985년에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명동촌 생가를 찾았을 때에는, 건물은 없어지고 집터는 담배밭이었다. 파헤쳐진 초석이 무더기로 쌓였고, 콘크리트로 된 부엌바닥 등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
▲ 윤동주 생가 전경 ▼ | |
1984년에 미중한인우호협회의 현봉학 박사가 찾아갔을 때 돌무더기에서 기왓장 하나를 가져왔는데, 이것을 연세대학의 박창해 교수와 오형범과 윤일주 부인(정덕기) 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보여주었다. 그 기와는 처마 끝에 쓰는 막새 수키와였는데, 둥그런 테두리 안에 중앙에는 삼태극이, 위에는 십자가, 아래는 무궁화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 막새기와는 현재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2003년 6월 6일 필자가 찾아갔을 때에는 본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동행한 연변대학의 김만석(金萬石) 교수의 설명으로는 가옥 두 채를 헐어다가 그 재목으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전면 5칸, 측면 2칸의 겹 10칸의 기와집이었다. 본채는 동서로 길게 남향으로 자리했는데, 나무기둥에 하얀 회벽이고, 골이 진 기와를 올린 팔각지붕이었다. 칸마다 전면에는 중앙에 나무문살의 문이 하나씩 달렸는데, 부엌과 곳간인 오른쪽 두 문은 중간까지 나무판으로 되어 있었다. |
▲ 1994년 복원된 윤동주 생가는 윤동주 여동생인 윤혜원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좌우의 위치가 반대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
본채의 서쪽으로 사이를 두고 헛간채가 직각으로 있었다. 안에는 디딜방아 한 틀이 놓여 있었다. 안채와 헛간채 사이의 굴뚝 앞에 “윤동주생가옛터”라 새긴 복원비가 서 있는데, 용정시 지신향인민정부와 용정시 문학예술계연합회 공동 명의로 되어 있었다. 본래는 1900년경에 조부 윤하현이 세웠는데, 1994년 8월 29일에 복원한 것이라 적혀 있었다.
본채 앞 울타리 왼쪽으로 대문이 있는데, 삽작문이었다. 본채와 대문 사이 마당 오른쪽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깊어서 두레박을 썼다는데, 203년에 방문했을 때는 메워진 채 맨 위에 설치했던 井자형의 재목이 돌과 섞여 보일 뿐이었다. 앞마당에는 풀이 무성하였고, 울타리 너머는 밭이었다. 작은 뒷마당 울타리 너머에는 두어 길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
▲ 윤동주생가 내부 모습 ▼ | |
그런데, 복원한 이 윤동주 생가가 본래와는 달리 좌우가 바뀌었다고 한다. 2004년 11월 21일 서울에서 만났을 때 윤동주의 여동생인 윤혜원·오형범 부부가 설명해 주었다. 원래는 지금과는 달리 우측에 굴뚝이 있고, 왼쪽에 부엌이 있었다고 하였다. 맨 왼쪽에 소 외양간, 다음이 부엌, 부엌과 통한 터진 방, 앞뒤로 조부모와 부모방, 맨 오른쪽 끝에 손님방과 윤동주 방의 순서라고 한다. 윤동주는 굴뚝이 있는 오른쪽 끝의 뒷방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형범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복원공사를 하면서 평면도 좌우를 잘못 뒤집어놓고 했거나, 아 예 그림을 좌우를 잘못 그린 것 같아요.” 그런 착오나 실수를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했더니, 우리가 20여년을 살았던 집을 어찌 모르겠느냐고 하였다. 외양이야 맞선꼴이니 틀릴 리가 없겠지만, 내부 구조는 바꿀 수 있으니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실수든 의도적이든 살았던 이들의 지적이요 증언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 부엌이 디딜방아가 있는 헛간채와 가까운 것도, 굴뚝이 지금처럼 가운데에 있지 않고 집의 바깥쪽에 있다는 것도 그 타당성으로 보아 더욱 신빙도를 높여 준다. |
▲ 윤동주 생가 본채 좌측 건물 간판을 보면 예전에 윤동주생가 보존회에서 커피를 팔았던 것 같습니다. |
▲ 윤동주 생가에서 명동교회 방향을 바라 본 모습 |
3. 생가와 성장기 환경
윤동주는 어려서부터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고, 좋은 교육환경 속에서 학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가정적으로는 겹집 10칸의 큰 기와집에서 윤하연(尹夏鉉, 1875∼ 1948) 남신필(南信弼, 1886∼1955) 조부모와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5)과 어머니 김룡(金龍, 1891∼1948)을 모시고, 여동생 윤혜원(尹惠媛, 1923∼2011)과 두 남동생 윤일주(尹一柱, 1927∼1985), 윤광주(尹光柱, 1933∼1962)와 함께 살았다. 8식구의 대가족이었다.
교육자요 기독교 목사인 큰외숙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의 영향도 매우 컸다. 규암(圭嚴) 김약연은 명동소학교를 창립하고, 교장을 지낸 우국 교육자이다. 아들 김정규(金定奎)는 명동소학교 2대 교장이었고, 손자 김석관(金錫觀)은 명동소학교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으며, 뒤에 윤동주 묘비를 짓고 썼다. |
▲ 윤동주 생가에서 우측 길로 돌아서 나갑니다. |
늘 다니던 명동교회는 김약연이 세운 것인데, 생가의 밖 왼쪽 동남방에 있다. 큰길 아래로 낮은 둔덕이 있고, 그 밑 얕은 언덕바지에 붉은 벽돌로 지은 길쭉한 창고가 있는데, 그 앞에 명동교회 건물이 창고와 90도를 이루며 따로 서 있다. 교회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인데, 벽면에는 가로로 두 줄의 목재가 드러나게 하고 벽은 모두 백회(白灰)를 발라서 하얗다. 5칸 모두 상하 두 목재 사이 좌우 중앙에 각각 창을 설치하였다.
중앙의 두 나무기둥 중 왼쪽에는 “명동교회구지(明東敎會舊址)”, 오른쪽에는 “명동역사전시관(明東歷史展示館)”이라 쓴 세로 나무간판이 걸려 있다. 교회당 건물 오른쪽에는 <김약연선생 기념비>가 있다. 교회 옆에 김약연 목사의 집이 있고, 그 뒤에는 교회의 종을 매달았던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교회 뒤쪽에는 용정에서 삼합진으로 가는 큰 도로가 있고, 교회 밖에는 똘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작은 도로가 육도하(六道河)까지 나 있다. |
▲ 좌측에는 정자, 우측에는 윤동주역사전시관 건물이 보입니다. |
▲ 정자 앞에서 윤동주 생가 방향으로 돌아 본 모습 |
▲ 정자에서 잠시 쉬어 갑니다. |
윤동주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명동교회에서 서남쪽으로 200∼300m 거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잡초만 우거져 있다. 사진으로는 일자형으로, 왼쪽이 소학교이고 오른쪽이 중학교이며, 중앙에 문이 있는데 그 위에 횡서로‘명동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현재의 명동소학교는 원래 있던 곳이 아니라, 개울 건너 다른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
▲ 명동교회 정면에 위치한 윤동주전람관은 건물만 지어 놓고 내부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 |
▲ 윤동주전람관에서 바라 본 명동교회와 입구 방향 |
▲ 윤동주전람관을 지나서 윤동주 생가 관람을 마칩니다. |
명동학교는 1901년 4월에 김약연 선생이 명동에 <규암재서당>을 차렸는데,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으로 개칭하고, 1909년 4월에 <사립명동학교>로 개교하였다. 1910년에 중학부를, 1911년에 여학부를 설치하고 교육했는데, 1925년에 폐교되었다. 1973년에 대들보에서 “명동학교 건축기”가 발견되었다. |
▲ 하단에는 윤동주 생가 내부 길옆에 전시된 윤동주 돌표석 시(詩)를 찍은 사진입니다. |
윤동주의 본가에서 북쪽으로 10여분 쯤 걸으면 작은 언덕이 있다. 이곳에 윤씨네 묘지가 있고, 그 서쪽에 송씨네 묘지가 있다. 윤씨네 묘지에 윤동주의 부모 묘가 있다고 하는데, 묘비가 없어서 확인할 수가 없다. 증조부 윤재옥과 조부 윤하현의 묘도 있다고 한다. 윤동주가 살았던 집은 생가 이외에 두 곳이 더 있다. 윤동주가 용정의 은진중학에 입학하자 거리가 멀어 집에서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용정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 살았던 두 곳은 집터만 확인될 뿐이다. |
첫 번째 집은 두 번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데 얼마 살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집은 지금 용정현 기계수리공장의 정문과, 정문에서 공장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곳은 영국덕(英國德) 지역으로 은진중학과 명신여중과 제창병원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집은 제창병원 맞은편에 있었다고 한다. |
4. 윤동주 생가의 의미
윤동주의 성장기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10칸짜리 생가에 옆에는 교회가 있고, 소학교도 수백 미터의 거리에 있어 이웃이었다. 더구나 교회와 소학교를 큰외숙이 세운 것이니 둘 다 내 집이나 다름없었다. 집안의 맏아들로 조부모와 부모로부터 귀염을 받고, 맏이로 두 남동생과 여동생의 위함까지 받으며 살았다. |
그런 환경과 여건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살려 학업과 문학에 정진할 수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명동촌, 특히 생가는 윤동주가 실제로 산 곳이면서, 공부하고 문학의 터전을 닦고 기른 고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를 지닌 윤동주의 생가, 윤동주가 1917년 태어나서 소년기 15년을 꿈을 키우며 살았던 명동촌 생가, 1894년에 비록 복원은 되었으나 원형에서 좌우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그 여동생 부부의 증언으로 알게 된 것도 진실 확인의 의미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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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1945년 2월 16일(금요일) 오전 3시 36분에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나이가 29세라 하지만, 실제로는 만 27년 1개월 17일을 살았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아 그의 꿈의 산실이었던 길림성 명동촌 생가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생가는 단순히 태어나고 살았던 건물이 아니다. 인생을 꿈꾸며 자신의 꿈을 기르고 맺게 하는 산실(産室)이요 마음의 고향(故鄕)이다.
* 申吉雨 (서울 서초) : 문학박사, 수필가, 시인, 국어학자, 본명 신경철, 대학교수 정년퇴임, 현재 <문학의강> 문인회 회장, 한국영상낭송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