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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신은경은 KBS 간판앵커 출신입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은 박성범 전 KBS 앵커입니다.
박성범 앵커는 KBS 9시 뉴스의 간판 앵커로 신은경 아나운서는 컬러TV가 보급된 이후 등장한 미모의 여성 아나운서였습니다. 신은경은 1986년부터 91년 당시 KBS 보도본부장이었던 박성범과 91년까지 KBS 9시 뉴스를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신은경과 박성범의 스캔들은 끊임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신은경 아나운서에 대한 남자 팬이 많아서 그냥 나온 루머가 아니라, 실제로 1981년 KBS 아나운서 8기로 입사하고 5년도 채 안 된 상황에서 아나운서의 꽃이라고 불리는 9시 뉴스에 기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은경이 5년 넘게 박성범 앵커와 함께 9시 뉴스를 진행했던 것이 당시 박성범 본부장이 밀어줬기 때문이 아니냐는 루머가 단순 루머가 아니라는 사실은 박성범이 부인과 사별한 뒤 신은경과 1995년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18세의 나이 차이와 박성범의 부인이 오랜 화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는 그 둘의 관계가 그리 순탄하거나 평범한 부부의 삶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박성범과 신은경의 모습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박성범이 1996년 서울 중구에 출마하여 당시 정대철 국민회의 부총재를 이기고 당선되면서 반전됩니다.
사실 그때 박성범의 당선은 박성범이 KBS 뉴스 앵커라는 사실보다 신은경이 유권자를 발로 뛰어다니면서, 설거지를 해주고, 목욕탕에서 아주머니들 등을 밀어주면서 얻은 공로라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이런 그녀의 내조는 2004년 4·15 총선에서도 힘을 발휘해 한나라당의 다른 지역구는 몰락했어도 박성범은 당당히 승리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렇게 신은경의 도움으로 잘 나가던 박성범은 오히려 신은경 때문에 2008년 한나라당 공천에서 떨어집니다. 당시 중구청장 공천 후보자에게 21만 달러가 든 케이크와 명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 신은경 측의 주장으로는 공천헌금 증언자는 구속됐고, 명품도 남대문 시장 짝퉁으로 돌려줬다고 함)
박성범은 공천탈락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원칙도 기준도 없이 오직 계파간 나눠 먹기로 일관한 공심의 행태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며 분노했고, 이런 상황에서 신은경은 자유선진당에 입당해 2008년 총선에 나섰습니다.
2008년 서울 중구에서 벌어진 18대 총선은 TV에서 보던 인물들이 대거 출마했습니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명성을 떨치던 정범구와 한나라당에서 밀어준 미모의 나경원, 그리고 KBS 아나운서 출신 신은경이 모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나경원이 46.07%를 득표해 정범구(27.60%), 신은경(20.55%) 을 큰 차이로 따돌리고 승리를 했습니다.
나경원이 등장하기 전 서울 중구는 박성범과 신은경의 텃밭이었습니다. 하지만 나경원이 등장하고 박성범은 공천 탈락의 수모를 겪었고 신은경은 남편을 대신해서 자유선진당으로 입당해 자신의 남편과 자신이 이룩한 아성을 몰아낸 나경원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습니다.
이들 부부의 복수는 무참한 패배로 끝이 났지만, 이제 새누리당 공천을 놓고 다시 격돌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왜 자꾸 제가 미모의 나경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나경원과 신은경, 정범구, 박성범 등이 왜 총선에 나왔는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TV 앵커, 방송인, 미모의 정치인이라는 이름으로 TV에 이름을 알리고 금배지를 향해 나섰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에 미모와 얼굴은 자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주요 수단이자 장점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시민과 유권자들은 그것에 현혹돼서 자꾸 무엇을 봐야 하는지 잊고 투표장을 향합니다.
4·11 총선을 향한 정치인들의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향해 뛰어가고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유심히 봐야 합니다.
나경원과 신은경이 여성으로 금배지를 향해 복수하건,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의 패배를 다시 딛고 재활하는가는 우리가 눈여겨볼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TV 속 이미지와 언론이 보여준 포장된 모습만을 봐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언론을 움직이고, 자신의 얼굴을 팔아 국회에 입성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성이 정치하는 것이 나쁜 것도 전통 유교 사회의 한국이었다고 금기시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사립학교를 나와 중구가 불쌍하다고 여기는 미모의 나경원이나, 남편의 성공을 위해 아주머니의 등을 밀어주며 헌신한 신은경이나 그들이 여성이라고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중구 시민은 없고 금배지만을 향한 그들의 야욕이 무서워서 독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국회의원 한 명, 한 명을 잘못 뽑으면 우리는 다시 4년간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MB정권 ‘거짓말’, 노무현과 너무 달랐다/여의도-청와대 돈봉투 악취 진동… 분통 터져
“하금열 대통령실장은 오늘 중동순방 중인 이명박 대통령께 김효재 정무수석의 사의 표명 사실과 관련 상황에 대해 보고를 드렸다. 이에 대해 대통령께서는 아무 말씀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셨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10일 김효재 정무수석의 사의 표명과 관련 청와대 출입기자단에 브리핑한 내용이다. 골자는 ‘아무 말씀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정무수석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 관련돼 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바로 이런 국정 최고책임자의 무반응이 국민을 분통 터지게 하는 대목이다.
대통령이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국민은 그 속을 알 길이 없다. 불통 그 자체다. 국정 운영도 운동경기처럼 잘할 때도 잘못할 때도 있다. 잘못했으면 잘못을 인정해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잘못이 없는 데도 야당과 언론이 다그치면 국민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면 된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니다. 그저 ‘싸고 뭉개기’만 있을 뿐이다.
대통령도, 국회의장도, 정무수석도 ‘싸고 뭉개기’만
하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지난해 9월 30일 대통령이 앞장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며 “임기 끝까지 열심히 일하겠다”고 물색없는 자기 암시를 내뱉은 이후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것이 친인척과 측근 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쥐 잡기의 달인’인 명진 스님은 “포항에서는 ‘도둑’을 ‘도덕’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고 일갈했지만, 그 도덕적 완벽의 절정은 대통령이 아들 명의로 매입한 내곡동 사저 땅 의혹이다. 이 악재 탓에 10월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을 민주당에 '헌납'했으니 대통령이 입이 열 개라도 '꿀 먹은 벙어리 신세'일 수밖에.
대한민국 정부 수반이자 국군 통수권자로서 공식 의전서열 1위인 대통령이 이 지경이니, 돈봉투에 연루된 서열 ‘넘버 투’ 국회의장은 한 달이 넘도록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흐릿하다. 국회와 정당 관련 업무를 대통령에게 보좌하는 정무수석은 한 달 넘게 거짓말로 대통령 뒤에 몸을 숨기는 비겁한 행태를 보여왔다. 여의도와 청와대에서 돈봉투 비리의 뚜껑이 열려 한 달 넘게 냄새가 진동했지만 치우는 사람은 없고 그저 ‘싸고 뭉개기’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대통령의 인지부조화가 이들을 ‘끝까지 싸고 뭉개는’ 쪽으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일국의 국회의장이 직접 국민 앞에 서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인데 대변인을 통해 5줄짜리 사퇴서를 읽게 하고 떠나는 것으로 끝이다. 그의 언행에서 돈봉투를 돌린 것에 대한 죄의식은 전혀 찾을 길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처럼 운 나쁘게 들켜서 신세 조졌다는 푸념만 넘친다.
정무수석이라는 사람은 거짓말을 해놓고 들킨 다음에 고작 한다는 얘기가 마치 큰 결단이라도 내린 듯 “모든 정치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뿐이다. 돈봉투 의혹을 폭로한 “고승덕 의원과는 눈길 한번 나눈 적 없다”는 강한 부인으로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사죄와 그에 따른 도의적, 법적 책임을 지겠다는 말은 없다. 그의 언행에서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찾을 길 없다. 재수가 없어서 들통 났다는 ‘운 타령’만 있을 뿐이다.
대통령과 청와대 반응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 청와대 일부 참모들은 ‘순방 징크스’를 탓하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뉴욕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에 대한 사전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지난달 중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는 돈봉투 사건이 터지는 등 순방 중 ‘악재’가 계속 터지곤 했다는 것이다.
MB와 역대 대통령들의 ‘순방 징크스’
따지고 보면 역대 대통령들도 외국을 방문할 때면 대형 사건-사고나 정치적 악재가 터지곤 했다. 그러나 이런 ‘순방 징크스’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어서가 아니고 갈수록 국제관계가 중요해져 대통령의 정상외교가 잦기 때문에 해외순방 중에 국내에서 사건-사고가 터질 ‘확률’도 그에 비례한 것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2003년 10월 ‘아세안+3 정상회의’ 참석 도중에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 비리 사건이 터지는 등 ‘순방 징크스’라고 이름붙일 만한 악재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 대통령은 귀국 비행기 안에서 순방에 동행한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해외에 나가면 일정도 빡빡하고 몸은 고단하지만 기분은 좋은데 귀국할 생각을 하면 골치부터 아프다”고 푸념하곤 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순방 징크스’가 더 많았다. 1998년 3월 취임 한 달 만에 영국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했을 때 한나라당의 김종필 총리서리 국회 인준 ‘발목 잡기’를 시작으로 ▲간첩선 침투사건(1998년 11월 APEC정상회의) ▲한일어업협상 비준동의안 파동(1998년 12월 아세안정상회의) ▲옷 로비 사건(1999년 5월 러시아-몽골 국빈방문) ▲이회창 총재의 ‘제왕적 대통령’ 비판(1999년 9월 APEC정상회의) ▲한빛은행 대출 사건 및 한나라당 장외투쟁(2000년 9월 유엔 ‘새천년 밀레니엄 정상회의’) 등으로 거의 예외 없이 정국이 시끄러웠다.
문제는 해외순방 중에 발생한 국내의 정치적 악재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여론을 존중했지만 여론에 끌려 다니지는 않았다. 여론이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며 여론은 또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99년 5월 러시아-몽골 국빈방문 후 귀국길에 야당과 언론이 ‘옷 로비’ 사건에 연루된 김태정 법무장관의 퇴진을 주장한다는 보고를 받고 “마녀사냥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참모들을 옹호하다가 여론의 압력에 밀려 김태정 장관과 박주선 법무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했지만 이후 법원은 옷 로비를 실체 없는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노무현 대통령 “대통령이 난감해 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3월 6일 아침 아프리카 3개국 순방 출국을 앞두고 이백만 홍보수석을 대통령 관저로 불렀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해찬 국무총리가 3·1절에 골프를 친 것을 문제삼아 사퇴를 요구하는 ‘골프 정국’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백만 수석에게 “순방중에 ‘골프 정국’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니 ‘대통령이 난감해 하고 있다’는 수준에서 메시지 관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지시했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출국하자 ‘골프 게이트’라고 명명하며 더 강경하게 이 총리의 사퇴를 주장했다. 기자들도 총리 거취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뭐냐고 다그쳤다.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여론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지경이었다. 이백만 수석은 다음날 기자들을 만나 “대통령은 시시각각으로 국내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면서 “총리 골프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난감해 하고 있다”고 밝혔다. 모든 언론이 '대통령, 난감해한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노 대통령은 귀국 후 이 총리의 사의를 수용했다.
노 전 대통령도 임기말에 이명박 대통령처럼 인기는 없었지만 측근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국민을 속이지는 않았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돈봉투 의혹이 처음 불거졌을 때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혹시 보좌관 등 누가 했나 싶어서 알아봤는데 아무도 돈을 준 사람도 돌려받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고 잡아뗐다.
지금 와서 보면, 보좌관 등 아랫사람들에게 검찰에서 허위진술을 하도록 지침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조선일보> 출신인 김효재 수석은 버젓이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후배기자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쯤 되면 거의 ‘막장 수준’이다. 그런데 대통령 지지율은 아직 ‘막장’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 아직 ‘막장’이 아니어서 심각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중 ‘소통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보수언론 등 한국 사회의 주류층이 거의 대부분 등을 돌린 상황에서도 노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 30~35% 수준의 국정 지지도를 유지했다.
이에 비해 보수적인 여론 분석-연구기관인 동아시아연구원(EAI)의 1월 말 여론조사(전국 성인남녀 1천 명 대상 유선전화 RDD 전화면접조사, 95%신뢰수준±3.1%) 결과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25.2%, 잘못하고 있다는 여론은 71.2%다. 국민 4명 중 1명만 지지하고 3명은 잘못을 질책한다. 직접선거로 뽑힌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제외하곤 최하위다.
지난 4년간의 국정 지지율 추이를 보면, 2009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국면에서 28.5%로 일시적으로 20%대로 떨어진 적은 있지만, 두 달 연속 20%대 지지율에 머문 것은 2008년 촛불시위 정국 이후 처음이다. 현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온 보수층에서조차 긍정적인 평가는 32.5%, 부정적 평가는 64.3%로 지지층 이탈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재의 하락세가 일시적 현상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초부터 불거진 대통령 부인 사촌오빠의 저축은행 구명 로비 청탁에 이은 대통령 형님 이상득 의원실의 불법 로비자금 수수 의혹,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측근 비리 의혹과 중도 사퇴, 박희태 국회의장실의 돈봉투 살포 의혹 등 친인척 및 측근 비리와 선관위 디도스 공격 파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통령과 청와대가 관련돼 있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6인 원로회의’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제18대 총선 공천 탈락에도 전폭 지원으로 원외 당대표를 만든 사람은 이 대통령 자신이다. 또 이명박 대선캠프의 모태인 안국포럼 시절부터 참여한 ‘친이 직계’인 김효재 의원을 당대표 선거캠프의 좌장(상황실장)으로 보내 문제의 ‘돈봉투’를 만지게 한 사람도 이 대통령 자신이다.
이 대통령의 물색없는 인사가 제 발등 찍는 망사(亡事)
김효재 의원을 청와대로 부른 것도 이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교체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참모진 개편을 단행했다. 총선 출마 예정자들을 교체하고 국정운영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상 이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할 ‘완주조’의 진용을 꾸린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김 의원이 뱃지를 떼고 정무수석으로 기용되었으며, 김두우 청와대 기획관리실장은 저축은행 로비의혹에도 홍보수석으로 승진 기용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가장 신임한다는 김두우 수석은 불과 석 달도 안 되어 저축은행 구명 로비와 관련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김효재 전 정무수석은 그로부터 8개월 만에 당대표 선거에서 돈봉투를 살포한 혐의로 검찰 소환조사를 앞두고 있다. 이 대통령 임기 ‘완주조’로 진용을 짠 지난해 6월 인사는 결과적으로 ‘비리 완주조’를 뽑은 셈이다. 그러니 누굴 탓하랴. 결국 이 대통령의 물색없는 인사가 제 발등을 찍는 망사(亡事)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각각 <중앙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잔뼈가 굵은 언론인 출신이다. <동아일보> 정치부장와 한국 갤럽 대표를 지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까지 포함하면 ‘조중동’ 출신이 사이 좋게 끼어 있다. 역시 <조선일보> 출신으로 뇌물 혐의로 구속된 신재민 전 차관과 보좌진이 디도스 공격 사건에 연루된 최구식 의원까지 합치면 MB 정권에 참여한 ‘조중동’ 출신 언론인들의 몰락이다. 그나마 국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조중동-MB연대’라는 ‘막장의 끝’이 보인다는 점이다.
총선-대선, ‘새빨간 거짓말’ 처단하는 처형장 돼야
4대강 사업의 부실이 심각하다. 서너 달 전 공사가 완료된 함안보는 바닥보호공 상류 쪽의 강바닥에 심각한 파임 현상이 일어나 깊이 27m까지 파였다. 하류 쪽에도 같은 현상이 진행되고 있어 보의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파임 현상은 함안보 이외의 여러 곳에서도 관찰된다.
법원, 4대강 사업 위법하다 결론 내렸지만…
누수도 문제다. 4대강 16개 댐(보) 가운데 9곳에서 누수현상이 발견됐다. 낙동강 구간의 상태는 더욱 충격적이다. 8개 보 모두에서 물이 샌다. 상주보의 경우 콘크리트 고정보 벽면 수십 곳에서 누수현상이 관찰됐고, 우안 제방에서는 물이 솟구치듯 새자 정부가 황급히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위법과 부실이 점철된 초대형 혈세 낭비 사업, 이게 MB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한 정의다.
마침내 법원이 4대강 사업이 위법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산고등법원은 낙동강 국민소송단이 국토해양부와 수자원공사 등을 상대로 낸 하천공사 시행계획 최소 사건에 대해 정부가 국가재정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대규모 국책사업은 시행 이전에 경제성 검토 등 예비타당성 조사를 먼저 해야 하는데 정부가 이를 어겼다는 얘기다. 법원은 ‘4대강 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시킬 정도로 시급성이 인정되는 사업이라고 볼 수 없다’고 명시했다.
밀어붙이기식 ‘속도전’ 때문에 애꿎은 인명 피해도 속출했다. 사망자가 20명을 훌쩍 넘는다. 2009년 8월부터 2011년 4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공사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작업자만 해도 19명에 이른다.
4대강 공사현장, 거짓말 판치는 ‘치외법권’ 지역
대부분 안전사고였다. 법과 규정을 무시한 채 무리한 공기에 맞추기 위해 ‘속도전’을 벌인 결과였다. 대표적인 예가 굴착기 기사 유씨의 경우다. 유씨는 준설작업을 마치고 나오다가 작업용 통로가 침하되면서 굴착기가 강에 빠져 숨졌다.
현행법으로는 작업인력의 안전을 위해 작업용 통로 양쪽에 흙막이판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유씨가 일했던 현장에는 토류판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4대강 공구 전 구간에서 안전을 무시한 밀어붙이기식 작업이 밤낮으로 진행됐다.
편법도 판을 쳤다. 흙을 조금이라도 더 파내고 담을 수 있도록 굴착기의 바가지(버킷)을 불법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굴착기의 버킷을 규정보다 훨씬 큰 것을 장착하지 않으면 공사현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불법 사실을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었다. 4대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했던 한 노동자는 “경찰에 신고해도 무슨 ‘특별법’이라며 경찰이 외면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부실과 위법성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잘 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단체와 언론을 향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며 툭하면 겁박하기 일쑤다.
또 ‘거짓말’이 판치는 곳, 청와대와 대통령 측근
정부의 ‘4대강 거짓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거짓말’과 ‘감싸기’가 횡행하는 데가 있다. 바로 청와대와 대통령 측근들이다. ‘전대 돈봉투 살포’에 박희태 국회의장, 김효재 정무수석 등이 개입돼 있다는 폭로와 증언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오리발’로 일관했다.
박 의장은 고승덕 의원의 폭로가 있는 직후 기자들에게 “전혀 사실무근,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부인했다. ‘철저한 오리발’은 한 달 동안 계속되다가 그의 비서관이 검찰과 언론에 ‘양심선언’과 ‘고백’을 하자 마침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꼬리를 내렸다.
김효재 정무수석의 ‘거짓말’은 더 심했다. “그런 사실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고승덕 의원과 박 의장의 수행비서 고씨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며 대화한 사실도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그의 ‘거짓말 버티기’도 진실 앞에 무너져 내렸다. 망신만 당한 채 청와대에서 물러나 검찰의 사법처리를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청와대는 한 수 위, ‘거짓말’도 감싸고돌아
김두우 전 홍보수석의 ‘오리발’도 가관이었다. 부산저축은행 로비 의혹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청와대 흠집 내기”라며 이를 보도한 언론에 대해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금품 수수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 구속됐고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청와대의 ‘거짓말’도 꽤 단수가 높다. 측근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면 먼저 자기 식구 두둔하기 바빴다. 제기된 의혹에 대한 사실 확인보다 어떻게든 모면하려고 애썼다. 은진수, 신재민, 김해수 등 측근 비리가 터져도 되레 야당의 정치공세라며 역공을 펼쳤다.
‘거짓말’을 감싸기도 했다. ‘돈봉투 사건’의 핵심으로 김효재 정무수석이 지목되자 청와대는 “(언론과 야당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냐. 김 수석의 해명을 믿는다”고 말했다. 재차 김 수석에 대한 폭로가 이어져도 청와대는 “아직도 김 수석을 신뢰한다”며 ‘거짓말’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이기도 했다.
이번 총선과 대선, 이런 ‘거짓말’ 처단하는 처형장 돼야
4대강 사업이 위법이고 부실투성이라는 게 확인됐는데도 마땅히 취할 조치가 없다. 법원은 4대강 사업의 위법성을 인정하면서도 공정이 90% 이상 완료된 상태라서 사업 취소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결했다. 법을 어긴 건 맞지만 공사는 그대로 진행하라는 게 법원의 결정이다.
측근과 친인척 비리가 넘쳐나고 황당한 사건이 하루가 멀다고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정권에 대해 당장 마땅히 취할 조치가 없다. 현 정권에 ‘아웃’을 선언해도 어쩔 수 없다. 헌법에 의해 보장된 임기 때문에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사실상 ‘아웃’이지만 임기는 보장해 줘야 한다는 게 법의 논리다.
4대강 ‘거짓말’과 측근들의 ‘거짓말’은 그 수위나 수법에서 똑 닮아 있다.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대놓고 아니라고 윽박지르며 원색적인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정권, 심판할 수 있는 방법은 선거뿐이다.
이번 총선과 대선이 새빨간 ‘거짓말’을 처단하는 처형장이 되어야 한다
부러진 화살’과 ‘범죄와의 전쟁’의 정치학
김명호 교수의 석궁 재판 실화를 영화로 재구성한 ‘부러진 화살’(정지영 감독)이 누적 관객수 300만 명을 돌파한 데 이어 전두환-노태우 시절 부패와 비리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고발한 ‘범죄와의 전쟁’(윤종빈 감독)도 박스오피스 부동의 1위를 기록하며 누적 관객수 250만 명을 넘어섰다. 사법부의 부조리를 다른 영화와 검찰-세관 비리를 다룬 영화가 박스오피스 1위와 3위를 기록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리얼리티즘을 표방한 이들 영화의 그 어떤 요소가 이토록 관객들을 열광시키는 것일까?
대중문화에 있어서 현실과의 접목은 흥행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뿌리 깊은 나무’는 MB정권의 소통 단절 때문에 더욱 인기를 모은 측면이 컸고, 공지영 작가의 원작을 토대로 실화를 영화로 재구성한 ‘도가니’도 장애인 인권과 아동 성희롱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상황이었기에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부러진 화살’과 ‘범죄와의 전쟁’이 흥행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법조계에 대한 국민들의 냉소주의와 불신이 극에 달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재 자체가 따분해서 영화에서 다루기 힘든 부분이 있음에도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 영화를 관람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조직 이기주의와 법률 편의주의 덫에 빠져 정작 자신들의 존재기반이자 이유인 국민들을 핍박하고 무시하는 법조계의 총체적 부실을 실감 나게 지켜보면서 분노를 표출하게 되고,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것이 영화가 흥행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언론과 수구 지식인들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팩트가 사실과 다르다며 영화에 딴지를 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아니, 그렇다면 공민왕을 다룬 ‘쌍화점’과 연산군을 다룬 ‘왕의 남자’에 대해서는 왜 시비를 안거나? 역사적 팩트와 틀리잖아.
그러나 사실은 정작 이들만큼은 팩트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이승만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승만을 미화하고, 박정희에 대해서도 오로지 찬양 일색이다. 그런 자들이 팩트가 맞네 틀리네 이야기하니 도통 헷갈린다. 이처럼 자신들의 팩트 왜곡에 대해서는 정당한 ‘로맨스’라고 우기고, 다른 사람들의 팩트 재구성에 대해서는 파렴치한 ‘불륜’이라고 하니 스스로 무덤 파는 거다. 오죽하면 ‘부러진 화살’을 다룬 TV 심야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보수 측 패널들이 희화화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겠는가? (영화를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영화 전문가 없이 직급 순으로 법조인이 가장 상석에 앉은 것 자체가 코미디였다.^^)
법원과 검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권력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편리하고 활용 가치가 높지만, 이를 부당하게 행사했을 때에 막중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두 개의 상반된 측면을 갖고 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인사권, 사면권, 거부권을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사용할 경우 의회주의, 사법부 독립, 책임정치는 실종되게 되고 그 부메랑 효과로 대통령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어 사면초가에 빠지게 된다.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갖고 있음에도 가급적 이를 행사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의회를 설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MB정권는 권력이 갖는 칼날의 양면을 철저히 무시하며 역주행했다. 규제가 많을수록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방송분야와 통신분야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를 투입했고, 시대착오적인 인터넷과 SNS 규제를 도입했다. 그러면서도 황당하게도 신규 종합편성 채널을 무려 4개나 허가해주는 모순된 행동을 했다. 정보화와 과학의 시대에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를 모조리 없애고 그 수장에 과학과 통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을 앉히는 어이없는 인사까지 감행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립성이 요구되는 감사원장에 청와대 민정수석 출신을 앉히려는 파렴치한 일까지 벌였다.
그 결과 법원, 검찰, 경찰, 국세청, 대학, 언론 등 사회적 소명의식과 공공정신이 투철해야 하는 분야에 종사하는 상당수의 고위직들이 원칙과 금도가 깨지고 고삐가 풀린 ‘낙하산 인사’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대놓고 아부하고 탐욕을 드러내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세청 고위간부가 핵심 내사자료를 빼돌리고 폐기하고, 경찰 고위간부는 청와대와 핫라인을 통해 수사기밀을 실시간으로 보고하고 재가받고, 법원 수뇌부는 사건 배당을 자신들의 원하는 결과를 위해 임의 배당하고, 검찰 고위간부는 피의자 및 참고인 소환을 앞두고 정보 유출 및 출국금지 소홀로 해외도피를 묵인하고, 언론사 국회 출입기자들은 출세를 위해 야당 수뇌부를 도청하고 이를 상부에 보고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거다.
이 중, 단 한 가지만 드러나도 그 사회는 썩은 것이고 도덕성에 ‘빨간불’이 켜질 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 행위들이 MB정권 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한꺼번에 터졌으니 이것이야말로 홉스가 말한 권력기관 간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검찰과 경찰이 싸우고, 법원과 검찰이 싸우고, 국정원과 총리실이 싸우고, 검찰과 국세청이 싸우고, 청와대와 총리실이 싸우는 일들이 모두 MB정권 하에서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모든 부처들이 권력이 가지는 추상과도 같은 책임은 회피한 채로 그 파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탐욕을 노골화하고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된 거다. 그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무엇일까? 권력이 갖는 추상과도 같은 책임을 이들 모두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래야만 과도한 권력에 대한 탐욕을 억제할 수 있으며, 각자가 가져야 할 필요 최소한의 권력을 갖고 이를 책임 있게 행사하는 것으로 각자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검찰 개혁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법부 개혁, 언론 개혁, 정부 개혁, 국회 개혁, 공기업 구조조정 등이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권력을 향한 탐욕을 드러내며 자신들이 섬겨야 할 국민을 도리어 핍박하고 무시한 자들에게 엄정한 법의 심판을 들이대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들 권력을 탐한 자들에게는 정치적 심판뿐 아니라 사법적 심판이 반드시 뒤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부러진 화살’과 ‘범죄와의 전쟁’에 분노한 관객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이동관, 김종훈의 꼼수, 국민 우습게 보나?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새누리당에 입당, 강남을에서 정동영과의 ‘빅매치(?)’를 원하는 것 같다. 그의 발언, “한미 FTA 반대가 확실한 정동영과 겨루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곧 “나를 그곳에 전략공천 해 주세요”의 다름이 아니다.
이동관은 MB아바타라고 불렸다.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부터 그의 입으로 활동, 청와대 대변인, 홍보수석, 정무수석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이명박 정권의 단물을 거의 다 먹었다. 그런 그가 새누리당에 종로지역구 공천을 신청했다. 그리고 “종로를 잃으면 청와대 안방을 내놓는 것”이라며 “정운찬 전 총리가 출마하겠다면 양보할 의사도 있다"고 말했다.
이동관과 김종훈
이동관은 평생을 저널리스트로 살아온 것 같으나 실상은 ‘폴리널리스트’의 전형이고, 김종훈은 평생을 관료로 살아온 사람인 것 같으나 실상은 ‘권력형 해바라기 관료의 전형’이다.
이동관이 동아일보 기자, 정치부장, 논설위원 등일 때 행보는 권력 탐하기가 짙게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끝내 당선이 유력한 후보의 최측근으로 기용된 뒤 자신의 주군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언론 경호원과 방탄인을 자처했다. 김종훈은 외교부의 관료로 출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부 내의 요직을 지내 권력에 대한 줄 대기가 능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에 외무부에 첫발을 디딘 김종훈은 하급 외교부 직원을 거친 뒤 전두환 정권에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파견근무를 했다. 당시 조직위원장이 노태우.
하여 그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곧바로 외무부 특전담당관, 의전담당관이 되어 권력자들의 외교 의전을 책임지는 일을 했다. 그리고 또 김영삼 정권 때는 외무부 의전심의관도 했다. 김종훈의 외교부 경력 중 유독 의전 관련 경력이 많은 점, 이는 그가 어떤 정권이든지 권력자들과 매우 가까이했었다는 증거다.
김종훈은 이런 경력들을 발판삼아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부 통상교섭본부 지역통상국 국장이 된다. 오늘의 김종훈이 된 발판이다. 이어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 FTA 한국 측 수석대표, 이명박 정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아 이 협정의 처음과 끝을 책임진 관료로 남는다.
좋다. 이동관이나 김종훈의 출세(?)는 그들이 권력 줄 대기를 잘했든 아니면 능력이 출중하여 권력자들에게 발탁되었든, 지금까지의 그들 인생에 내가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다.그러나 그들은 이제 국민의 심판, 아니 정확히는 지역구 유권자의 심판을 통한 정치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정치인으로 자신들의 주관을 펼치겠다고 한 이상 나는 이제 그들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 또 그것은 응당 정치블로거인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종훈의 강남 출마 의사표명과 함께 정동영과 일합을 원한다는 발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김종훈이 만약 정동영이 전주 덕진에서 출마했다면 그런 말을 감히 했을까? 아니 정동영이 민주당 강세지역인 서울 강북권에서나 또는 관악권에서 출마한다고 했을 때도 과연 그랬을까? 천만의 말씀으로 보인다.
한발 물러나 김종훈이 똑같은 논리로 “한미 FTA를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정당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있는 관악을에 출마하고 싶다”고 발언했다면 나는 민주당에게 관악을을 이정희에게 양보하라고 과감하게 요구했을 거다. 그래서 김종훈과 이정희의 한미 FTA에 대한 진검승부를 부추겼을 거다. 이것이 내가 김종훈을 비판하는 논리다.
헌데 김종훈은 한나라당의 안방이라고 하는 강남을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소선거구제로 지역구가 생긴 이래 현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야권인사에게 단 한 번도 자리를 내주지 않은 노른자위 중 노른자위를 노리면서 감히 국민심판 운운하는 것이 가소롭다.
강남을은 공성진 같은 교수 출신도 신인으로 한나라당 간판을 달고 나가 단번에 당선된, 그것도 야당 후보와 거의 더블스코어로 당선된 그런 지역구다, 당연히 공성진은 손쉽게 2선을 했으나 비리로 낙마한 지역구가 그곳이다.
정동영은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냈으므로 당의 흥망성쇠에 무한책임이 있는 정치인이다. 따라서 그가 당의 취약지역에 출사표를 던진 것은 국회의원 한 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의 외연 확대가 더 중요하다는 선당후사 의미가 짙다. 즉 정동영은 죽을 줄 알면서 죽으러 간 것이다. 노무현이 종로에서 부산으로 갈 때 죽을 줄 알면서 죽으러 간 것과 같다.
물론 노무현이 종로에서 부산으로 갈 때 부산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강남도 예전의 강남이 아니라 분위기는 해볼 만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정동영이 강남에서 당선된다면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다고도 본다. 그 상대가 김종훈이든 아니면 새누리당 간판을 단 장삼이사든 마찬가지다. 상황이 이런데도 김종훈은 손쉽게 당선도 되고 정동영도 꺾은 ‘의미 있는 승리’를 했다는 평가도 받고 싶은, 정말 속 보이는 꼼수를 보이고 있다.
이동관도 마찬가지다. 이동관이 출마하겠다는 종로도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시행된 1988년 13대 총선 이후 딱 한 번의 16대 보궐선거에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을 뿐, 현 새누리당의 전신이었던 당들의 후보가 내리 당선된 지역이다.
이종찬이 2선(민정당 13대, 민자당 14대), 이명박이 1선(신한국당 15대), 정인봉이 1선(한나라당 16대), 박진이 2선(한나라당 17,18대). 중요한 것은 이종찬이 민정당 민자당일 때 내리 당선되었으나 야당인 국민회의 후보로는 신한국당 이명박에게, 새천년민주당 후보로는 한나라당 정인봉에게도 졌다는 사실이 종로가 현 여권의 안방이라는 증명이다.
그래서 이동관이 “종로를 내주는 것은 청와대 안방을 내주는 것과 같다”고 말했을 거다. 그렇다면 이동관은 그 안방에서 출마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주군에 대한 심판 성격을 가진 총선이므로 주군 대신 심판을 받겠다면서 자기 안방에서 출마 당선된 뒤 “민심이 우리 주군을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이는 비단 이동관과 김종훈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 새누리당으로 총선에 출마하려는 이명박 직계들도 거의 그렇다. 간단히만 살펴봐도 김희정(전 청와대 대변인) 부산 연제구, 이성권(전 시민사회비서관) 부산진을, 박형준(전 정무수석, 청와대 사회특보) 부산 수영구, 김대식(전 평통사무차장, 국민권익위 부위원장) 부산 사상구, 등이 보인다.
부산이 비록 야당바람이 불고 있다고는 하나 어떻든 한나라당 안방이다. 그렇다면 안방에서 당선되고도 ‘MB심판’ 바람을 뚫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당연히 그들도 그렇게 말하고 보수신문들도 그렇게 쓸 것이다. 꼼수의 전형이다. 특히 김대식은 전남 출신임에도 부산출마를 노리고 있음을 보면 이들의 꾬수를 알만하다.
MB의 꼼수에 ‘나꼼수’가 뜨고 있다. 이른바 ‘가카헌정방송’이란 이름으로… 하여, 앞으로 ‘가카와 그 아바타 헌정방송’이 또 나올 것 같다. 과연 언제까지 이동관, 김종훈 같은 ‘얼치기들'의 꼼수를 우리는 지켜봐야 하나? 오늘 이들의 뻔뻔함을 보고 드는 소회다.
MB아바타 '이동관'의 가증스런 출마의 변
이동관 전 청와대 수석이 위키트리 ‘소셜방송’에 출연하여 ‘정치 1번지 종로의 자존심을 지키겠습니다’라는 출마의 변을 통해 새누리당에 입당한 뒤 저울질했던 지역구를 종로로 확정하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동관 전 수석의 종로 출마의 변을 보면서 저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습니다. 한번 그의 출마의 변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이번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중심,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제 정치 생명을 걸고 당당히 승부하려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정치를 시작해서 이곳에서 정치를 끝맺겠습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강남 출마를 포기하고, 강북지역 출마를 선언한 이후, 과연 어느 곳이 제가 명분 있게 싸울 수 있는 전장인지 고심했습니다. 그 결과, 이명박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걸고 싸울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제가 젊음과 땀을 바쳤던 곳이 바로 종로라는 점에서 이곳을 택하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종로는 제가 25년간 몸담았던 언론사가 있는 곳이고, 청와대 출입기자와 청와대 근무 5년간을 합쳐 성년이 된 이후 30년간 제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87년 민주화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했고, 역대 정권의 부침을 지켜보았습니다. 종로는 대한민국의 심장입니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패배에 이어 청와대 앞마당인 종로까지 내준다면 다가올 대선에서 청와대 안방까지 내주는 참담한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
이동관 전 수석이 밝힌 출마의 변에서 자신이 언론사 기자 출신이며, 87년 민주화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했다고 밝힌 부분에서 저는 뒤집히는 줄 알았습니다. 왜인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동관 전 청와대 수석은 1985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합니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기사를 쓴 시점이 1986년입니다. 1986년에는 수습 1년 차 기자로 아무것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시점이지만, 그가 사회부 기자로 좌담회에 참석하고 발언한 기사의 제목이 ‘좌경구호, 유인물에 시민들 충격’입니다.
동아일보의 이 기사가 왜 나왔을까요? 1986년 10월28일 건국대에서는 전두환 독재 정권을 규탄하는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대식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발대식 도중에 1,500명의 전경이 최루탄을 쏘며 진입하여 학생을 고립시켰습니다.
결국, 학생들은 저항하며 밤샘농성을 했고, 31일 아침 경찰은 무려 8,000명의 진압병력과 헬기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을 전원 연행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모두 좌익사범, 빨갱이로 몰아 학생운동 사상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동관 기자가 참석한 좌담회는 결국 이런 전두환 독재정권의 좌익사범, 빨갱이 타령을 위해 날조된 거짓 기사, 기획 기사였던 것입니다. 이런 기사에 이동관 기자가 참석하여 기사를 낸 것이 그가 민주화 투쟁을 위해 뛰어다녔던 시절이라고 했던 시점에 나온 기사입니다.
수습 1년 차 기자가 무엇을 알겠느냐고 반문하는 분을 위해, 1987년 이동관 기자가 동아일보 1면에 올린 기사를 보여 드립니다.
“노사분규 확산 격화, 전 업종 타격”
“타결, 새 농성, 분규 끝 안 보여”
제목만 보면 노조가 노동운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 경제도 마비되고, 나라꼴이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87년의 노동운동은 그냥 단순한 노동운동이 아니었습니다. 6월 민주 항쟁이 전 국민에게 확산한 시점으로, 1987년 노동운동은 민주화를 통한 노동 기본권을 찾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1987년 민주노조운동은 현재까지 이어진 노동자들의 노동 민주화를 만들어준 분수령이 되었던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동관 기자는 동아일보 1면 기사에 노사분규 때문에 못 살겠다는 기사를 올립니다.
도대체 이동관 전 청와대 수석이 1987년 민주화운동을 최루탄 맞으며 취재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노동자와 국민의 민주화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독재자의 입을 대변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성장한 이동관 기자는 노무현 참여 정부 시절 논문 부조리로 문제가 된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 사태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이런 사태를 유발한 이유가 노무현 대통령의 오기와 소통 부재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했던 이동관 논설위원은 2007년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 공보 특보로 임명되고, 2007년 17대 대통령 인수위원회 대변인을 거쳐 2008년 대통령 대변인, 대통령 홍보수석 비서관으로 임명됩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의 홍보와 언론을 담당하며, MB정권의 얼굴마담이 된 이동관 전 수석은 과연 떳떳했을까요?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아 농지법을 위반한 데 이어, 농지 구입 과정에서 가짜 농업경영계획서를 낸 의혹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보도하려던 국민일보 기사를 그는 외압을 통해 막았었고, 그는 이 과정에서 ‘내가 잘못했다, 이번 건을 넘어가 주면 은혜를 갚겠다’며 회유까지 했었습니다.
언론인 출신으로 이동관 전 수석은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익명 보도’로 유명합니다. 자신은 감추고 정보를 슬쩍 흘려주고, “내가 원래 했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왜곡되었다, 기사가 잘못 쓰인 것이다.”라고 발뺌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또한 청와대에 있으면서 언론사를 대상으로 얼마나 고소를 자주 했는지, ‘고소의 달인’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선전은 특정한 정치 목적에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감정에 호소하고 필요하면 거짓말도 동원하는 부정적 방식이다. 반면 현대 민주국가에서 말하는 홍보는 정확한 정보 제공을 통해 호의적 여론을 조성한다는 긍정적 의미가 담겨 있다…(중략)…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는 일이라며 경제를 챙긴다는 이미지 만들기에 거부감을 보인다’며 '홍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참여정부는 아무래도 선전과 홍보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홍보의 출발점은 진실이다.” (이동관 논설위원의 2005년 ‘선전과 홍보’ 칼럼)
홍보의 출발점은 진실이라고 강조했던 이동관 논설위원이 청와대에 가더니 진실은 감추고 국민을 속이는 사기질과 언론통제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는 진실보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예뻐해 주는 사람을 위한 ‘충성포장’을 잘해 귀여움 받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1997년 이동관 기자는 청와대 출입기자가 됩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청와대를 취재할 수 있는 기자답게, 정치부장, 편집국장, 정계진출로 가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동관 동아일보 청와대 출입기자가 1999년 동아일보 1면에 올린 기사의 제목을 보면 낙선운동이 시민의 이기적 행동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써져 있습니다.
여기에 ‘이익집단까지 가세땐 선거혼탁 부추길 우려’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깃들여져 있습니다. 과연 낙선운동이 시민의 이기적 행동이고 선거혼탁을 부추길 나쁜 행동입니까?
어쩌면 그는 청와대 출입기자로 된 시점부터 정치를 향한 그의 욕망을 슬슬 내비치며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에게 기자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가는 출세의 시작일뿐이지,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기자정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2012년 4·11총선에서 그를 향한 낙선운동을 1997년에 미리 비난한 그의 정치적 탐욕의 지혜는 인정해줄 수 있지만, 저는 이런 사람들이 청와대에서 국회로 자리를 옮기고, 청와대가 이들의 안방으로 계속 남는 것은 절대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원조를 아십니까
이명박 정부는 집권 후 방송장악을 위해 그 첫 타깃으로 KBS를 지목하고는 당시 정연주 사장을 내쫓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현 정권은 방송통신위원회, 국세청,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을 총동원해 그에게 배임죄를 뒤집어 씌워 파렴치범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정 전 사장은 2008년 8월 19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배임)’으로 기소되었고 결국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5개월이 흐른 지난달 12일, 대법원은 그에게 최종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정 전 사장은 그간 자신에게 덧씌워졌던 배임 혐의를 말끔히 벗었습니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지난 2009년 9월부터 <오마이뉴스>에 ‘정연주의 증언’이란 제하의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그 내용은 그가 이명박 정부 들어 KBS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담담히 그려낸 것으로,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의 ‘KBS 장악사(史)’라고 하겠습니다.
정 전 사장은 지난 2월 7일 자 <오마이뉴스>에 ‘정연주의 증언’ 제73화를 실었는데 그 제목이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부끄러웠습니다/MBC-KBS 후배님, '분노의 화살'이 되어야”였습니다.40년 전, 취재차 모교를 찾은 그가 ‘개’와 동급 취급을 받았으니 그 심경이 과연 어떠했으리오.
“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72년 10월 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유신헌법’을 공포했습니다. 이후 세상은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돼버렸습니다. 국회가 해산되면서 모든 정치활동은 중단됐고, 비판자들에겐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언로가 막혀 세상은 그 생생한 실상을 알지 못했습니다. 야당도 언론도 침묵하던(혹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그나마 목소리를 내는 곳은 대학뿐이었습니다. 20대 신참기자였던 그는 모교의 데모 취재를 위해 모처럼 모교를 찾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사건기자로 대학 데모를 ‘취재’했습니다. 말이 ‘취재’지 기사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크낙새 한 마리 나타났다고 1면 머리기사로 다루면서 데모 기사나 억울하게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신문사 앞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와 “잠에서 깨어나라”고 외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모교에서 데모가 있었습니다. 좀 늦게 현장에 갔더니 데모는 이미 끝나고 학생들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농성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성명서도 얻고, 이야기도 좀 들어보려고 농성장에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농성장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개와 기자는 출입금지’.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부끄럽고, 기자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분노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 것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동료·선배들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분노가 쌓여 마침내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게 되었습니다. 자유언론을 되찾아 오기 위해, 아니 그 이전에 무엇보다, 다 망가져 버린 우리의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
40년이 지난 지금, 국민들로부터 쫓겨나는 MBC 기자들
정 전 사장이 이 글을 쓴 계기는 40년이 지난 지금 바로 그러한 현상이 MBC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11월 하순 무렵, 한미FTA 비준안 날치기 처리에 반발한 시민들의 시위현장을 취재하던 MBC 기자와 카메라 기자들이 현장에서 시위대들로부터 욕설과 함께 취재거부를 당한 것입니다.
이유는 MBC가 현 시국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극한 이념대립을 보이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진보매체 기자들은 보수단체 집회에서, 반대로 보수매체 기자들은 촛불집회 등 진보단체 집회에서 취재거부를 당한 적은 더러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MBC를 향한 시민들의 비난이나 취재거부는 그 수준을 넘고 있습니다. 이성재 MBC 카메라 기자는 MBC 인트라넷 '자유발언대'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지난 25일(작년 11월 25일) 취재한 선후배들이 가져갔던 카메라가 밀쳐지고 트라이포드는 걷어차였다”며 “이제 우리 몸이 걷어차이고 맞는 일만 남았다”고 개탄했습니다.
이 기자는 또 “MBC 로고가 새겨진 ENG카메라를 들고는 도저히 취재가 불가능해 아예 로고가 없는 6mm 소형캠코더를 들고 가서야 근접 취재가 가능했고, MBC 차량은 시민들의 항의 때문에 근처에 주차하지도 못해 아예 시청에 숨어(주차)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기자 글에 현아무개 카메라 기자도 답글로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했는데, 그의 입에선 ‘자조’와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최근 취재현장을 가면) 카메라 뒤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하나같이 정곡을 찔러 옵니다. ‘식충이들 밥벌이 하러 왔나?’라는 말에는 도저히 변명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MBC에, 그토록 바라던 카메라 기자가 되어 최소한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왔는데, 구악질을 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MBC 카메라를 지니고 있는 제가 부끄러워질까요? 자조 섞인 한숨만 계속 내쉽니다. 5공 때처럼 이제 대놓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나의, 우리의 MBC가 변해가는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 아무 말도 못하고 지내는 현실이 너무도 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신문사를 제 집 드나들 듯한 보안사·안기부 요원들
MBC 기자들이 취재거부를 당하는 것은 1987년 이후 25년 만의 일인데 거기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용마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면, MBC는 청와대 내곡동 사저, 10·26 보궐선거, 한미FTA 날치기, < PD수첩 > 판결, 반값 등록금 문제, KBS 도청의혹 등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김재철 사장이 ‘투입’된 뒤부터는 정권의 압력에 굴종했던 과거로 퇴행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자들은 한직으로 내쫓겼으며, <100분토론>은 자정 이후 시간대로 밀려났고, <뉴스 후>는 폐지되었습니다. 또 MBC의 간판프로인 < PD수첩 > 역시 솎아내기 인사와 잦은 아이템 검열로 무력화되었습니다.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언론은 수차례에 걸쳐 탄압과 굴종을 강요당했습니다. 그에 저항하는 언론인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에 끌려가 두들겨맞거나 아니면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언론사 통폐합, 언론인 강제해직 등 사상 유례 없는 언론탄압을 자행한 5공화국 말기의 일입니다.
당시 보안사(현 기무사 전신)나 안기부 요원들은 신문사나 방송사를 마치 제 집 드나들 듯하면서 신문사 편집국의 동향을 체크하고 기자들을 감시하였습니다(압력의 강도나 방식은 다르지만 제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하던 2000년대 중반에도 국정원 ‘조정관’들이 언론사를 출입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간부들을 만나 압력을 넣기도 하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언론사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를 참다못한 몇몇 신문사 기자들이 편집국 입구에 팻말을 하나 써서 붙였습니다.
‘기관원 출입금지’.
기자가 취재원들로부터 불신을 당해 취재현장(혹은 출입처)에서 취재거부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기자들이 특정 외부인의 신문사 출입을 금지시킨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거부 대상은 다르지만 누군가를 ‘출입금지’ 시킨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과 개는 출입금지” 간판…. 이토 통감 죽자 ‘잔치’
그렇다면 우리 언론계에서 ‘ㅇㅇㅇㅇ 출입금지’라고 처음 써 붙인 경우는 언제, 어떤 일로, 또 어디서였을까요? 즉 ‘원조’는 어디일까요? 결론부터 앞세우면 구한말 항일지인 <대한매일신보>가 바로 원조랄 수 있습니다.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대한매일신보>에서 있었던 비화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영국인 베델이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 15세이던 1888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상업에 종사하던 베델은 1904년 3월 4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으로 임명돼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우연히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4월 14일 일제의 방화로 경운궁(현 덕수궁)이 불타자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송고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데일리 크로니클> 역시 친일성향의 매체였던 탓에 이 일로 선생은 특별통신원에서 해임되었고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데 베델은 영국이나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채 한국 땅에 남기로 정했습니다. 그러고는 당시 항일지식인인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새 신문 창간에 뜻을 모으고는 그해 7월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는 선생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 이름을 하사하였고 그 밖에 여러 가지 편의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 항일지로 불렸습니다. 국한문판, 한글판은 물론 자매지로 영문판 <The Korea Daily News>도 같이 발행했는데, 3종을 합해 발행부수가 1만 부에 달하는 당시 최대의 신문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가 짧은 기간에도 이 같은 급성장을 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발행인인 베델의 국적이 영국이었기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고, 따라서 <대한매일신보>는 언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베델은 이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실었으며, 1907년 헤이그 특사 중 이준 열사가 헤이그 현지에서 순국하자 이를 호외로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로써는 금기를 깬 파격적인 보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나 정보원들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는 어느 날 사옥 앞에 이색 간판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일본인과 개(犬)는 출입금지’.
‘을사늑약’ 체결로 사실상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그 시절에 이런 간판을 신문사 정문에 내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일제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편집책임자로 있던 양기탁 선생은 사옥 2층에 태극기를 내걸고 만세를 부르며 축하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취재 현장에서 ‘개’ 취급당하는 기자들, 더 이상은 없기를
그러나 이후 베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고 자금난 등으로 신문사가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이 같은 기개는 결국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1909년 5월 1일 베델이 고문 후유증으로 서거한 후 친일 성향의 인물들로 사장이 교체되었고, 또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국권이 피탈되자 결국 ‘대한’ 두 자를 떼어내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베델은 37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생애의 마지막 5년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죽음에 앞서 베델은 유언을 한 마디 남겼는데 그 내용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조선의 백성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부음을 전해 들은 고종 황제는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천하박정지여사호, 天下薄情之如斯呼)”라며 애통해했습니다.
1968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는데, 고인의 묘소는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 초입에 마련돼 있습니다. 한동안 그를 잊고 지내다가 그의 사후 90년이 돼서야 민간 차원에서 기념사업회를 꾸려 매년 5월 초에 추모행사를 열면서 '은인'에 대한 체면치레를 겨우 하고 있을 뿐입니다.
최근 이근행 MBC 해직PD와 노종면 YTN 해직기자 등이 주도하여 제작한 <뉴스타파>가 언론계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지난달 27일 첫 방송에서 지난 10·26 서울시장 재선거 때 빚어진 투표소 변경내역 집중취재를 비롯해 최근 사퇴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국회 위증 의혹, 현 정부가 정권 말기에 거액의 무기 도입을 추진한 배경 등에 대해 집중보도해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MBC 노조는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9일 첫 방영한 바 있습니다. 이는 MBC의 기존 <뉴스데스크>와 차별화 된 것으로, 그동안 방송되지 못한 정부비판 리포트들을 대거 담아 보는 이의 주목을 끈 바 있습니다.
끝으로, 이제부터라도 MBC가 언론 본연의 역할을 다해주길 기대하며, 아울러 다시는 MBC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개 취급당하며 쫓겨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조선일보 횡포를 두고 정치를 어떻게 바로 할 수 있겠는가”
- 91년 <주간조선> 허위보도 명예훼손 소송과 정언유착의 단절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이나 정당, 정부는 언론과 긴밀한 관계를 맺길 원한다. 정치권력은 할 수만 있다면 언론을 통제하거나 장악하고 싶어 한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때는 물리력을 동원해 언론과 언론인들을 직간접 통제했다. 이 땅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언론들은 친일이란 오욕의 굴레를 쓰고,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에 굴종해 나팔수 노릇을 한 전력이 있다. 뜻있는 기자들의 민주언론 요구는 창살 아래 갇히거나 거리로 내몰렸다. 한국 언론은 민주화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전처럼 정치권력의 강압에 의한 통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언론은 시장권력과 결탁해 자본을 축적하며 스스로 권력이 되어 버렸다. 언론은 여론 형성과 사회적 의제 설정을 통해 영향력을 갖는다. 그 영향력으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감시하고, 견제한다. 언론이 시민의 권력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 땅의 보수언론들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파적으로 보도해 반대세력을 공격한다. 거기에는 사실과 진실 추구보다 다분히 정파성이 개입된다. 정치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이 답이다. 과거의 보수언론들은 독재권력과 유착하고, 특혜를 받아 성장했다. 요즘에도 권력화한 언론과 정치권력 간엔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진다. 정치인으로서는 언론사와 그 경영진이나 간부, 기자들과 합법적 수단보다 ‘캐시 앤 위스키’를 통한 유착에 더 매력을 느낀다. 정치인이 언론과 싸워 득 될 게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정-언 유착이 똬리를 튼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부당한 횡포에 맞선 정치인이었다. 언론과 갈등이 표출된 사건을 통해 정치인 노무현의 언론관을 돌아본다. (노무현재단) |
“20년 정치를 하는 동안 언론과는 늘 불편한 관계였다. 정치인과 언론은 어느 정도 관계가 불편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신문들은 ‘특별하게 불편한’ 관계였다. 그들은 몇 백만 부의 발행부수로 표현되는 막강한 미디어의 힘으로 나를 공격했다. 나는 정치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만 가지고 싸웠다. 사실의 힘, 논리의 힘, 진실의 힘만으로 싸웠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믿었기에,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서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정치인이었다. 초선의원 시절인 91년에는 거대 언론사인 조선일보와 명예회복 소송까지 벌였다. 조선일보 소송은 잘못된 보도로 인한 법적 피해구제 차원을 넘는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작문으로 판정된 문제의 기사
90년 3당합당을 거부한 정치인 노무현은 작은 민주당을 꾸려 야권 통합운동에 나선다. 그리고 91년 9월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출범한 통합 민주당의 첫 대변인을 맡는다. 당시 언론들은 야당 대변인 인선을 알리는 기사를 내보냈다.
헌데 유독 <조선일보>(91년 9월 17일 자)에 실린 노무현 의원 인물평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1단의 짤막한 기사에 「고졸 변호사 … 상당한 재산가」란 발문이 뽑혔고, 「의원직 사퇴서 제출 촌극을 빚는 등 지나치게 인기를 의식한다」거나 「개인 요트를 소유하는 등 상당한 재산가」등의 표현을 써서 정치인 프로필 기사치고 이례적으로 부정적 인상을 주는 기사였다.
기사에서 ‘개인 요트 소유’와 ‘상당한 재산가’는 사실이 아니었다. 노무현 의원은 바로 해명서를 만들어 언론사에 돌렸다. “82년경 소형 요트를 취미로 탄 적은 있으나 개인 요트를 가지고 있지 않고, 재산가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조선일보는 자매지 <주간조선>(91년 10월 6일 자)을 통해 「노무현 의원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싣는다.
<주간조선> 기사는 1년 전부터 떠돌던 악성 루머를 전제로 작성된 것이었다. 기사에는 「노무현 의원이 이재에 밝아 재산이 상당하고, 인권변호사 역할은 과장되어 있으며, 요트 타기를 즐기고, 노사분규 중재과정에서 재미를 보았다」고 되어 있었다. 노무현 의원은 기사 내용을 조목조목 반반했다. 이어 11월 12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조선일보를 상대로 ‘손해배상 및 사죄광고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피고는 조선일보사와 안병훈 편집인, 기사를 쓴 우종창 기자였다. 원고 측 소송 대리는 박용일·최일숙 변호사가 맡았다. 소장에는 “조선일보가 취재를 통해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노무현 의원이 마치 상당한 재산가이고,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활동이 상당 부분 거짓이며, 노사 양측으로부터 돈을 받아먹는 부도덕한 정치인, 심지어 부동산 투기까지 했다는 인상을 주어 정치적 이미지와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 제기 이유를 밝혔다.
소 제기 1년 뒤인 92년 12월 4일, 법원(재판장 이진영 부장판사)은 “명예훼손이 명백하다”며, “조선일보는 노무현 전 의원에게 2천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한다. 그러면서 조선일보의 “언론자유 보장을 위해 공공의 이익과 관련한 보도는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면책된다” 라는 주장에 대해 “기사 대부분이 진실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진실이라고 믿도록 뒷받침할 만한 자료로 작성됐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한 마디로 근거 없는 사실들로 나열된 ‘작문’이란 거였다.
그렇다면 조선일보는 왜 이런 악의적인 허위보도를 했을까? 노 대통령은 후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기자에게 조그만 인간적 호의만 있어도 진위를 확인하고 지나친 표현을 삼갔을 것이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배경으로 조선일보에 밉보인 ‘괘씸죄’를 지목했다.
조선일보에 밉보인 괘씸죄?
소 제기 당시 <월간 말>(91년 12월호)은 이 사건을 취재 보도한 바 있다. <월간 말>은 노무현 의원 인터뷰를 통해 “주간조선 기사는 조선일보가 야권통합 기사 때 낙종한 것과 그해 3월경 조선일보 종로보급소 배달소년들의 권익 싸움에 대해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복인 것 같다”고 밝혔다.
그게 발단이었을 수 있으나, 조선일보의 행태를 보면 그 이면의 분석도 가능했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대중적 인기를 얻어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비주류 정치인을 그대로 두고 볼 조선일보가 아니었다(이런 분석은 <월간 말>이 우종창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조선일보는 ‘색깔론’ 등 안보상업주의를 이용해 신문 부수를 늘렸고, 수구보수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검증’ 칼날을 휘둘러왔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공정한 심판자 역할보다 영향력을 앞세워 킹메이커를 자임하며 정치인들을 줄 세웠고, 엇나가거나 자기편이 아니면 기사로 조졌다.
<월간 말>에 따르면, 소 제기 후 조선일보 측은 민주당 지도부에 ‘노무현 의원을 대변인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압력을 넣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출입기자를 통해 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야권통합을 비판하는 기사로 조지겠다’고 협박했단다. 이제 막 출범한 통합야당이 조선일보와 싸워봤자 손해 볼 게 뻔했다. 그래 당 지도부는 노무현 의원에게 ‘타협’을 권유한다. 이에 대해 당시 노무현 의원이 밝힌 생각이다.
“내가 정치를 한 것은 강자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가 한 정치인을 공략해 그 정치인의 정당생활을 어렵게 한다면 그것은 부도덕한 행위다. 조선일보처럼 부도덕한 언론과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면 누구도 정치를 바로 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상처를 입을 각오를 하고 이런 악의적인 언론의 횡포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된다. 내가 정치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 상처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정치인이라도 이로 인해 조금이라도 피해를 덜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노무현 의원은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1심에서 승소했다. 승소 후 조선일보사 사장과 해당 기자가 사과했고, 소는 취하됐다. 하지만 승소 사실을 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정정과 반론에 인색한 한국 언론계의 단면이었다. 그런 가운데 잘못된 보도로 실추된 이미지나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후 선거 때마다 <주간조선> 기사는 정치인 노무현을 인신공격하는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 첫 입성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정치 초년생이 언론의 관심을 받는 것은 더없이 행운이었지만, 초점은 온통 입지전적 성공담뿐이었다. 그 생각을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청문회 이후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인터뷰 요청이 봇물 터지듯 들어왔다. 정치인으로는 매우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나의 이야기를 입지전적 성공담으로만 다루고 있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번번이 외면해 버렸다”
이런 불만이 있었으나, 언론은 민주화운동가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의 정치 초년생에게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88년 12월 26일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연설한 내용에 대한 언론의 왜곡보도에 항의하다가 언론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했다(사료이야기 “여러분, 반드시 승리하십시오!” 참조).
89년 3월에는 파행을 겪던 청문회에 한계를 느끼고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동정적 여론이 일었으나 일부 언론은 ‘소영웅주의’로 몰아갔다. 그해 연말 국회에서 전두환 씨의 청문회 증언 아닌 일장연설에 야당의원들이 거칠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부당한 지시에 반발해 명패를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언론들은 ‘자질’을 거론하며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정치를 하면서 언론의 생리에 무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고백했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부터 언론보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독재정권을 비호하고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재도언론들의 보도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특히, 언론들이 노사분규 과정에서 자본의 편만 들거나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데 불만이었다.
민주화운동가 시절 언론에 대한 생각의 편린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있다.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 진상조사에 관여했다가 구속 당시 검찰이 제기한 범죄사실에 대한 ‘항변서’ 말미에는 언론의 보도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노사분규 현장에는 그 분규의 원인이 제일 첫째의 문제이다. 그다음은 장차 원만한 수습을 위하여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론은 어느 것을 했는가? 적어도 공정한 보도라도 했어야 한다. 왜곡보도는 구체적으로 어느 사실의 문제도 그렇거니와 자구 하나씩만 슬쩍슬쩍 끼워 넣어 전체 분위기의 흐름을 왜곡된 방향으로 몰아가는 데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우사건 보도에 갑자기 민민투의 주장까지 갖다 붙였다. 억울하게 사람 죽은 데 대한 안타까움도, 분노도 전혀 표시하지 않고.”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제도권 보수언론들에 대한 문제의식은 계속됐다. 다음은 89년 부산 동의대 사태 당시 <노동문학>(89년 6월
호)이란 잡지에 쓴 ‘두려운 것은 패배가 아니라 패배주의이다’라는 칼럼 중 일부다.
“나는 ‘동의대 사태’에 대한 중앙 일간지의 사설을 보며 엄청난 왜곡과 과장을 역겹게 지켜봐야만 했다. 재단의 비리가 문제시되었을 때 문교부에서 충분히 조사할 의무와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방치하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공권력을 동원해 무모하게 진압한 점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도 없고, 심지어 감금된 전경을 태워 죽인 것인 양 써 놓은 작자들까지 있었다. 그 이후 단 한 마디 사과도 없이 말을 바꾸는 이들에게 과연 지식인으로서의 양식이 있는가 조차 의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론의 왜곡과 진실보도에 대한 외면이 노동 쟁의에 대해선 더더욱 극심하다는 것은 국회 노동위원회에 들어와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언유착 고리를 끊다
그랬다. 초선의원 시절 국회 노동위 소속으로 정치활동의 많은 시간을 노사분규 현장에서 보냈기에 노동쟁의를 전하는 언론들의 왜곡보도와 편파보도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정치를 하면서 이후 언론관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91년 조선 소송은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하면서 잘못된 보도에 맞서고, 언론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또한, 정치인으로서 언론과의 유착 고리를 스스로 끊어내고, 정-언관계의 정립을 고민하게 한 출발점이었다.
증명되지 않은 사실에 의문을 갖는 것은 국민의 권리
대기업-중소기업 순이익률 격차가 3배 이상 벌어졌다. 삼성·엘지·현대차·에스케이 4대 그룹의 매출액(2010년 제조업 기준)은 463조 원에 이른다. 4년 전인 2007년 말보다 63% 급증했다. 금융위기 여파에도 전체 상장사 평균 매출증가율(44%)을 크게 웃도는 성장을 한 것이다. 사업 확대와 인수합병으로 덩치가 커진 만큼 일자리도 많이 늘었을까? 4대 그룹의 지난해 말 임직원 수는 50만 4000명이다. 4년 전보다 5만 8854명, 13.2% 늘었다. 매출 신장세에 견줘 5분의 1 수준이다. 그룹별로는, 삼성이 7.8%, 현대차가 12.3%, 엘지가 33.7% 증가했다. 에스케이는 6.2% 줄었다. 재벌 그룹의 매출이 아무리 늘어도 고용은 좀체 늘지 않는다는 ‘고용 없는 성장’의 좋은 사례다. 재벌 그룹의 비대화는 오히려 고용의 80% 이상을 책임지는 중소기업의 입지를 좁히면서 청년실업과 양극화를 부채질 한다. 4대 그룹이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부가가치 기준으로 20% 안팎에 이른다. 그러나 고용의 규모는 전체 2424만 4000명의 2.1%에 불과하다. 4대 그룹이 신규로 만들어내는 일자리도 100명 중 5.9명에 그친다. 4대 그룹의 경제력은 급속히 커지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고용 창출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신문> |
2000년대 초부터 재벌총수들은 투자와 고용 계획을 앞다퉈 발표했다. 재벌 그룹들이 해마다 대규모 투자·고용 계획을 내놓고 전경련이 발표한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와의 만남이 이뤄질 때마다 국민들에게 투자와 고용 확대를 ‘선물’한다. 전경련은 지난해에도 30대 그룹의 신규채용이 12만 4000명, 투자규모는 114조 8000억 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채용 규모는 발표된 수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투자 활성화를 명분으로 권력이 재벌과 손을 잡는 명분만 제공했을 뿐이다.
물가는 오르고, 월급은 고정 되어 있고, 고용은 불안하며, 삶의 질은 계속 저하되고 있다. 가정의 살림 규모는 계속 축소하고 있어 이제는 쓸 돈이 없다. 반면, 재벌이 쌓아놓은 돈은 곳간에 넘쳐난다. 돈은 씨가 마르고 돌지 않는다. 지난 5년간 부자감세로 대기업등은 100조의 이익을 보았지만 가진 자와 재벌등은 감세 만큼 투자하지도 않았고, 고용을 늘리지도 않았다.
총선과 대선의 해를 맞이하여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겠다고 각 정당은 말하지만 보편적 복지 실현에 따른 효과를 언제나 볼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서민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희망은 너무 멀리 있다. 대형할인 마트가 들어오면 사방 500미터의 재래 상권이 초토화 된다고 한다. 이젠 전국에 꽉 들어차서 들어 설레야 들어 설 곳도 없다. 골목에 있는 두부공장, 빵집까지 손을 댄 대기업들에게 ‘오블리스 노블리제’는 강 건너 먼 나라 이야기이다.
대통령은 일만 생기면 재래시장에 가서 국밥 먹고, 어묵 먹는 쇼를 하고 온다. 그의 발걸음에 서민이 죽고, 마음까지 상처를 받는데도 ‘뼛속까지 서민’이라고 사기를 친다. 이제는 그와 함께 한 세상을 살아 주는 것만도 그에겐 보은이다.
속이 쓰린 것은 정치인이나 국민들이나 매 한가지이다. IMF를 가져온 김영삼 때문에 김대중이 제대로 정치를 못하였고, 이명박이 워낙 개판을 쳐 놓아 다음 정부도 나라 살림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거의 하느님 정도는 와서 대통령을 해야 할 듯싶다.
유럽 경제위기와 내수경기 부진, 고물가에 손에 쥐는 돈이 줄자 서민들이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다. 한쪽은 얼어 죽고 다른 한쪽은 더워 죽으니 살맛도 없고, 뛰다 죽을 노릇이다. 중산층이 무너져 하층민이 되었고, 그들의 삶은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이명박 때문이라 욕하기에도 너무 망가져 버렸고, 너무 지쳤다.
새누리당이 현역의원들을 상대로 총선 관련 여론조사를 했다가 결과를 모두 폐기했단다. 왜 돈 들여 한 조사를 폐기할까? 친 박근혜 계 의원 다수가 공천 배제 대상인 하위 25%에 포진했기 때문이다. 여론 조사 결과까지도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에게 불리하면 민의 마져 포기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라 살림을 어떻게 맡길 수 있겠는가? 이제는 더 나아가 여론 조사 방법을 바꿔서 다시 한다고 한다. 참 웃긴다.
총선을 향한 정치 전쟁이 시작되었다. 총선에게 대패할 것 같다며 엄살부리는 새누리당의 고령자와 다선의원들은 아직도 하산하지 않고 “경륜이 필요한 것 아니냐?”며 살아날 곳을 찾아 기웃거린다. 야당의 한쪽은 이젠 차려진 밥상이라고 축제 분위기이고, 다른 야당은 절호의 찬스가 왔으니 한번 해보자며 의석수 가지고 씨름을 한다.
그들이 무엇을 향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얼굴 파는 사람, 언론을 등에 업은 사람, 무엇이 되기 위해 출마하는 사람, 내용은 없는데 과대 포장하는 무리들, 시민은 없고 금배지 야욕만 있는 사람, 잘못 뽑으면 또다시 4년이 고통이다. 정치인들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절대 죽지 않고 서민만 죽어 나가니 문제이다.
인사는 만사라는데 이명박의 인사는 능력과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님을 향한 충성도’이다. 권력의 충성도가 인사의 원칙이 되어 버렸다. 불행의 시작이고 끝이다. ‘가카’의 충성도에 ‘이의’가 있거나 ‘반대토론’을 하지 않으니 제대로 국정이 돌아갈 리 없다. 어처구니 없는 인사에 국민이 불행이다.
오늘도 공무원과 권력기관과 정치인들은 출세와 만수무강을 위해 이명박을 빨아준다. 정부의 사건 사고에는 언제나 정치적 복선이 깔려있고, 은폐와 조작은 보이는데 증거는 부족해 보인다. 결국, 부정과 부패가 온 사회를 장악할 수 밖에 없으니, 국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 볼 수 밖에 없다. 증명되지 않은 사실에 의문을 갖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MB정부에게는 공적 업무를 수행할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다.
무지한 ‘박근혜 새누리당’, 뭘 알고나 하십시오/새누리당 ‘골목상권 보호대책’, 한미 FTA와 정면충돌
야권의 대표들이 한미FTA 폐기 의지를 담은 서한을 미국 대통령과 상하 양원 의장에게 발송한 것을 놓고 말들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를 겨냥해 무슨 ‘역심판론’ 같은 것을 제기한 모양새다.
박 위원장은 “(야당이) 한미FTA가 그토록 필요하다고 강조하고서는 이제 와서 정권이 바뀌면 없던 일로 하겠다는 데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서 “한미FTA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정치권의 행동이나 말은 책임성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뒤질세라 이명박 대통령도 거들고 나섰다. 이 대통령은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게 한미FTA”라며 “세계가 경쟁하고 있고 모두가 다 미국과 FTA를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발효도 하기 전에 폐기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화 시대에, 과거 독재시대도 아니고 외국 대사관 앞에 찾아가서 문서를 전달하는 것은 국격을 매우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예의 저 ‘국격’ 타령이다. 한미FTA에 관한 한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이 대통령 사이에 ‘찰떡공조’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국내법도 아닌 국제조약마저도 ‘날치기’ 처리하는 것은 ‘국격’을 상승시키는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한 행위에 대한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따져 물어야 할 일인지 도무지 우리로선 알 턱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국격을 추락시킨 행위에 대해 대다수 국민 또한 끝까지 책임을 묻고 싶은 심정이다.
“대형마트 진입규제, 한미FTA 충돌없다”… 과연?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새누리당이 내놓은 이른바 ‘골목상권 보호대책’이란 걸 보면 한마디로 그 어처구니 없음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13일 새누리당은 대형마트와 SSM(기업형 슈퍼마켓)의 지방 중소도시 신규 진출을 5년간 금지하는 방안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 개정안을 추진키로 했다 한다. 이런 내용의 ‘중·소상공인 보호 대책’을 발표에 따르면, 신규진출이 금지되는 중소도시의 기준은 인구수로 30만 명 이하가 해당되는데, 이 같은 기준에 따르면 전국 82개 도시 가운데 50개와 전체 군(郡)이 대상이 될 전망이다.
새누리당은 또 이미 중소도시에 진입한 대형유통사에 대해서는 최근 도입된 ‘심야 영업(오전 0~8시) 제한조치’ 적용에 이어 지방자치단체 결정에 따라 월 최대 4일까지 강제휴무일을 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김종인 비대위원은 “이번 조치가 자유무역협정(FTA)에 저촉할 수 있다는 논란이 나올 수 있는데 외국기업, 국내기업에 균형하게 규제를 가하는 것인 데다 외국업체가 국내의 30만 명 미만인 도시까지 진출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내외국민 간에 차별을 금지한 ‘내국민대우’ 조항(한미FTA 제12.2조)만 놓고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미FTA 제12.4조 ‘시장접근’을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제12.4조 시장접근 어떠한 당사국도 지역적 소구분에 기초하거나 자국의 전 영역에 기초하여 다음의 조치를 채택하거나 유지할 수 없다. 가. 다음에 대한 제한을 부과하는 것 |
한미FTA 제12.4조에 따르면 한미양국은 전국 또는 그 ‘지역적 소구분’(regional subdivision) 곧 전국의 시·군·구 등과 같은 하위 단위 어디서건 ‘서비스 공급자의 수’에 제한을 부과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시장접근과 관련된 의무(제12.4조)’는 ‘내국민대우(제12.2조)’, ‘최혜국대우(제12.3조)’, ‘현지주재(제12.5조)’와 더불어 협정문 제12장 서비스무역상의 ‘4대 기본의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구수 30만을 기준으로 전국의 중소도시 50개와 모든 군에 외국 유통업체의 시장접근을 제한하는 것은 협정문 ‘제12.4조 가항 1)호’에 상충될 소지가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대형마트 심야영업 제한 조치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이 검토하고 있는 월 최대 4일까지의 강제휴무일제 역시 ‘제12.4조 가항 3)호’상의 ‘서비스 영업의 총수’ 제한 금지 조항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소도시에 진입하기 위해 투자 의향을 밝힌 미국의 어떤 유통업체가 새누리당의 유통법 개정안을 협정의무 위반으로 투자자-정부 중재제도(ISD)에 의거 세계은행에 제소할 가능성도 당연히 높다.
말하자면 이 개정안으로 인해 전국 82개 시 가운데 50개, 그리고 전국 모든 군이 ISD 대상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새누리당은 날치기할 땐 언제고 이제 총선을 앞두고 표가 아쉬우니 전국의 수많은 시·군을 ISD 구덩이로 몰아넣는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새누리당이 추진하고 있는 유통법 개정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 시행 중인 유통법상의 전통상업보존구역제도에 따른 입점제한 제도, 상생법상의 사업조정제도 역시 한미FTA와 상충될 여지가 높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종 논란 끝에 시행 중인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 역시 한미FTA와 상충된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된 데스크탑PC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데스크탑 컴퓨터시장에 진입이 불가하다. 그런데 지난해 말 새로이 정부조달시장에 뛰어든 미국의 델이나 IBM 데스크탑은 어떤가. 만일 이 회사들의 데스크탑의 정부조달 시장진입을 정부가 규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한국정부는 ISD 제소 대상이 될 것이다.
중소상인들의 ‘공적 1호’가 애국자로…대체 뭔가
갑자기 중소유통상인이나 중소기업을 보호하겠다는 때늦은 자각은 비록 가상하나, 뭘 좀 제대로 알고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미FTA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가.
더군다나 새누리당의 졸속정책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애국자’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의 등장이다. 새누리당의 ‘애국자’인 그는 오래전부터 중소유통상인의 ‘공적 1호’였다.
중소유통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유통상생법에 대해 국회 입법조사처, 지식경제위 전문위원실 등에서조차 WTO 협정 위배가 아니라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도 김종훈 전 본부장은 줄기차게 중소유통상인 보호법에 반대해서 이 법안들을 폐기 직전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우리 중소상인들의 밥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EU FTA 위반’을 이유로 들면서 오히려 영국 대형유통업체의 이익을 가장 앞장서서 옹호했던 이가 바로 이분이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새누리당, 날치기에 무임승차하다 불현듯 중소상인을 위한답시고 협정 위반이 자명함에도 유통법 개정안을 내놓더니, 또 다음 날엔 중소상인과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바로 그 한미FTA를 폐기하자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한다.
그러더니 바로 그 중소상인 보호를 위한 유통상생법 개정에 가장 반대했던 인물을 ‘애국자’로 둔갑시켜 선거용 매물로 내놓았다. 박근혜의 새누리당,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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