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거짓말을 사랑했네 [조미희]
새빨간 것들을 사랑했네
선명해서 긍정이 되는 것들
피로회복제 같은 말,
나만 믿어
이런 말들
폭설처럼 행복이 몰려드는 착시 현상
참말이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때
빨간 거짓말은 그물망을 펼쳐 나를 받아내네
앳된 점집 여자의 반말에도 귀가 경건해지는
새하얀 의심의 눈동자에
자주 찾아오는 불신과 절망은 무채색
슬그머니 옆에 앉아 웃다가
순식간에 내 목을 분지르지
빨강은 옆집 오빠처럼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네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은 그렇게 노래 뒤에 기대 있지만
거짓말은 가끔 다정을 흉내 내네
점집 여자가 빨간 입술로 말하네
1월엔 돈거래를 조심하고
7, 8월엔 물가를 조심하고
12월에는 뜻하지 않은 횡재수나 손재수가 들었다고
아무래도 점집 여자는 시인인 것 같아
뻔한 세상사를 상징으로 표현하지
취업을 하고 월세에서 전세로 집을 갈아타는
고춧가루 솔솔 뿌린
세상의 모든 새빨간 위로들을 사랑해
낮술과 거짓말 [안명옥]
마흔 넘도록 결혼 못한 남자친구는
낮술을 먹는다고
불광동에서 여자에게 바람 맞고
거짓말처럼 홀로 술을 마신다고
늙은 부모에게 얹혀사는 남자친구는
늙은 어머니가 동네아기를 돌봐주며 든 적금을 깨
베트남 갔다 그냥 돌아왔다고
돈 주고 가난한 나라 딸을 사는 것 같았다고
베트남 처녀에게 거짓말 할 수 없다는데
구김 잘 가는 남편 셔츠를 다리던 나는
전화 걸어온 남자 친구에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낮술도 마시고 좋겠다고
낮술 마실 수 없는 나보다 나은 팔자라고
남자친구에게 거짓말 하듯 하였는데
거짓말 때문에 결혼했다고
고생시키지 않는다고 했던
남편의 숱한 거짓말 때문에 결혼했다고
거짓말처럼 중얼거리는데
맑은 하늘이 거짓말처럼 비를 뿌리니
그야말로 하늘이 땅에 물을 뿌리니
비 내리는 불고아동
즐비한 모텔들 거짓말처럼 행복할 것이다
거짓말 [신미균]
간단히 입고 벗을 수 있다
일상적인 일을 하거나
조깅 에어로빅을 할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입고만 있어도 땀이 난다
가볍고 튼튼하다
모자가 달려 있어
여차하면 떼어서
남에게 뒤집어 씌울 수가 있다
우주인의 멋과 색깔도 느낄 수 있다
한번 입기 시작하면
계속 입고 싶어진다
남녀 공용
프리사이즈다
거짓말처럼 [김소연]
약국에 갔다
신분증을 내밀고 신원을 입력한 후에 약사는 내게
공적 마스크 3장을 건넸다
손세정제는 없나요
내가 묻자 약사는 대답했다
우리도 구하고 싶습니다
제주도에서 교사가 사망했다고
빌딩 위 전광판에서 뉴스 앵커는 전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수업을 하던 초등학교 교사였다
나는 산책이 늘었다
나는 요리가 늘었다
나에게 시간이 너무나도 늘었다
축제가 사라졌다
장례식이 사라졌다
옆자리가 사라졌다
재난영화의 예감은 빗나갔다
잿빛 잔해만 남은 도시가 아니라
거짓말처럼 푸른 창공과 새하얀 구름이 날마다 아침을 연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테라스에서 나팔꽃이 손이 뻗어 코스모스를 감고 있었다
황조롱이가 나타나 앞집 지붕 위에 앉아있었다
뭄바이에 나타난 홍학과 함께
레인섬에 나타난 바다거북이와 함께
산티아고에 나타난 퓨마와 함께
손을 내밀어 페이크 악수를 한 후에
늠름한 메타세쿼이아 숲으로 사라진 내 뒷모습을
누군가 카메라에 담았다
비밀과 거짓말 [신해욱]
아무도 모르게 체조 선수가 되었다.
옷 속에 팔과 다리를 잘 집어넣은 채로
나는 태연하게 걸어 다닌다.
잠 속에서만 팔다리가 길어진다는 건
억울한 일이지만
줄 없이도 줄넘기를 할 수 있는 밤들
나쁘지는 않다.
달리면 나 대신
공중의 시간이 부드러워지지만
아주 약간일 뿐.
내가 나에게로
어이없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세상에는 언제나
한 명의 체조 선수가 부족하고
나는 심장이 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무척 아름답고 투명한 일이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 오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우,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거짓말 [김수열]
“선생님은 무얼 먹고 그렇게 키가 커요?”
풋과일 같은 여자애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올려다본다
시선은 집중되고 정적이 감돈다
“착한 마음”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이들 벌떼같이 소리지른다
책상 탕탕 내리치는 놈
자다가 벌떡 깨는 놈
힐끗힐끗 눈 흘기는 놈
머리 싸매고 뒤집어지는 놈
우웩우웩 토악질 흉내내는 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놈
교실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다
그래, 이놈들아
말도 안 되는 소린 줄
낸들 왜 모르겠냐만
그래도 우기고 싶구나
너희들 앞에서만큼은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구나
새빨간 거짓말 [박이화]
먹다 보면
껍질만 남는 것이 석류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빨간 껍질만 쌓이는
사랑하고부터 거짓말도 늘었다
생각만 해도 신트림 끄윽 괴는
그 새콤달콤한 말 들키지 않으려
석류처럼 석류꽃처럼
내 입술도 반지르르 붉어졌다
익다 보면 제풀에 단내 쩌억 풍기는
벗기다 보면 겉과 속이 한통속인
석류 한 통 다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석류보다 더 많은 껍질이 쌓였다
단물 쏙 빠진 알맹이까지 시금털털 껍질로 남았다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사랑에 온통 정신 팔려
영영 지울 수 없는 얼룩만 남긴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석류보다 석류꽃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거짓말 사탕/김명원
어느 날 오래된 거지가 나타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심야곡 사월 태양은 정오일 때 사악한 뱀에게 물려 죽은 적이 있었단다. 뇌수는 터지고 독 때문이었는지 사지 선혈 붉게 철쭉빛 물드는데 비비몽사사몽 하늘에 짓눌려 구름에게 겁탈 당하고 신음의 번개 내질러 달려, 노래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넘치는 건 오니샤 강물 둔덕, 뼛속까지 드러내는 우레 바늘, 스러진 무덤 속은 구겨지는 셀로판지 소리거나 질겅 씹어 삼켜도 좋을 가래 점액 같은 것이었단다.
왜 이런 이야길 들려주시죠? 나는 물었지.
이백 년쯤 뱀에게 물려 사사몽비비몽 비명의 울음 계곡에 처박혀 있을 때 뱀의 여자에게 송두리째 뺏긴 동정이 오늘 나를 보는 순간 화들짝 기억나는 것이었다는, 내게서 추악한 발정 냄새가 나고, 몇 겁을 돌아 이윽고 도달한 허무의 발톱이 보이고, 질질 끌어당기는, 일순 낯익은 초경 핏자국 사위가 감지되었다는 것, 다시 죽을 듯 내 몸 그림자 살점에 감전되었다는 것.
웃겨서, 그러나 그의 전생 해몽을 듣고 나도 모르게 거지 곁에 나란히 누웠단다.
먼지 낀 사내는 어둔 눈을 들어 깊숙한 내 구멍을 찾고, 처음이라서… 더듬거리는 나의 숨결 위로, 어쩌나, 어찌 빠른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사탕들이 일제히 흔들려 미친 듯 폭포방울로 떨어지던 것은, 맛, 있, 어, 라, 바람이 감기고 숲이 울고 그토록 오래 오래 빨고 나자 아파라, 혀 끝 단 침이 미라 속으로 출렁 녹아내리는, 그 때 내 손위에 놓여 진 해골 백발 한 줌이란
잘 만든 거짓말보다 더 깨끗하게 [이원하]
새처럼 허공에 풀어둔 기억이
가슴에서 시작된 습한 기운이
둥지를 찾는 파도의 거품이
섬의 난간으로 모인다
간직할 것이 많아서 긴 바다
추모할 것이 많아서 긴 오로라
그 무엇보다 긴 한숨이
난간에 걸쳐진 것들의 손을 잡고 사라진다
이제 내게 과거는 없다
해변에 발 닿을 곳은 많지만
닦아낼 바닥은 없다
과거가 없으니 추해질 것도 없는 것이다
지상에서 벗어나 바다의 열매가 되자
열매를 터뜨려 꽃을 피워내자
꽃이 펴지는 모습보다 더 크게 웃자
꽃의 계절에 눈이 내리면
하얀 눈 덮인 빨간 우체통의 색을
궁금해하면서
기다리면 올 것 같은 것들을 기다려보자
진짜 다 읽으셨네요.^^*
첫댓글 거짓말 하나 더 ^^*
거짓말 / 최현우
내가 그랬어요, 그애는 나빴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요, 세제를 탔어요, 물병에, 내가 그랬어요, 죽이고 싶었어요
없는 아들이 불쑥 말하고
침대에서 튀어나와 현관을 열고 유치원으로 갔다
어린 아들과 아들의 어린 친구는
손을 잡았다 어른처럼
울기 시작한 아이들의 앞에는 다른 아이가 쓰러져 있고
백발이 자라고 있었다
(죽이고 싶었니? 정말 독을 넣었니?)
다친 아이를 싣고 가는 구급차 안에서
아들이 대답 없이 친구를 더 꼭 안았고
그 작은 애인이 나를 무서워했다
나를 무서워하는 친구를 끌어안은 나의
없는 아들 쪽으로 길이 가라앉고 있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어요, 가위로 몰래 머리를 자르고, 울면 웃었어요,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았어요, 그애는 나빴고, 지켜주고 싶었어요, 힘이 세니까, 죽이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내가 그랬어요
( 죽이고 싶었니? 정말 때렸니?)
돌아온 집에서 아들은 계속 울었다
말랑말랑한 눈물이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지켜주세요, 제발 지켜주세요
같이 울던 친구를 돌려보내자 아들은 사라졌다
새치를 모조리 뽑고 잠이 들어도
아침이면 흰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아들이 밤마다 다가와 울고 있었다
나를 단단히 끌어안고 놓을 수 없다는 듯
실려간 아이가 마신 물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고
어떤 울음소리가 웃으며 내 흰머리를 하나씩 세고 놀았다
[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2020.
흰머리 하나 뽑습니다.^^*
힘들어서 반만 봅니다.
詩가 배고플 때, 또 먹겠습니다.
수고하심에 꾸벅^^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늘 강건하셔요.
시사랑 마당쇠
다래투 올림♡
공갈빵 안 줌. ㅋㅋ
@joofe 수정 했습니다.늘 감사합니다. joofe님~~ ^^*
@joofe 다 읽었으니 공갈빵은 주페님 잡수시고, 천안 명물
호두 과자 주셔요.
굿밤 되세요.
詩사랑 마당쇠
다래투 올림.
시에 대한 사족: 안 현미 시인의 “거짓말을 타전하다”란 시를 좋아한다고 느꼈는데, 잘 알진 못했던 단지 느낌이었던 것같다.
실컷 잠을 자고 깨어나서 거짓말에 대한 다양한 시들을 읽으며
이 한 편의 시에 오래 시선이 머문다.
좋은 시란 다의적이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어떤 시어에 대해 다른 단어를 넣어도 다 말이 된다는 거라 생각하는데
이 시의 “거짓말‘이란 단어와 ”타전하다“란 제목이나 본문의 청춘, 벌레, 기타 시어들을 다양하게
변용할 수 있는 재미를 느꼈다.
거짓말을 타전하다란 감각적인 표현보다 더 감각적인 표현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를 &&하다란 식으로 다양하게 변주해보았다.
거짓말이란 말대신 다른 말로 바꾸어도 감각적이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가시를 발라내다
꽃을(꽃그림자) 날려보내다
새를 드러내다
깃털을 **하다
눈송이를 **하다
또 추상적인 언어로 바꾸고 서술어를 감각적으로 해보았다.
슬픔을 웅얼거리다
행간을 살해하다
암호를 분해하다
스스로 작위적이군하면서도
오랜만에 시를 쓰고 싶어졌고
감사한 마음에 긴 댓글을 달았어요.
그럼 이만, 나도 거짓말을 타전하러
휘융 날아가요.
바람꼭지님,
긴 댓글 감사합니다. 시에 대한 식견으로 명쾌한 댓글이었습니다.
자주 좋은 시에 대한 고견을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시 많이 지으시고 많이 읽으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