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신춘문예 당선 작품 < 詩 > - 제1부
< 작품 및 심사평 / 2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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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귤이 웃는다 / 백숙현/ 강원일보
2. 산책/ 차수현/ 경남도민신문
3. 레드문/ 권영유/ 경남신문
4. 시소/ 김현주/ 경상일보
5. 세계,고양이/ 김현주/ 경인일보
6. 버터/박선민/경향신문
7. 연착/ 노수옥/ 광남일보
8.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최주식/국제신문
9. 구 일째/ 황정희/ 농민신문
10. 묘목원/ 권승섭/ 동아일보
11. 박스에 든 사람/ 박장/ 매일신문
12.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안시표/ 무등일보
13.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김혜린/ 문화일보
14. 극장의 추억/ 이상록/ 부산일보
15. 청벚보살/ 이수진/ 불교신문
16. 볼트/ 임후성/ 서울신문
17. 드라이아이스-결혼기념일/민소연/세계일보
18. 데칼코마니/ 한이로/ 영남일보
19. 숲을 켜다/조이경/전라매일
20.홈커밍데이/ 이진우/ 조선일보
21.맬로영화/ 이진우/ 조선일보
22.가장 낮은 곳의 말/ 함종대/ 전북도민일보
23. 활어 / 황사라/ 전북일보
24. 당산에서/ 신나리/ 한국경제
25.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이예진/ 한국일보
26. 결빙/ 윤계순/ 한국불교신문
27. 책을 끓이다/ 장현숙/한라일보
28. 오아시스 편의점(시조) / 김미진/한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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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귤이 웃는다
백숙현 / 2023 강원일보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심사평>
올해는 응모작의 편수도 역대급이었고.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 또한 그 어느 해보다 많았다. 특히, 오랜 수련을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윤계순의 「계량」, 서희의 「침전의 방식」, 원미소의 「원룸」, 김송리의 「카블」,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 등이었다. 「계량」은 폐지 트럭의 무게를 재는 계량에 대한 묘사를 통해 삶의 고단함과 “헐값의 부피”를 그려낸 작품으로, 리얼한 현장성과 빈틈없는 직조 능력이 돋보였다. 「침전의 방식」은 감자 전분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평생 고름 쏟던 마음을 치마폭에 담아/ 어레미로 감자 전분 내리던 어머니”와 가계를 그려낸 작품으로, 제목처럼 잘 ‘침전’된 비유가 빛을 발했다. 「원룸」은 “듣지 않아도 들리는 것이 있는 원룸”에서의 일상을 묘사하면서 관계와 외로움을 그려낸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젊은 감각이 돋보였다. 「카블」은 제목 그대로 아프카니스탄의 수도 카블에 대한 상상을 통해 전쟁의 상처와 전장 같은 삶을 그려낸 작품으로, 숨가쁜 리듬과 강렬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최종에 오른 작품들은 각각의 장점과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 잘 짜인 작품이 주는 익숙함 때문에 미래에 대한 설렘을 감소시키는 면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백숙현의 「귤이 웃는다」는 무엇보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과 전개가 돋보였다. 이러한 활달함 속에서도 “그러므로 나는 나”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등의 구절을 뽑아내는 힘이 있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장점들이 풍요롭게 펼쳐지고 있어 최종에 오른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날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설렘이 이어질 수 있도록 당선자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이문재.이홍섭 시인
2. 산책
차수현 / 2023 경남도민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좋은 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심사평>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를 경쾌하게 표현
경제난과 아직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등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비 시인이 창작의 열정을 멈추지 않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왔다. 시를 쓰겠다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 역량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러 시인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시인이 많은 사회는 정치인이나 투기꾼이 많은 사회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214명의 시인 지망생이 총 1589편의 시를 응모해 왔다. 그중 23명의 시 134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 오랜 시간 검토하여 이영숙의 ‘태풍주의보’, 서승한의 ‘30 큐브 레이아웃’, 차수현의 ‘산책’,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 이 4편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영숙의 ‘태풍주의보’는 이미지는 선명하고 표현이 매끄러우나 시적인 시상의 새로움과 시적 표현의 참신성이 부족해서 제외되었다.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는 주제 선정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사유의 깊이를 전개해 내지 못해 최종심에 오르지 못했다.
서승한의 작품과 차수현의 작품 두 편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오래 고심했다. 두 편 모두 표현의 참신성과 주제의 밀도가 장점이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서승한의 ‘30 큐브 레이아웃’은 어항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한 측면을 형상화해내고 있다. 특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우리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시적 기교를 보여주는 등 오랜 창작의 숙련 기간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진 문장들이 흠이었다.
결국, 오랜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차수현의 ‘산책’을 선택하는 데 합의했다. 차수현의 작품에서는 뛰어난 언어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산책하는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경쾌한 언어가 반대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말해주고 있는 시적 아이러니가 잘 살아 있어 시의 주제 의식을 강화해 주고 있는 점이 큰 장점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속도감 있는 이미지의 전환이 작품 전체에 리듬감을 만들어 내고 있어서 운문의 효과를 아주 잘 살려내고 있다. 오랜 수련 과정을 거친 듯한 작품의 완성도와 신인으로서 보여주는 참신한 패기가 모두 함께 느껴지는 작품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밀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 황정산 평론가, 신미균 시인
3. 레드문
권영유 / 2023 경남신문
개기월식이라는 뉴스에 옥상으로 가본다
붉은 달이 초콜릿 듬뿍 묻힌 초코파이 같다
한 입 베어 문 그때
평화동에 산 적 있다 절취선 같은 골목 따라가면 노인이 돋보기안경으로 거스름돈 꺼내주던 구멍가게가 나왔다 초코파이 한 상자 어김없이 한 봉지씩 우물거리는 밤 별들도 그 부스러기였다 네가 갈래? 내가 갈까? 자매끼리 서로 떠넘기다 마지못해 사러갔던 그 가게, 초코파이만큼은 늘 채워져 있었다 날마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열다섯, 빈 봉지 털어보듯 용돈도 털려갔다 속을 채우고 담아도 늘 고팠던 그때의 정은 오직 초코파이
오리온자리를 찾아본다
그 자리 뜯어보면
열 두 개의 촉촉한 정이 있다
<심사평>
참된 삶의 의미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 돋보여
한국 문학의 샛별이 될 신진 시인의 산실인 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의 응모작품 편수가 지난해보다 늘었다. 시인 지망생이 늘었다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미학이 지닌 성찰적 인식을 수용해 삶의 가치를 북돋우려는 의식을 지닌 사람이 우리 사회 저변에 많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적 열정을 담은 많은 작품을 만나는 일은 고무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전체 응모작에서 여덟 편의 작품을 가려낸 후 논의를 거쳐 ‘막판의 자세’, ‘창문 외전’, ‘퍼즐’, ‘레드문’ 등 네 편의 작품으로 축약해 숙고했다. ‘막판의 자세’는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발상과 서사의 진행이 진지하면서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표현이 평이했고, 의식 깊숙한 곳에 은폐된 문제를 사회성과 결부시켜 의미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창문 외전’은 비유를 통한 언어의 직조가 신선했고 시적 전개가 흥미를 불러일으켰으나, 후반부에서 긴장감이 풀려 있었고 마무리가 미진했다. 좀 더 치밀하게 사유를 갈무리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퍼즐’은 사고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주제의식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부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진부한 표현들이 한계로 지적됐다.
‘레드문’은 일상적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시가 밀도를 더하면서 마침내 삶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의를 끄집어내는 상상력은 이 시를 견인하는 힘이다. 아쉬운 점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다소 거칠더라도 당대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첨예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논의와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레드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개기월식을 보면서 이를 숙련된 솜씨로 형상화해내는 자연스러운 시적 시선, 그리고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성찰적 인식을 보여준 응모자의 시적 잠재력에 신뢰를 걸어보기로 했다. 더욱 정진해서 한국 문단의 큰 별이 되기를 고대한다. / 심사위원 성선경·배한봉
4. 시소
김현주 / 2023 경상일보
올라가는 것을 동경한 적이 있나요
덜컥 파랗던 하늘이 정지 영상으로 멈추기 직전까지
가장 먼 곳을 밟기 바로 전
힘차게 발을 뻗는 것과
마음을 멀리 두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어디를 향해 올라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요
롤러코스터와 대관람차를 탈 때
목적지를 묻지 않는 것처럼
오래전 죽은 나무로 만든
시소 위에 앉아서 말이에요
놀이터는 높이에 묶인 유배지
멀리 떠나지 못한 놀이들이 박혀 있어요
아이들은 숲보다 낮은 그네를 타고
얕은 철봉을 돌아 둥글게 떨어져 내리죠
눈이 없는 기린과 입 벌린 녹색의 악어 사이
차가운 높낮이로 기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도
물이 흐르고 빛은 형체를 그려요
어둡게 올라가는 나는 짧은 시간의 끝에서
당신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가끔,
내려가 보는 거예요
동그랗게 짓이겨진 이끼의 위치 아래
녹슨 용수철과 나비의 날개
매몰된 습지가 자유롭게 부유하며 떠오르도록
발 디딤이 없는 한 칸마다
당신을 향한 깊이가 높이로 기화하고
비명처럼 자라는 어린 잎들이
밤새 날고 있다는 착각으로 웅성거리도록
당신이 내리면 허공,
나는 어느새 제한된 공중으로 떠오릅니다
<심사평>
시소의 물리적 속성,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
202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응모작이 투고됐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15명이 투고한 15편이었다. 이들 시편은 저마다 개성적인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음을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구체적 경험과 고도로 조직된 언어에 정성을 쏟은 시편들이 호의적으로 찾아왔고, 결국 시상의 참신함과 작품의 완결성, 앞으로 시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갈 지속 가능성 등을 두루 참작해 김현주씨의 ‘시소’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소’는 시소가 가지는 물리적 속성인 ‘올라감’과 ‘내려옴’이라는 순환성을 삶의 기율로 은유한 명편이다. 멀리 떠나지 못하고 높은 데를 향하는 시간과 낮고 얕은 곳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그 안에 함께 흐르고 있다. 그러다가 깊이가 높이로 전화되는 순간에 ‘당신’을 발견해가는 사랑의 서사가 아름답게 전해져온다. 시소를 둘러싼 역동적 이미지들을 파생시키면서 자신을 규율해온 시간과 불화하고 화해하는 교차점을 그려냈다고 판단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시소를 대상으로 하여 그것이 남겼을 잔상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비교적 긴 호흡 속에 구성하는 만만찮은 비유적 능력을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것이라고 예감해본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시상과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참신함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음에 더 빛나는 결과를 얻기를 기대해본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유성호 평론가
5. 세계, 고양이
김현주 / 2023 경인일보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
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
흩어지는 만년설 사이로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작게 너울거리는 심장소리가 빼꼼히 나를 올려다본다
휘둥그랑 투명한 수염을 휘날리며
다정히 나의 세계에 뛰어들었던 고양이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강렬한 축문처럼 나를 감싸던 고양이가 사라진 지금
나는 달빛 한 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되었다
언제쯤 돼야 이 지긋지긋한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무쇠 신을 끌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고 긴 북극의 밤에는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을 지난다
쇄빙선도 깨지 못한 얼음에 갇혀
일각고래와 청새치 바다거북이 가라앉은 심해 한가운데를
혼자 일렁이는 밤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간다는
낯익은 이별가에 목이 메인다
동그랗게 떠있는 그곳을 향해
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 간다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며 솟아오르는
나, 또는 고양이라는 세계
<심사평>
감각적 문장·세련된 은유로 한층 높인 시의 격조
올해의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팬데믹이라던가 이태원 사태 같은 국가 사회적인 재앙 문제를 짚어가는 담론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세계, 고양이'를 두고 장시간 논의를 계속했다. 그리고 응모작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데 합의했다. 당선작은 차가운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상승의 이미지로 시를 밀어 올린다는데 동의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만만치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 김현주는 감각적인 문장과 세련된 은유로 시의 품격을 높이며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첫 연의 도발적인 문장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손끝에 떨어진 작은 눈물 한 조각에/지구 반대편 수만 년 전의 빙하가 서서히 녹고 있다'라는 문장이 마치 불온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하는 도화선 같다.'달빛 한조각의 자비도 없는 세상에 포위 되'어 터벅터벅 걸어가는 북극의 밤은 그녀의 의식의 세계다. 그런가하면 '가시처럼 불행의 취기만 가득 담은 냉담한 숨결을 통과하며/영원히 끝나지 않은 밤을 지난다'와 같은 유려한 문장이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당선작은 투명한 얼음 같은 차가운 이미지로 빛난다. '동그랗게 떠 있는 그곳을 향해/차가운 유빙과 얼어붙은 별들을 데리고'가는 시인의 그곳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면서도 솟아오르는 대지일 것이다. 그녀의 시세계가 대지를 다 품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국 시단의 별로 찬란하기를 빈다. / 김명인. 김윤배 시인
6. 버터
박선민 / 2023 경향신문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심사평>
기후위기·참사·불안…시대의 문제를 관통한 감정들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시의 무력함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용하고 무력한 자리를 지켜온 까닭에 존재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시가 절실하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부문 응모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섬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응모작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서 모종의 감정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애도의 문제, 청년세대의 불안,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 등을 그린 시가 비교적 자주 눈에 띄었다.
응모작 중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 네 명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의 장에 올라온 시는 사이의 ‘매트릭스(Matrix)’ 외 4편, 한백양의 ‘피카레스크’ 외 4편, 이자연의 ‘물과 풀과 건축의 시’ 외 4편, 박선민의 ‘버터’ 외 4편이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며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들이었다. 사이의 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신뢰가 가고 무심한 세계에 상처 입은 주체가 던지는 발화가 매력적이었지만 아포리즘을 조금 줄여본다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백양의 시는 사람들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적 주체가 포착하는 세계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취하는 주체의 태도를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눈길을 끌었지만 자기 고백적인 말이 흘러넘치는 시들은 여백이 필요해 보였다. 이자연의 시는 나무와 풀과 건축과 물을 오가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낯선 감각도 매혹적이었지만 참신한 비유의 매력을 상쇄하는 평이한 비유가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민의 ‘버터’는 뭉쳐지고 흩어짐, 얼음과 불, 저온과 고온의 대비적 상상력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사각이었다가 물처럼 녹아버리는 버터의 속성을 포착해 펭귄, 오두막, 당나귀, 저울, 안녕, 창문으로 이어지는 낯선 상상력을 전개해 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버터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바탕에는 버터가 탄소발자국이 많은 음식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각이 돋보였다.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점도 믿음이 갔다. 말을 예민하게 다룰 줄 알고 상상력의 전개가 독창적이면서도 이 시대의 가장 첨단의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인류세로 접어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생태시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버터’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마음을 모았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빛나는 개성을 열어가기를 바란다. 예비 시인들에게도 쓰는 자로 살아가는 한 머잖아 우리는 지면에서 만날 거라고, 쓰는 시간이 우리를 버티게 할 거라고 응원의 말을 전한다.
7. 연착
노수옥 / 2023 광남일보
오전에 내린다는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쏟아졌다
아마도 우산들의 모의가 있었지 싶다
몇몇 우산의 후예는 지구 밖으로 날아갔다. 활짝 펴졌다. 그리고 다시 우기를 살피고 비의 입자를 감지했다. 가끔은 지구 밖에서도 비가 내린다고 빗소리 같은 잡음을 전송해 왔다
비는 늘 시시각각을 벗어난 적이 없다 어느 곳에서든 정시를 고집하지 않고 습도의 비율을 찾아다녔다.
연착이 없는 태양과 달,
단호한 날짜마다 태양과 달의 봉인 도장이 찍혀 있다
비가 내리는 동안 지상의 나무는 그늘을 따돌리고 잠깐 자란다. 타설된 오전에서 오후의 빗방울 화석이 발견되었지만 그건 인류의 역사를 밟고 지나간 거인의 발자국과 같은 과정일 것이다.
느닷없이 쏟아진 소나기는 저 아랫마을에 가서 깊어졌다
끊긴 오전에서 오후를 넘어온 시내버스 운전사는 연착을 설명하느라 바쁘고 왼손쯤에서 사라졌던 태양이 오른손에서 발견되었다.
이유 불문, 태어나는 일에는 연착이 없지만 태몽은 연착이 있다
약속은 대부분 내려야 할 곳을 놓친 사람의 입장이 아니다
중간에 교차로가 있고
속도의 결렬이 있고
아직 분실이
바닥에 닿지 못하는 이유다
<심사평>
사유의 발랄함·냉정한 시선…신인의 과감함 돋보여
십여 년 전부터 신인상에 응모하는 작품 속에서 응모자의 성별과 나이를 짐작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졌다. 이번 심사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를 위해 인적 사항을 지우고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하는 방식의 영향이 크겠지만, 신선한 감각과 개성적 사유가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투고된 작품들이 하나같이 세대의 구분을 지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시로 다시 한번 청춘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고투도 빛나 보였다. 응모작 중 어느 것 하나 뜨겁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다만 심사자의 입장에서는, 온몸으로 받아낸 자기 체험 없이 손끝으로 매만진 작품의 가벼움은 경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응모작 행간에 스며있는 사유의 농밀함과 시선의 깊이를 찾는 데 주력하였다.
이중 ‘마트료시카’ 외 4편, ‘말, 얇고 두텁고 다순’ 외 4편, ‘버드 세이버’ 외 4편, ‘슬리퍼’ 외 4편, ‘연착’ 외 4편을 시간이 허락하는 마지막까지 두고두고 읽었다.
‘마트료시카’ 외 4편은 사회적 메시지를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개성이 돋보였다. 이미지나 의미를 자기 시의 질서 안에 수렴하는 모습이 안정되어 있으나, 의미가 시의 맥락을 선도하려는 태도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말, 얇고 두텁고 다순’ 외 4편은 자기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하지만 이미지로 구축된 시적 세계를 지탱해줄 시적 논리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서 아쉬움이 컸다. ‘버드 세이버’ 외 4편 역시 흥미로웠다. 시에서 다루는 제재가 현실과 밀착되어 있으되, 시인의 은유를 통해 현실에 종속되지 않고 시적 여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균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 못해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슬리퍼’ 외 4편은 나름 자신만의 개성적 문법을 만들어내고 있어 눈길이 갔다. 하지만 매 시편에서 반복되듯 드러나는 서술어의 변주가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어조는 시에 가장 적절한 것으로 골라야 하는데, 시인의 간섭이 다소 지나치다 싶었다.
결국 당선작으로 ‘연착’ 외 4편을 선정했다. 응모작 5편 모두 오랜 수련의 흔적을 안은 채, 균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간혹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사유의 발랄함과 시적 대상을 뜨겁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발굴해내는 솜씨가 훨씬 값져 보였다. 당선작은 자전과 공존의 정확한 주기로 재단된 세계 속에서, 오히려 결렬이나 연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단면을 은유적으로 연출해내고 있다. 사유의 깊이가 남다르고,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 해 내는 과감함이 신인으로서 기대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다만 시를 조금 더 현실로 팽팽하게 끌어당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시인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당선자가 세상과 교감하고 독자와 공감할 수 있는, 자기 시를 쓰며 오래오래 버텨주길 응원한다. / 김병호 시인(협성대 교수)
8.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최주식 / 2023 국제신문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심사평>
응모된 시의 경향은 다양했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시, 실험적인 시, 새로운 감각의 시로 분류할 수 있었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다. 젊은 세대의 독특한 언어 감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시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심사위원들은 십여 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뒤, ‘쪽방촌 오르트 씨’, ‘미행’,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세 편의 시를 놓고 마지막 논의에 들어갔다.
세 편의 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만 단 한 편의 당선작을 뽑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세 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음미해보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깊이와 높이를 가늠해 보기도 했지만 세 작품이 각각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어서 심사위원들 간의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선작을 내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쪽방촌 오르트 씨’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았다. 기법적 완성도도 높았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도 뛰어났다. ‘미행’은 담백하면서도 깊이와 품격을 지닌 좋은 시였다. 재치 있는 마무리도 인상적이었다. 풋사랑을 그려낸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는 공감의 폭이 넓은 시였는데 특히 뒷부분의 반전이 좋았다.
좋은 시에 필요한 요소는 많다. 언어의 깊이와 생각의 높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공감의 폭 등이 그것이다. 최종심에 올라온 세 편의 시는 모두 이런 요소를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 시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공감의 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공감의 폭이 가장 넓은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선작은 언어 감각이나 호흡 면에서는 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이 점은 시를 계속 써나가면서 점점 좋아지리라 생각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선보일 좋은 작품을 기다려 본다.
9. 구 일째
황정희 / 2023 농민신문
구 일째 울진 산불이 타고 있다
한 할머니가 우사 문을 열고
다 타 죽는다 퍼뜩 도망가거래이 퍼뜩 내빼거라 꼭 살거라
필사적으로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몰고 있다
불길이 내려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밀쳐놓은 와이셔츠를 당겨 다린다
발등에 내려앉은 석양처럼 당신은 다가오려 했고
나는 내 발등을 찍어 당신이 집 나간 지도
구 일째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떠올라 매매 반듯하게 다리고 있다
똑 똑
똑똑 똑똑
똑똑똑똑똑똑
빗소리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화를 몰고 와
우산을 쓰고 돌아온 당신 속으로 질주하는 나는 맨발
날 밝아
체육관으로 피했던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다 타버린 우사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소들의 모습이 비쳤다
<심사평>
분명 신춘문예는 축제다. 사는 일 곁에서 문학(시)을 알게 되고 배우고 쓰고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소출을 모아 제출한다.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한창 운동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렇게 축제는 지나간다.
그 가운데 단 한사람이 남는다. ‘구 일째’ 외 4편을 보낸 황정희씨가 올해 당선자다. 축하를 보낸다.
투고된 작품들의 대체적인 경향은 ‘농민신문’이라는 제호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춤한 시들을 모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선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는 매체 성격과는 별개로 단지 ‘문학(시)’을 발견하고 싶고 그것도 새로운 문학을 설레며 기다릴 뿐이다.
당선작을 포함한 다섯편 시 모두 잘 정제되어 있었다. 세상의 비극을 응시하되 그 현상을 자기 안에 끌어들여서 앙금으로 가라앉힌 모습이다. 얼핏 보면 아무 이야기도 아닌 듯하나 그 이면에는 들끓는 아픔과 성찰이 놓여 있다. 이즈음 떠도는 시들, 노래방 조명처럼 휘도는 언어의 쇄말 속에서 분명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산불을 만난 할머니가 키우던 소들을 우사 밖으로 내모는 텔레비전 영상과 화자의 사적인 경험이 중첩되어 전개된다든지 우연히 마주하게 된 싸움 구경에서 자신이 “아침에 산뜻하게 다려준 청색 남방이 찢겨져 있는 (‘지나쳤다’)” 장면을 발견하고는 이내 모른 척 돌아서는 모습에서 독자는 각각 처해진 삶의 조건 속에 숨어 있는 위선과 성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감정의 노출 없이 넌지시 제시되는 이 새로운 시공(時空)은 음미해볼수록 매혹적이다. 앞으로도 이 시의 축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읽는 바닥들’과 ‘저수지의 집필방식’ 등이 최종 토의 대상이었으나 이른바 ‘운때’가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음을 ‘굳이’ 밝힌다. / 장석남.나희덕
10. 묘목원
권승섭 / 2034 동아일보
버스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이 오가고 /그동안 나를 만난다
어디를 가냐고/그가 묻는다
나무를사러 간다고 대답한다
우리집 마당의 이팝나무에 대해 그가 묻는다
잘 자란다고/나는 대답한다
그런데 또 나무를 심냐고 그가 묻는다
물음이 있는 동안 나는 어딘가 없었다/없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무슨 나무를 살 것이냐고 그가 묻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나무는 어떻게 들고 올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먼 사람이 된다
초점이 향하는 곳에 나무가 있었다
잎사귀로 헤아릴 수 없어서
가둥으로 그루를 세야 할 것들이 무수했다
다음에 나무를 함께 사러 가자고 /그가 말한다
아마도 그 일은 없을것이다
언젠가 그를 나무라 부른 적 있는데 /다시금 지나가는 비슷한 얼굴의 나무는
<심사평>
‘체험의 일단’을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 뛰어나
올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생활감상문과 같은 시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시는 생활에서 나온다. 소재를 취하고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도 시의 중요한 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변용과 깊은 사유의 맛이 결여된 감상은 넋두리와 소품에 그칠 뿐이다. 구성이 승했던 때에 작위가 문제였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진술은 절제와 엄밀함을 통해 독자에게 호소하는 시적 문장의 힘을 아쉬워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감수성과 지성의 통합이라는, 현대시와 관련한 고전적인 경구를 떠올리며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었음을 덧붙여 본다.
‘히에로글리프’는 미술관에서의 감상을 시공을 넘나드는 사유로 확장시킨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후반부 이후에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템플 스테이’는 일상에서 길어온 잔잔한 사유가 매력적이지만 마지막 대목에 있는 다소 이질적인 논평자적 마무리가 사족이 되고 말았다.
‘묘목원’에 대한 숙고가 있었다.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고려함과 동시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는 한 작품을 내밀어 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이 오고 갔다. 그 결과, 심사위원들은 과장과 작위가 없이 단정한 문장을 통해 체험의 일단을 문제적인 시적 상황으로 변환시키는 기량을 믿어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건에서 중층적인 의미가 배어나게 하는 시적 구성도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 정호승 시인, 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국문과 교수)
11. 박스에 든 사람
박장 / 2023 매일신문
손을 잡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방지턱을 넘는 버스. 내 키를 덮는 그림자. 엄마는 보이지 않고 내 손엔 엄마의 검지만 쥐여져 있었다.
눈 뜨면 구석일 때가 많았다.
나는 주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면도기와 골프공, 설렁탕을 담는다. 여섯 살 때 내가 잃어버린 휴게소를 클릭한다. 얼굴의 푸른색은 휴대폰에 옮겨둔다.
산소에 간다. 캔커피와 꽃을 산다. 살수록 비굴해진다. 더 비굴해지기로 한다. 그렇게 주문을 건다. 주문은 많은 걸 해결해준다.
써보지 않은 양식의 글을 쓴다. 흰 봉투에 넣어 책상에 올려둔다. 이력서는 모두 폐기한다.
택배는 내가 받고 내역서는 그가 받는다. 방금 도착한 복숭아가 물러 있다. 상처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다. 스티로폼 박스에 반품이라 쓴다. 뽁뽁이로 싸맨다. 구겨, 몸을 넣는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아이스팩을 끼운다. 뚜껑을 닫는다.
칼로 뜯지 마세요. 던지지 마세요.
아무도 열어주지 않아 나는 나를 열고 나온다. 뜯긴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팔과 다리의 얼룩을 눌러본다. 운송장 번호가 없다. 받는 사람이 지워졌다. 상자를 열고 다시 몸을 넣다가,
그를 주문한다.
<심시평>
시적 상황을 다층적 구성…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 포착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되었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평이한 감각에 머물거나 시적 긴장을 견인하는 힘이 부족한 작품들이 일차적으로 걸러졌다.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들면서 내면의 감정을 응축한 절제의 미학과 시어의 갱신을 이루어낸 작품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재독과 윤독을 거쳐 5편으로 압축한 뒤 다시 3분의 작품을 두고 최종적으로 깊은 논의를 거쳤다.
박이음의 시는 세련된 형식과 새로운 화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관계의 어려움과 현실의 불안을 포착하는 감각이 돋보였다. 툭툭 끊기는 질문과 대화들 속에는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이 담겨 있었다. 내밀한 고백과 연계된 낯선 이미지가 감정의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시적 대상의 관계와 상황의 맥락이 잘 잡혀 있지 않아 시적 주체의 사유와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감각적인 언어 구사와 주제에 따라 목소리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능력도 좋고, 시의 도입부를 도발적인 진술이나 감각적인 묘사로 제시하여 흡인력 또한 있었으나, 환상적인 상황 설정이 혼돈스러운 시적 전개와 맞물려 의미를 잡기 어려웠고 흐릿한 환상으로 처리된 종결부에서 오히려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면이 아쉬웠다.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편차가 있다는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박선민의 시는 새로운 발견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중심에서 이탈되거나 인식의 '외곽'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낯선 사유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또한 정해진 중심과 질서가 포섭하지 않는/ 못하는 주변의 것들, 중간과 평균으로 재단된 것들 너머를 지향하는 이미지들이 교직되면서 주제로 응집되어 시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상상력의 폭이 예상된 범위 안에 머물러 있고, 관념적인 진술이 사유의 깊이를 동반하지 못하거나 체험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동어반복에 그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투고된 작품들이 엇비슷한 시적 구조를 보이고 있으며 목소리도 일정해 단조로운 인상을 받았다. 시적 대상과 현실의 고통이 맞닿는 자리를 섬세하게 잇대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박장(본명 박미영)의 시는 언어의 내포와 외연의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려 역전된 현실에 대한 감각으로 밀고 가는 힘이 있었다. 시적 상황을 다층적으로 구성하는 형식적 실험과 세계 내의 상징적 폭력에 따른 고통이 핍진하게 담겨 있었다. 일상적 상황과 사건을 시적 소재로 삼으면서 시적 상상이 현실과 떨어지지 않는 접착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행한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형상화해내는 것도 장점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박스에 든 사람'은 자본주의의 상품 체계에 종속된 삶, 비굴하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존재가 지워지는 현실이 아버지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삶의 힘겨움과 겹쳐 비극성이 극대화된다. 간명한 상황 전개가 주는 시적 긴장, 안과 밖을 역전시키는 상상력, 언어의 굴곡과 뒤틀림을 통해 찢어지고 뜯어지고 구겨진 삶의 맨살이 드러난다. 주문을 걸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파악,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지워진 삶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을 정확하게 포착해낸 이 신인의 단단한 내공이 앞날의 시작(詩作)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12.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안시표 / 2023 무등일보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어머니의 환한 하루가
이렇듯 흘러가는 어진 눈매에
느려도 천 리를 가는 황소의 콧김으로
점점 沼와 뜨겁게 맞닿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꿈결 沼에 비친 낮달을 사각사각 베어 물다
생이가래 속으로 툭 떨어진 이빨을 찾으려 손을 집어넣던 딸애
간질대는 물뱀에 울면서 깨어난 다락빌레엔
종일 비가 내렸고
웃자란 풀을 쫓다 벼랑 아래로 큰어머니의 황소는 별안간 떨어졌지
바다는 굵어지는 빗소리에 큰어머니 상혼(喪魂)의 궁핍을 남기고
그 해, 무른 콜타르 감정이 다락빌레 沼를 자르니
쭈욱 뻗어나간 신작로에 소금 핀 마른 눈물만 번져갔어
서쪽 돌 염전 따라 빌레의 명치끝을 밟으면 다락쉼터 표지석을 만날 수 있어
바람 부는 날 이곳에 서면 수평선 너머로 간 큰어머니의 황소가
아직도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를 씹으며
바다로 터져나간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아 먹먹해지고는 해
<심사평>
상상력의 참신성 초점
올해 응모작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서정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의식으로부터 제법 사이 띄기가 된 것인지, 몇 해 동안 보이던 어둡고 우울한 감상성이 어느 정도 걷혀 있는데다 전반적으로 수준도 높아진 것 같아 반가웠다. 좋은 시는 능란한 기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적 대상과 세계를 끊임없이 응시하고 통찰하는 자기 성실성에 의해 산출된다.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시가 언어를 몸체로 하는 한, 언어에 대한 성찰을 뒤로 한 채 자기 감상에 먼저 포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인으로서의 기본에 충실한 시, 그러면서도 상상력의 참신성과 가능성을 갖춘 좋은 시에 주목하였음을 밝혀둔다.
응모작 중 심사자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이 작품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시품을 갖추고 있어서 한 작품만을 당선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김미향의 '속도의 풍장'은 버려진 자동차를 통해 인간 삶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는데, 담담한 어조가 오히려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호소력으로 다가왔다. 박행신의 '지워질 줄 알았다'는 어머니와 목기에 얽힌 서사적 모티프를 산문시형으로 구성하면서도 끝까지 서정적 긴장을 놓치지 않은 뚝심이 돋보였다. 최서정의 '풍경사(寺)'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의 정경들을 풍경의 사찰로 응시하는 독특한 상상력과 성찰의 언어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최종 당선작의 자리에는 안시표의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를 올리기로 하였다.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는 시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미덕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소(沼)와 소(牛)의 동음이의어로 교직하고 있는 상상력의 확장성, 장소 체험으로 환기하는 그리움의 서정성, 소환된 기억을 늪에 사는 생물들로 구체화시키는 예민한 감각, 한 편의 시를 마치 언어로 그린 수채화처럼 보여주는 이미지의 선명성 등이 그것이다. 표현이 난삽해지거나 의미에의 집착을 범할 수 있는 시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아우르고 있다는 점은 범상치 않은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시인으로서 큰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축하의 말을 전한다. 또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김동근 문학평론가·전남대 명예교수
13.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김혜린 / 2023 문화일보
물레 위에서 점토를 돌린다
선생님은 마음의 형태대로 도자기가 성형된다고 말했다
점토가 돌아가는 물레가 있고
물레는 원을 그린다
물레가 빚어내는 바람이 원의 형태로 부드럽게 손을 휘감는다
생각하는 동안 점토는 쉽게 뭉그러지고
도자기는 곡선이지만 원은 아닌 형태로 성형된다
가끔 한쪽으로 기울고 일그러진다
그러는 동안 창밖의 개들은 풀밭 위를 빙글빙글 돈다
꼬리를 쫓으며 도는 개의 주변으로 풍경이 둥글게 말린다
부드럽고 단단한 개의 몸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수백 개의 동그라미들
개들을 보면 사람은 마음속으로 무엇을 그리며 사는지 궁금해졌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 재단된 옷을 입고
같은 사이즈의 길을 걷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언젠가 집으로 연결되는 길에서
길을 잃는 방법을 잃어버린 동네에서
구획이 잘 나누어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지른다
어느새 공원은 개들이 풀어놓은 동심원으로 가득 찬다
나는 원을 그리는 법을 배운다
꼬리에 시선을 두고 여백에 시선을 두고 선에 시선을 두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많이 돌 수 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손끝과 반대쪽 손끝 사이의 거리를 잰다
선은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다
원이 아닌, 모든 곡선을 그리고 있다
아직 백자가 어떤 모형으로 구워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 들여 유약을 칠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희고 맑다
어느새 풍경은 백자가 되어 있다
<심사평>
‘마음의 형태’를 부드러운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줘
시 부문에 응모한 작품들을 세밀하게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는 조금 줄었지만, 응모작들의 수준은 높다는 데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들이 많아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응모작들은 개인적 서사를 시로 풀어낸 작품들의 비중이 컸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삶의 질곡과 통증, 소통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시적 모티프로 폐점과 채무, 구직과 고된 노동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곤고한 일상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주목한 작품들은 ‘행방’ ‘비광’ ‘인공눈물’ ‘어린이는 자란다’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이었다.
‘행방’은 외할머니의 부음을 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었다. ‘귤’ 냄새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마음의 누선을 건드려 뭉클했다. 도입부가 다소 평이해서 아쉬움이 있었다.
‘비광’은 삼촌이 겪은 비탄의 내용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가게 구조와 “오 도씩 기울어진 화장실”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삼촌에게 곧 닥칠 절망에 대한 어두운 암시로 유효하게 연결시켰다. 개인적 체험을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인공눈물’은 함께 보내온 다른 시편들에 비해 새로웠다. 사물을 결합해서 정서를 만들어내는 신선한 솜씨가 있었다. 이 작품은 영화를 보며 “울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화자의 행위를 통해 오히려 우리의 가슴에 있는 공통의, 애련(哀憐)의 감정을 발견해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돌려놓을 수 있는 모양은 없어요”와 같은 표현에서처럼 모호한 진술이 더러 있었다.
‘어린이는 자란다’는 성장기를 다뤘는데 자아와 가족과의 관계를 진솔하게 표현해 감동적이었다. 시행의 경쾌한 보법도 인상적이었다. 서사가 길어지면서 긴장감을 상쇄하는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동의했다. 우선 이 작품을 포함해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고 안정적이었다. 산문적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생신(生新)한 이미지와 사유의 쌓임이 특별하게 만들어낸 시구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시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견인해낸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특히 당선작은 맑고 투명한 시선으로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서정을 빚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하게 도자기를 빚어내는 경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획된 직선과는 대별되는 곡선과 둥긂을 지향하는 마음의 형태를 백자의 부드럽게 굽은 조형미에 빼어나게 견주었다. 이러한 안목과 감각이라면 앞으로 시단에서 자신만의 육성을 산뜻하고 묵직하게 표출할 신예라는 데에 깊은 신뢰와 기대를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나희덕·문태준·박형준
14. 극장의 추억
이상록 / 2023 부산일보
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꾼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 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컷,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닥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았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인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심사평>
기억 저편의 사물 포획 솜씨 돋보여
515명이 투고한 2140편의 작품을 읽으며 심사위원들은 자기표현으로서의 시가 인간학적인 장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였다. 20대에서 80대에 이르도록 매우 다양한 삶에 처한 이들이 다채로운 시적 발화를 선보였다. 모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적 수행이 아닐 수가 없다. 이들 가운데 한 편을 선택하는 일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운 과업. 이 어쩔 수 없는 역할을 위하여 걸러낸 시편은 김미선의 ‘수풀떠들썩팔랑나비’ 외 3편, 박봉철의 ‘만개꽃’ 외 2편, 이도화의 ‘무심코’ 외 2편, 김수현의 ‘무한동화’ 외 2편, 이상록의 ‘추억의 극장’ 외 3편 등이었다. 참신한 감각과 포착, 재치 있는 사변, 환상의 표출, 내면의 환기 등을 그에 어울리는 시적 언어로 건져낸 시편이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들 어디 내어놓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우선 동의하였다. 하지만 단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과 삶을 지각하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의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발화의 양상에 더 주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이상록의 시편들을 남겼고 그 가운데 ‘극장의 추억’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극장의 추억’은 흑백영화처럼 낯선 추억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 작품이다. 어쩌면 서정의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어 다소 낡은 느낌조차 없지 않다. 그러함에도 구체적인 시어와 비유를 통하여 기억 저편의 사물을 감응하고 포획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자기만의 고유한 리듬을 획득한 점도 높이 살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구체에 육박하려는 태도의 성실함이 뚜렷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이를 계기로 정진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구모룡 문학평론가, 성선경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