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동지>(20회) 2014년 -180- |
맹골수도 2014년, 갑오년은 청마(靑馬) 해였다. 2013년의 마지막 밤에 열렸던 MBC 가요대제전에서는 야외 특별무대로서 ‘씨엔블루’의 과천 경마장 공연을 내보냈다. 경마장의 트랙에서 잘생긴 세 남자가 어깨에 느슨히 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현란한 다섯 손가락이 길쭉한 기타 넥의 아래위를 종횡무진 오르내리고, 피크를 잡은 손으로 기타 줄을 사정없이 죽죽 내리그을 때면 현장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자지러지게 환호성을 질러댔다. 가수들이 노래하는 사이 사이에 마구간의 말들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고 콧김을 불어내는 모습도 전파를 탔다. 하지만 2014년은 청마처럼 역동적인 해가 되지는 못했다. 불온한 징조는 계절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계절의 시계가 심각한 오작동을 일으켜 연초에 심하게 가물더니, 2월 중순에는 영동 지방에 사람 -181- |
키를 삼키는 큰 눈이 내렸다. 기상청에서는 백 년 만의 폭설이라고 발표했다. 한 달 후 3월에는 매화꽃이 필 시기에 초여름 날씨를 보여 사람들은 예사롭지 않다며 심란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예사롭지 않은 징후는 연이어 일어났다. 4월 중순에 피던 여의도의 벚꽃은 2주를 앞당겨 3월 말경에 진해와 여의도에서 동시에 화르르 폈다가 무슨 각오라도 한 듯이 화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정작 여의도에 벚꽃이 한창이어야 할 4월 16일에 인천항을 출발하여 제주도를 향해 가던 여객선 하나가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영문도 모른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세월호’란 이름의 그 여객선에는 승객 414명과 선원 62명을 포함하여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다. 승객은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났던 고등학생 325명과 교사 14명, 여행 인솔자 1명, 그리고 일반 승객 74명이었다. 해경의 구조함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구조함 위로 뛰어오른 사람은 선장이었다. 선장과 함께 기관부 선원 일곱 명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하였고 조타실 선원들도 뒤이어 구조함에 올랐다. 어떤 선원은 배로 돌아가 잊고 나온 휴대폰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탑승객들에게는 선내 방송을 통해 각자의 선실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한 뒤였다. 선장이 팽목항에 도착하여 젖은 돈을 햇볕에 널어 말리는 동안 여객선에 남은 탑승객들은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믿고 기다렸다. 배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세상과 미련이 많은 듯 선미를 물 밖에 -182- |
내놓고 삼 일을 버티다가 4월 18일 오전 11시 58분에 304명을 실은 채로 맹골수도의 파도 아래로 가라앉았다. 선미가 완전히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자, 그 자리에는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이내 파도가 배 빠진 자리를 주변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워버렸다. 팽목항에서 TV 화면을 지켜보던 학부모와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돌바닥을 쳐서 피를 뚝뚝 흘렸다. 급기야는 여러 사람이 실신했다. 전 국민이 TV 앞에서 배가 사라진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TV 앞에 앉아 실신하기도 했다. 사고 당일부터 구조 선박과 병풍도의 어선과 헬기를 동원하여 구조작업을 벌였으나 배가 침몰하기까지 구조한 승객은 배에 탔던 476명 중에서 172명에 그쳤다. 나머지 304명은 일찌감치 폈다가 화르르 져버린 벚꽃처럼 생을 마감했다. 죽은 304명 중 250명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여객선의 선미가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 간 뒤 선체 내부의 어느 공간에서 공기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를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또는 이미 숨진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잠수부들이 선박 주변과 선박의 내부 수색을 시도했다. 하지만 맹골수도는 이름이 말해주듯 조류가 매우 빠르고, 물속 가시거리가 20cm도 채 되지 않아 잠수부들은 자기의 손등마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궂은 날씨 때문에 파도까지 높아져서 구조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사태까지 벌어 -183- |
졌다. 잠수 요원이 빠른 유속과 짧은 가시거리를 극복하고 선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면에서 선체까지 밧줄로 유도선을 연결해야 했지만, 물속이 보이지 않아 유도선을 연결하기 위해 손으로 더듬어서 한발 한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빠른 유속으로 인해 자꾸만 꼬이는 유도선을 정리하며 선실과 화물칸 입구와 조타실 등에 도달하면, 유도선을 결박하여 진입로 입구를 확보하고, 그곳을 기점으로 자기 몸의 생명줄을 연결한 뒤에 선체 내부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선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자칫 방향을 잃게 되면 선체 내에서 미아가 되기 십상이었다. 선체로 진입한 후에는 혼잡한 선체 내부를 조명 장비로 비춰서 좁은 시야를 확보한 뒤에 수색해야 하므로 고도로 훈련된 잠수 요원만이 가능한 작업이었다. 작업 일정이 길어지자 차가운 바닷속에서 누적된 피로로 인해 잠수부 중에서도 목숨을 잃는 자가 생겨났다. 잠수 장비는 산소통을 짊어지고 들어가는 스쿠버다이빙 방식과 다이빙 헬멧에 공기호스를 연결하여 외부로부터 산소를 공급받는 머구리 방식이 있었다. 스쿠버다이빙 방식은 물속에서의 작업 지속시간이 최대 30분에 불과했다. 머구리 방식은 서해에서 머구리들이 다이빙 헬멧을 쓰고 40미터 해저 바닥을 걸어 다니며 키조개를 캘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서 한 번에 세 시간 동안 잠수가 가능했다. -184- |
하지만 머구리 방식으로 좁은 선체를 굽이굽이 들어가려면 산소를 공급하는 공기호스가 꼬이거나 절단될 위험이 따랐으므로 처음 한동안은 스쿠버다이빙만을 허용했다. 이에 유가족들이 크게 분노하자, 결국은 머구리 방식을 허용하여 사고 후 6일이 지난 4월 22일에서야 선체 내부에 첫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유가족들은 시체만이라도 온전히 찾기를 바랐지만, 선체가 무너져서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곳도 많았다. 선체가 무너진 곳은 5층 선수의 승무원 객실 통로와 중앙 특실 통로, 4층의 선수 좌현 8인실 통로와 선미 30인실 통로 등 네 곳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수색할 수 없는 구역이 생기자 선체 외판 일부를 절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족들은 시체의 유실을 우려하여 반대했으나 정부가 선체 부근과 외곽에 세 겹으로 유실 방지를 위한 에어백과 그물 및 안강망 등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하여 승낙을 얻어냈다. 승객들이 남아 있는 객실을 예약 현황과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파악하여 수색하였으나 많은 실종자가 발생하였고, 누구도 더 이상의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2층 화물칸은 적재된 차량과 화물로 인해 수색이 불가능했다. 사고 발생 후 3개월이 지난 2014년 7월 14에는 사고 해역에서 사흘 동안 실종자 수색작업을 마치고 복귀하던 강원도 특수구조단 소속 헬기가 산으로 추락하는 바람에 탑승자 다섯이 모두 죽는 -185- |
사고가 발생했다. 그 후 실종자 수색작업은 정부가 수색작업 종료를 결정한 2014년 11월 11일까지 209일간 지속되었다. 생존자 구조작업이 이루어지던 초기에 동지는 팽목항을 찾아갔다. 팽목항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댔다. 맹골수도에서 구조작업을 하다가 복귀해 쉬는 사람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방파제 옆에 모여있었다. “선체 수색작업에 동참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동지가 말했다. “머구리 했어요? 그렇게 안 뵈는데.” “아니, 그런 거 한 적은 없습니다만, 제가 가능한 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장비는 뭐요?” “장비는 뭐라도 여기서 사용하는 걸 주시면 제가 해보겠습니다.” “일도 안 했고, 장비도 없다?” “·····” 동지가 머뭇거리자 그가 소리를 질렀다. “에이 씨팔! 이러는 건 아니지! 아무리 벌어먹기 팍팍해도 그렇지, 여기까지 와서 이러면, 씨팔!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거 아니야?” 그는 세상 더러운 꼴을 다 본 사람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저쪽에 낯익은 경찰이 보이자 쫓아가서 이쪽을 가리키며 무슨 말인가를 -186- |
했다. 그리고 그 경찰이 동지에게로 다가왔다. “가세요! 여기 이분들 정말 목숨 걸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지금은 쉬어야 한다구요. 한가한 분들이 아니에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TV를 통해 여기 사정을 지켜보다가 제가 뭔가 도움이 될 자신이 있어서 온 겁니다. 저는 물속에서 십 분쯤은 숨 안 쉬고도 견딜 수 있고, 그 밖에도 남들이 못하는 여러 가지 극한 상황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일단 한 번만이라도 시험 삼아 동참시켜 주면 안 될까요?” 경찰은 한심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한 듯 바다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파도가 높이 울렁거리는 바다를 가리켰다. “저 바닷속에 깊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저건 풀장도 아니고 거실에 앉아서 보는 TV 화면도 아니잖아요. 저런 일은 따로 전문가가 있는 겁니다. 꼭 하고 싶다면 저기 가족분들이 텐트 생활을 하고 계시니까 저기 가셔서 자원봉사를 하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원봉사에 동참하리라 기대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방파제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어떤 사람은 뭔가 맡은 일을 하느라 의도 있는 움직임을 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맹골수도 방향을 망연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맹골수도는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작은 섬들 뒤쪽 먼 어딘가에 맹골수도가 있다고 했 -187- |
다. 텐트 곁에 설치해 놓은 대형 스크린에 비친 맹골수도에는 거친 파도 사이에서 바지선과 작은 배들이 보였다. 잠수 장비를 머리에 쓴 사람과 맨얼굴인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팽목항에서 보기에 느리고 한가했다. 304명의 탑승객이 파도 아래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은 생각으로만 알뿐이었다. 노인 한 사람이 방파제 앞에서 맹골수도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헌팅캡에 쥐색 점퍼를 입은 노인은 마른 체격에 자세가 반듯했다. 이번 여객선 침몰 사고를 소재로 글이라도 쓰기 위해 타지에서 왔다면 어울릴 차림새였다. 동지는 노인 곁에서 노인이 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노인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처음에는 쪼그려 앉으려 한 듯 보였으나 마음 같지 않았던지 그냥 엉덩이로 주저앉았다. 동지는 얼른 노인을 부축해 안고 팽목항에 나와 있던 이동 구급대로 달려갔다. 그 와중에도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한 시간쯤 후에 정신을 차린 노인과 동지가 구급대 옆에 놓인 철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보아하니 여기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 자원봉사를 하시는지요?” 노인은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도와준 데 대한 고마움이라기보다는 본래부터 말 쓰임새가 그런 것처럼 보였다. “아닙니다. 원래는 실종자 수색에 참여하려고 왔습니다만, 비전문 -188- |
가란 이유로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아, 왜 그랬을까요. 멀리서 돕겠다고 찾아온 분을.” 노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무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선체 수색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들을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현장은 멀리서 본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사정이 있어서 허락받았더라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동지가 물었다. “같은 마음일 테지요. 우리 같은 늙은이야 안타까운 마음뿐이지만. 수색작업에 동참하려는 젊은 패기가 부럽군요,” “TV로 수색작업이 어려운 걸 지켜보다가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달려왔습니다.” “서울에서 오셨나 봐요?” “인사동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아, 인사동, 연 전에 그쪽 탑골공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옛날과는 참 많이 변했더군요.” “·····” “원래 그곳은 탑동공원, 탑골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렸었는데, 아시겠지만, 그 이유는 국보 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중종과 연산군 시대를 거치며 절은 없어지고 지금은 탑과 탑비만 남았지만.” 노인은 숨이 찬 듯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던 1902년에 영국인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공원을 조성했어요. 우리나라 공원의 1호지요. 당시에는 이왕직(李王職) 소유의 공원으로 이왕직 소속 군악대의 연주 연습 장소로 사용되었고, 일요일에만 개방하였다는데, -189- |
명실상부한 공원으로 대중에게 공개된 건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였답니다. 합방되고 나서 공원 내부에 유리온실과 다리가 있는 일본식 연못 등이 생겨나고. 그 밖에도 공중변소와 전등, 수도 설비도 갖추게 되어서, 여름밤이면 경성 시민들이 산책 나와 더위를 식히는 장소가 되었답니다.” “아, 네····” 동지는 잠자코 노인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해방 후에는 공원 주변에 판자촌이 형성되었더군요. 인근엔 ‘종삼’이라 불렸던 사창가도 생겼지요. 그랬는데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불도저’라 불렸던 당시 서울시장이 공원 주변을 정리한 다음에 공원 둘레에 이 층으로 아케이드를 설치했어요. 일본식 철제 정문을 뜯어내고 지금의 맞배지붕으로 교체한 것도 그때였어요. 그런 뒤에 공원을 유료화하였는데, 그 후로는 룸펜이나 노인들이 이용하기가 어렵게 됐다는군요.” “아, 네.” “공원의 운명은 한 번 더 바뀝니다. ´83년에는 아케이드를 철거하고 시원스럽게 시야를 확보하였지요. 그리고 ´88년 올림픽을 기해서 입장료 없는 공원으로 개방하고, 이름을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바꾸었어요. 그때부터 노인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답니다. 원래는 근처의 종묘 공원이 더 판이 큰 노인 집결지였다는데 종묘가 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자 풍선효과처럼 노인들이 탑골공원으로 몰려들어서 지금의 ‘노인 공원’ 이미지가 굳 -190- |
어졌다는군요” “탑골공원에 대해 매우 자세히 아시는데 혹 문화재 관련 분야에서 일하셨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사실은 젊은 시절에 보았던 공원과 많이 달라졌기에 궁금해서 벼락공부를 좀 했어요.” “혹 외국에 오래 계셨습니까?” “이십 대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았지요. 가끔 볼 일이 생길 때면 귀국하였고.” “아 그러셨군요. 그럼, 이번에는···?” “이번에 들어온 이유는 이 나이에 돈 되는 일은 아니고, 어쩌면 이번 여객선 침몰 사고와도 연관이 있긴 하지만····” 노인은 더는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팽목항에서 처음 본 노인에게서 탑골공원 얘기를 듣는 건 뜬금없는 일이었다. 다만 노인의 차림새와 말 씀씀이가 범상치가 않았고 특히 그의 눈빛은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독특한 흡인력 같은 걸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동지는 상경하면 그가 얘기한 탑골공원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인 역시 일부러 팽목항을 찾아온 젊은이에게 색다른 느낌을 받았던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하며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내밀었다. 명함에는 ‘이석홍’이라는 한글 이름과 그 옆에 일본 글자로 쓴 이름이 보였고, -191- |
이름 외에는 전화번호와 역시 일본 글자로 쓰인 주소가 적혀있었다. ‘저는 명함이 없습니다만.’ 동지가 말하자 노인은 휴대폰을 내밀며 전화번호를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계절 시계의 오작동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5월 말에 열대야가 찾아와 사람들이 밤에 다리 밑으로 모여들었다. 6월 초에는 우박이 전국에 쏟아졌고 며칠 후 일산에서 용오름이 일어났다. 태풍 ‘봉퐁’이 지나가고 바로 10월 중순, 가을의 중간에 강원 북부 지역에 난데없이 한파특보가 내려졌다. 그러다가 10월 말부터 다시 기온이 올라 11월 하순에는 섭씨 20도에 이르는 이상 고온을 보이더니, 11월 30일에는 전국에 큰비가 내려 겨울 홍수가 졌다. 슬픔이 장마철 눅눅한 공기처럼 삶의 공간에 빈틈없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향한 애도와 마음속의 분노를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다는 것으로 표시했다. 분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검경합동수사본부에서 10월에 세월호 침몰 원인을 조사해 발표했다. 화물 과적, 무리한 선체 증축, 평형수 부족, 고박 불량(화물과 컨테이너를 선박에 결속하는 것과 화물을 컨테이너에 넣고 고정하는 것) 등의 이유를 들어 침몰 원인을 설명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숨겨진 다른 진실을 찾기 위해 2020년까지 여덟 차례나 더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그 외의 다른 진 -192- |
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가족의 슬픔을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무리가 생겨났다. 유가족 중 일부는 그 세력에 가담하여 힘을 보탬으로써 이득을 취하려 했고, 무리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자신들이 득을 보는 데 도움이 안 되는 말이 포함되면 그 조사 결과는 전면 부인 되었고, 재조사에 들어가야 했다. 너의 자식이라도 그렇게 말하겠느냐는 한 마디에 아무도 이유를 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많은 사람이 시청 앞과 대한문 광장 앞에 추모 텐트를 치고 상주하며 투쟁했다. 투쟁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유가족이 아닌 타인이었다. 정치적인 구호가 난무하면서 아이들을 잃은 슬픔은 색깔이 점점 바래져 갔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힘을 얻지는 못했다. 투쟁 세력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했다가는 바로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리거나 뜬금없는 ‘토착왜구’란 말까지 듣는 분위기여서 웬만한 용기로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사회적 공분 앞에 진실은 점점 힘을 잃었다. 해운회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왠지 크게 낼 분위기가 아니게 변해갔다. 선박을 불법 개조하였다거나, 턱없이 과적하였다거나, 인원을 초과하여 태웠다는 말을 꺼내면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았다. 온갖 억측과 괴담이 난무했다. 처음에 등장한 괴담이 미군 잠수함과의 충돌설이었다. 명문대 교수가 TV에 나와서 그런 주장을 펼 -193- |
치자, 그 주장은 한동안 정설로 굳어지듯 하였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수그러들더니 다시 우리 해군 잠수함과의 충돌설로 탈바꿈하여 등장했다. 우리 해군 잠수함이 무사고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우기 위해 충돌 사실을 숨겼다는 주장이었다. 어느 TV 방송은 일개 네티즌의 소설 같은 잠수함 충돌설을 한 시간 특집으로 내보기도 했다. 한편, 얼굴을 온통 털로 뒤덮은 어느 개인 방송인은 여자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가 세월호를 일부러 침몰시킨 뒤 항적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고의 침몰설’을 내놓았다. 이자는 나중에 그런 주장을 담은 영화를 제작하여 5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44억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항적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통해 선박 상호 간이나 기지국에 자동 송신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배와 기지국에서도 같은 데이터를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항적을 조작하려면 전 세계 기지국의 데이터를 모두 조작해야 하므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괴담을 만들고 이를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괴담이 진실이었고, 합동조사단의 말은 거짓이었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일부러 희생시킬 이유가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따위의 상식적인 질문마저도 용납되지 않았다. 누군가 만화 같은 괴담이라도 한 마디 던져놓으면 그때마다 다시 많은 시간과 예산을 들여 재조사하는 일이 다음 정권이 끝날 때까지 반복되었다. 나중에 세월호를 인양하여 살펴보니 충돌한 흔적은 없었다. 그 많은 괴담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지난 얘기는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194- |
첫댓글 소설 <동지>를 쓰려고 오래 전부터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겠군요. 지나간 사건을 이렇게도 허구가 아닌 사실로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매스컴에 대한 폭넓고 세심한 섭렵이 아니면 불가한 일이지요. 다시금 10년 전으로 돌아가 큰 충격을 주었던 이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음미하면서 작가의 재단에 대해 주목을 하게 되는군요. 소설의 지향점을 나름대로 유추하면서 관심있게 읽게 됩니다. 그럼 즐거운 한가위 연후가 되시기를...
괴담, 협잡, 억측과 험담, 광란의 저주가 난무하고 야합의 정치가 극에 치닿던 수상한 시기, 상식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조작과 음모가 틀림없어보이는 사고가 만들어낸 세월호 사태, 우리나라를 뒤집어 엎으려는 세력이 사회 곳곳에서 발현하는 모습을 목격했지요. 518이후 여러차례 시도했던 사회 동요와 국가에 대한 불신 조장, 더 나가서는 체제 전복의 시도를 노골화한게 세월호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 통해 다행이 우리가 망각하고 있었던,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경각심을 갖게도 하는 반사적인 이익을 얻기도 했지요.
소설이 본격적인 전개의 단계로 들어서는 것 같군요. 어떤 전개가 이루어질 지 기대가 됩니다~
해암의 분석과 정리는 정부에서 발간한 백서보다 더 설득력이 있네요. 그기에 주인공을 픽션으로 넣으니 흥미진진 합니다. 다음 회가 기다려 지네요.
정보통신의 발달이 가져다준 나쁜 결과가 바로 진실은 가려진 채 호도되는 가짜뉴스가 아닐까요. 어떤 사건이 터지면 본말이 전도되고 가짜가 진짜인양 활개치는 세상에서 살고있는 게 현실이지요. 이를 날카롭게 파헤쳐 글로서 절 표현하는 게 작가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