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15 촬영..>>>.
원래 이절터에는 원나라 통래들어온 인도승려 지공이 지은 절터가
있었답니다
무학대사 탑비와 쌍사자석등으로 유명하구요...
이 절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지공의 창건으로 전한답니다...
우왕 2년(1376) 나옹이 다시 지었고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되어 여말·선초에는 번창하였던 사찰이었으나, 명종 때 보우대선사의 실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는 폐사가 되었었답니다요.
<<<제인폭포.... 내려가는계단.>>>>.
지장봉(877m)이 원류인 이 폭포는 한탄강 서쪽에 깊숙이 자리해 있다. 높이 약 18m의 폭포가 이루어내는 맑고 시원한 시냇물과, 주변의 울창한 수풀로 경치가 좋다. 특히 여름과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지요.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고을 원이 한 재인(才人)의 아내가 절색인 것을 보고,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에서 줄을 타게 하여 죽게 하고 아내를 차지하려 하자, 그는 자결하고 말았다. 그 후,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불렀다고 한다지요.
재인폭포에서 한탄강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전곡선사 유적지 한탄강 유원지, 숭의전과 같은 볼거리와 쉬어갈 곳이 많다. 보개산 너머 굽이굽이 연천읍 내산리 가는 길은 선경을 보는 듯하고 동막골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피서지로 유명
<<<<글 사진..홍삿갓..>>>>>
<<<한석봉 글씨 새긴 암벽..>>>>
한호(韓濩, 1543~1605)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서예가일 것.
한호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이라도 한석봉(韓石峰)이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이 최고의 수준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취와 평가 없이 너른 명성을 얻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고.
대중적 명성과 다작(多作)은, 이른바 ‘순수 예술’에서 특히, 그 작품과 작가의 수준에
대한 평가에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고하지요. 간단히 지적한 이런
경향들은 한호의 예술 세계와 적지 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군요.
<<<,미군 사격장... 버려진 폭탄..>>.
<<<< 장락사 앞 전탑..>>>>
모전석탑과 남북 축선을 이루는 건물지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져 모전석탑 조성 시기도 같은 시대로 파악하고 있고.
<<<화적연.. 바위모양..짚단 쌓은 모습... 겸제 정선 그림에도 나옴..>>>>
"'조선 최고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에나와 더욱 유명해진 화적연""'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와 관인면 사정리 경계에 위치한 연못. 영평 8경중 1경으로 임진강 상류에 있고. 마치 볏 짚단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상이어서 화적(禾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그러나 이것은 화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큰 뱀이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형상도 하고 있고. 수면 위로는 높이 13m에 달하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여지도서』에 "화적연(禾積淵)은 영평현의 북쪽 25리에 있는데 강원도 철원부의 경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흐른다."고 되어 있다. 『대동지지』에 "유석향(乳石鄕)은 영평현 북쪽 4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고
. 예로부터 화적연은 기우제터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날 한 늙은 농부가 3년 가뭄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면서 이 연못가에 앉아 한숨을 쉬면서, "이 많은 물을 두고서 곡식을 말려 죽여야 한다는 말이냐? 하늘도 무심커니와 용도 3년을 두고 낮잠만 자는가보다." 이렇게 탄식하자 물이 왈칵 뒤집히고 용의 머리가 쑥 나오면서 꼬리를 치며 하늘로 올라가자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때부터 이 지방에 가뭄이 들면 화적연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답니다요..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우정이 돋보이는 회암사..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절.>>>>
<<수원 용주사.. 사도세자.. 원찰..>>>>
<<<<포천 금수정..>>>>
<<<회암사지 무명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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