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장면 (외 2편)
정익진
화사한 봄날 아침, 청하루 창밖 나무를 바라보며,
새싹이 푸릇푸릇 돋는 짜장면을 주문한다.
아직 잠옷 차림인 종업원이 방을 나와 눈을 비비며
아직 잠든 요리사를 깨운 뒤, 슬리퍼를 질질 끌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창밖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아침 햇살을 애완견처럼 데리고 들어온 세 명의 여중생,
개나리 짬뽕, 진달래 볶음밥, 목련 잡채밥을 시킨 다음,
책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어 국어생물학, 수리관상학, 영어기계학 숙제를 한다.
중국집 문이 열리고 아침햇살 마시며
야채 아줌마가 들어선다. 당근 모양의 감자, 양파 맛 오이,
검은색 토마토, 오렌지 맛 대파를 내려놓고
오토바이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잠시 후, 슈퍼맨 복장을 한 푸줏간 아저씨가 입구와 함께 등장한다.
커피 맛 돼지고기, 카바레용 닭고기, 눈물 젖은 소고기,
기타 치는 오리고기를 바닥에 부려놓고,
봄바람과 함께 퇴장한다.
학생들이 주문한 음식 아직도 나오지 않았고,
저녁노을 번져가는 창밖, 겨울 나뭇가지에 피어난
요리 한 접시.
비트겐슈타인
하지 않았던 말과 하지 않을 말, 그것이 비트겐과 슈타인이다.
밤마다 우리 집 근처에서 이유도 없이 서성이며 휘파람을 불던 그가 바로 비트겐,
곧고 강직한 결코 누워서 자지 않았던 사나이, 슈타인
비트, 비트박스, 비트겐슈타인!
향후 일 년간 우리 학과 지도 교수 슈타인과
환경미화원 비트겐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상기후에 관한 나의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고야 만다.
밤새워 연구 논문을 쓰고 수영장 후문을 빠져나오는 슈타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경마장 셔틀버스를 잽싸게 올라탄다.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한편 청소를 마치고 영안실 입구로 들어서는 비트겐,
보라색 양복을 걸친 그의 왼쪽 주머니에
하늘색 장미가 꽂혀 있었다.
비트겐, 미안하다. 그저 휘파람이나 불며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너에게
영안실을 상속해줄 수 없구나. 다만 네가 홀로 증발하지 않도록, 약속하마.
슈타인, 어떠냐? 아직도 어린 말들과 함께 서서 잠드는지 궁금하구나.
그렇다면 너희들이 결코 할 수 없었던 말과 하지 못할 말들의 의미는?
수박이다. 비트겐과 슈타인으로 쪼개지는, 수박!
넌 언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되었니.
청춘
내가 추억을 떠올리는 가장 익숙한 방식은
빵집의, 벽시계의, 초등학교의, 강아지의 이름이
아니라 배우들의 이름이다
즈느비에브 뷔졸드
그녀였다
서점에서 최신 영화 잡지…… M을 뒤적이다
40년가량 잊고 있었던 그녀를 0.01초 만에 알아보았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녀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직 살아 있어 고맙다, 라고 말할 뻔했다
<천일의 앤>에서 앤 불린을 연기했던 그녀……
머리와…… 얼굴이 유난히 작고 예뻐서 영원히 늙지 않을 거 같았는데
할머니 같은 소녀가 되었다, 즈느비에브 뷔졸드(42년생)
샤를로트 갱스부르(71년생) 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美는 기억의 가치를 한층 높여준다
사르트르도 한때 프랑스였겠지만
줄리 크리스티(라라, 41년생)도 엄청 늙었고
장 루이 트래티냥도 엄청 할아버지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32년생), 데버러 커…… 이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리 마빈, 막시밀리안 셸도 죽었고
말론 브란도(24년생)도 죽었다
그네들과 비슷한 연배인 27년생이신 나의 아버지
정종옥 씨께서는 잉그리드 버그먼을 좋아했고
33년생이신 나의 어머니 배소란 여사는
대머리에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매의 배우,
율 브리너를 무척 좋아하셨다
이빨은 빠지고 허리도 아프시지만
두 분 다 밥 잘 드시고, 잘 계신다
—시집『스캣』(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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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진 / 1957년 부산 출생. 1997년 계간 《시와 사상》에 「콘트라베이스 인상」 외 9편으로 제1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구멍의 크기』『윗몸일으키기』『스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