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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한국문인협회에서 원고청탁을 받는다. 지난 2024년 2월10일에 보내온 원고청탁서이다.
당황스럽기도 꿈같은 순간이리다. 무슨 내용을 어떻게 수필을 작성을 할까.
며칠밤을 헤매다가 아래 두개의 수필을 보낸 것이다.
" 두 수필중에 마음에 맞는 것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 한 마디를 첨가한 것이다.
5월 2일에 월간문학 (月刊文學)지를 배송 받았다.
" 여보 ! 미안하오 "와 " 고종명(考終命) " 이중에 고종명(考終命)이 선택된 것이다.
동기들 여러분들에게 응원에 감사하는 마음뿐으로 수필을 올린 것이다.
읽어보시고 독후감이라도 보내주시면 감사하리라.
2024년 5월 4일(토) 무 무 최 정 남
“ 여 보 ! 미 안 하 오 ”
그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올해가 5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지금 그곳에 가서보면 작디 작은 곳이지만 그때는 상당히 넓은 운동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짜장면 내기 축구시합을 하기도 몇몇번이더냐.
수업료를 제때에 못내어 집으로 쫒겨 보내지면 장충단 공원과 남산에 오른다.
먼 하늘만 바라보며 내 앞날의 꿈도 꿀 수 없었던 처량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곤 한다.
부모님에게는 수업료 못내서 쫒겨 나왔다는 내색도 못하고 김치국물에 얼룩진 책가방을 팽겨치고
동네 친구녀석들과 어울려 뒷동산에 오르기도 한다. 온 동네를 휘젖고 다니며 나도 모를 서러움을 풀곤 했나 보다.
1950년대 60년대는 6.25전쟁 이후에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왕창 태어나는 시기로
그야말로 먹고 살기 급급한 생존을 위한 먹기를 위한 하루 하루였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밑바닥 삶의 연속이었나 보다.
지금은 초등생도 스마트폰을 너나없이 들고다니며 전철이든 버스속이든 길을 걷든 산에 오르든
언제 어디서나 들여다 보고 있는 현실이다. 손가락을 잽싸게 놀리면 무슨 일도 벌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그 때 그 시절 그대들이 코흘리며 옷소매로 코를 닦던 그 세상과는 상상도 못하던 그런 시간속에
지금 그대들이 서있는 것이 오늘이다.
그대들의 자녀들이 스마트폰을 사준다 해도 고개를 저으며 생각만으로도 머리 아픈 것을 무엇하러 갖고 다니겠나이까.
요금도 덜 나오고 통화만 되는걸 가지면 되는 것이지 쓸데없이 낭비하는 모습이 아닌가.
젊은 애들의 행동거지는 그대들의 머리로는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갖고 다닌다고 해도 애들의 10분의 1도 활용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폼으로 들고 다니는 것인지
정녕 이해가 안되는 친구녀석들도 더러는 있기도 하다.
어리디 어린 손주녀석들이라도 매달리면 가뿐히 얼른 안아주지도 못하는 노인네가 아니냐.
“ 아 ~ 이 ~ 구 허리야 ~ ” 소리부터 나오는 것이 그대들인 우리들의 신체 조건일 것이다.
“ 그래, 너희들은 아들 딸이 장가도 시집이라도 갔으니 그런 푸념 아닌 넋두리라도 하리다.
내 새끼들은 마흔이 넘어도 결혼은 커녕 데이트도 변변히 못하는 자식들을 매일 대하다 보면 말 못할 울화통이 치밀뿐이다.
한숨부터 터져나오는 이놈의 내 신세를 너희는 알기나 하려는가.
행복에 겨운 푸념을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는 내 신세 내 팔자 어디다 하소연이라도 할것인가 ”
그대가 고희 칠십에 접어들었으니 내 몸이 예전 같지 아니함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소이까.
세상 천지에 무슨 기계가 하루도 쉬지 않고 작동하고 움직이면서 칠십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으리까.
그래도 그대의 기계는 그런대로 무리없이 먹고 마시고 걷고 달리고 오르고 내리는 데는 아직 큰 지장을 받지 않는게 아닌가.
얼마나 다행이며 크나 큰 축복이며 행복인지를 망우리에 가서 보면 알 것일 게다..
내 몸이 제대로 접어지지 아니함은 근육과 관절들이 이제는 쉬고 싶어하는 것이니 그리 원망만할 일은 아닌 줄 알아야 된다.
귀도 약간 가는 귀가 먹고 시력도 전과 같지 않고 가까이 다가와야만 누구인지 알 수가 있지 않은가.
이런 현상은 너와 나없이 거쳐가야 되는 필수코스인 것을 어찌 할 수 있겠나이까.
아름다움을 뽐내던 장미꽃도 푸른숲을 이루던 무성함도 한여름 거센 광풍이 몰아치고 지나가고 나면
낙엽이 지듯이 바람에 흩날려 버리는 것이다.
자연 철칙인 것이어늘 우리 인간만은 어리석게도 몇백년을 살 수있는 것처럼 기를 쓰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움켜쥐려고만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일까.
당신 곁에 있던 친구들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안녕이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당신 곁을 떠나 버리면 ~ ~ ~
건강 검진 한다고 멀쩡한 정신으로 걸어 들어갔던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어있다.
말도 못하고 당신 자식 당신 남편도 몰라 보고 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정만 멍하니 쳐다보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을뿐이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녀석들은 바쁘다는 핑게로 일주일에 한번 들르다가는
요즘은 한달에 한번도 들릴까 말까하는 정도가 아닌가.
그래도 오면 반갑고 얼마나 그 녀석들이 예쁜지 모르겠다.
당신의 남편이자 애비가 애들에게 배고플세라 손수 밥도 지어준다.
어서 먹으라며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 보아도 그냥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훌쩍 모두 떠나 버리고나면 눈만 껌뻑이던 아내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뿐이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은 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생전에 외국여행 한번 못가 보고 결혼기념일에도 알량한 외식 한번 변변히 못해 주었건만 ㅡ,
집에서 발을 뻗고 편안히 TV라도 보면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 그만이라던 아내가 아니었던가.
당신이 이렇게 오늘이 몇일이며, 무슨 요일인지도, 봄인지, 겨울인지 모른채 누워있는 날도 내일 모레면 3년이 되나보다.
몇시간 거래처를 돌고 들어오면 그래도 당신은 “ 어서 오세요 ” 라는 인사를 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미동이 느껴지기도 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당신이 내 곁에 있어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소이다.
아직도 예전처럼 당신의 체온을 느끼노라면 그냥 이대로만 계속 있어만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바램인 것을 어찌 하겠소이까.
오늘도 당신을 목욕시키면서 너무 가벼워진 당신의 가녀린 마른 모습에 또 한번 가슴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산에 가노라면 다람쥐처럼 나보다도 날쎄게 뛰듯이 신이나서 오르내리던 당신이 아니였는지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도 같소이다.
당신이 어느날 방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사뿐이 일어날 그날만을 학수고대하며 밤마다
눈물로 빌며 기원하곤 하던 날이 얼마였는지 당신은 모르겠지요.
이제 그만하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견뎌온 남편이건만, 더 이상 당신을 내가 행복하자고,
내가 당신의 체온이라도 느끼려고, 붙들고 있기에는 아무 말을 못하는 당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어찌 해야 좋을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도 않는구려.
신혼여행 때 찾아왔던 대웅전 앞 마당엔 지금 하얀 목련꽃이 활짝 피어 있다.
산속 외진 곳에 홀로 핀 목련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당신이었건만 지금은 어찌하여 아무말도 아니 하나이까.
사십여년전 당신과 손을 잡고 스님의 목탁소리와 염불소리에 매려되어 하룻밤을 지새우며
그 많던 희망과 꿈을 수없이 노래하며 속삭이던 산사(山寺)가 아니던가.
지금 당신의 귀에는 저 스님의 청아한 목탁소리도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그때 대웅전 기둥에 인간일세여몽중(人間一世如夢中)이란 글귀가 지금도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인간이 태어나 한 세상 사는 것은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같다는 그 뜻을 되새기며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바램은 정녕 꿈일런지도 모르겠소이다.
“ 여 ~ 보 ~ 오 ~ 오 ~ ~ ~ 이젠 아무 고통없이 아무 걱정도 말고 당신이 그토록 다시 오고싶어하던 바로 그곳 산사입니다,
그윽한 목련꽃 향기와 하늘 높이에서 저렇게 애타도록 울부짖는 까마귀 소리에 목이 메이고 맙니다.
청아한 목탁소리를 함께 들으며 저 멀고 먼 하늘 나라에서 고이 잠드소서 ”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나는 또 한번 가슴이 무너져 내려앉고 만다.
사십년전 결혼을 할때 내 한달 봉급이 3만원 정도였으니 친구 전당포에서 거의
두달 월급을 주고 싸게 구입하여 좋아라 하던 당신이 아닌가.
식장에서 당신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던 그 다이야 반지를 곱게 싼 종이에는 ---
“ 혹시 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 저 머나 먼 하늘나라로 가게 된다면 이 반지를 우리 며느리에게 끼워 주세요,
인공적으로 나를 붙들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그대로 편안히 보내주세요,
그 동안 고마웠고 정말 당신을 사랑 했습니다, 당신보다 먼저 가서 미안해요,
건강하게 기죽지 말고 애들과 함께 잘 살아주세요, 나의 몫까지 건강하게 살아주세요,
여 ~ 보 ~ 오 ! 그럼 안녕히 ~ 영원한 당신의 아내가 ”
나는 그만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힘들어 하며 괴로워 했을런지 말도 없는 당신의 마지막 소원마저 알지 못하고
몇년을 붙들고 헤매었으니 말입니다.
“ 여 ~ 보 ! 그저 미안 하오 ~ 이젠 편히 잘 가시오 , 정말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
" 아니 ~ 당신은 ~ 약국에 나가야죠, 벌써 여덟시가 ~ " 화급한 아내의 일갈(一喝)이다.
온 몸에는 땀이 흥건하고 넋이 나간 몰골이 아닌가.
고 종 명(考 終 命)
“ 내가 아직 못 해 본 것은 고 종 명(考 終 命)이야 ”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어느 날 무심코 지나치던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느릿 느릿한 목소리의 주인공에 시선이 고정되고 만다.
배경은 어느 산골 오지로 사면은 산으로 에워 쌓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깊이 패인 주름살이 크로즈엎되는 순간이다.
두 분이 부모님의 중매로 백년가약의 혼례를 치른다.
60년이 넘어 회갑혼을 치른지도 4년이 지나고 80대 중반에 접어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다.
“ 흙으로 지은 집이 처음엔 그렇게도 대견하고 대궐 같더니 60년이 지나니
이렇게 오막살이가 되어버리고 형편없이 되어버렸다 " 고 할머니의 넋두리는 계속되고 ...
사실은 가난이 너무 지겹고 사람이 그리워 보따리를 수 없이 쌌지만 친정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한 번도 마음 내킨대로 해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줄줄이 여섯이나 낳아서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공부도 못 시켰지만
지금은 모두 도회지로 나가 손자 손녀들 잘 낳고 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 저희들이 바빠서 못 가겠어요 " 자식들이 하는 소리이다.
일년에 한번 보기도 힘들다니 어느새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엔 알게 모를 원망같은 눈물이
거칠은 뺨을 적시고 긴 한숨소리에 가슴은 무너지고 만다.
쓸 데 없는 소리한다며 면박을 주는 할아버지의 얼굴엔 아내에 대한 연민과 미안하고 안스러움이 그대로 배어 나고 있다.
“ 그래도 나와 님자는 오복을 타고 난 사람들이야 ” 하며 분위기를 바꿔 보지만
아내는 돌아앉아 하염없는 눈물로 마음을 추스르려 애쓰는 모습이다.
아마도 남편의 마음도 무너지나 보다.
아내는 치마폭을 훔치며 텃밭으로 가버려도 할아버지의 삶에 배어나는 절절한 이야기는
대학 강단에서도 들을 수 없는 살아 숨쉬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런 산골짜기에 살지만 오복중에 네 가지는 갖고 있으니 복(福)에 겨운 사람이고
한 가지 남은 고 종 명(考 終 命) 이것은 나도 모르고 마누라도 모른다는 말씀이다.
“오복(五福)이 무엇이냐면 말이야 ~ ~ ~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이것이 바로 오복인 게야,
나는 팔십을 넘게 살고 있으니 수(壽)를 누렸고, 자식도 많이 낳고 부족한게 없으니 부(富)도 가진 것이고,
이렇게 팔 다리 멀쩡해서 나무도 패고 산 나물을 캐러 산에 오를 정도면 강녕(康寧)한게고,
나는 스스로 남에게 베푼 것은 없으나 선비 정신으로 자식들에게 덕(德)을 쌓으라 강조하고 살고 있으니,
이 또한 유호덕(攸好德)하달 수 있는 게다.
허지만 아직 못 다한 것은 고종명(考終命)일 뿐이지 --- ”
자기 수명대로 천수(天壽)를 다 하고 편안히 눈을 감고 삶을 마감할 수만 있으면
그 때야 고종명(考終命)으로 오복(五福)을 다 가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리라.
할머니가 깻닢을 한 소꾸리 따다가 한 묶음씩 묶으면서 하는 말씀은 이걸 읍내에 장날에 갖다 팔아야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고등어랑 막걸리를 사다드린다고 함박웃음을 머금으시고 있다.
시장 상인들은 40개씩 묶어서 3개 천원인데, 할머니는 40개씩 묶어 4개씩파는데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5개씩 집어 가지고 가곤 한단다,
하지만 밑지지는 않으니 다 팔고 집에 돌아올 때가 좋다는 웃음이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 것도 못 갖고 가는데 웬 욕심들이 많은지 모르겠다며 옆에 있는 남편과 약속이나 한 듯이
“ 인간은 말야 !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야 ”하며
앞에 놓인 깻잎 보따리를 한사코 들려주시면서 하시는 한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 마음은 아직 이십 삼십대 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들으니 나이는 어쩔 수 없나봐 ”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며 파아란 하늘 쳐다보시는 모습이 아마도 사람이 그리워 못내 아쉬워 하시는가 보다.
화면속에서 하신 할머니의 말씀이 내 어릴 때 어머님이 내 아버님께 하시던 그 모습이 가슴을 흔들고 있다.
여름이면 언제나처럼 하얀 모시옷을 빳빳이 풀을 먹여 정성껏 아침마다 다려 아버님께 입혀 주시곤 한다.
그 손길과 눈길에서 말은 없어도 흐뭇해 하시던 어머님 모습에서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님의 상(像)을 보곤 한다.
그리고 아버님이 그 토록 즐기시던 막걸리와 녹두 빈대떡의 향수가 묻어 난다.
“ 님자 ! 또 섞었군 ” 한입 잡수시곤 늘 하시던 불만 섞인 한 말씀이 어머님을 매몰차게 나무라시지만
내 어머님은 한 마디 대꾸도 없으시다.
이럴 땐 제 어린 마음에 무척이나 속상했고 어머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밉기도 하다.
내 아버지는 순수 녹두로만 빈대떡을 원하시지만 우리 오마니는 한번도 남편의 말을 절대로(?) 들으신 적이 없나 보다.
" 내래 식구가 많으니까네 어~카~간 ~ 비싼 녹두만으론 감당이 되갔네 ~ "
다른 모든 일에는 절대 복종하면서도 이북 사투리의 한 말씀도 우리가 훌쩍 커버린 다음에야 들려준 이야기이다.
화면속에 두 분을 보며 나를 낳아 키워주신 부모님과 머지않아 닥쳐올 내 모습과 과연 저렇게 아름답고 애틋한 모습으로
내 후손 자식들에게 비춰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 수(壽) 부(富) 강녕(康 寧) 유호덕(攸 好 德) 고종명(考 終 命) ”
*** 추석 명절 며칠전 부모님이 계신 공원묘지에 가서 너무나 몰라보게
뒤덮혀 버린 잡초를 뽑으며 또 뽑으며 살아 생전에 항상 하시던 말씀이 가슴을 적십니다.
“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먹고 살며 어떻게 이북 고향을 찾아 가겠는가 ”
하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그 모습이 이 못난 아들을 더욱 초라하게 하나 봅니다.
그래서 난 언제부터인가 추석이나 구정 명절이 돌아오면 그토록 싫고 ~~~
고향 찾아 몇 시간씩 고속도로를 메우는 차량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
실향민의 아픔을 그 누가 언제나 어루만져주리까 하는 서러움에 밤잠을 설치곤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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