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는 총 22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중 작곡 도중 포기하여 미완성으로 끝난 오페라는 차이데(Zaide),
카이로의 거위(L'oca del Cairo), 속아넘어간 신랑(Lo sposo deluso) 3개이며 징슈필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은 모차르트와 다른 네 명의 작곡가의 공동작품이다.
또 이집트의 왕 타모스(Thamos, König in Ägypten)는 온전한 오페라가 아니고 일종의 음악극에
사용된 부수음악이다. 따라서 22개의 오페라 중 제대로 완성된 오페라로 볼 수 있는 것은 17개이다.
단명한 그의 나이를 감안해야겠지만 일단 절대 갯수로만 보면 17개는 당시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수에 비해
상당히 적은 숫자이다. 게다가 17개의 오페라들 중 모차르트의 진가를 보여주는 진정한 명작은
원숙기의 4작품(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반니, 코시 판 투테, 마술피리)이며, 여기에 이도메네오, 후궁으로의 도피,
티토 황제의 자비를 포함하여 총 7작품 정도를 걸작군으로 파악한다. 결코 많지 않은 단 7개의 작품만으로도
그는 현재까지도 베르디, 푸치니, 바그너, 로시니 함께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손꼽히고 있다.
'최고'라는 칭호는 결코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내용상으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크게 3개의 장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신화나
고대 영웅을 소재로 하는 3막의 이탈리아 오페라), 오페라 부파(Opera Buffa-희극이나 笑劇적인 내용을 가진
이탈리아 오페라) 그리고 오페라 징슈필(Opera Singspiel-대화에 음악이 삽입된 독일 오페라)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한다.[1] 다만 현존하는 그의 최초의 오페라인 "최초이자 최고의 계시에 대한
책무(Die Schuldigkeit des ersten Gebots)"나 몇몇 단막극처럼 딱히 장르를 구별하기 힘든 작품들도 있다.
2. 모차르트 오페라[편집]
2.1. 초기 오페라[편집]
모차르트가 빈으로 오기 이전에 작곡된 오페라들은 이도메네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당대의 오페라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모차르트의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원숙한 작법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나이를 감안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10대 초 중반의 나이에 큰 규모의 오페라를 여럿
작곡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11세에 모차르트는 앞서 이야기한 '최초이자 최고의 계시에 대한 책무' 및 찰츠부르크 대학의 요청으로
오비디우스의 라틴어 대본에 의한 '아폴로와 히아킨투스(Apollo et Hyacinthus)'를 작곡한다.
[2] 이듬해에는 모차르트 최초의 징슈필 '바스티안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 K.50)'와
최초의 오페라 부파 '어리석은 아가씨(La finta semplice, K.51)'가 작곡되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공연되지는 못했다.
모차르트 최초의 오페라 세리아는 이탈리아 여행중이던 1770년 밀라노에서 작곡된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87)'인데, 이 미트리다테는 모차르트 작품 중 최초의
대규모 오페라이자 제대로 공연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큰 성공까지 거두었다. 이 성공에
고무되어 이듬해에는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K.111)', 그 이듬해에는
'루치오 실라(Lucio Silla, K.135)'를 잇따라 상연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상연된 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세리아들은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의 작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당시에 오페라 작곡가들은 극장주에게 휘둘리고 가수에게 휘둘렸기 때문에 거의 을의 입장에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이런 탓에 오페라 세리아는 주로 중창이나 합창이 거의 없이 아리아와 짧은
레치타티브 위주로 진행되며[3] 각 아리아는 가수들의 가창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가사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고난이도의 기교와 화려한 선율 일색으로 꾸며진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극음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등장인물들은 이렇다 할 개성을 갖추지 못하고 죄다 노래솜씨만 뽐내는 수준이며, 극의 구성에 가장 중요한
사건의 개연성 따위는 산으로 가버린다.[4]
모차르트의 오페라 미트리다테, 당시 의상과 분위기를 매우 잘 재현한 공연이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상연된 세 오페라를 작곡하는 막간에 모차르트는 자신의 고향 찰츠부르크에서
단막의 소오페라 '시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K.126)'을 대주교의 저택에서 공연하였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익힌 오페라 수법을 대주교 앞에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2.2. 발전 도상의 오페라[편집]
루치오 실라를 상연한 이후 모차르트(정확하게는 모차르트 아버지 레오폴트)는 이탈리아에서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일단 찰츠부르크로 복귀한다. 찰츠부르크는 작은 도시로
오페라를 공연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에 1773부터 빈으로 떠난 1781년까지 찰츠부르크에
적을 두고 있던 시기의 오페라는 주로 구직활동을 하는 중에 작곡되었으며 그래서 그 수가 많지 않다.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오페라는 1775년 뮌헨에서 상연된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 K.196),
1781년 역시 뮌헨에서 상연된 이도메네오(Idomeneo, re di Creta, K.366), 빈 시절 초기에 상연된 후궁으로의
도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K 384) 및 미완성으로 끝난 차이데(Zaide, K.344, 1779년경),
그리고 단막 오페라인 극장 지배인(Der Schauspieldirektor, K.486, 1785년)이 있다.[5]
모차르트가 18살때 작곡한 가짜 여정원사는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중에 원숙한 후기 오페라를 예견하는
중요한 특징들이 나타고 있다. 이런 발전은 기본적으로 오페라의 대본의 수준이 그가 기존에 받았던 대본보다
한차원 높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6] 이 작품은 오페라 부파로 분류되긴 하지만 등장인물 중에는
오페라 세리아에 더 어울리는 진지한 인물들도 있으며 단순히 웃고 즐기는 희극으로 보기에는
비극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오페라 부파대신 드라마 지오코소(Dramma Giocoso)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한 사건전개가 나름 현실감이 있고 등장인물들도 전형성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개성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대본에 스토리다운 스토리와 인물묘사가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극의 내용과 인물에 맞추어
음악을 만들 수 있었고, 모차르트는 이 때 좋은 오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대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7]
모차르트가 차이데의 작곡을 중단한 이유도 역설적으로는 이러한 깨달음 덕분이었는데, 현재 차이데의 대본이
실전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대본의 내용과 수준은 알 수 없으나 작곡이 중단된 부분까지의 내용으로 유추해보면
기본적으로 스토리상의 모순이 많아서 후반부로 갈수록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대본자체의 부실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고 결국 대본의 한계 때문에 스토리의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작곡을 중단한 것이다.[8]
이처럼 오페라의 스토리를 중요시하고 오페라의 분위기와 음악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는 모차르트가 최초는
아니었다. 모차르트보다 한 세대 선배인 크리스토퍼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은
당시 가수들에게 휘둘리는 오페라계의 분위기를 극복하고 음악은 어디까지나 극의 내용과 가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가 1769년 출판한 알체스테(Alceste)의 서문에는 오페라에 대한
그의 이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시는 음악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종속한다.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
가수의 기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가능한 한 배제하여 단순한 기법을 쓴다. 악기는 막의 상황에 따라 알맞게 선택되어야 한다. 서곡을 극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계지어야 한다. 합창, 춤, 무대장면, 무대효과 등은 극정인 명확함을 위해 통일성을 갖게 해야 한다.[9]
모차르트도 이러한 글룩의 오페라철학을 알고 있었으며 발전기를 대표하는 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는
바로 이런 개혁의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다. 애초에 이 오페라의 대본에 글룩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는데,
오페라의 대본을 맡았던 지암바티스타 바레스코(Giambattista Varesco, 1735-1805)가 글룩의
오페라 타우리드의 이피게니(Iphigénie en Tauride)나 알체스테의 대본을 담당했던
칼차비치(Raniero de Calzabigi)의 영향을 받아 극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중간중간 합창/발레/행진곡 등이
많이 삽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프랑스 오페라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뮌헨 관객들에게
이런 프랑스 스타일이 먹힐지 확신하지 못한데다 당시 이탈리아식 오페라에 익숙해 있던 가수들을 설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좀더 이탈리아식 오페라 세리아에 가깝게 수정을 요구했다.
대신 모차르트는 글룩의 오페라철학을 그대로 계승하여 진정한 의미의 극음악을 추구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구습에 물들어 있던 가수들과 끊임없이 실랑이를 해야 했으며 대본작가 바레스코에게도 자주 대본을
수정해달라고 설득해야 했다.[10] 음악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고 징징대는 가수들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도메네오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음악적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이도메네오 이후에도 인상적인 오페라들을 많이 쏟아내는 바람에 대중적인 인지도에서 이들 후기 오페라에 밀려 버리긴 했지만 이 이도메네오는 단순히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세리아 뿐만 아니라 역대 유럽에서 작곡된 모든 오페라 세리아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11][12]
한편 빈 시절 초기에 상연된 후궁으로의 도피는 성공에 목말라 있던 모차르트가 철저하게 흥행을 계산하고
만든 징슈필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는 1781년 10월 러시아 대공 파울 페트로비치(Archduke Paul Petrovich)의
빈 방문 환영작으로 위촉되었는데, 대공의 방문 일자가 연기되었다가 다시 잡히면서 상연작품이
글룩의 타우리드의 이피게니와 알체스테로 바뀌게 된다. 이런 이유로 자칫 빛을 보지 못할뻔 했던 작품이었지만
독일어 오페라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의 배려로 1782년 7월 극적으로
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상연될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마음고생도 많았지만[13] 상연이
지연되었던 것이 한편으로는 전화위복이 되었는데,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대본도 좀더 충분히 수정을
가할 수 있었고 작곡도 좀더 충실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도 그만큼 높아졌다.
원래 징슈필은 희극적인 내용을 담은 소박하고 단순한 음악극이었다. 하지만 이 후궁으로의 도피는
기존의 징슈필과 달리 상당히 규모가 크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서 화려한 아리아가 많이 등장한다.
본격 오페라 장르로서 징슈필의 가능성을 확인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14] 다만 초연에 참석한 요제프 2세는
징슈필의 소박함과 단순함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탓에 오히려 이 오페라의 화려함과 복잡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초연이 끝난 후 황제는 모차르트에게
'친애하는 모차르트군, 우리 귀에는 그대의 음악이 너무 아름답고 또 음이 너무 많은 것 같네.'라고 불평했는데
모차르트는 '폐하, 음은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2.3. 원숙기의 오페라[편집]
중요한 오페라들이므로 따로 항목이 작성되어 있으니 자세한 것은 해당 오페라 항목을 참조하자.[15]
'후궁으로의 도피' 이후 몇년간 모차르트는 몇년간 연주활동 및 기악음악에 몰두하면서 오페라와 거리를 둔다.
모차르트가 빈으로 건너와 한창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베니스 출신으로 빈 왕립극장에 재직 중인 뛰어난
대본작가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있었다. '후궁으로의 도피'가 성공을 거둔 이후,
차기작의 대본을 그에게 의뢰하는데 '다 폰테'는 당시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비롯해서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 의뢰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모차르트에게 대본을 써줄 형편이 안되었다. 두 사람은 1783년
베츨랄 백작 집안의 만찬에서 만났는데 당시 다 폰테는 모차르트로부터 의뢰를 받고 몇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모차르트와 다 폰테 둘 모두 너무 바빴던 관계로 대본을 주겠다는 약속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그렇다고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도메네오에서 역량을 보여준 대본작가 바레스코에게 다시
대본을 의뢰하여 '카이로의 거위(L'oca del Cairo)'라는 제목의 대본을 받는데 바레스코는 오페라 부파에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대본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모차르트는 몇 곡 작곡을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이후 작가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가짜 여정원사의 대본작가로 알려진 페트로셀리니로 추정하고 있다)
'속아넘어간 신랑(Lo sposo deluso)'의 대본을 받아 작곡에 착수하는데, '카이로의 거위'만큼 망작은 아니었지만
역시 오페라로 상연되기에는 문제가 많은 대본이었다. 대폭 수정이 불가피했는데 모차르트는 그냥 작곡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2.3.1. 피가로의 결혼(1786)[편집]
1785년 드디어 모차르트는 '다 폰테'로부터 대본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대본은 1년 전에 프랑스에서 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둔 보마르셰의 희극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 1784년)'에 기초한 것으로 귀족들의
타락과 위선을 조롱하는 내용 때문에 빈에서는 상영이 금지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연극의 작품성에 주목한
다 폰테는 민감한 내용을 빼거나 순화시킨 후, 남녀간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로 테마의 방향을 바꾸어서
상연허가를 얻어냈다. 그리하여 모처럼 오페라를 작곡할 기회를 얻은[16] 모차르트는 이 곡의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듬해 초연되었고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이 피가로의 결혼은 글룩이 주창한 '극과 음악의 일치'를 한 단계 뛰어넘은 작품이었다.
이 오페라에서는 역할이 있는 등장인물이 무려 11명이나 되는데 각 배역은 서로 긴밀한 상호관계를 갖고
공연 내내 바쁘게 움직인다. 게다가 각 배역들은 노래솜씨 뿐만 아니라 연기력와 춤솜씨도 갖추어야 하며
호흡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쉽게 말해 혼자 '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혼자 '처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비록 원작의 풍자와 신랄함이 희석되고 좀더 가벼운 희극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원작의 깊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성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어서 일종의 심리극의 경향도 있다.
또한 일종의 도덕론 차원에서 남녀관계에 대한 문제도 제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주제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들이다. 덕분에 피가로의 결혼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상연되는 오페라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사랑받는 명작으로 남아있다.
2.3.2. 돈 조반니(1787)[편집]
이 피가로의 결혼은 빈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라하에서는 한층 더 큰 환영을 받았다.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한 프라하의 극장주 파스쿠알 본디니(Pasquale Bondini)와 요제파 듀섹(Frantisek, Josepha Dusek)
부부는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작품을 의뢰하였고 이에 모차르트는 다 폰테와 함께 또하나의 야심작을 준비하는데,
이 작품이 바로 돈 조반니이다. 음악적으로 걸작일 뿐만 아니라 나름 철학적인 주제를 제시하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오페라의 주인공 돈 조반니는 14세기(또는 그 이전)에 있었다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호색가 '돈 후안(Don Juan)'을
모델로 한 인물로 오페라 내내 쉴 새 없이 엽색행각을 벌이고 못된 짓을 하다가 참회를 거부하고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데, 이 돈 조반니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단순히 보면 이 돈 조반니는,
오직 자신의 쾌락을 위해 윤리 따위는 아랑하지 않는 악인(일종의 사이코패스)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인습과 구차한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으며 설령 지옥에 갈 지언정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일종의 자유주의자이다.
후자의 해석은 몰리에르가 자신의 희곡, '동 쥐앙(Don Juan)'에서 묘사한 주인공 동 쥐앙의 인물상과 일치한다.
지옥에 떨어지고 마는 돈 조반니의 최후는 분명 권선징악 또는 인과응보의 결과이지만 통쾌함보다는
오히려 비극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이 오페라는 유쾌함과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오페라 부파가 아니라
일종의 (안티)영웅의 영욕과 몰락을 그린 비극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멕베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멕베스는 분명 악인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그의 몰락이 그리 기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에서 초연된 돈 조반니는 '피가로의 결혼' 못지 않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듬해 빈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몇몇 아리아와 레치타티브를 추가하여 상연하였음에도 기
대만큼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돈 옥타비오의 아리아 Dalla sua pace(테너 모렐라를 위해 작곡, K.540a), 레포렐로와 쩨를리나의 듀엣 Per queste tue manine (K.540b), 돈나 엘비라의 아리아 Mi tradi quell'alma ingrata (K.540c), 기타 일부 아리아 사이에 레치타티브가 추가되었다. 오늘날에는 주로 빈판으로 연주하는데 다만 K.540b는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빈에서 이 작품을 관람한 많은 사람들은 돈 조반니가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음악이 너무 복잡한데다 악한인 돈 조반니의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가치 중립적으로 다루어지는 등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초연을 관람한 하이든은 이 작품을 매우 높게 평가했으며 "이 작품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모차르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이다.'라는 논평으로 사람들의
불평을 한방에 평정시켜버렸다.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는
2.3.3. 코지 판 투테(1790)[편집]
1790년에는 다폰테 3부작의 마지막인 코지 판 투테(Cosi fan Tutte, K.588)가 빈에서 상연되었다.
제목을 번역하면 '여자는 다 그렇다' 정도의 뜻이 되는데 돈 지오반니와는 다른 차원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남자들이 자기 약혼녀들의 정조관념을 시험한다는 스토리는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그간 이 오페라는 여성에 대한 이런저런 편견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때문에 여성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19세기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제대로 상연되지 못했던 흑역사도 있다.
사실 이러한 여성관은 모차르트보다는 다 폰테에 의한 것인데, 다 폰테 본인이 호색한에 문란한 생활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학자들은 돈 지오반니도 다 폰테의 아바타에 해당되는 캐릭터로 평가하기도 한다.
한편 다 폰테는 코지 판 투테의 피오르딜리지 역에 자신의 정부(情婦)였던
아드리아나 페라레제( Adriana Ferrarese)를 억지로 밀어 넣었는데, 모차르트는 실력도 별로인데다
자기 남친을 등에 업고 콧대 높게 구는 페라레제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념 차원에서 보면 코지판 투테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 20세기 이전의 대부분의
오페라가 남녀차별적이다. 오페라에서 여성은 항상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약자로 등장하며 사랑에
목을 매고 남자에게 버림받으면 망가지거나 자살하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혹시나 그렇지 않은 여자들은 대개 행실이 문란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사이코패스이거나
기타 등등 부정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투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오페라로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정조를 직접적인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은건 분명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이 오페라만 남녀차별 오페라로 단정하는 건 억울한 측면이 있다. 여튼 이 코시 판 투테는
이전의 다 폰테 오페라에 비해 내용이 좀더 단순하고[17] 돈 지오반니처럼 복잡한 복선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음악은 전술한 이념논란을 덮고도 남을 수준으로 훌륭하며, 그래서 한동안 상연이 금기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는 다시 각 오페라단의 중요한 레파토리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2.3.4. 마술피리(1791)[편집]
1791년 9월 자신이 죽기 2개월 전 최후로 상연된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 620)는 2막으로 된
징슈필이며 독일어로 된 오페라 가운데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런
평가가 좀 의아한 것이,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동화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하며 결말도 평범하게
권선징악으로 끝난다. 게다가 1막과 2막에서 선인과 악인이 뒤바뀌고 우스꽝스러운 인물
(파파게노, 파파게나, 모노스타토스)과 진지한 인물(자라스트로, 파미나)이 공존하며 어떤 대목에서는
유치할 정도로 웃기다가 어떤 대목에서는 너무 진지해지는 등 일관성이 없이 뒤죽박죽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스토리와 캐릭터 구성이 극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마술피리의
파격적인 스토리와 캐릭터에 대해서는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는데 아직까지 확실한 정설은 없다.
또한 이 오페라의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대본작가인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 1751-1812)가 모두
프리메이슨 소속이었기 때문에 이 마술피리가 자유, 평등, 박애를 모토로 하여 평화스런 이상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프리메이슨의 이념이 담긴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쉬카네더는 직업이 참 다양한데,
빈 오페라 극장의 '경영자'이자 '오페라 대본 작가'이자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프리메이슨'이다.
실제로 오페라 중간중간 보편적인 인류애나 사랑을 주창하는,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손발이 살짝
오그라드는 수준의 도덕강의식 대화나 노래가 나온다. 마술피리가 상연되기 전 해에 모차르트와
4작곡가가 공동으로 작곡한 오페라,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 역시 이와 같은 프리메이슨의
이념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과 관련된 5명이 모두 프리메이슨 소속이었으며, 팔방미인
쉬카네더는 이 작품에서도 대본과 작곡을 함께 맡았다. 참고할만한 것은 이 5명은 마술피리의 초연에서도
각자 대본/작곡/연주를 담당하였다는 점이다.
스토리 만큼이나 이 작품에서 구현되는 음악의 종류도 다양한데, '파파게노의 아리아'에는
당시 빈 지방에서 유행하던 민요나 유행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밤의 여왕의 아리아'는 이탈리아 풍의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아리아의 끝판왕급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모노스타토스의 아리아'는 전형적인 오페라 부파 스타일이다. '타미노와 자라스트로의 아리아'는
단순하면서고 간결하며 '파미나의 아리아'는 순수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다.
이처럼 마술피리의 음악은 당시 유행하던 모든 성악분야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일종의 베스트 선곡집이다.
친근함과 깊이를 모두 갖춘 작품으로 이 마술피리보다 더 성공적인 작품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여담으로, 오페라 마술피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아래 영상의 노래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라는 곡으로
매우 유명하다. 노래 자체도 이미 유명하지만,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소프라노 조수미가 불렀던 노래로도
굉장히 유명하다. 제목을 보고도 못 알아 듣는다면 '조수미가 높은 음으로 부른
아아아아아아아아~[18] 하는 노래'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무슨 노래인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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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마술피리,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 마시모극장 오케스트라
2.3.5. 티토 황제의 자비[편집]
이 티토 황제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K.621)는 이도메네오 이후 오페라 부파/징슈필에 몰두하던
모차르트가 모처럼 작곡한 오페라 세리아로서 일종의 외전(外傳)격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가 한참 마술피리를 작곡하는 도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가 사망하고 보헤미아 왕인
레오폴트 2세가 황제 자리를 계승했는데, 모차르트는 프라하에서 열릴 그의 대관식을 축하할
오페라작품을 급하게 위촉받아 단 3주만에 작곡을 완료하였다(좀더 정확하게는 완료해야 했다[19]).
경축의 의미를 지녀야 하기 때문에 레오폴트 2세를 상징하는 티투스 황제가 지혜와 덕망을 모두 갖춘
성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대본을 고치고 어쩌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스토리 자체는
진부한 오페라 세리아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20] 오페라의 형식도 아리아와 레치타티브
위주의 전형적인 세리아 문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원숙기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자주
언급되지 않는 편이며 공연도 뜸한 편. 다만 날림 수준으로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자체는
더 없이 아름답고 훌륭하여 절정에 올라있는 모차르트의 역량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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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콜린 데이비스경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