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신춘문예 당선 작품 < 詩 > - 제2부
< 작품 및 심사평 / 2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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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귤이 웃는다 / 백숙현/ 강원일보
2. 산책/ 차수현/ 경남도민신문
3. 레드문/ 권영유/ 경남신문
4. 시소/ 김현주/ 경상일보
5. 세계,고양이/ 김현주/ 경인일보
6. 버터/박선민/경향신문
7. 연착/ 노수옥/ 광남일보
8.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최주식/국제신문
9. 구 일째/ 황정희/ 농민신문
10. 묘목원/ 권승섭/ 동아일보
11. 박스에 든 사람/ 박장/ 매일신문
12.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안시표/ 무등일보
13. 백자가 되어가는 풍경/ 김혜린/ 문화일보
14. 극장의 추억/ 이상록/ 부산일보
15. 청벚보살/ 이수진/ 불교신문
16. 볼트/ 임후성/ 서울신문
17. 드라이아이스-결혼기념일/민소연/세계일보
18. 데칼코마니/ 한이로/ 영남일보
19. 숲을 켜다/조이경/전라매일
20.홈커밍데이/ 이진우/ 조선일보
21.맬로영화/ 이진우/ 조선일보
22.가장 낮은 곳의 말/ 함종대/ 전북도민일보
23. 활어 / 황사라/ 전북일보
24. 당산에서/ 신나리/ 한국경제
25.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이예진/ 한국일보
26. 결빙/ 윤계순/ 한국불교신문
27. 책을 끓이다/ 장현숙/한라일보
28. 오아시스 편의점(시조) / 김미진/한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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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청벚 보살
이수진 / 2023 불교신문
개심사 청벚나무 가지에 연둣빛 꽃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 것일까
가지 하나 길게 내밀어 법당에 닿을 듯하다
꽃이 맑다
매화나무는 목탁 두드릴 때마다
꽃잎으로 법구를 읊고,
청매화는 동안거 끝에 심욕의 수피를 찢어
꽃망울 터트린다
저토록 신심(信心)을 다져왔기에
봄이 일주문에 들어설 수 있다
가지마다 허공(虛空)으로 낸 구도의 길
제각각 가부좌 틀고 참선의 꽃들을 왼다
전각에서 내리치는 죽비소리
제 몸 쳐대며 가람으로 흩어지는 풍경소리
합장하듯 꽃잎들 맞이하고 있다
법당은 꽃들의 백팔배로 난분분하다
부처가 내민 손바닥에
청벚꽃잎 한 장 합장하듯 내려앉는다
16. 볼트
임후성 / 2023 서울신문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심사평>
코끼리와 사회의 연결, 그 상상력과 호흡에 감탄
“한 명.” 신춘문예는 한 명을 찾는 일이다. 인파 속에서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년보다 응모작이 많은 데다가 수준 또한 높아서 심사장은 후끈후끈했다. 한 명이 될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793명이 응모한 3001편의 시들을 집중하며 읽었다. 팬데믹의 여파가 경기 침체, 청년 실업 등의 양상으로 응모작에 나타났다. 삶의 피로와 미래에 대한 비관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고 기후 위기를 염려하는 시도 눈에 띄었다.
본심에 올라온 세 명의 응모자는 개성으로 빛났다. 개와 오리와 코끼리 등 동물이 시를 이끄는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여름의 잠’(외 2편)을 보낸 응모자는 정적인 장면을 상상으로 부풀리는 데 거침없었다. 상상이 끝나고 질문이 바닥나도 여운은 오랫동안 현장에 머무를 수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 주었다. ‘문에 기대지 마시오’(외 2편)를 쓴 응모자는 예사로운 풍경에서 움직임을 그려 내는 데 능했다. 골목길과 지하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복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가만히 설득해 냈다.
토론 끝에 ‘볼트’ 외 2편을 응모한 임후성을 그 ‘한 명’으로 결정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코끼리처럼 성큼성큼 나아가되 주변의 작은 존재들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응모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신해욱,오은,정끝별
17. 드라이 아이스
-결혼 기념일
민소연 / 2023 세계일보
평생 함께 하겠습니다
짙은 약속을 얼떨결에 움켜쥐었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검붉은 피가 모였을 때
치밀한 혀를 가지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어떤 밤엔 마침내 혀를 쓰지 않고도 사랑을 발음했다
맺혔던 울음소리가 몇 방울 떨어지고
태어나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잠갔다
한밤중엔 그런 소리들에 놀라서 문을 닫았다
너무 규칙적인 것은 무서웠다 치열하게
몸을 움직이는 초침 소리나
몸을 웅크린 채 맹목적으로 내쉬는 너의 숨소리가 그랬다
거듭 부풀어 오르는 뒷모습을 보면서 호흡을 뱉었다
어쩌면 함께 닳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에 맞춰 피어오르는 게 있었다 입김처럼
희뿌옇고 서늘했다
숨을 삼키다 체한 밤이면 너를 깨웠다
내기를 하자고 했다
누가 더 먼저 없어질 것 같은지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보자고 했다 너와 나는 모두
내가 먼저일 거라는 결론을 내려서
우리는 오래도록 같은 편이 되었다
내가 죽은 척을 하면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등 뒤에서 각자의 깍지를 움켜쥐었다
영원한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손끝에 짙은 피가 뭉치면
동시에 숨을 전부 내쉬었다
품 안에서 녹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살갗이 들러붙었다
<심사평>
착상·비유 안정적 구현… 서늘한 감각 탁월”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작품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여러 편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공력과 시간을 쌓아온 성과라는 데 공감하였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타자들을 관찰하고 해석한 결실도 많이 보였고,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아 내면의 정직한 기록이 되게끔 한 사례도 많았음을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는데, 김운, 노수옥, 민소연씨가 그분들이다. 오랜 토론 끝에 결국 민소연씨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김운씨의 ‘여름의 앙카’는 흰 눈과 붉은 꽃의 색상 대조가 고양이와 말의 상상적 모자이크를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로 승화하는 데 기여하면서,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노수옥씨의 ‘가난한 접시’는 밀도 높은 기억과 표현이 마지막까지 특징으로 거론되었다. 오랜 향기와 시간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접시를 다룬, 구체적 기억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민소연씨의 ‘드라이아이스’는 전언의 구체성과 표현의 개성, 착상과 비유의 구현 과정이 매우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되었다. 특별히 드라이아이스가 가진 물리적 속성과 사랑의 제도적 결실인 결혼의 상징적 속성을 연동하면서 펼쳐낸 희뿌옇고 서늘한 감각이 탁월하게 다가왔다. “영원한 타인”과 살갗이 들러붙는 과정을 발견한 순간이야말로 ‘결혼기념일’의 가장 큰 페이소스이자 빛나는 선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당선작으로 뽑히지는 못했지만, 저마다의 개성적 언어로 자신만의 언어적 성채를 이룬 경우가 많았음을 덧붙인다.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드린다. /안도현, 유성호
18. 데칼코마니
한이로 /2023 영남일보
내 방엔 거울이 하나
나는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서로 다른 옷을 입을 때
살짝 삐져나오는 다디단 표정
나란히 서면
자꾸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에겐 곁눈질이 있으니까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학교를 벗어던진 우리는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 위로 쏟아진 자동차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진다
반으로 나눠진 마카롱,
사라진 쪽이 너라고 생각하겠지
바닥에 번진 우리의 그림자를 지우느라
붉어지는
늦은 오후의 얼굴들
간호사가 건네는 푸른 옷을
얼굴처럼
똑같이 입고 우리는
사이좋게
캐스터네츠를 악기라고 말하고 난 뒤의 기분을
반으로 접는다
다른 그림찾기와
같은 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내 방엔 거울이 하나인데
두 개
매번 언니였다가 나였다가
입 꼬리 살짝, 올라간다
<심사평>
발랄한 상상력 뒷면에 감춘 저항의식…詩 본원적 매혹 느껴
본심에 올라온 열아홉 분의 작품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쁘고 단정한 서정시에서부터 종교성을 띤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은 넓었으나,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거나 새로운 전망, 실험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말이 많았고, 사유와 상상력을 자신의 언어로 정련한 작품을 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산문적인 시의 경우, 시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의미와 이미지가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하는데, 반복에 그치거나 오히려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대상으로 남은 것은 '데칼코마니' '흰색 위의 흰색' '유리방' 세 편이었다.
'유리방'은 산문시인데 밀도 있는 전개와 예리한 언어감각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세상 혹은 세상의 폭력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는 유리방 속 존재들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시를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주었으나,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문제의식이 보다 다양하게, 입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흰색 위의 흰색'은 말레비치의 그림 <흰색 위의 흰색>을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언어 구사가 빼어났다. 묘사와 진술의 능력이 돋보였고 시를 끌고 나가는 힘도 있었다. 그러나 평면적이었다. 눈덧신토끼와 스라소니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구체적 자기 경험과 겹쳐졌으면 시의 깊이와 울림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데칼코마니'는 경쾌한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정서의 파동을 지닌 작품이었다.
그동안 우리 시가 보여준 거울에 대한 상상력과는 또 다른 관점을 보여주면서 자아·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인식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발랄한 상상력의 뒷면에 감추어져 있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 "이따금씩/ 거울을 볼 때/ 나를 잊어버리는데// 나는 잘 있니?" 같은 질문들, "다른그림찾기와/ 같은그림찾기가/ 다른 말로 들리니?" 같은 유희, 이것들을 한 편의 시에 유기적으로, 또 차분하게 담아내는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심사자는 시의 본원적 매혹을 느끼게 해 준 '데칼코마니'를 흔쾌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정동균,이하석 시인
19. 숲을 켜다
조이경 / 2023 전라매일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주먹을 내야겠어요 오늘이 새나가지 않도록
블랙 미러 속 환삼덩굴이 투명한 손을 뻗어오네요 엄지와 검지의 잔뿌리를 싹둑 자르고 포레스트 어플*을 켭니다
여기는 역설의 숲, 숲지기는 가위로 가위를 잘라야 해요
비탈진 모래 언덕에 곰발바닥선인장을 심어볼까요 보송보송한 솜털에는 지문이 닳지 않겠죠
천천히 흘러내리는 모래시계를 샀지요 시간의 나무는 백색소음을 먹고 자란대요
건조한 수요일이 명상을 클릭합니다 함께 심기에 당신을 초대할게요 다달이 선물로 주던 데이터, 이젠 꽃과 나무로 주세요 코인이 쌓이면 낙타의 무릎에도 종려나무를 심어요. 우리
눈을 감고 날숨을 길게 내쉽니다 마른 흙이 빗방울에 놀라 소스라치네요 불모의 한때가 비늘처럼 떨어져 내립니다 코끝을 스치는 흙내음
내일은 집을 지을 거야수목 한계선 밖에서 울고 있던 야명조夜鳴鳥 한 마리,
가문비나무숲으로 날아듭니다 가문비나무에선 사철 물소리가 들려요 극지의 바람에는 비의 씨앗이 들어 있나 봐요
바람의 숨결에 집중하며 주먹을 풀지 않는 나무 고요히 겨울을 완성한 가문비나무는 악기의 맑은 공명共鳴이 되죠
새에게서 저녁을 삭제하자 발톱이 새로 돋아났어요 여문 실핏줄을 뽑아 시간의 나이테를 그려요 파랗게 녹명鹿鳴을 풀어놓아요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계획한 일에 몰두한 시간만큼 숲에 나무가 자람.
<심사평>
미래지향적 사유 속에 잔잔한 울림
2023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에 1514편(372명)이 응모하였다. 예년에 비해 많은 응모작들이다. 국내는 물론 미국,독일, 필리핀 등 해외동포들까지 폭 넓게 응모한 결과다. 총 327명의 응모자 중 김태익, 양수민, 오솔길, 장윤덕, 김소영, 조이경, 이 6명의 작품 20여편을 본심에 올려 심도 있게 살펴보았다.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문법과 탄탄한 구성, 밀도 있는 표현 등에 초점을 맞추어 선정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 분의 작품이 또 다시 최종심에 올랐다. 장윤덕 「방」은 소통 부재의 방에 갇혀있는 화자의 우울한 심사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엮어낸 구성이 돋보였으나 다소 산만하였고, 김소영은 「나는 별빛의 일부」에서 '나'라고 하는 양면적 존재를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접근,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었으나 결구가 허술하였다.
이에 비해 조이경은 「숲을 켜다」 외 3편에서 작품의 완성도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 불모의 현장에서 숲을 찾아가는 야생조 한마리의 지난한 열망이 안정된 구조와 신선한 문장, 미래 지향적 사유 속에서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 김동수 문학평론가. 시인
20. 홈커밍데이
이진우 /2023 조선일보 1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여름이 온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감각들이 유빙처럼 떠내려갔지
애인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얼음이 녹는 속도라든지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마시게 될 맥주의 온도라든지
우리는 우리의 이마와 코끝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했지
앨범에 넣어둔 사진이 눅눅해지는 건지도 몰랐지
그때 네가 입고 있던 반팔 티는 무슨 색이었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의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운동장엔
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다음 여름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죽은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심시평>
당선자가 시집을 낸다면 누구보다 먼저 살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열세 분의 작품들이 취업 절벽, 사회 양극화, 저출산, 이주 노동, 기후 재난 같은 사회의 현안을 제치고 기분에 쏠린 현상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기분이란 미시적 영역에 천착한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이번 신춘문예의 공동 주제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품을 지경이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의 메아리이고, 생의 사소한 기미를 머금은 감정 생활의 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기분을 배제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 쏠림은 다소 염려스럽다. 이것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오늘의 비정한 세태를 반영한 징후이고, 자기애의 과잉 때문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탓이다.
그렇다면 이 사소한 감정의 굴곡인 기분이 어떻게 시의 모티브가 되는가를 눈여겨볼 수밖에. 먼저 경험과 이미지 사이 표면 장력이 작동하는 힘이 느슨한 시, 얕은 경험과 조각난 이미지의 흩어짐으로 끝나는 시, 감각적 명증성을 견인하는 데 실패한 시를 걸러냈다. 최종으로 남은 ‘멜로 영화’ 외, ‘손자국’ 외, ‘연안’ 외 등등은 좋은 시는 “운명을 동봉한 선물”(파울 첼란)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생의 변곡점일 수 있는 순간을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시적 명증성을 붙잡은 한 응모자의 ‘멜로 영화’ ‘홈커밍데이’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들은 범속한 생활 감정을 의미가 분광하는 이미지로 빚어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언어 감각과 섬세한 느낌의 표현은 시의 풍부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되었다. 숙고와 머뭇거림에서 길어낸 사유를 자기의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능력, 능숙한 악기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듯이 시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귀한 재능이다. 이 응모자가 첫 시집을 낸다면 서점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집을 구입해 읽고 싶다는 게 우리 속마음이다. 당선 문턱에서 멈춘 두 예비 시인께도 아낌 없는 박수를 드린다. / 장석주. 김기택 시인
21. 멜로 영화
이진우 /2023 조선일보 1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22. 가장 낮은 곳의 말(言)
함종대 /2023 전북도민일보
발톱은 발의 말이다
발은 한순간도 표현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나는 낮은 곳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짓눌리거나 압박받는 곳에서 나오는 언어는 어감이 딱딱하다
그렇다고 낮은 곳 아우성이 다 각질은 아니어서
옥죈 것을 벗겨 어루만지면 이내 호응한다
늦은 퇴근 후 양말을 벗으면
탈진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발가락들이 하는 말을 더럽다고 외면한 날이 많았다
안으로 삼킨 말이 발등으로 통통 부어오른 날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에게 내미는 말을
나는 야멸차게 잘라내며 살았구나
오늘은 발을 개울에 데려간다
물은 지금 머무는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아는 양
같은 족을 만난 듯 온몸으로 감싸 안는다
발이 내어놓는 울음인지 물의 손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봄나무에 물오르듯 올라온다
머리를 낮게 숙여 두 손으로 발을 잡아본다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는지 볼까지 흠뻑 젖었다
개울이 발의 울음소리까지 보듬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산의 발등이나
나무들의 발가락을 어루만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개울도 울컥거릴 때가 있어 강에 발을 담근다
바다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하구를 보듬는다
장사가 어려워 가게를 폐업하던 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뭍의 등을 철썩철썩 쓸어내린다
<심사평>
낮은 곳에서 서로 힘이 되는 것들의 속내를 미려하게 묘사
‘시인은 ‘시’를 매개로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구현하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준으로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 673편을 읽는 동안 여러 번 행복하였다. 너무 많은 비유가 오히려 흠집을 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했지만, 사물과 사람의 아름다움을 역량껏 드러낸 좋은 작품들은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새겨읽고 싶었다.
여러 번 정성 들여 읽는 단계를 거쳐 1차로 선정한 일곱 작품은 「서폐」, 「눈과 발」, 「가장 낮은 곳의 말」, 「동백낭 아래」, 「회색 늑대」, 「유성」, 「마두금」이었다. 일곱 개의 시를 되풀이하여 읽고 난 후 「서폐」와 「눈과 발」, 「가장 낮은 곳의 말」을 2차로 선정하였다.
박승균 님의 「눈과 발」은 적절한 수사와 시적 장치들이 좋았고, 차분하게 주제를 끌고 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읽을 맛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그리고 어느 작품에선가 본 듯한 결말이 마음 한구석을 서운하게 했다.
노수옥의 님의 「서폐」는 ‘책허파’라는 독특한 소재를 온전히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능숙한 언어의 운용이 돋보이고 작품의 분위기를 책임지는 시적 화자의 시선 처리와 묘사도 정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경합했으나 매우 아쉽게 되었다.
202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함종대 님의 「가장 낮은 곳의 말」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가장 낮은 곳의 말」은 시상을 무리하게 전개하지 않으면서,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매끄럽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도 시의적절하였다. ‘발톱’이라는 오브제에서 시작한 시적인 사유를 거침없이 확장해내는 활달함도 돋보였다. 낮은 곳에서 서로 힘이 되는 것들의 ‘속내’를 미려하게 묘사해내는 점도 작가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했다. 대한민국 시단에 무르익은 기량을 맘껏 펼치시기를 바란다. /김영 시인
23. 활어
황사라 /2023 전북일보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싱싱해요
벌려지지 않는 조개는 살아 있는 거래요
나를 단단히 여미고 싶을 땐 시장에 가요
횟집 옆 원단가게 사장님은
둘둘 말아 놓은 천을 풀어 보여주시는데
아득한 바다가 출렁대는 줄 알았어요
바위에 붙어 있는 게 굴만 있겠어요
저기 좌판 한 자리에 앉아
수십 년 동안 곰피를 팔아 온 할머니
손등 위에 물결무늬가 깊게 새겨졌네요
흥정은 늘 미끄럽기 마련이지요
손 안의 물고기처럼
자칫하면 놓쳐버리고 말아요
하루하루 쳐지는 나의 감정도
얼음조각으로 덮어 놓으면
조금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위에 수없이 부딪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파도
물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데요
골목의 해류를 따라가다 보면
지느러미를 펄떡이는 물고기들
나는 잊었던 기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심사평>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 보인 시적 진정성
이미지의 부조화와 언어표현의 부정교합으로 빚어내는 파격미 혹은 의외적 정서충격도 소통의 가능성을 전제로 했을 때 유의미하다. 투고한 많은 작품들이 새로움의 추구라는 강박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실험적 언어표현을 과도하게 구사한다든지 열린 언어 구조로 너무 많은 것을 독자의 몫으로 떠넘기는 경우를 본다. 의미맥락을 간추릴 수 없거나 일상적 의미맥락에서 너무 멀어진 경우가 많다.
주제의 치우침 현상 때문에 예심을 넘어서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 사회적인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었을 때 변별력을 잃고 또한 상식을 넘어서는 개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투고된 많은 작품들에서 산문화 경향이 뚜렷했다. 압축과 생략 그리고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드러내는 (혹은 감추어두는) 시의 언어적 속성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긴 시간 고립된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문장 특성도 자주 발견되었다. 고립된 시간을 견디며 혼자 읊조리는 독백형, 사변형의 문장들이 그것이다. 배출 혹은 배설과 다른 지점에서 씨 쓰기의 이유는 찾아져야 한다는 점에서 얼마간의 우려를 하기도 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아보카도', '밀리터리룩의 이중성', '활어', '검은 고양이'다. 이 작품들과 함께 제출한 다른 작품도 참고하여 시인이 그의 시 세계를 계속하여 펼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도 가늠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아보카도'에서 견디기 힘든 폭염 속 시적화자는 “비닐하우스가 녹아내려 그 안에 자라고 있던 푸른 식물들이 다 타버릴지도 모를 날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밀리터리룩의 이중성'은 위선과 관능과 관음을 도덕으로 위장한 ‘이곳’(도시)에서 ‘그곳’으로의 이탈(혹은 일탈)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표현했다. 시의적절한 문제의식과 함께 많은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단순 서사에 머물거나 설명적 요소가 강하여 형상화가 미흡하다거나 정서 수준으로 용해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검은 고양이'는 빚어내는 이미지가 발랄하고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이 흥미롭다는 점에서 눈이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그 이미지와 상상이 과잉된 측면이 있고 그 어떤 메시지로 수렴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활어'는 바닷가의 삶에서 읽어낸 활력과 긍정의 힘을 그려낸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 표현으로 끌어가는 시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안정감이 있다. 그가 펼치는 정서에 신뢰를 갖게 하는 노련함이 보인다. 서정성도 잃지 않고 있다. 그 어떤 섬광 같은 새로움이 아쉽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여줄 역량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이의 없이 「활어」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심사위원 김사인(문학평론가)·복효근 시인
24. 당산에서
신나리 /2023 한국경제
비 오는 새벽 요강을 몇 번이나 비워낸 할머니는 내가 잠에서 깰까 아침이면 부엌에 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약을 많이 먹어 몸에서 쓴 내가 났다 나한테는 미묘한 매실 냄새가 비가 퍼붓는데도 두 냄새가 멈추지를 않았다
푸른 논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뚫린다던 엄마는 절대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골에 살면 우울증에 걸린다나 나 어릴 때 친구 하나가 너희 엄마 불 꺼진 매장에 혼자 앉아있더라 전해 준 적이 있다
할머니는 방에 걸린 무수한 액자들과 함께 살고 있어 나는 양심이 없으므로 엄마에게 몇 마디를 했다 얼마나 불쌍한지 외로운지 결국은 심심한지 할머니가 엄마는 고집 있고 성질 나빠 아빠랑 살기 어려웠을 거래 우리는 웃다가 콧물을 흘렸다
다음날 어떻게 잘 지낼지 생각하느라 도통 밤에 잠을 못 잤다 희망을 벗어날 길 없어 욕망을 추스를 틈 없이 이른 아침 아이돌 노래에 맞춰 산책하다 고추밭에서 누군가 칼로 난도질한 복권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죽은 삼촌 방에 앉아 뭘 하는지 할머니는 모른다 노래기 잡고 거미랑 싸우며 그냥 해보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이를 갈면서도 이를 숨기느라 진을 빼고
같이 목욕을 하자더니 결국 혼자 손으로 몸을 문질러 닦았다 나가 있으래서 나가 있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머니가 비누로 씻고 밥을 차리면 비위 상해서 못 먹겠다고 상을 물렸다고 한다 그깟 소리 듣기 싫어서 그때부터 물로만 문질러 닦았다는데
이도 없고 밥 먹고 솟아야 할 기력도 권태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와 저녁을 먹는다 기름 친 음식이 먹고 싶어 우유에 탄 진한 커피도 마시고 싶어 죽겠는 와중에 어김없이 체한다 할머니가 내 커다란 배를 문질러 준다
늙은 엄마를 사랑하지 못할까 눈물 찔끔 흘리는 내게 희망이 절망이 될까 한 글자 쓰는데 벌벌 떠는 내게 마을의 수호신 장승처럼 너무나 큰 할머니 끈질긴 여름밤 비는 쏟아지고 미물들이 발광을 한다
할머니 옆에 꼭 붙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 우뚝 선 자존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심사평>
할머니·어머니·나로 이어지는 여성…서사의 저력 육화한 수작
시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낯선 언어와 다른 시선뿐만 아니라 이미 익숙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정서들을 재배치하는 데서도 온다. 먼저 ‘새들의 주식회사’는 말과 이미지를 빚어내는 제작술이 돋보였다. 동봉한 작품들의 수준 또한 두루 균질한 편이어서 신뢰할 만했으나 완성에 급급한 나머지 시적 공간이 더 확장되지 못하고 발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래된 습관’ 외 네 편은 당대의 그늘진 삶을 다루면서도 활달한 어조와 아이러니한 맥락 속에서 시상을 곱씹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함께 읽은 작품들에서 탈골하듯 드러나는 비유의 도식성은 숙고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당산에서’ 외 네 편은 자기 안으로 함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몸과 마음을 돌리는 시적 운동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당선작은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지는 여성 서사의 저력을 육화한 수작이다. 독백이나 넋두리 수준의 사담에 연루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그 또한 상투화된 기우로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우리는 기꺼이 시인의 모험에 함께하기로 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의 공덕이 부식토로 깔려 있음을 잊지 않고 정진하길 바란다./김사인,손택수 시인
25.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이예진 /2023 한국일보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눈과
따로 노는 낡고 지친 눈빛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심사평>
담담하게 펼친 일상의 세목들로, 가계·욕망·폭력의 민낯을 기록하다
새로운 시인의 작품과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면 으레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의심의 방향은 작품과 시인이 아니라 이것을 대하는 스스로를 향한다. 이제껏 내가 시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고 추궁하는 것이다. 불안과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안도를 바라는 일은 아니다. 늘 내가 가진 관점이 보기 좋게 깨지기를, 그리하여 아프게 갱신되기를 원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함께 쓰는 이가 아니라 함께 읽는 이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번 심사에 임하는 위원 모두가 이러한 마음이었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외 4편을 투고한 이예진씨를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로 정한다. 시인의 언어는 선명하고 정직하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을 차곡차곡 쌓아 어느새 의무도 당위도 필요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시인은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그러모아 큰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불필요한 제스처 없이 일상의 세목들을 담담하게 펼쳐내면서도 그 안에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
시인이 창출해내는 이미지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유와 관념을 단단히 비끄러매면서도 일순간 낯선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인상적이었다. 부디 앞으로도 사유와 언어, 서사와 이미지 사이를 마음껏 횡보하며 시작(詩作)해주기를 당선자께 바란다. 진정한 문학적 자유로움과 균형감이란 조심스레 살피며 걷는 일이 아닌 어떤 극단까지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시와 문학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순하게 응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반하는 일에만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며 여전히 읽고 쓰는 일만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낙선한 분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시와 살아낼 시간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마음도 함께.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게 될까. 불안전하고 불완전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의심을 품어야 할까. 그러면서도 어떤 온전한 미감에 깨어지지 않을 삶을 기대야 하겠지. ‘신춘문예’. 계절만 벌써 새봄이다. / 이수명.김빈정.박준
26. 결빙(結氷)
윤계순 /2023 한국불교신문
큰 강에 얼음이 얼 때
얼음은 일사불란하게 얼지 않는다
얼었다가 다시 무수한 조각으로 부서지길
몇 차례 반복한 다음에야
평평하고 두껍게 언다
단단한 것들은 경전(經典)의 고리처럼
파륵 파륵 넘겨지다가 다시 한 권으로 뭉친다
티베트 승려들의 논쟁엔 손뼉을 치는 주장이 있어
셀 수 없는 의견으로 나눠지고
다시 이어 붙는 합의
그런 일들의 끝에 큰 강은
하나의 얼음판으로 얼어붙는다
얇은 추위에 몇 겹의 추위가 달라붙고
쩡쩡 얼음 조각들의 합의가 밤을 울린 다음에야
흐름이 멈춰 서듯 얼어붙는다
그런 물도 추우면 저희끼리
쩡쩡 뭉치지만
분분한 의견의 투합이 겨울을 건너와
지탱했던 제 몸을 다시 풀면 봄이다
그러니 녹는 순서는 그저 얼음 밑
흐르는 속도에 맡겨두면 되는 일이다
햇살이 조각나는 일을 두고
나뭇가지들은 저의 일직(日直)인양 분분하지만
지상의 결빙이 풀려야 비로소
햇볕도 해동한다
<심사평>
불교신문이라고 해서 불교 소재나 공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강박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 두 해째를 맞은 한국불교신춘문예 시부문의 첫인상을 공유하면서 심사위원들은 200여 명의 1,100편이 넘는 작품 중 예심을 통과한 김동임의 ‘꽃’ 외 4편, 조현미의 시조 ‘분꽃, 누이’ 외 4편, 윤계순의 시 ‘결빙’ 외 4편을 중심으로 최종 심의에 들어갔다.
우선 ‘꽃’은 상징계의 제도 언어에 대한 부정의 어법이 소박한 가운데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소품이었으나 동봉한 단형 시편들의 편차가 극심하여 안정감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조 ‘분꽃, 누이’는 방직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옮겨오면서도 은유의 동일화 욕망을 저만치 여의면서 리듬과 형상과 뜻이 하나의 트라이앵글을 이룬 가편이었다. 형상과 뜻이 경직되지 않도록 시조의 리듬을 조직화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당선권을 다툴 만하였으나 역시 함께 읽은 ‘어떤 곡예’ 같은 작품의 기시감을 쉬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이미 기성의 시조들과 경쟁을 하고 있으리라 예측되는 이 시인이 돌파해나갈 세계의 기꺼운 파열을 기대하는 것으로 미련을 달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당선작 ‘결빙’은 불교 소재의 선입견을 극복하면서 재배치를 통해 오리려 낯설게 만드는 인식의 렌즈가 돋보였다. 결빙의 물리적 현상에서 손뼉 치는 논쟁과 합의의 동시성을 읽는 눈은 결빙과 해빙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손쉬운 진술이나 설명이 아니라 제시된 이미지에 의해 역설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집중적인 관찰력과 성실한 묘사력, 뜻의 과잉 전달과 일방통행을 유연하게 만드는 시적 이미지의 힘이 크다고 하겠다.
당선자와 참여해준 모든 분들의 정진을 바란다. 아울러 한국불교신문의 지극한 노고와 보람이 보다 드넓은 지평 위에서 지속할 수 있도록 문학장 안팎의 관심 또한 증폭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심사위원 안도현ㆍ손택수시인
27. 책을 끓이다
장현숙 /2023 한라일보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났다
책 속에 접힌 페이지가 있다는 건 그 자리에서 눈의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일기장이 제일 뜨겁다 그 안에는 태양이 졸아들고 별이 달그락거리면서 끓기 때문이다
책을 끓여 식힌 감상을 하룻밤 담가 놓았다가
여운이 우러나면 고운 채로 걸러내야 한다
그 한술 떠 삼키면
마음의 시장기가 사라진다
28. 오아시스 편의점 < 시조>
김미진 /2023 한라일보
사장님 호출문자 자라목이 나온다
후루룩 컵라면에 삼각김밥 먹는 저녁
진열대 위 상품으로 흔들리는 긱잡* 인생
비상구 더듬으며 사막을 걸어간다
신기루 만지다가 소소초에 찔리는 손
웅크린 낙타의 등에 달빛만 부서진다
수십 장 입사원서 흩날리는 모래바람
사구에 처박혀도 오아시스 향해 걷고
울음을 널어 말리며 유통기한 늘려간다
*긱잡(gig job); 필요할 때마다 계약직, 임시직을 하는 사람
<심사평>
응모작 303편 중에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50편이었다. 우선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큰 작품, 자질과 개성, 참신성을 생각하며 심사에 임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팬데믹 관련 작품은 볼 수 없었다. 나름대로 시상을 압축, 정형의 가락으로 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쉬운 점은 기성 시인의 작품을 지나치게 모방하거나 덜 익은 작품들도 있었다.
그중에 명량대첩의 주인공 성웅 이순신 장군을 제재로 노래한 '울돌목', 책 제본공 아버지를 소재로 장인의 삶을 노래한 '冊 양장점', 그리고 취준생의 어려운 삶을 노래한 '오아시스 편의점' 세 편을 주목했다. 오랜 숙고와 의논 끝에 '오아시스 편의점'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시조(時調)는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이다. 즉 시대나 현실 인식을 함의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당선작은 훨씬 돋보였고, 시적 울림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같이 투고한 4편도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시적 화자는 가판대 상품같이 어디로 팔려 갈지 모르는 존재. 사막의 신기루를 만지다가 손이 찔리면서도, 끝내 오아시스(직장)를 찾으려고 가다 보니 유통기한만 늘려간다고 처절하게 고백하고 있다. 낯설지 않은 소재와 주제를 다루면서도 남다르게 은유와 진술로 진정성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마음을 울컥하게 하는 가편이다. 그러나 '인생' 같은 진부한 시어는 티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시조의 품격을 잘 살리면서 시적 울림이 큰 작품을 쓰기 위한 쉼 없는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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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렸습니다.
23년 전라매일 신춘문예가 배출한 조이경 시인은 아마도 전국 최고의 신춘문예 신인을 발굴 하였다는 문단의 입소문입니다. 지방지에서도 이러한 시 잘 쓰는 시인을 발굴할 수 있다는 데 대하여 부러움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선작인 < 숲을 켜다> 는 평론계에서는 심사를 맡으신 김동수 시인의 평에 공감하면서도 독자와 심사자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도입부 첫 연의 환상적인 언술에 대해 극찬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9 연은 이 시의 백미로 " 극지의 바람에는 씨앗이 들어 있나 봐요"의 詩句에 대해서는 아끼지 않는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심사평과는 별도로 저도 졸평을 준비하여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런 시인이라면 시를 핑게삼어 연애 한 번 해보고 싶은 꼰대기 짓을 해보고 싶습니다. 대어를 낚은 셈입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숲을 켜다 > 의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詩句 / 창작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1. 주먹을 내야겠어요 오늘이 새나가지 않도록
2. 엄지와 검지의 잔뿌리를 싹둑 자르고
3. 낙타의 무릎에도 종려나무를 심어요.
4. 마른 흙이 빗방울에 놀라 소스라치네요
5. 가문비나무에선 사철 물소리가 들려요
6. 극지의 바람에는 비의 씨앗이 들어 있나 봐요
7. 바람의 숨결에 집중하며 주먹을 풀지 않는 나무
8. 새에게서 저녁을 삭제하자 발톱이 새로 돋아났어요
작품 분삭을 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