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후 만주를 상실하고 한반도에 갇혔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에 굴욕을 당하기도 했고,
조선에 이르러서는 소중화를 자처할 지경까지 국력이 쇠잔해졌다. 이 와중에 실로 중차대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태종太宗 이방원의 「서효사誓效詞」, 일명 「신지비사神誌秘詞」 소각 사건이다.
태종은 왜 동방 조선의 역사서인 「신지비사神誌秘詞」 를 불태웠을까? 불타 버린 「신지비사神誌秘詞」 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신지비사神誌秘詞」 란 어떤 글인가?
「서효사誓效詞」는 ‘맹세할 서誓, 본받을 효效, 말씀 사詞’ 자로 문자적으로는 ‘하늘에 맹세하고 본받는 글’이라는 뜻이다. 이 「서효사」를 일명 「신지비사神誌秘詞」라고도 한다.
6대 달문達門 단군 때 사관이였던 '신지발리神誌發理'에 의해 기록한 하늘에 고하는 제천문인 「서효사」,(신지비사)에 관한 문헌은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환단고기』 등에 기록되어 전한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의 「신지비사神誌秘詞」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그(연개소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 했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니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
唐書 云 盖蘇文 自謂莫離支 猶中書令
당나라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자칭 막리지莫離支라고 했으니 당나라의 중서령과 같다고 했다.
又按 神誌秘詞序 云 蘇文 大英弘 序幷注
또 「신지비사」의 서문을 보면 ‘연개소문 대영홍이 서문을 쓰고 주(注)를 달았다’고 했다.
則蘇文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소문蘇文은 직책명이라는 증거이다. 전傳에는 문인 소영홍이 서문을 썼다 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삼卷第三 흥법興法, 보장봉노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일연 스님은 보장왕寶藏王과 (연)개소문蓋蘇文의 대화를 통해 「서효사」의 다른 이름인 ‘신지비사’를 전한다. 다만 그 본문은 전하지 않고,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 서병주序幷注’, 소문 대영홍이 서문을 쓰고 주를 달았다.”라고만 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일연 스님 때에 「신지비사神誌秘詞」가 존재했고, 관직명이 소문蘇文인 대영홍大英弘이 서문과 주석을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가 전하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신지비사神誌秘詞」 본문의 일부는 세종대왕 때 편찬된 『고려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중기 숙종 때 김위제金謂磾가 『도선비기道詵秘記』와 「신지비사神誌秘詞」를 근거로 하여 남경南京 천도를 건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金謂磾 肅宗元年 爲衛尉丞同正
김위제는 숙종 원년(1096)에 위위승동정이 되었다.
新羅末 有僧道詵 入唐學一行地理之法而還 作秘記以傳
신라 말기에 승려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후세에 전하였다.
謂磾學其術 上書請遷都南京曰
김위제가 도선의 학술을 공부하여 남경南京으로 천도하자고 요청하는 상서를 올리며 말하기를,
道詵記云 高麗之地 有三京 松嶽爲中京 木覓壤爲南京 平壤爲西京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의 땅에는 3경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南京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西京이 된다.
十一十二正二月 住中京 三四五六月 住南京 七八九十月 住西京 則三十六國朝天
11월·12월·1월·2월에는 중경에 거주하고, 3월·4월·5월·6월에는 남경에 거주하며, 7월·8월·9월·10월에는 서경에 거주하면 36개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중략)
又神誌秘詞曰 如秤錘極器 秤幹扶疎樑 錘者五德地 極器百牙岡 朝降七十國 賴德護神
또 「신지비사神誌秘 詞」에서 말하기를, ‘저울추[秤錘]와 저울접시[極器]에 비유하자면
저울대[秤幹]는 부소량扶疎樑이며,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이고,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70개 나라가 항복하여 조공을 바칠 것이며 땅의 덕에 힘입어 신기神氣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精首尾 均平位 興邦保太平 若廢三諭地 王業有衰傾
저울의 머리와 꼬리를 정밀하게 하여 수평을 잘 잡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것이고, 만약 비유로 들은 세 곳의 땅을 버린다면 왕업은 쇠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위제는 고려의 수도(중경)인 송악, 서경인 평양과 더불어 남쪽에 남경을 열어 왕이 넉 달씩 순회, 거주하며 국정을 볼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서인 『도선기道詵記』와 「신지비사」를 통해 삼경三京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삼경제도는 석 삼三에 서울 경京 자로 수도를 셋을 두고 통치한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려 중기까지 『신지비사』의 핵심인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전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조선의 삼경三京제도가 균형을 이룰 때 임금의 덕에 힘입어 삼신의 정기를 잘 간직해, 영원히 단군조선이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 했다. 그리하여 ‘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이 실현될 것이라 했다. 실제로 삼경제도가 굳건했던 단군조선은 70여 나라의 조공을 받은 대제국이었다.
그 핵심은 삼한의 저울추와 저울대, 저울접시에 해당하는 세 수도가 조화롭게 유지될 때 ‘조항칠십국朝降七十國’, 즉 주변 칠십 나라가 조공을 하고, 태평성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동방 문명의 장자국인 단군조선은 한민족 원형정신인 삼신관에 따라 셋이면서 하나인 체계, 즉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로 통치했다.
넓은 영토의 중앙은 대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주변은 부단군을 두어 다스린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만주의 중앙은 진조선의 대단군이 통치하고,
요서와 북경 주변의 번조선과 한반도의 마조선은 부단군이 통치한 것이다. 이것이 고유한 한민족의 국가 통치제도였다.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연구』에서 ‘단군조선은 강역이 넓었기에 신하의 여러 나라들을 거수국渠帥國(제후국)으로 삼아 다스렸다’고 했고, 이덕일 교수는 『이덕일의 한국통사』에서 ‘고조선은 제후국과 같은 거수국을 거느린 황제국가였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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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이 전하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소각 사건을 『조선왕조실록』 원문을 통해 살펴보자.
命史官金尙直 取忠州史庫書冊以進.....
1412년(명 영락永樂 10년)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
且命曰 神秘集 毋得披閱 而別封以進
「신비집神秘集」 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
上覽其集曰 此書所載 皆怪誕不經之說
임금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이하고 허황된 법도에서 벗어난 說학설이다.” 하고,
命代言柳思訥焚之 其餘下春秋館藏之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이를 불사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간직하게 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8월 7일(기미) 둘째 기사)
태종太宗 이방원(1367~1422)은 충청도 충주忠州의 사고史庫(도서 보관서)에 보관 중이었던 많은 도서 중에 왜 「신지비사神誌秘詞」만 별도로 올리라 했는가? 그것도 ‘무득피열毋得披閱 이별봉이진而別封以進’ 펴 보지 말라. 따로 봉하여 올리라고 엄명했을까?
태종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다섯째 아들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형제와 신하들을 죽이고 숙청했다. 결국 태종은 1400년부터 18년간 재위했지만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의 뜻을 저버려 정통성이 약한 이방원은 사대事大하던 중국에 작은 빌미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차서소재此書所載 개괴탄불경지설皆怪誕不經之說’ 한마디로 자신의 대권 장악을 용인해 준 중국에 불경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해 결국 ‘괴탄불경지설’이라는 죄목을 붙여 동방 조선의 제천문이자 역사서인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불태워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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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가 전하는 「서효사」, 일명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원문
이제 『환단고기』가 전하는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원문을 통해 어떤 부분을 조선 3대왕 태종이 ‘불경지설不經之說’로 판단했는지 「단군세기」에 기록된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집필 시기와 의도를 간략히 알아보자.
「신지비사神誌秘詞」는 6세 달문達門단군 때인 단기 285년, 서기전 2049년에 제작되었으며, 달문 단군이 여러 제후국의 왕들과 함께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에 모여 천제를 올릴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한 제천문이다.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일성은 ‘조광선수지朝光先受地와 삼신혁세림三神赫世臨’이다. 우리 조상들은 만물을 깨우는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비치는 동방의 땅에 터전을 잡았고, 이 땅을 삼신三神께서 밝게 강림하시는 성스러운 땅으로 여겼다.
桓因出象先하사 樹德宏且深이로다
환인께서 삼신의 도를 먼저 여셔서 덕을 심으심이 크고도 깊도다.
諸神議遣雄하사 承詔始開天이로다
모든 신성한 이들이 의논하여 환웅을 보내시니, 환인의 명을 받들어 처음으로 나라를 여셨도다.
蚩尤起靑邱하시니 萬古振武聲이로다
치우천황께서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셨도다.
淮岱皆歸王하니 天下莫能侵이로다
회수, 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도다.
王儉受大命하시니 懽聲動九桓이로다
단군왕검께서 하늘의 명을 받으시니 기뻐하는 소리가 구환九桓에 울려퍼졌다.
魚水民其蘇오 草風德化新이로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백성들이 소생하고 바람이 풀 위에 불 듯 덕화가 백성을 새롭게 했도다.
怨者先解怨이오 病者先去病이로다
원한을 가진 자는 먼저 그 원한을 풀어주고, 병든 자는 먼저 고쳐주셨도다.
一心存仁孝하시니 四海盡光明이로다
일심으로 어짊과 효를 지니시니 온 천하가 광명으로 충만하도다.
하늘에 고하는 제천문인 「신지비사神誌秘詞」는 삼신께서 점지해 주신 이 땅을 개척한 국통맥의 핵심 인물들을 환인, 환웅, 치우천황, 단군왕검으로 전개된 큰 역사의 맥을 전해 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지비사神誌秘詞」는 『환단고기』가 전하는 3,301년 환국 환인의 역사, 1,565년 배달국 환웅, 치우천황의 역사 그리고 2,096년간 지속된 단군조선의 개창자 단군왕검의 통치정신을 짧은 글 형식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가 「신지비사神誌秘詞」와 『삼국유사』 「고조선」 조를 함께 보면 대한의 국통맥인 환국과 배달, 단군조선의 맥을 명확히 잡을 수 있다.
환인천제께서 삼신의 도로써 환국을 여셨고, 환웅천황께서 환국 말기에 환인의 명을 받아 천부와 인을 가지고 동방 땅을 개척하여 동방의 첫 국가 배달을 세웠다. 배달의 14세 치우천황은 서방으로 진출해 청구 땅을 개척하였는데 그때 회수, 태산 지역이 모두 귀순하고, 천하의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음을 전한다.
또 단군왕검께서 배달국 말기에 흩어졌던 구환九桓의 백성들을 덕화德化와 해원解怨, 일심一心의 정신으로 크게 통일하여 단군조선이라는 대제국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통치 정신인 삼한관경제와 삼경제도가 어떻게 하면 영원할 수 있는지를 전해 준다.
眞韓鎭國中하니 治道咸維新이로다
진한眞韓이 삼한三韓의 중심을 굳게 지키니 다스림의 도가 다 새로워졌도다.
慕韓保其左하고 番韓控其南이로다
모한(慕韓마한)은 왼쪽을 지키고 번한番韓은 남쪽을 제압하도다.
巉岩圍四壁하니 聖主幸新京이로다
거룩하신 임금께서 새 수도에 납시도다.
如秤錘極器하니 極器白牙岡이오
秤榦蘇密浪이오 錘者安德鄕이로다
삼경(三京)이 저울대, 저울추, 저울판 같으니 저울판은 마한 수도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진한 수도 소밀랑이요 저울추는 번한 수도 안덕향이로다.
首尾均平位하야 賴德護神精이로다
머리와 꼬리가 고르게 균형을 이루어서 임금의 덕에 힘입어 삼신(三神)의 정기를 잘 간직하도다.
興邦保太平하야 朝降七十國이로다
나라를 흥성시켜 태평성대를 이루니 일흔 나라가 조회하도다.
永保三韓義라야 王業有興隆이로다
삼한三韓의 근본정신을 영원히 보전해야 왕업이 흥하여 번성하리로다.
興廢莫爲說하라 誠在事天神이로다
나라의 흥망을 말하지 말지니 진실로 천신(삼신상제님)을 섬기는 데 달려 있도다.
고조선은 삼신문화(三神文化)를 국가 통치 제도로 뿌리내려,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곧 한반도를 마한馬韓, 압록강의 북쪽을 진한辰韓, 그리고 요하 서쪽, 지금의 산동성이 있는 쪽을 번한番韓이라 하였다. 이게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다. 삼한으로 나라의 국가 영토 경계를 나누어가지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삼한 체제는 22대 색불루(索弗婁, BCE 1285~ BCE 1238) 단군 때부터 서서히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색불루 단군에 이르러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현재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를 한다. 그리고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가지 죄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三聖祖,환인,환웅,단군) 시대의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회분위기와 경제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동안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부단군이 다시리던 번한(番韓)과 마한(莫韓)에 병권을 일부 나누어 줌으로써 삼한 체제의 동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삼한관경(三韓觀境)의 체제는 무너지고 대신 두 분조의 독립된 병권이 인정되는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 체제(分權管境)로 개편되었다.
그 후 43대 물리(BCE 1285~BCE 426) 단군의 재위 말기인 기원전 426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아사달이 점령되고 물리 단군이 피난길에 붕어하고 만다.
이 때 구물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고 44대(BCE 425~BCE 397) 단군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이 때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었는데, 이는 한양조선의 고종황제가 국운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의 탈출구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과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개칭하고 백악산에서 장당경(요령성 개원)으로 천도하였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서 다시 살려보려고 몸부림쳤으나 이미 진조선(진한)의 중앙정부 권력은 크게 약화되고 번조선(번한)과 마조선(마한)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중앙정부인 진조선의 권한이 축소되고, ‘좌우의 두 조선’이 형식적으로 진조선을 받드는 형국이 되자 장군들의 반역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고조선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삼조선이 각각 독립된 국가로 운영되면서 삼한관경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다가 진조선의 47대 고열가(BCE 425~BCE 238) 단군에 이르러 나라의 정사(政事)가 혼란에 빠지자, 임금이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나버렸다. 그래서 오가五加가 연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고열가 단군이 물러나기 1년 전인 BCE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을 중심으로 북부여를 열었다.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마지막 구절에서 나라의 흥망이 다른 데 있지 않고 ‘사천신事天神’ 즉 천신을 모심에 있음을 전한다. 여기서 사事는 일 사事 자가 아닌 모실 사事 자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의 모실 시侍 자다. 태초에 조상들이 깨달아 섬겨 왔던 천신, 삼신상제님을 참되게 모심으로써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바로 서고, 국가가 흥하게 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지비사神誌秘詞」 역사관은 후에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쓴 『단군세기』와 조선 중종 임금 때의 찬수관撰修官(사관)을 지낸 행촌의 현손 이맥李陌이 쓴 『태백일사』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정리된다.
우리는 「신지비사神誌秘詞」를 통해 사마천이 『사기』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연나라 추장, 위만衛滿 이야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위만은 단군조선의 중앙 진조선과 마조선, 번조선의 전체 강역을 다스린 역사가 아니라, 삼한관경제의 서쪽 변방인, 기준왕이 다스리던 번조선 강역을 탈취한 도적이다.
그런데 현 교과서에서는 번조선 말대의 역사를 단군조선의 전체 역사로 포장한 사마천의 『사기』를 기준으로 하여 대한민국에 국통맥의 중심으로 잡혀있다. 이것은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이다.
현 중·고등 교과서는 중국인의 기록을 맹신한 소중화 교과서의 틀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삼한관경제만 제대로 이해해도 사마천이 한무제를 높이기 위해 조작한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관을 이제는 바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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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불태운
신지비사를 통해 본 대한민국의 국통맥
온누리님 덕분에..
오늘도 감사히 즐감 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또 비가 많이 온다고 합니다. 항상 조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