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1. 예수비전교회 주일낮예배 기적의 능력, 주께 영광을 유백선 목사
사도행전 4: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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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독일에서 화제의 책이 나왔습니다. <위대한 기회를 위해 태어나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파리 특파원으로 활동하는 울리히 피히트너가 지적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잘못되거나 오염된 정보로 인해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감염시키는 ‘인포데믹(infodemic/정보전염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비관론이 낙관론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보다 더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놀라운 진보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힘과 에너지가 과소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2021년 10월에 독일의 한 언론이 발표했습니다. ‘독일 성인의 3/4(75%)이 미래의 아이들이 자신의 세대보다 더 가난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설문결과를 보고 적지 않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실례로 아프리카 사하라사막의 ‘사헬지대’는 키 작은 풀과 큰 다년생 초본이 자라는 천연의 목초지입니다. 그래서 가축들을 방목하는데, 1년 중 8개월 이상 비가 오지 않고 6월-8월에 내리는 비가 평균 100-200mm에 불과했습니다. 과다한 가축들의 방목과 농사로 사막화가 진행되어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척박한 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30년 동안 부르키나파소의 수많은 농민들이 나섰습니다. 이 지역의 건조하고 넓은 땅을 좀 더 생산적인 농업지대로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황폐했던 사헬지대가 이제 나무와 곡식이 자라고 가축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지대를 놀랍게 변화시킨 사람이 야쿠바 사와도고 농부입니다. 그는 물을 보존하는 전통 농법 ‘자이’를 통해 세계 기구와 국가가 해결하지 못한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소박한 농부의 노력으로 아프리카 사헬지역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더는 절망과 비관주의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생명과 유전공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서 미래세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고 확신합니다.
여러분! 지금 현대인들이 자신의 생명과 인생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위대한 기회를 위해서 태어났다. 나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을까요? 작은 기회에서 위대한 업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작은 기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작은 시작이 위대한 결실을 맺도록 노력하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할 것이다.” 세계가 사람에게 맞추어서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정관념과 고정된 틀을 고수하면 변화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을 자기생각의 틀에 가두는 것이 ‘소유’입니다. 자신의 뜻을 고집하여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 집착입니다. 이 집착이 고통을 낳습니다. 인생은 수없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지혜롭게 생각하고 현명하게 판단한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적절한 때에 올바른 선택이 성공과 행복의 길입니다. 현명하게 판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명확한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올바로 선택해야 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넓혀야 합니다. 객관적인 생각과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직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긍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내면의 성숙과 성찰을 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마인트셋과 감사하는 마음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타인과 원활한 소통으로 인간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목표가 분명해야 어려운 상황에서 일관성 있는 판단을 합니다. 지속적인 반성과 성장을 해야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배경이 이렇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제 구시(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성전 미문에 40세 정도의 사람이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 걷지 못해서 사람들이 메고 와서 구걸하여 생활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자 구걸하며 ‘무엇을 얻을까?’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이 나에게 없다. 나에게 있는 것을 너에게 줄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걸어보고, 뛰어보면서 신기하게 여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가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아주 놀라워했습니다.(행 3:1-10)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기적을 듣고 놀랍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신 것에 놀랍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신 것에 놀랍다고 생각합니까? 앉은뱅이의 기적을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 사건을 사실로 믿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요 20:3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할 것이다.”(행 2:21)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행 2:36)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건강하게 하신 것입니다. 건강을 되찾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면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걷고, 뛰는 기적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걷고, 뛰는 기적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유대교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요한과 알렉산더, 대제사장의 문중입니다. 유대교 종교인들이 이 기적에 충격을 받아서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행 4:10)
유대교 종교인들이 왜 이 기적을 말하지 못하게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기적이 민간에 퍼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여기서 “민간(톤 라온/τον λαον/ton laon)”은 “그 백성, 그 무리, 그 사람들,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유대교 종교인들은 이 기적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타락한 종교인들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타락한 종교인들이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은 이 기적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예수 이름으로 병이 낫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십니다.(행 4:30) 불순종의 영(사탄)이 지배하는 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기적이 민간인들에게 퍼져나가서 민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까봐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대로 기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대 종교인들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거부한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행 3:14-15) 사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는 것을 방해합니다.(눅 24:47) 사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지 못하게 합니다.(요 1:12) 사탄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요 1:14)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적을 체험하기 원하십니다. 기적의 능력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이것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환난을 당해도 담대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요 16:33)
여러분! 타락한 유대교 종교인들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경고했습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여기서 “경고하다(파렝게이란/παρηγγειλαν/pareggeilan)”는 말은 ”전언하다, 명하다, 선언하다, 지시하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거대한 유대교 종교인들이 종교적인 큰 권력을 가졌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경고했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협을 받았던 것입니다. 유대 종교인들이 두 가지를 경고했습니다. 하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종교인들이 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적과 능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마귀, 사탄)을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영이 있으면 해독을 받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막 16:17,18)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4:13-14)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롬 10:13)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든지, 말이나 일에서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십니다.(골 3:17)
다른 하나는 예수의 이름을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이 예수의 이름으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요 14:26)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고, 장래 일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요 16:13-15)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하기 위해서입니다.(시 8:1)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주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시 9:10)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기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61:5)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고, 주의 의로 인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시 89:16)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가르쳐야 주를 찬송하기 때문입니다.(히 2:12)
여러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교 종교인들의 경고를 받고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여기서 “옳다(디카이온/δικαιον/dikaion)”는 말은 “공정한, 흠 없는, 거룩한, 의로운, 적당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올바로 판단해야 할 것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은 불완전합니다. 사람의 말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위협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야 합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도움을 받습니다. 좋은 사람의 말을 들으면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행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면 주께 범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시 119:11) 주의 말씀을 주의 말씀은 내가 곤란할 때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기 때문입니다.(시 119:50)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 119:105) 주의 말씀을 열면 그 말씀이 심령에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시 119:130) 하나님께서는 주의 말씀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인이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갈 3:1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합니다. 본문 2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람이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했던 앉은뱅이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로 40여 년을 살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생한 기적을 체험하고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본 사람은 생생하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전하는 사람은 누구도 어떤 위협이나 경고를 받아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본 것을 말할 때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나(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듣고 전해야 그 말씀이 살아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는데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오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은혜를 전하면 그 말씀이 살아서 한 생명을 살립니다. 나에게 복음을 받았던 사람이 나를 살리기도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계십니다. 그 말씀이 나의 마음에 활력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말씀을 들을 때 집중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들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본문 2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기적의 능력을 말할 때 사람들이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대교 종교인들이 두 사도를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살리면 그 영혼이 그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의 생명을 지켜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기적을 보게 하십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발을 아름답게 하십니다.(롬 10:15) 이제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증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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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비전교회91 원문보기 글쓴이: bs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