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2024. 6. 15.(토)
ㅇ날씨; 흐리고 무더운 날씨로 때때로 빗방울도 조금.
ㅇ홀로 탐방.
2. 교통
ㅇ갈때
*잠실역; 전철 4호선 이용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전철 2호으로 환승.
*잠실역-산성역; 잠실역에서 8호선 전철 환승.
*산성역-남한산성 로터리; 산성역 2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성남 시내버스 그린라인 9번 버스 환승.
ㅇ올때
*하남 시청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전철 5호선 이용.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전철 4호선 환승 귀가.
3. 진행경과
1)하남 위례둘레길은 현재의 하남과 옛 백제 하남 위례성을 한눈에 보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길수 있는
코 스 입니다.
ㅇ코스
하남시청-샘재-객산-남한산성-금암산-이성산성-덕풍골을 잇는 39.7km의 걷기 길입니다.
ㅇ주요 즐길거리
ㅁ사적 57호 남한산성.
ㅁ병자호란때 많은 벌이 날아와 청군을 쏘아 조선군의 승리을 도왔다는 전설의 벌봉.
ㅁ비단색의 바위가 많다는 금암산.
ㅁ거북, 새,개구리바위와 말바위 호랑바위등 여러가지 전설의 바위.
ㅁ남한산성 길목을 지키는 군사시설 토성과 포루.
ㅁ산성과 능선에서 하남 시가지 조망.
ㅁ야생화와 시원한 숲길등.
2)오늘 진행한 구간은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출발, 행궁 정문인 남한루를 돌아보고 북문 전승문에서
성벽위길을 따라 남한산의 한봉성을 일별하고 되아서 벌봉에 오르고 이내 봉암성의 일부를 거처
이름 대로 바람재의 바람을 맞으며 객산에 이르고, 샘재로 하산, 하남대로 동경주 마방집앞 3거리
에서 좌향, 하남시청을 경유하여 하남시청역에서 일정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객산 능선길은 아주 오래전에 걸었 던 길로 낮설지 않은 코스 인데 그간 수목의 성장으로 숲이 무성
해 젔고 많은 스토리 텔링 표지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3)현재 중부고속국도 아래 통로 옆의 샘재 입,출구 미비로 출입이 통제중에 있어 바깥샘재 부근으로
우회 진행 하였는데 조속한 정비가 요망됩니다.
4)진행코스
*산성로터리-한남루-전승문(북문)-옥성사지암문-봉암성암문-동장대지-한봉갈림목-남한산(왕복)-벌봉
-봉암산성신축비-법화골갈림목-전망암-갈라진이빨바위-춘궁동갈림목-새바위-개구리바위(왕복)-막은
데미고개-사미고개-객산-선법사갈림목-전망쉼터-거북바위-산불감시탑-매봉앞3거리 -매봉(왕복)-바깥
샘재-중부고속국도지하도-동경주3거라-덕풍1교-하남시청-하남 시청역.
5)탐방거리 14.2km(아래 개념도 참조)
4. 南漢山城
1)위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산1.
(면적 608,705㎡. 사적 제57호 1963.1.21.지정.)
( 도립공원 제 158호 1971. 3. 17. 재 지정)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 6km에 있는 남한산에 위치함.
2)총길이; 12.356km.(본성 8.9km, 외성3.2km, 신남산성 0.2km.)
높이 7.3m.
성내부 면적; 212만6,637㎡.
3)역사
ㅇ삼국시대및 통일 신라시대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때 백제의 수도 위례성으로 추정 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젔으나 신라시대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ㅇ조선조 인조 숙종시대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갗추었습니다.
*남한산성 축성에 대한 설
하나, 남한산성이 백제 시조 온조가 세운 왕도인 하남위례성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남한산성이 신라시대에 쌓은 晝長城(주장성,日長城)이라는의견이 있습니다.
전자의 처음 제기 시기는 고려시대로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등 조선시대 지리 관련 문헌에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이라는 주장이 실릴정도로 힘을 얻었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의 입장에서 한성이 국가의 수도로 적합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정남한지의 저자 홍경모만이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인용하여 이런 주장을 반박하였으나 인정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학계에서 는최초의 백제수도 위례성으로 풍납토성을 강력히 지목하고 있으나, 2001-2002에 걸쳐
토지박물관에서 남한산성의 행궁터를 발굴 조사했는데 백제유적인 수혈 화덕자리 토기조각등의 출토로
백제시대에도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대적인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도읍으로 단정 지을수 없으며 계속 연구중입니다.
다른 하나의 설; 신라시대 주장성 주장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신라 문무왕 12년조에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 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당과 투쟁에 들어간 시기로 특히 문무왕 12년 당나라 병력 4만여명이 평양
에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범하려는 의도를 보이던 시기였고 고구려의 패잔병과도 대치하던 시기이기때문
에 이를 대비코자 남한산성을 축조했을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주장은 여러 고문헌에도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연구에서 주장성과 남한산성의 크기를 비교하여
당시 한산지역 산성중에서 이 기록에 근접한 산성은 남한산성이 유일하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 되고있
습니다.
또 조선시대 기록에도 주장성의 길이가 3,993보나 17,400척등으로 기록되어 있는거리를 오늘날 단위
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주장성에 관한 기록과 비슷합니다.
인조 당시 개축 할때 기록에 "옛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라는 남한지의 기록이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설을 뒷 받침하는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 되기도 하였습니다.
토지박물관의 남한산성 행궁터 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층위 아래에서 길이 50m 가량의 통일신라시대
환경 초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유물로는 국내 최대크기 통일신라시대 편기와가 다수 출토 되었습니다.
ㅇ고려시대에는 특별한 기록이없고 조선시대에 기록은
태종때 전략 거점으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세종조에 군사시설로 이용 하였고
1596년(임진왜란) 서애 유성룡이 전략적 거점을 주장.
1621년(광해군13) 석성으로 개축공사 시작.
1624년-1626년(인조2) 이괄의 난을 계기로 도성방어와 유사시 피난처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증대되어 2년 간 공사 추진 완료.
1636년 병자호란(청태종 12만 대군 침공)
식량 부족등으로 45일만에 한강변 삼전도에서 항복.
인조가 소복을 입고 청 황제 황태극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림,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를고백하는 여진족 의식)
ㅇ병자호란 이후
병자호란을 거치며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하여 봉암외성 포 루돈대 옹성등을 증축
하였고 문루와 장대를 축조 하였슴.
ㅇ1896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애사건)후 봉기한 경기 의병이 잠시 남한산성을 점거(2월28일)하기도
하였고
ㅇ1919년 3월 27일 인근 주민들의 만세운동.
ㅇ1930년대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
4)환경
ㅇ남한산성의 전반적 지형은 청량산(497m) 남한산(480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주봉인 청량산(482.6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과 망월봉(502m) 남쪽으로 한봉(414m)을 비롯한 몇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입니다.
ㅇ산 아래 해발 400m 내외의 고도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비교적 넓은 면적의 평지가 펼쳐저 있
으며 고위평탄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한산 주변은 서고동저의 기복을 형성하여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
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 합니다.
ㅇ산정을 중심으로 서쪽 저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 동쪽에는 또 다른 지류인 광안천이 북으로흘러
본류와 합류합니다.
산과 성벽이 결합하여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공략이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 입니다.
ㅇ성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개의 샘이 있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장기간 농성에 유리 합니다.
ㅇ남한산성은 한강변의 가시권에 속해서 강북의 아차산 일대와 북쪽의 불암산 인왕산까지도 조망이
가능 합니다.
5)이용과 생활
남한산성 내부는 높이400m 정도의 고위평탄면으로 일시적 방어만 가능한 타 산성과는 달리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에 광주군청이 설치될 정도로 행정의 중심지이자 지역중심지로 기능하였습니다.
또한 이지역 취락은 고도가 높고 산으로 둘러 싸여있어 다른지역과 확연히 다른 입지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6)시설및 건축
ㅇ성곽
ㅁ원성; 하나로 연결된 본성, 높이 3-7m.
ㅁ외성; 봉암성(숙종 12년 축성) 원성에 대해 새로 쌓은 성의 뜻으로 신성이라고도 하고
동쪽에 있어 동성이라고도 함.
한봉성(숙종 19년 축성) 봉암성 동남쪽-한봉 정상 구간의 성.
신남성(영조 29년 축성) 검단산 정상에 위치, 남격대 또는 대봉으로 부름.
ㅁ옹성; 주로 성문 보호 시설, 주 성곽에서 밖으로 길게 뼏은 작은 성곽, 성벽에 달라 붙은 적군을
옆에서 공격 할수 있슴. 남한산성에 5개의 옹성이 있슴.
ㅁ여장(성가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수 있는 시설.
남한산성은 전돌로 쌓은 평여장 시설임.
ㅇ성문
ㅁ동문(左翼門)
ㅁ서문(右翼門)
ㅁ남문(至和門)
ㅁ북문(戰勝門)
ㅁ암문(16곳) 형식 평거식과 홍예식.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문.
제11 암문은 시구문 임.
ㅁ수문; 배수물길.
ㅇ장대;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설치한 지휘소.
ㅁ수어장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1972. 5.4.지정,유네스코세계유산 2014.6.22지정,1439호)
ㅁ남장대터; 제 2 남옹성 바로 안쪽.
ㅁ동장대터; 동쪽에 위치.
북장대터; 북문 서북쪽 245m 해발 405m지점.
외동장대터; 해발 492m 지점.
ㅇ행궁(사적 80호, 2007. 6. 8.지정)
유사시 피신 예비 궁궐.
조선조 인조4년(1626) 6월 총융사 이서의 계책으로 건립 되었고,병자호란으로 아픈역사를 품고
있으며 일제강점기때 파괴 되었다가 10여년의 공사기간을거쳐 201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일반에게 공개 되었습니다.
약 30,000㎡ 부지에 상궐 하궐로 나뉘는데 정자 좌전 광주유수의 집무사 외행전 임금의처소인
내행전 정문인 한남루등이 있습니다.
ㅇ침괘정(1972. 5. 4. 지정,경기도 유형문화재 5호)
관사의 용도로 쓰인 특수 건물로 추정.
ㅇ崇烈殿(경기도유형문화재 2호 1972. 5. 4.지정)
백제 시조 온조왕의 위패 봉안 제사 사당.
ㅇ청량당(경기도유형문화재3호197.5.4지정)
남한산성 동남쪽 부분 축성 책임자 이회와 그 부인및 서북성을 쌓은 벽암 스님의 김각성의 혼령을
모신 수어장대 담밖의 사당.
ㅇ연무관(경기도유형문화재 6호, 1972.5.4.지정)
군사들 무술 연마 장소.
ㅇ지수당(池水堂경기도문화재자료 114호))
조선조 현종13년(1672) 당시 고관들의 낚시터.
ㅇ군포지
성을 지키는 초소 건물 터.
ㅇ사찰
ㅁ장경사; 경기도 문화재자료 15호, 1983. 9. 19. 지정
ㅁ망월사지; 경기도기념물111호1987.2.12지정
ㅁ국청사; 1625년 (인조3)남한산성 축조시 7개 사찰 창건중의 한 사찰.
ㅁ개원사지;경기도기념물119호1989.12.29지정.
ㅁ옥정사터;절뒤의 큰우물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옥같은 샘물이 솟아 붙여진 이름,
ㅇ사당
현절사;경기도 유형문화재 4호 1972. 5. 4.지정.
병자호란때 3학사 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넋을 위로 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
6)관광정보
ㅇ축제
ㅁ산성문화재; 국난 극복의 장소에서 10월 개최.
ㅁ 숭열제향; 온조왕과 축성 책임자 이서 장군에 바치는 제향.
ㅁ 현절사제향; 3학사를 기리는 제향.
ㅁ 영월제; 지역 주민들의 전승 정월 대보름 행사.
ㅁ 도당굿; 청량당에서 이회장군과 그 부인등을 기리는 굿행사.
*남한산(522.1m)
1)위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검복리 불당리, 하남시 항동 상사창동 등에 걸쳐 있는 산.
주장산 일장산 이라고도 합니다.
청량산(482.6m) 벌봉(515m) 한봉(418m) 검단산(520m)으로 이어져 있어 산세의 구별이 모호
합니다.
2)전해오는 이야기
산의 사방이 평지로 둘러 싸여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日長山 혹은 晝長山이라는 이름이 붙여
젔습니다.
고주몽의 셋째 아들 溫祚가 남하 하여 백제국을 일으킨 곳으로 유명합니다.
원래 온조는 현재 서울 풍납동에 토성을 쌓고 위례성이라 하여 백제국을 세웠으나 지세가 불안하고
협소하여 이곳으로 천도 하였습니다.
또한 벌봉을 둘러싸고 있는 남한산성의 외성인 봉암성은 천혜의 요새답게 산세가 험해 병자호란때
청태종과 청군이 이곳에 진을 친 다음 전투는 하지 않고 인조와 조선군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내려다 보면서 항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는 전설을 기지고 있습니다.
3)산행 길
남한산은 서울 분당등 수도권 남부지역 주민들의 해맞이 인기 명소입니다.
접근성이 좋고 산행도 힘들지 않으며 주변 먹거리촌도 잘 갖추어진 준비된 지역입니다.
*북문
*봉암성
*客山(292.1m)
1)위치;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산 10-4.
2)명칭; 객지에서 온산이라하여붙여진 이름입니다.
3)설화; 옛날 마귀 할멈이 한양에 있는 남산과 같은 산을 만들려고 이천의 도드람산을 떠서 치마폭에
싸 가지고 가다가 힘이 들어 이곳에 놓고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샘재
객산 자락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샘이 있는 고개 넘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동경주 고개를 넘어 오면 나오는 마을을 바깥샘재라하고 교산동에 위치한 샘재 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샘재라 합니다. (스토리 텔링 안내문 참조)
5. 풍광사진
1)남한산성 로터리-옥정사지 구간의 풍광
▲남한산성 중심의 원형 회전 로터리
▲세계유산 표석
▲남한산성 행궁 정문 한남루, 뒤로 수어장대 봉우리가 보인다
▲전승문 (북문)
▲북문 서쪽 성벽 길 풍경
▲북문에서 동쪽 동장대 방향 성벽길
▲성벽 밖의 외 솔
▲성벽 내의 적송 모습
▲옥정사지 암문
2)옥정사지 암문-동장대 구간의 풍광
▲이상, 동장대 오름 북쪽 성벽길 중 가장 가파른 계단 길
▲봉암성 암문 (제3암문); 원성과 봉암성 연결 통로.
▲동장대터에서 봉암성 방향 조망
▲동장대 터
▲봉암성 길에서 돌아 본 동장대 터
3)봉성암문-벌봉 갈림목 구간의 풍광
▲이상, 동장대에서 벌봉과 남한산 가는 길의 봉암성 풍광
4)남한산과 그주변 풍광
▲남한산 정상석; 현 위치에서 100m 정도 남쪽에 실제 정상이 있슴
.
▲삼각점이 있는 남한산 실제 정상
▲복원된 한봉성의 암문
▲한봉성(복원 구간)
▲한봉성 옛성 잔존 모습
▲남한산 표석 주변 풍광
5)벌봉과 그 주변 풍광
▲벌봉 암문 (봉암성 구간); 객산은 이 암문을 지나 간다
▲봉암성 잔존 모습
▲성벽 위의 산 나리 꽃
▲청 태종의 수어장대 전망대가 되었던 벌봉
▲이상, 벌봉옆의 봉암신성 신축비; 비문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성 밖에서 본 봉암성
6)법화골 갈림목-개구리 바위 아래 쉼터 구간의 풍광
▲바람재 숲길
▲이상, 산곡동 방향 전망 바위와 계곡 풍광
▲갈라진 이빨 바위
▲새바위
▲새바위를 지나 개구리바위 능선으로 돌아 가는 길
▲새 바위길을 돌아, 다시 개구리 바위 능선으로 왔다.
▲중식 쉼터; 계곡 바림이 시원해서.......
7)사미고개-객산 정상 구간의 풍광
▲사미고개; 하사창동과 하산곡동을 오가는 고개로 새미고개 또는 삼외고개라고도 합니다.
객산과 남한산성을 연결하는 주능선 중 가장 낮은 곳으로 고골 사람들이 광주 이천 우시장에서
소를 사올때 이 길을 가장 많이 이용 하였다고 합니다.
▲사미고개를 지난 개활지에서 지나온 능선 조망; 가운데 벌봉이 보인다.
▲객산 정상
▲객산 정상에서 예봉산 조망; 습도가 높아 산 그리매가 흐리다.
아래쪽에 한강의 팔당 대교도 보인다.
▲스티필드 하남 타워가 보인다.
8)객산-하남 시청역 구간의 풍광
▲예봉산 정상의 기상관측 타워가 희미하게 보인다.
▲솔숲의 전망 쉼터
▲거북 바위
▲검단산 조망
▲산불감시탑
▲개미의 대이동
▲하남대로 덕풍1교에서 덩풍천 북쪽 조망
▲하남시청 정문
▲오늘의 종착지; 하남 시청역.
9)트랭글 궤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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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등산야생화 사진 원문보기 글쓴이: 장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