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SF 코믹 소설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따르면 은하계의 모든 주요 문명은 3단계 진화를 거친다. 생존, 의문, 그리고 세련(sophistication)의 단계다.
먹는 문제에 비유하자면, 첫째 단계는 ‘어떻게 먹고살 수 있을까(how)’, 둘째는 ‘우리는 왜 먹어야 하는가(why)’, 마지막 단계는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까(where)’에 해당한다.
얼마 전 영국을 다녀오면서 받은 느낌은 영국은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지 선택한 것 같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은 금융에 지나치게 의존한 영국 산업의 몰락을 얘기했다. 그러나 영국은 점심 먹을 장소를 옮겼을 뿐이었다. 훨씬 더 멋있는 장소로 말이다. 적어도 자동차 산업과 전자 산업은 그랬다.
기자는 자동차 R&D 회사인 매클래런(McLaren·통칭 ‘맥라렌’)과 스마트폰 핵심 부품 설계 업체인 ARM이라는 두 회사를 방문했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언제나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즉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지 항상 그들 스스로 결정해 온 기업이었다는 점, 그리고 ‘두뇌’로 먹고사는 기업이라는 점이다.
지난 4월3일 런던 히스로(Heathrow) 공항에서 M25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20분쯤 달린 뒤 오른쪽 숲길로 들어섰다. 주변에 건물 하나 없이 가로수 사이로 넓게 초원이 펼쳐졌다. 편도 1차선 도로를 한 5분쯤 더 달려 완만한 구릉을 지나니 앞쪽의 라운드어바웃(원형으로 된 영국식 교차로) 중앙에 ‘매클래런 테크놀로지 센터’라는 작은 간판이 나온다. 간판 방향 지시에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50만㎡(약 15만평)나 되는 풀숲 안쪽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애플 신사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인공 호수 위에 떠 있는 건물은 위에서 보면 태극 문양이다. 호수에 담긴 물은 50m 레인의 수영장 50개를 채우고도 남는다.
매클래런그룹은 원래 세계 자동차 경주 대회인 F1(포뮬러 원)에 출전하기 위해 직접 자동차를 만들고 출전한 레이싱팀이었다. 페라리와 함께 F1을 대표하는 양대 축이었다. F1에 출전하면 TV 중계권료와 후원사의 후원, 입장료로 한 해 수천억원을 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F1에서 쌓은 명성과 성공 노하우를 어떻게 사업 모델로 확장할 것인지 고민한 끝에 10년 전 스포츠카 생산을 결정하고, 3년 전 양산에 돌입했다. 연간 생산량은 3300대. 그중 염가형 스포츠카인 ‘650S’ 가격이 3억원이며, 플래그십 모델인 P1은 기본 가격이 15억원, 맞춤형 모델은 20억원이 넘는 차가 흔하다.
매클래런은 2000년대부터는 자기들의 기술을 파는 컨설팅 사업에 진출, 지금은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벤츠의 8억원짜리 최고급 스포츠카 ‘SLR 매클래런’은 매클래런의 기술을 바탕으로 했다. 매클래런의 기술은 자동차와 전혀 무관한 업종에도 팔리고 있다. 매클래런은 현재 히스로 공항의 관제 시스템 효율화 작업을 진행 중이며, 이 외에도 석유·제약·군사 등 다양한 업종에 기술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매클래런그룹 직원 수는 2200명인데, 작년 매출이 약 1조원에 달했다. 이 중 2000명이 기술직과 연구원이다. 2000명 중 700명은 그룹 내에서 ‘과학자(Scientist)’라는 최고급 두뇌에 속한다.
이튿날 찾아간 ARM 역시 두뇌 기업의 전형이다. 스마트폰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의 원천 설계 기술을 개발한다. 전 세계 모든 스마트폰·태블릿PC에 탑재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의 95% 이상은 이 회사의 설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논스톱 급행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을 달려 케임브리지 역에 도착한 뒤 2층 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달리니 한적한 대지에 2~3층짜리 낮고 넓은 건물 10여개가 흩어져 있었다. 세계 모바일 기술을 쥐고 흔드는 강자의 존재감 따위는 없었다.
앤드루 윈스탠리 홍보실장은 “ARM은 공장이 없고 연구소뿐이니, 조용해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라고 했다. 전체 직원 2800명 중 70%가 연구원이다. 건물 안을 둘러보니 연구원들이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헤드폰을 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잔뜩 들어왔다.
이 회사 매출의 대부분은 스마트폰·태블릿PC 제조업체에 설계 기술을 제공해 주고받는 라이선스비와, 해당 제품이 팔릴 때마다 받는 로열티에서 나온다. 작년 매출은 전년보다 24% 증가한 1조3000억원이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49%에 달했다.
앨런 포스터 스포츠카 생산 담당 부사장 안내로 자동차 공장을 먼저 둘러봤다. 축구장 네 개 정도인 3만2000㎡의 공간. 바닥과 벽이 눈부시게 하다. 대조를 이루는 검은색 직원 작업복은 휴고 보스가 디자인했다고 한다. 자동차 공장 특유의 쿵쾅거리는 프레스 소리나 매캐한 기름 냄새는 없었다. 깨끗했고, 심지어 우아했다.
멀리 보고 미리 계획한다
포스터 부사장은 30년 전 영국 포드 공장을 시작으로 GM과 도요타 공장에서도 일했다. 2005년 매클래런으로 스카우트돼 3년 전 스포츠카 양산을 시작하기까지, 공장의 작은 디테일까지 전부 그의 손을 거쳤다. 10여년 전 매클래런은 F1 레이싱팀에서 종합 기술 회사로 다변화하려는 장기 전략을 세웠다.
“저희는 아주 긴 관점에서 사업을 바라봤습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이 가졌던 긴 안목의 투자 전략 말입니다. 저희는 F1 팀만 갖고는 재정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지요. 우리는 페라리가 했던 것처럼, F1에서 쌓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카 생산 쪽으로 영역을 넓혀 규모의 경제를 키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 영국엔 내세울 만한 자동차 회사가 없다. 재규어, 랜드로버, 롤스로이스가 모두 외국에 팔렸다. 그는 영국 자동차 산업이 몰락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0~30년 전 영국 자동차 회사에는 오직 1년짜리 계획만 있었습니다. 당장 올해만 생각했기 때문에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고, 도요타처럼 10년, 20년을 보는 회사에 맞설 수가 없었지요. 현재 매클래런의 사업 전략은 일본식 사업 철학에 영국의 브랜드 파워를 접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공장이 지나치게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도요타식으로 보면 ‘무다(낭비라는 뜻의 일본어)’투성이인 것 아닌가요.
“(웃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도요타나 GM에 있을 때 이 정도 라인을 만들려면 최소 1200억원은 들었을 겁니다. 저희는 고급스럽게 만들고도 800억원밖에 안 들었어요.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면밀하게 계획됐다는 겁니다. 과정을 잘 짜면 실제 실행 과정의 낭비가 거의 없어집니다. 공장을 짓다가 설계 변경을 한다든지 장비를 갑자기 도입한다든지 하면 그게 전부 추가 비용으로 전가되지요.
이 공장 형태는 무엇 하나 기능을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진 게 없습니다. 벽은 작업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빛을 반사하게 함으로써 공장 내 조명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25% 절감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건물 바깥 인공호수는 아름다움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호수에서 물을 끌어올린 뒤 식물과 바이오기술을 이용해 열을 식히거나 저장하는 데 사용됩니다. 에너지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이 어떻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한 분야에 최고가 되면 다른 분야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매클래런은 세 가지 핵심 비즈니스가 있다. 스포츠카 생산, F1, 기술 컨설팅이다. 기술 컨설팅을 자동차 회사에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철도 ·항공·에너지·제약·군수·헬스케어·가전, 심지어 축구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에 제공한다. 자동차 회사에 대한 기술 컨설팅은 10%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제프 맥그래스(Mcgrath) 기술 컨설팅 담당 부사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F1 기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엔진, 조향(操向), 디자인 등 눈에 보이는 부분만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F1의 가장 큰 혁신은 전자·소프트웨어, 데이터 관리와 분석에서 일어났어요.
F1 운영사인 FIA는 자동차의 디자인이나 파워 등 모든 분야에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레이스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런 제약 속에서 남보다 앞서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고 빠르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는 매년 일어나며, 때로는 레이스와 레이스 사이 몇 주, 또는 레이스 도중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마지막 경우라면 전략적 판단을 위해 허용된 시간은 몇 분, 몇 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전자공학·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지난 20년간 이런 일을 겪어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따라서 여기에서 얻어진 노하우로 히스로 공항 관제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고, 석유 회사들이 석유 생산을 최적화하게 도울 수 있는 겁니다.”
그는 “결국 기술은 고급의 세계로 가면 다 통한다”고 말했다. “당신이 어떤 기술에 통달한다면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보는 눈이 열릴 겁니다. 이런 것은 한 분야에 통달한 전문가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의 융합이라는 것은 각각의 기술을 조금씩 알아서는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술 분야의 고급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은 F1 분야에서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매클래런이 컨설팅하는 회사 중에는 세계 최대 제약 회사인 영국의 글락소스미스클라인도 포함돼 있다. 해외 물류 프로그램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미국 디자인 회사 아이데오(IDEO)에는 데이터센터의 운영 방법과 디자인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첼시 축구클럽이나 영국 내 럭비클럽 같은 스포츠팀도 컨설팅한다. “선수들이 경기 중에 상대팀의 어떤 포지션의 선수와 어떤 식으로 얼마나 많이 육체적인 접촉을 하는지 등을 측정한 뒤 이를 토대로 어떻게 트레이닝을 하고,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할지 알려줍니다.” 그는 고객 중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국 기업도 몇 개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똑같은 자동차는 하나도 만들지 않는다
매클래런 테크놀러지 센터에는 스포츠카 생산, F1, 기술 컨설팅 엔지니어들이 한곳에 모여 일한다. 1층 자동차 공장 옆에 F1 레이싱팀이 있고, 자동차용 고성능 전자 부품을 설계하는 팀이 있다. 2층에는 이런 기술을 여러 산업에 응용하는 컨설팅 회사가 있다.
포스터 부사장은 “첨단 기술만 만지는 엔지니어들이 실제 자신들의 기술이 어떻게 양산차에 구현되는지를 실물로 확인하고 서로 의견을 공유함으로써 양산과 첨단 기술 양쪽에서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F1 팀 엔지니어들은 지구상에서 차를 가장 빠르게 달리게 하는 기술면에서 최고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매클래런의 플래그십 스포츠카 ‘P1’은 8기통 트윈터보 엔진과 전기모터를 결합해 최고 출력이 900마력 이상이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가속하는 데 2.8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현대 쏘나타가 168마력·10초대이다.) 매클래런의 스포츠카에는 F1의 두 가지 대표 기술이 숨어 있다.
― 어떤 부자가 주문한 차 안에 커피 머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고객이 있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게요. (그는 바로 앞에서 조립이 진행 중인 차량을 가리켰다.) 보통은 탄소섬유 차체 위에 코팅해서 블랙 느낌을 그대로 살립니다. 하지만 한 고객이 ‘나는 블랙이 싫다’면서 녹색으로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녹색으로 하고, 시트와 휠도 녹색으로 만들 예정입니다. 이렇게 고객 취향을 반영해 차를 생산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같은 매클래런 차량은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고 봐도 될 겁니다.”
F1팀 창설한 매클래런, 1970년 시험주행 중 사망
데니스 회장 들어 그룹체제 갖춰
매클래런 그룹은 1966년 브루스 매클래런이 만든 F1팀에서 비롯됐다. 1970년 매클래런이 시험 주행 중 사고로 사망한 뒤 팀 멤버 테디 메이어가, 1980년엔 론 데니스가 리더가 되면서 F1을 대표하는 명문팀이 된다.
데니스는 18살 때 모터스포츠 업계에 기술자로 발을 딛은 뒤 49년간 일해 왔다. 그는 매클래런에 합류하기 전, 다른 F1팀에서 일할 당시 먼지 하나 없는 작업장을 강조했다. 한번 경주가 끝난 차량은 수술실을 방불케 하는 수준으로 완벽하게 해체 조립해 고장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성으로 이름을 날렸다.
F1은 주관 운영사가 TV중계권료, 경기장 입장료 등의 수익을 관리해 F1에 참여하는 10여개 팀에 배분한다. 매클래런은 F1에 참여하는 팀 가운데 한 곳이며, 주관사에서 배분받는 이익 외에도 경주용 차에 붙이는 광고 등 스폰서십을 통해서도 돈을 번다.
론 데니스는 현재 매클래런 그룹의 CEO 겸 회장으로 매클래런 레이싱팀을 지휘하는 동시에 2000년대 들어 고급 스포츠카 생산, 기술 컨설팅 사업 등 사업 다변화 전략의 기초를 만들었다.
Tip “싸게 좋은 기술 쓰도록 오픈시킨 게 성공비결”
스마트폰 두뇌 설계사 ARM 시거스 사장 “영업이익률 50%, 매출 25% R&D 투자”
ARM 본사에서 에릭 골랜드(Gowland) 수석연구원의 설명을 들으니 삼성전자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ARM의 프로세서 기술이 들어간 4가지 모바일 기기를 보여줬다. “여기 25달러(약 2만6000원)짜리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차이나모바일의 OEM 제품인데, 중국에서 만들었습니다. 이 65달러짜리는 대만 미디어텍 프로세서를 탑재했는데 가격 대비 성능이 꽤 좋습니다. 이것은 모토롤라 대표 모델 모토G입니다. 200달러짜리입니다.
마지막 제품은 영국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가 중국에서 주문 생산해 들여온 태블릿PC입니다. 100파운드(약 17만원)짜리지만, 구글의 넥서스7과 비교할 만한 성능을 갖고 있습니다.”
ARM 같은 회사가 있는 한 저가품을 만드는 중국 업체도 최신 기술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어렵지 않다는 의미다.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한태희 교수는 “삼성전자도 중국 신생 업체도 OS는 구글 안드로이드, CPU 핵심 기술은 ARM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처지”라면서 “결국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모두 핵심에서 삼성전자가 기술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사이먼 시거스 사장은 나중에 한국에서 만났다. 그는 ARM 설립 이듬해인 1991년 입사했으며, 작년 7월 45세 나이로 CEO에 임명됐다.
― 공장이 없는데, 비용은 어디에 들어가나요.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교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비용이 드는 부분입니다. 대략적으로 보면, 저희 매출 가운데 영업이익이 절반입니다. 그리고 비용 가운데 R&D 비용, 즉 인건비가 25%, 그 외 비용이 25%쯤 되겠네요.”
― ARM이 어떻게 독점적인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저희는 반도체 회사로서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아주 긴 관점에서 생각하고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공장은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 반도체라는 제품 자체를 생산하는 것은 포기한 겁니다. 대신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라이선스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프로세서 설계를 하는 데 공통 부분을 묶어 최고의 성능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그만큼 규모가 커질 것이고 비용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립 당시 스마트폰의 초기 형태에 해당하는 애플 ‘뉴턴’이라는 PDA의 프로세서를 개발해야 했는데, 휴대용 기기이기 때문에 프로세서를 작고 저전력이면서 싸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거기에서 저희 기술력의 강점이 시작됐습니다.”
― 그래도 95%라는 시장점유율이 말이 되나요.
“꼭 ARM 기술을 써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기술을 선택하는 건 고객사에도 이익일 겁니다. 가장 저렴하고 전력 소모도 적고 가장 작은 프로세서를 설계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바일에 특화된 저전력, 소형, 저가격인 ARM 기술을 쓰는 게 스마트폰 회사가 직접 내부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고 효율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많은 스마트폰 회사가 ARM 기술을 채택했고, 소프트웨어도 ARM 기술에 최적화된 형태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더 많은 스마트폰 회사가 ARM 기술을 채택하는 선순환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죠. 우리가 성공한 또 다른 이유는 경쟁자에 비해 개방적이었다는 겁니다. 스마트폰 회사들은 설계 기술을 외부에 제공하는 데 아주 폐쇄적이었지요. 반면 저희는 모든 고객이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기술을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 이 기사는 조선일보 2014년 4월26~27일자에 실린 것을 전재한 것입니다.
/이코노미 조선
글=워킹·케임브리지(영국) = 최원석 조선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