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康津)은 군(郡)으로 승격한 이래 그 땅이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그대로이다. 그러나 1960년대의 12만이 넘던 인구는 오늘날에는 3만3천을 어렵게 유지하고 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진은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초당에서 동북쪽으로 15킬로 떨어진 곳에 내동 마을이 있고, 김재철은 이곳에서 1934년 김경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을은 90호 인가가 있는 비교적 큰 동네였다. 남쪽으로는 완도와 고금도가 마주보고 있는 강진만(康津灣)이 강진의 중심부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고, 내동마을 앞의 벌판은 탐진강(耽津江)이 감싸안으며 강진만으로 흘러간다. 비파산(琵琶山)의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김재철 회장의 옛집과 선영을 찾아갔다.
▲ 김재철 생가. 강진군 군동면 금강리.
그의 생가는 마을에서도 안쪽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데 16회절 대명당이다. 기실 풍수계에 회자되는 유명한 양택들보다 훨씬 대명당이다.
강진농고의 졸업을 앞 둔 시기였다. 공부를 잘했던 김재철은 서울농대를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울대를 다녔던 담임 선생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서울대생이지만 이렇게 너희들과 입씨름하고 있지 않느냐. 인생을 더 멀리 더 넓게 봐라. 1등 국가가 되고 안되고는 젊은이들이 바다개척에 뛰어드는가에 달려있다” 김재철의 인생항로를 결정지은 한 마디였다. “공부 잘하는 녀석이 뱃놈학교 간다”는 비아냥을 뒤로하고 김재철은 국립수산대학(부산)의 어로학과에 진학한다.
외국에 나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1957년, 수산대 어로학과 4학년생들은 실습선을 타고 대만의 기륭항에 간다. 이 때, 김재철은 기륭항에서 참치어선을 처음으로 목격한다.
1957년 제동산업의 지남호(指南號)가 사모아로 출항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김재철은 회사를 여러 번 찾아가 승선을 간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일년 동안 월급도 없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사모아행 어선에 승선하니 그의 나이 24세였다.
선원들은 한가한 시간이면 화투와 마작을 즐길 때, 김재철은 어류도감을 보며 물고기를 연구했고 영어공부도 계속했다. GPS가 없던 시절, 배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영어로된 천측(天測) 정보를 읽어야 했으니 김재철의 영어 실력이 돋보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온갖 허드렛일을 알아서 챙기니 성실하다는 평판도 얻었다.
지남호는 12개월 간 풍성한 어획고로 9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개가를 올렸다. 제동산업은 연이어 어선을 사모아 어장에 추가 투입하는데, 이제 김재철은 월급 200달러의 당당한 일등항해사로 승선한다.
1961. 1월 ~ 1962. 5월, 1년 6개월간 사모아에서 발휘한 여러 차례의 만선 어획량으로 그에게 “캡틴 김”이란 별명이 붙게 되었다. 동아일보에 실린 “13만 달러어치, 풍어기 날리며”라는 기사에는 “김재철”이란 이름이 실렸다. 험난한 선상생활 중에도 매일 매일 선내(船內)와 어장상황, 선장의 고민과 역할 등을 낱낱이 기록한 그의 선상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 김재철 증조부 묘소. 강진 내동마을 뒷산.
김재철 증조부 묘소. 강진 내동마을 뒷산.
증조부 묘소 뒤에서. 핵심 주혈인 조부모 묘소의 여기(餘氣)에 자리하지만 엄청난 대명당이다.
김재철의 부친은 7대 독자였다. 증조부 묘소가 김재철 집안에 서광을 비추기 시작했다는 풍수적 판단이다.
원양사업은 선장의 능력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결정되고는 했으니, 사주(社主)들은 모두 김재철에게 눈독을 들였다. 이학수는 5·16때 혁명공약과 포고문을 인쇄했던 사람이다. 큰 돈을 벌기위해 고려원양을 설립하고 김재철에게 집요하게 러브콜을 보낸다. 1965년 30세의 김재철은 고려원양의 수산부장으로 발탁된다. 이학수는 김재철에게 고려원양의 광명 11호 선장이자 광명 9·10·11호 3척의 선단장으로 임명하고 인도양 어장 개척에 투입한다. 인도양 조업에서도 김재철은 어김없이 많은 성과를 올렸고, 그가 쓴 선상일기의 내용은 실업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1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는 이사로 승진한다. 7~8년 선배들을 넘어서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1969년, 35세가 된 김재철은 자본금 1,000만원으로 동원산업을 설립한다. 창업의 이면에는 일본인 하기와라 노부오(萩原宣夫)의 끈질긴 권유가 있었다. “중고 참치어선을 외상으로 줄 테니 고기를 잡아서 천천히 갚아라. 당신은 틀림없이 고기를 잘 잡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였다. 경쟁자이기도 한 김재철을 미쓰비시 종합상사에 연결해 주니, 이 때 만난 사람이 마키하라 미노루(槙原稔) 전 미쓰비시 회장이다. 미쓰비시는 김재철이 하버드의 최고경영자과정(AMP)을 연수하는데 추천을 해줬고, 훗날 외환위기 때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깐깐한 일본인도 김재철의 성실함과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 조부모 묘소. 증조부 묘 하단.
조부모 묘소. 증조부 묘 하단.
증조 묘소도 대명당인데, 조부모 묘소는 더 좋은 명당에 모셨다.
험난한 바다에 운명을 맡기며 연이은 만선(滿船)의 어획고를 올린 것에는 양대(兩代)선영의 묫바람도 적지 아니 작동했을 것이다.
이곳의 맥로는 진도방면에서 출발하여 해남을 경유하고 만덕산을 넘어 강진의 내동마을 앞 벌판을 지나서 조부모 묘소에 정확히 결혈하니 22회절 명당이다. 22회절 명당이면 대기업의 창업이 가능한 역량이다. 조부모 묘소는 김재철이란 용(龍)에게 여의주(如意珠)를 물리어준 셈이다.
조부모 묘소앞 청색선은 길흉의 경계이다. 김재철의 조부모와 증조 묘소는 길(吉)한 쪽에 자리한 명당이지만 아래에 자리한 족인(族人)의 묘소는 자리가 될 수 없다. 맥로이론에서 길흉경계선의 파악을 중요시하는 이유이다.
김재철의 사업에도 세 차례의 위기를 맞게 된다. 1973년 10월의 1차 오일쇼크, 1977년 3월의 미·소간의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 이어서 1979년 1월의 2차 오일쇼크였다. 김재철은 어로기법의 혁신과 새로운 어장의 개척 그리고 4,500톤 급 공모선의 대담한 투자로 난관을 돌파한다. 김채철의 어장 개척사가 한국 원양어업의 개척사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동원은 1982년 국내 최초로 참치캔을 출시한다. 당시 국민 1인당 소득이 2천 달러에 육박하자 김재철은 참치통조림 시장의 가능성을 확신한 것이다. 이후 참치캔 선물세트의 개발 등 식문화 트렌드에 맞춘 다양한 제품의 출시로 40년간 1위의 자리를 지키왔다. 2022년 기준 누적 판매량이 70억캔을 넘었으니 이를 늘어 놓으면 지구를 약 14바퀴 돌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국민 1인당 137개 이상을 섭취했으니 국민 통조림이라 불릴만 하다.
원양어업과 관련한 김회장의 장쾌한 스토리는 <김재철 평전>에 생생하게 실려있습니다. 김회장 사업의 양대 축의 하나인 금융업을 말하자면,
금융업은 대양(大洋)을 누비던 “캡틴 김”에게는 생소한 분야였다. 치밀하게 준비해서 도전했다기 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낚아챈 김회장의 사업가적 감각이었다.
1981년 하버드의 AMP(최고경영자과정, 13주)과정을 수료하면서, 미국의 똑똑한 젊은이들이 금융업에 진출하는 것을 목격하고, 발상을 전환하여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마침 그 해 6월 시중은행의 민영화에 따라 증권사가 매물로 나오는데, 김재철은 한신증권을 인수하여 사장(1982~1996년)이 된다. 10여 년간을 고생하며 회사를 키우는데 이 때 그가 발탁한 대표적인 사람이 김정태(전 국민은행장)과 박현주(미래에셋증권 회장)이다. 당시 36세였던 김정태와 17년 6개월간 함께 일하면서 회사를 궤도에 안착시키고, 1996년 4월에는 회사의 이름을 동원증권으로 바꾼다. 내실있게 운영을 해온 동원은 1997년 4월 “차입금 전무(Zero)”를 발표할 수 있었고, 외환위기가 닥치자 대형 증권사들이 줄줄이 적자를 내는 속에서도 186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금융업 계열분리의 복안으로 1991년 장남에게 자신의 동원산업 주식 55만 주를 증여하는데, 자진하여 증여세 62억 3,800만 원을 납부한다. 국세청은 세무조사로 추징하지 않고 자진 신고한 증여세를 받아들이며 이는 처음있는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째째하게 살지 않겠다”는 김회장의 지론이 행동으로 드러난 일이었다.
▲ 부친 김경묵(金敬黙, 1914~1991)과 모친 김순금(1913~2013)묘소.
부친 김경묵(金敬黙, 1914~1991)과 모친 김순금(1913~2013)묘소.
부친 김경묵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벌판이 훤히 보이는 길가에 무덤을 썼으니, 김재철 형제들이 초등학교와 강진농고를 오가던 그 길목에 자리한다.
김경묵은 부지런하고 수완이 좋아서 10마지기의 농사는 지었지만. 형편은 늘 빠듯한 편이었다. 그는 남에게 신세를 지기 싫어했고, 스스로 삶을 일궈야 된다고 믿었다. 남에게 수박 한 덩어리 달걀 한 꾸러미를 받아도 기록을 했다가 반드시 그 이상으로 되갚고는 했다.
부친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틈만 나면 책을 보는 사람이었다. 김회장 본인이 독서광일 뿐만 아니라 자녀는 물론 회사 직원들에게도 끊임없이 독서를 강요(?)하는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다.
모친 김순금은 강진 남쪽의 산동마을에서 스물 한 살 때 내동마을로 시집왔다. 산동댁은 11명의 자녀들과 머슴들, 그리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돌봐야했다. 그러면서 22년간 시부모를 봉양했으니, 마을 잔치와도 같았던 아이들의 운동회에 단 한번도 갈 수 없었다. 산동댁은 선영을 신앙처럼 여긴 분이였고, 김회장도 조상의 음덕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왔다.
개략 맥로도. 맥로는 묘역의 서북쪽 방면에서 출발한 것인데, 가까이는 보은산을 넘고 라천리의 벌판을 경유하여 묘역으로 진입한다.
상세 맥로도. 쌍분의 묘소는 모두 청색선의 길흉경계선 안쪽에 자리하는데, 핵심 주혈은 모친 묘소에 24회절, 부친 묘소에 23회절의 명당을 맺는다.
부친 묘소는 김회장의 금융업 창업과 외환위기 돌파에 많은 풍수적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두 분 묘소는 김회장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손자들도 사업에 뚜렷한 성과를 내는 것에 풍수적 뒷심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2004년 동원증권은 계열 분리를 완료함으로써 지분뿐만 아니라 경영상의 모든 의사결정에서 독립적인 행보를 한다. 그리고 2005년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하여 오늘의 한국투자금융지주로 발전하게 된다.
1981년 한신증권을 인수할 때는 상대방을 250만원의 간발의 차이로 따돌렸는데, 2005년 한국투자신탁을 인수할 때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칼라일(Carlye, 글로벌사모펀드)은 5,400억을 기입했는데, 동원은 그보다 12억 많은 금액을 더 써서 투자신탁을 인수한 것이다. 이런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선영풍수의 덕분이라면 풍객만의 과도한 생각일까.
▲ 김회장 부인 조덕희 (1938~2012) 여사 묘소. 이천 장호원.
김회장 부인 조덕희 (1938~2012) 여사 묘소. 이천 장호원.
김재철은 고교동창인 친구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조여사는 시부모를 봉양하며 10명의 시동생도 돌봐야 했다. 게다가 남편이 외국 친구들, 그 자식까지 데리고 오니 집안은 늘 북적거렸다. 그 모든 일은 조여사가 감당했던 몫이었다. 김회장은 아내를 회고하기를, “전형적인 현모양처에 말없이 내 뜻을 받들어 줬다”고 한다. 기실 조여사의 삶의 무게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맥로도. 동남방 먼 곳에서 출발한 맥로가 봉분의 왼쪽으로 진입한다. 김회장 모친과 대등한 24회절 명당이다. 생전에는 집안의 대소사를 떠맡더니, 세상을 떠나서도 후손들에게 풍수적 뒷심을 줄 것이란 생각이다.
필자의 과문한 탓이나, 우리나라 정·재계에 4대를 모두 이런 대명당에 모신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기업을 창업하려면, 창업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명당의 선영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회사가 지속·발전하려면 대대(代代) 또는 격대(隔代)로 그 기업에 상응하는 또 다른 대명당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현장에서 체득한 현상이다.
※ 풍수이외의 내용은 공병호의 <김재철 평전>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