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98
7월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연중 제1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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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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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8goOfIuU5Y (신현범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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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이라는 빛나는 열매를 맺게 한 명품 나무였습니다!>
시들시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서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튼실하고 색상도 좋으며 꽉 찬 열매는 반드시 좋은 나무에서 거둘 수 있습니다.
성모님이라는 역사상 길이 남을 멋진 열매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에게도 부모님이 계셨는데, 그 요아킴과 안나입니다. 두 분은 성모님이라는 빛나는 열매를 맺게 한 명품 나무였습니다.
교회는 초 세기부터 이 두 성인을 공경해왔습니다. 성경에는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언급이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승을 통해서 두 분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 분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전승에 따른 성모님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와 관련된 행적입니다. 신심 깊은 요아킴과 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양육했고 교육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는 또 다른 명품 나무가 되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품 열매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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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x9Zs9z4u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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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는 ‘장기적’ 관점으로 판단해야!>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는 프랑스에서 있었던 유명한 두 친구의 결투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실화입니다. 두 친구, 카루즈와 자크는 는 전쟁에서 서로를 구해주는 절친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카루즈는 하지만 성주이기는 했지만, 피에르라고 하는 영주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혈질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진 거 없었던 자크는 영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주는 카루즈의 아버지가 죽자 그 땅을 아들이 아닌 자크에게 주어버립니다. 자크도 친구에겐 미안했지만, 영주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입니다. 카루즈는 열을 받아 영주를 왕에게 고소합니다. 하지만 왕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장 카루즈는 자신처럼 가문의 회복을 노리는 집안의 딸과 혼인합니다. 카루즈는 마르게리트에게 땅을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를 이을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카루즈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못되게 대합니다.
마르게리트는 그래도 절친이었던 자크와 카루즈를 화해시켜 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과정에서 자크와 마르게리트가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자크는 낭만주의자로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마르게리트는 카루즈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카루즈는 돈을 벌어 땅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에 전쟁에 자주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크와 마르게리트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카루즈가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마르게리트는 남편에게 자신이 자크에게 겁탈당했다고 말합니다. 이에 화가 난 카루즈는 이 이야기를 귀족들을 통해 널리 퍼뜨립니다. 어차피 영주는 자크의 편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재판받으면 승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루즈는 왕에게 자크와 결투를 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왕은 그러라고 합니다. 그래서 둘이 결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결투 중에 자크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은 결코 무력으로 카루즈의 아내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카루즈는 인정하지 않고 그를 죽입니다. 몇 년 뒤 카루즈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합니다. 마르게리트는 카루즈 영토의 상속인으로서 누구의 아들인지 모를 아들과 함께 30년 넘게 행복한 생활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하기 위해 ‘장기적인 관점’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단기적으로 볼 때 카루즈와 자크는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좋았다가 싫었다고 화해했다가 다시 싸웁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둘은 서로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가라지였다는 것입니다.
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단기적으로 선교도 할 수 있고 단기적으로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5년, 10년 전과 비교해 전체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면 단기적 판단으로는 그 사람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25살까지 저를 위해 사는 가라지였습니다. 하지만 하.사.시.를 잃고 신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이제 조금씩 더 이웃에게 피를 흘리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5년,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익어가면 밀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하느님의 뜻에 잘 따르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까지 살해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 이후로는 조금씩 더 온유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자기를 욕하는 사울의 친척도 용서하고 사울도 용서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압살롬이 죽었다고 할 때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이제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이 아닌 나의 피를 내어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가라지가 밀이 되는 때는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세례는 결단입니다. 자아의 뜻을 따라주며 살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인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면 밀이고 여전히 자신을 위해 살면 가라지입니다. 5년, 10년 전과 비교하여 나 자신보다 이웃 영혼의 구원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면 그렇게 발전하고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좋습니다. 항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1년, 5년, 10년, 20년 전과 나를 비교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이전보다 항상 더 이웃을 위해 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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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36-43 : 추수 때에 가라지를 추려내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이 세상이라는 밀밭에는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섞여 살아가지만, 이 밀밭도 추수 때는 밀과 가라지가 따로 추려지듯이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준비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여기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그것을 가리는 작업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자랄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엄밀히 구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 서는 좋은 밀일 수도 있기에 판단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전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쉽게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28)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 이웃을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하고, 쉽게 뽑아버릴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내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 역시 가라지로 되는 것이다. 남을 쉽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판단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가라지가 없는 집안,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각자가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매일 우리의 마음의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고 무슨 열매를 맺을 것인가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판단보다도 지금 이 순간 충실한 삶으로 언제나 좋은 밀알로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중요하다. 또한 지금 내가 올바르게 살지 못한다고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한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으나, 다시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즉 좋은 밀알로 변화될 수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노력하는 삶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까지 노력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항상 깨어 있는 삶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완전한 자는 없으며 완전을 향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밀알이 되도록 항구할 수 있도록 하자.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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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라지의 비유>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7ㄴ-43)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보면, 가라지를 뽑지 말고 수확 때까지 기다리라는 주인의 말에(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마태 13,29-30),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을 보면, 수확 때의 일에(하느님의 정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는 두 말씀을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심판’에 관해서,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이 자주 인용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하느님의 뜻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아버지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5,45)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마태 9,13) 가라지 같은 악인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라지를 뽑지 않고 수확 때까지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악인의 회개를 기다리는 하느님의 심정에 대해서는 에제키엘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자주 인용됩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메시아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입니다.(마태 12,20) <이 말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죄인이라도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애를 쓰신다는 뜻입니다.>
식물계에서는 가라지가 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는 가라지 같은 사람도 회개하면 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반대로 밀 같은 사람도 타락하면 가라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진실한 ‘밀’인가? 혹시 ‘가라지’는 아닌가? ‘가라지’ 같은 것이 내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의 심판대에 ‘밀’로서 서게 될지, ‘가라지’로서 서게 될지,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가라지의 비유’에 있는,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라는 말씀은, ‘가라지’가 ‘밀’로 변화될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악’과 ‘악인’을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은 악인이라도 회개해서 의인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고, 악인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악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선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악하고 강한 사람들한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참기만 해야 하는가?” 세상의 악에 맞서서 싸우고, 물리쳐서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이 땅에 ‘선’을 실현하는 일은 ‘악’을 없애는 일과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고,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악’을 없앤다는 말이 ‘악인’을 제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과 ‘악인’은 구분해야 합니다.
‘악인’을 회개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잘해 줄 수도 있고, 꾸짖거나 타이를 수도 있고, 어떤 제재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누가 보아도 ‘악인’인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의 악행을 막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상황에 따라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래도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는 주어야 합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또는 나의 선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세상의 악’을 없애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악행을 내버려 두는 것도 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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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아메리카 원주민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하나는 옳은 일을 하고, 남을 돕는 파란 늑대란다. 다른 하나는 나쁜 일을 하고, 남을 해치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우리의 마음은 일심동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2심동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다른 내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의 내면에는 거짓된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참된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두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어야 하지만, 우리의 나약한 마음은 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사탄의 깃발 아래 있을 때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원주민 할아버지의 ‘통찰’이 맞습니다. 우리가 먹이를 주는 우리의 마음이 선과 악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에 먹이를 주면 악한 마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은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학의 특징은 발병된 부위를 수술이나 약물을 통해서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학의 장점은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기 쉽고, 조기에 치료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의 단점은 발병 부위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세포를 상하게 하기도 하고, 발병 원인을 파악하기보다는 발병 부위를 제거하기 때문에 다시 재발할 우려가 있다는 점입니다. 동양의학은 우리 몸은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부위에 질병이 발생하면 그곳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몸 전체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질병 부위를 없애거나 잘라내기보다는 그와 같은 질병이 사라질 수 있도록 몸 전체를 다스리는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몸의 체질을 연구하고, 각 장기의 기능을 연구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치료 방법입니다. 당장 눈에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하기보다는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근본적인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동양의학의 장점은 몸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상처 부위를 제거하거나, 질병 부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몸의 기능이 건강해지도록 해서 몸 자체가 이겨내도록 저항력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의학의 단점도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고, 효과가 즉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10명의 사람 중에는 열심한 사람, 대충 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모두가 열심 할 것 같지만 열심 한 사람 중에서 또 게으른 사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을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게으른 사람들 또한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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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제자들은 오늘 복음 직전에 나오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마태 13,31-33 참조) 잘 알아들었던 것일까요? 집으로 돌아오신 예수님께 제자들은 유독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서만 설명해 달라고 청합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체험하는 악의 자녀들이 하느님의 자녀들보다 훨씬 더 힘 있게 보이고 그들과 같은 세상에서 함께 지내도록 허락하신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천 년 전 제자들이 예수님께 듣고자 하였던 이 설명은 오늘날 교회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진짜 계시기는 합니까?’ ‘우리가 저 악들을 제거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은 악의 자녀들을 피하여 그들이 없는 별도의 장소에서 사는 이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씨앗이 잘 성장하도록 어떻게든 악과 투쟁하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치열한 싸움의 목표는 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악이 방해할지라도 꿋꿋하게 성장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악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심판에 대한 말씀은 악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아편과 같은 허상의 위안이 아니라, 악인들의 방해에도 하느님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선을 길러 나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약속입니다.
요아킴 성인과 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은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인류의 역사 안에서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셨음을 묵상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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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효율성과 경쟁력>
가라지를 솎아내는 일과 그대로 두는 일 중 어느 쪽이 소출을 많이 내는 데 더 유리할까요? 부지런한 농부라면 결론은 뻔합니다. 시간이 지난다 해서 가라지가 밀로 바뀌지 않을 테니, 빨리 뽑아버리는 것이 한 톨이라도 더 많은 곡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발적으로 가라지를 뽑는 수고를 감수하겠다고 나서는 종들을 가로막는 주인이 오히려 이상해 보입니다.
사실 효율성을 따지는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그대로 실천하려다간 도태되기에 십상입니다. 변화를 뒤쫓기보다 선도해나가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FTA 협정을 체결한 지금, 우리 농업도 하루빨리 더 효율적인 경영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저가를 앞세운 캘리포니아산 칼로스쌀이 우리 식탁에서 외면당한 반면, 오히려 농약을 전혀 하지 않아 모양도 형편없는 유기농 쌀이 한 가마에 백여만 원씩에 팔렸다는 소식은 과연 효율성만이 정답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경쟁력 확보를 위해 될성부른 떡잎만 놓아두고 나머지는 재빨리 제거하려는 종들보다, 무녀리 같은 밀 이삭 하나라도 다칠까봐 차라리 적은 수확을 감수하려는 주인의 마음이, 우리 농촌과 각박한 우리 사회를 살리는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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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님]
<가라지의 길과 예수님의 길>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나한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어 활기찬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나와 좋지 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의 경우,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할 때가 많다.
더욱이 상대방이 나를 모함하고 빈정거리거나 험담하고 사사건건 나를 반대한다면 이를 버텨내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다. 속이 상하고 분하고 야속하며 미움이 가득해 저주를 퍼붓고 싶을 수도 있다.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 사람일까? 그 사람은 온전히 악한 사람, 사탄과 같은 존재일까? 온전한 악인, 사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힘일 때가 많다. 따라서 싸워야 할 진정한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니기에,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한테 말하는 것은 오히려 나한테도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싸움의 상대가 악의 세력이기에 악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이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이고, 진실이며, 철저히 자제된 침묵이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악에 맞선 방법을 배워 익히려 하지 않을 때가 적지 않다. 예수님의 길은 가라지가 아닌 참된 밀로 추수 때까지 자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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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시찬 다니엘 신부님]
<추수기를 위하여>
오늘의 예수님 말씀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뒤섞여 사는 세상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려면 거의가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혹은 신문에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매체를 대할 때마다 참으로 두렵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하는 것은 제 혼자만이 아니라 믿습니다.
매일 끊이지 않는 절도, 강도, 강간, 폭력, 살인, 사기, 권력형 부정축재 등등의 범죄를 볼 때마다 서양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이 한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왜 어떻게 선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악과 불행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가 살아 있는 한 계속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살면서 어찌 이다지도 악하고 비열하게 변해가는지, 또 하느님은 왜 그런 사람들을 멸하시지 않고 내버려 두는지 정말 궁금하고 답답합니다. 이러다가는 이 세상에서 선이 사라지고 악이 만연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성급한 생각 같아선 악한 무리가 당장 벌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밀밭의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해답을 주십니다. 세상이라는 밀밭에서 선인과 악인이 현재는 서로 살아가지만, 밀밭의 추수 시기가 있는 것처럼 밀과 같은 선인이나 가라지와 같은 악인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때를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악한 사람은 그때그때 벌하시다가 행여나 착한 사람이 다칠까 봐 세상 끝날까지 참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이라도 죽기보다는 회개하여 바른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배려와 지극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두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신앙 면에서 보더라도 하느님 말씀의 씨가 우리 각자의 마음과 생활이라는 밭에서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좋은 씨가 열매를 전혀 맺을 수 없도록 방해하거나 온전히 짓밟아 죽게 하는 세력도 있다는 것을 알고, 심판에 대비하여 우리 자신이 어느 편에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밀과 가라지가 싹 트고 성장할 때에는 서로 구별이 안 되듯이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선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상 가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보기엔 가라지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좋은 밀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의 것도 있다는 겁니다. 꼭 천국에 와있어야 할 사람이 없고, 천국에 있을 수 없다는 사람이 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전부를 우리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조급하게 서둘러서 판단하고 평가하고 매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한 가지 행위나 생의 한 기간만이 아니라 전 생애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때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도 좋은 밀알이 될 수 있는 기간을 충분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훌륭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생각지 않은 때에 큰 죄를 범하고 그의 생애를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판은 우리 각 사람에게 예외없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심판이며 하느님만이 또한 올바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가라지 같은 사람이나 세력이 없어져 살기 좋은 천국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구성원의 한 사람인 내가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도 좋은 밀알이었다가 불시에 순간적으로 가라지와 같은 악인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각자의 마음 밭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으며 무엇을 맺을 것인가를 깊이 살피며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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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생의 끝에 서면>
인생의 끝에 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바오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는데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이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알아들은 만큼 삶의 모습도 맑고 밝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날에 좋은 씨앗인 하늘나라의 자녀 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는 악한 자의 자녀로 밝혀질까 두렵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들은 이 세상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는 것보다 죽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야말로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먼 훗날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알곡을 만드는 것은 오늘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건숙씨의 “꼴찌의 간증”에 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수비결>
“인생은 육십에 시작하는 것이니
칠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잠깐 밖에 나갔다고 전해다오.
팔십에 저승사자가 오면
아직 이르다고 말해다오.
구십에 와서 가자고 하면
뭘 그리 서두르냐고 달래다오.
백 살에 와서 가자고 하면
이제 서서히 좋은 시기 봐서
가겠다고 전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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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애완동물의 수명도 참 많이 늘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키우던 애완동물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키우는 개만 해도 벌써 12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건강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과 달리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년 예방접종을 하고, 관절에 좋은 비싼 사료를 먹이고, 먹여서는 안 되는 것들은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예를 들어, 파, 양파, 초콜릿, 포도, 빵, 과자 등). 또 보살펴야 할 존재이기에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애완동물 키우는 분들이 모두 이렇지 않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자기 몸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몸에 해롭고,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몸 역시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 역할은 바로 ‘나’입니다. 그 누구도 내 몸을 온전하게 보호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랑을 쏟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십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 때에는 악한 자의 자녀들은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 나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라는 마음으로 악한 자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을 바라보면서 또 남들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삶을 통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는 남에게도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좋은 씨라 불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자녀입니다. 가라지라고 불리는 악한 자의 자녀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들어갈 불구덩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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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홀로라도>
마태오 13,36-43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홀로라도>
첫날도
모르고
마지막 날도
알 수 없지만
첫날과 마지막 날을
이어주는
수많은 날들
가운데에서
늘 바로 지금
늘 바로 여기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함께 어울리되
수많은 사람들과
그릇되게 섞이지 않고
홀로라도
착하게
홀로라도
깨끗하게
홀로라도
부드럽게
홀로라도
따뜻하게
홀로라도
아름답게
마지막까지
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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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깊고 신비로운,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년과 죽음을 위해서>
-‘가라지의 비유’를 바탕한 묵상-
어제 날씨는 참 청명하고 좋았습니다. 수도원 주변의 경관도 아름다워 어디나 사진 찍어도 아름다운 작품이었습니다. 새삼 사진은 빛의 예술임을 실감했습니다. 햇빛에 따라 빛과 그림자가 절묘하게 조화된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곳곳의 카톡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빛이 있기에 가능한 빛의 예술 사진이듯이, 하느님 은총의 빛과 우리의 죄의 그늘이 조화된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인생, 빛의 예술인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흑백 사진은 물론 빛과 그늘이 잘 조화된 천연색 사진도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듯 인생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삼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인생, 특히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입니다. 정경에는 없으나 2세기 위경 야고보 복음에 나오는 두 인물로 이미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승되어 기념하는 믿을만한 성인들입니다.
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6세기부터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10세기에는 서방교회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요아킴 성인에 대한 공경은 훨씬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전승의 요지인즉 성녀 마리아의 어머니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으나, 요아킴 성인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뒤 하느님의 섭리로 마리아가 탄생하였다는 일화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노부부를 묵상하면 참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의 모습을 연상케 됩니다. 분명 이런 삶에 죽음도 또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오늘 기념일 가까이 있는 7월24일 연중 제17주일을 제2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 기념일로 정해 온 교회가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날로 늘어나는 노년 인생들을 위해 참 시의적절時宜適切한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날의 기도문도 아름다워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주님,
저에게 장수의 복을 베풀어 주시고,
주님께 피신하는 이들이
언제나 열매를 맺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오, 주님,
저의 체념과 절망을 용서하시고
저의 기력이 쇠하여도
저를 버리지 마소서.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미래를
주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사명을
희망으로 바라보도록 가르치시고
제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저를 주님의 온유함의 혁명을 이루는 장인으로 삼으시어
저의 손주들과
주님 안에서 쉴 곳을 찾는 모든 어린이를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오, 주님,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호하시고
주님의 교회가 세상을 외로움에서 구하게 하소서.
또한 저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끄소서.
아멘.”
참 좋은 기도문입니다. 누구나 맞이할,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미래의 노년이요 죽음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이런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이나 죽음은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 바로 유일한 답이자 처방입니다.
바로 우리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런 삶의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 놀랍고도 자랑스러운 일은 지난 7월 24일 주일부터 7월 30일 토요일까지 일주간 카나다의 원주민들을 위해 제37차 해외 사목방문의 여정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곳 원주민들에게 과거 교회가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이들과의 치유와 화해와 일치를 위한 주목적의 방문이기에 “참회의 순례여행(penitential pilgrimage)”이라 명명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목방문이요, 얼마나 아름다운 가톨릭교회의 모습이요, 얼마나 아름다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노년의 모습인지요! 이런 깊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훌륭한 노년과 죽음을 위해 오늘 가라지의 비유는 참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라 하지 않고 가라지의 비유라 명명한 것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밀이 아닌 가라지가 초점입니다. 앞의 가라지 비유는 ‘인내’를 중점에 두고 있다면 오늘 가라지 비유에 대한 우의적 설명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반영하며 여기서는 ‘심판’에 중점을 둡니다.
우리의 현실 삶에서는 인내와 심판 둘을 다 고려해야 온당한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가라지 악의 존재는 참 불가사의不可思議요 신비롭습니다. 오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는 노골적으로, 참 순진하게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 수확 때는 세상 종말, 일꾼들은 천사로 비유합니다. 아주 실감 나는 비유에 대한 설명으로 어느 정도 공감이 갑니다.
분명한 것은 최후의 심판입니다. 누구나 맞이하는 노년의 삶에 죽음입니다. 죽음이 누구엔가는 절망의 심판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겐가는 희망의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인 오늘 복음의 마지막 묘사가 분명히 합니다. 심판의 지옥에 대한 묘사에 이은 희망의 구원인 천국에 대한 묘사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는 말씀이 우리 무지의 어둠을 일깨우는 하느님의 우렛소리 같습니다. 참으로 오늘 복음을 경청하여 어느 쪽인지 분별하고 부단히 선의 밀쪽을 선택하여 분투의 노력을, 훈련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상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순례 여정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입니다. 심판이냐 구원이냐?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노력에 달렸습니다.
가라지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밀과 가라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라지는 엄연한 현실이요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지극한 인내와 기다림중에 이들과 평화로운 공존의 지혜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제거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변질하거나 변절하여 가라지가 되지 않고 한결같이 선한 밀이 되어 살 수 있도록 죽는 그 날까지 하느님의 구원에 희망을 두고 분투의 인내와 노력과 훈련을 다 하자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선의 역량을 강화하여 지혜와 사랑, 순수와 열정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아도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하는 방법이 최상의 처방일 것입니다.
“예전 신학교 학생들은 정신적으로 정상과 좀 문제가 있는 학생의 비율이 7:3이었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로 바뀌어 3:7이라 합니다.”
바로 병든 사회 현실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심신이 온전한 사람들,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 약하고 병들어 있는 총체적 위기 현실입니다. 당장 공동의 집인 지구가 병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땅도 공기도 물도 많이 오염되어 있는데 사람이 독야청청 건강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이러다간 밀밭이 가라지밭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십시오. 광야 세상, 온통 가라지밭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인들보다는 괴물들이, 폐인들의 가라지들로 변질하는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이래서 비상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내적 혁명의 삶이, 삶의 방식 전환이 시급합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탄원에 공감이 갑니다. 이런 극단적인 불행은 아녀도 우리는 우리의 탐욕과 무지로 자초한 총체적 불행을 겪고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뿐입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출구는 단 하나,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이요, 지혜와 사랑, 지극한 인내와 분투의 노력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한결같이 선한 밀같은 존재로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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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40)
<돌아서자!>
먼저 오늘 뜻깊은 영명축일을 맞이한 요아킴 형제님들과 안나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마태13,36-43)은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끝끝내 밀의 모습인 의인으로 남아있지 않고, 악인인 가라지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면, 영원히 죽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냐?"(에제 18,23)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두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의 권고처럼(2베드 3,9 참조) 재림의 때도 늦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예레 14,17ㄴ-22)는 멸망의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을 위해 예레미야 예언자가 주님께 올리는 '탄원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소서."(예레 14,20-21a)
지금 여기에서 나는 의인인가? 악인인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이슈 앞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찰해 보면,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어느 누가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세리처럼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의 기도를 바치고, 새롭게 다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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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Yv-Xp0lQ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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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다."(마태 13, 38)
부모가 있기에
자녀가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우며
자라난다.
이와 같이
좋은 씨앗은
좋은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었기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기다림과
정성이 필요한
좋은 씨의
여정이다.
씨앗에 영양을
주어야만
씨앗은
살 수 있으며
성장할 수 있다.
한 톨의
씨앗도
소중하다.
어떤 씨앗을
심는가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마리아를 돌보셨다.
부모에겐
부모의 도리가
있고
자녀들에겐
자녀들의
도리가 있다.
자녀를
건강하고
올바르게
길러 내려고
고군분투하는
부모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진실한 확인이
복음의
만남인 것이다.
좋은 씨의
새로운 삶의
모습이
마리아의 삶으로
드러난다.
사랑의 세상이
시작되었다.
향기로운
꽃과
해처럼 빛나는
열매 또한
좋은 씨앗에서
시작하였다.
부모와 자녀가
조금씩 자라나는
기쁨의 시간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좋은
밭을 만나지
못하면 빛을
볼 수 없다.
좋은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좋은 부모의
역할이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이 땅의 부모들에게
가장 좋은
귀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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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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