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눈치 게임'이라는 제목이 그리 썩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청소년 추천도서라면 서정적(抒情的) 인 제목도 많을텐데 하필 직설적이고 가벼워보이는 '눈치 게임'인가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는 눈치를 본다는 것은 비굴하다는 뜻으로 알고 살아온 환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첫 문단인 문해학교(한글학교)를 다니는 할머니가 글을 깨우치고 시를 쓰면서 교장 선생님과 사랑을 싹틔우는 대목을 읽고나서 이 두사람을 이어주는 손녀 하영이의 눈치빠른 대처로 '안심 할매'에서 '야매 시인'으로 불리다가 자신의 이름인 '래연'씨로 불리는 순박하고 순수한 사랑이야기에 홀려버렸다.
그리고나서 책을 한참이나 덮어두었다.
책을 덮어둔 이유가 있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이 책은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가야 글의 맛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에도 성격이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흥미있는 소재를 이용해 화려한 문체로 재봉틀처럼 천편일률로 뻔한 결론을 도출하며 써내려간 글이 있는가 하면 마치 바느질을 하듯 한땀한땀 정성을 다해서 우리가 한번쯤 자신을 뒤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책에 새겨넣는 작가가 있다.
정해윤 작가의 글이 그랬다. 허구가 아닌 자신이 주변에서 느낀 일들을 생생하게 한글자 한글자 새겨넣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로 시간이 날 때 아주 천천히 한줄한줄 읽어나갈 요량으로 여유있는 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책은 하영이와 야매 시인 그리고 어릴때 집을 나간 엄마와의 조우를 통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승민이. 승민이를 키워준 베트남 국적의 호아센과 그의 딸 하잉, 몽골에서 강도들에게 자신의 전재산인 야크를 탈취당한 칸을 등장시켜 사회로부터 존중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들 그리고 이주 노동자와 국제결혼에서 오는 현실적 사회갈등을 풀어헤쳐 나간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유능한 이야기꾼이라기 보다 서로를 이해시키며 상호 탐색을 통해 우리가 안고있는 사회적 문제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는 사회학자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상 다반사로 겪고있는 자녀 문제역시 다양한 문장으로 사람을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제시해주고 있다.
하영이와 할머니의 대화에서 "할머니 사랑이 뭐야? 사랑은 무슨색이야? 근데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알아볼 수가 있어?"라는 하영이의 물음에 "내 사랑은 연보라 정도"라는 대답을 한다.
'노란 가로등 빛이 따뜻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둥그런 빛 밖으로 밀려난 어둠이 전봇대 주변으로 고요히 가라앉는 중이었다'99p
책의 중간중간에 사람 사이의 관계와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섬세한 기법이 돋보인다.
문해 학교를 나와 첫 시집을 낸 야매 시인 할머니의 첫사랑이라는 시는 가슴에 깊이 여운을 남겼다.
- 첫사랑 -
긴 시간을 건너 내게 이른 것 온통 내 삶을 감싸고 흐르는 그리움.
67페이지 라온이 편에서는 정동 할매와 강아지 '라온'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곁에 있는 뭇생명인 강아지 라온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내용이다.
교통사고로 다친 자신을 건사해준 정동 할매의 급작스런 죽음앞에서 라온이는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작은 생명이 우리에게 주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만드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였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드는 생각은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때묻지않은 풋사랑과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담겨졌다고 느꼈다.
감히 황순원,권정생 작가와 비견한다고 혀를 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해윤 작가는 이미 청소년 문학에서 정평이난 인물이다. 2013년 '밀림 그 끝에 서다'로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을 시작으로 '문제는 타이밍이야, 달의 눈물, 똥침 한 방 어때요'등을 발표했고 '눈치 게임' 역시 2023년 아르크 수상작이자 창작지원 수상을 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앞서 얘기했지만 눈치를 본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많이 쓰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통해 눈치란 다른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 사회 곳곳에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눈치의 다른말인 예의염치 (禮義廉恥)를 모르기 때문이다.
눈치를 통해 염치를 안다는 것은 수치를 아는 것이고 수치를 안다는 것은 독단적 행동보다는 예절과 의리와 청렴과 부끄러움을 알기에 배려와 공동체적인 연대를 할 수 있기에 이제부터는 눈치보는 것을 즐겨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