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닮아도 많이 닮았다. 항공사진이나 멀리서 찍은 마을 풍경사진을 얼핏 보노라면 나는 태연하게 ‘오르비에토’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마을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교회의 종탑 자리에 있어야 할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웅장한 자태가 왜 갑자기 쪼그라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제야 생겨났을 것이다. 이탈리아 중북부의 바위벼랑 위에 건설되어 이따금 교황의 은신처로 활용되던 성곽도시이자 요새인 오르비에토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세인트 폴드 방스(이하 생폴)의 첫인상은 ‘참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느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좁고 가파른 언덕길의 작은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저만치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성채가 눈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뚫려있는 방스로를 따라 띠욀 광장(Pl. du Tilleul)을 지나면 이제 비로소 생폴(St.Poul de Vence) 방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선이 뒤로 쏠린다. 방금 지나온 정류장 건너편의 아담한 하얀 건물이 묘하게 우리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이다. 흡사 우리나라의 한적한 시골마을을 방문하다보면 초입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아담하게 꾸며진 마을회관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도로를 건너 찾아가 보니 그것은 작은 교회였다. 아니지, 여기가 프랑스니까 아주 작은 시골 성당이라고 불러야겠다. 생폴의 수호성인인 클라라 성녀에게 헌정된 생 클레어 성당(Chapelle Sainte Claire)은 현재 내부공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아담하니 작고 예쁘게만 보였는데 알고 보니 17세기에 지어진 나름 역사를 가진 생폴의 소중한 문화재이자 유산이었던 것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띠욀 광장에 이르는 이 공간이 사실은 해외의 유명 보도사진에 종종 등장했던 아주 유서 깊은 명소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 일부라 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타고 있는 한 호텔을 겸한 레스토랑에 대해서만 시시콜콜한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싶어 보일 뿐이다. 육중한 성문을 지나 성채 안의 마을에 들어서면 온통 꾸불꾸불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과 계단길이 나온다. 생폴은 그만큼 현지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대단히 불편한 곳이다. 성벽을 따라 마을의 외곽으로만 소수의 차량들이 다닐 수 있고 주차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성내의 모든 생활 수단은 들거나 지고 나르거나, 작은 손수레를 이용하거나 당나귀 등의 등짐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다보니 버스 정류장에서 띠욀 광장에 이르는 너른 공터는 자연히 마차들이 사람과 짐을 내리고 기다렸다가 다시 사람과 짐을 싣고 떠나는 공용터미널이었던 것이다. 분수대가 있어서 행인과 말들에게 물을 마실 수 있는 장소였으며, 짐을 쌓아두는 창고와 말을 쉬게 하는 마굿간과 마차를 수리하는 대장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에 음식점과 숙박업소가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야 여행이 자유로워져서 프로방스니 코트다쥐르니 하면서 니스가 어떠니 모나코와 칸이 어떠니 쉽게 말하지만, 생폴 드 방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20 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말할 수 있겠다. 결국, 수많은 여행자들을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무수히 잡아끄는 생폴 드 방스의 역사는 또 하나의 명소인 ‘황금 비둘기’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역사와 같이한다고 해도 별반 그리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제 그 황금 비둘기의 역사를 아주 짧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으로 코트다쥐르 여행의 백미라고도 일컬어지는 생폴 드 방스 여행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계기로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정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새로운 정보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과 그것의 활용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고 나아가 돈이 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이때부터 신문과 라디오 활용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의 보다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파악이 금은 시장은 물론 석유시장과 주식시장의 성패를 가르게 되자 점차 언론은 모든 인간들의 생활 패턴까지 바꾸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나 깨나 정치. 경제. 재난. 전쟁 등의 정보만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모두가 곧 정신병자가 될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럴 때 새롭게 등장한 것이 이른바 스캔들이었다. 스포츠. 영화. 유명인들의 사생활. 감추어진 비사 등등이 획일적인 정보 시장에서 청량음료로 등장했던 것이다. 파파라치가 등장하고 비밀스런 스캔들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웃고 울고 떠들고 소리치며 화풀이 혹은 대리만족 또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곤 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해외토픽을 손꼽아 기다리는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멀고먼 동아시아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는 동족상잔의 전쟁 소식이 해외토픽을 온통 장식하고 있던 1951년 어느 날, 프랑스의 모든 신문과 주간지에 실린 몇 장의 사진이 온통 파리 거리의 가판대를 채우고 있었다. ‘프랑스의 자존심 시몬 시뇨레가 생폴 드 방스에서 이브 몽땅과 비밀리에 결혼’이라는 소식이었다. 이는 곧 해외토픽 뉴스로 온 세계로 타전되었다. ‘그게 누군데?’ ‘결혼했다는데 그게 어째서?’ 사실 그랬다. 시몬 시뇨레라는 프랑스 여배우와 이브 몽땅이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남자 배우가 결혼식을 했다는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는 해프닝 정도라 모두가 생각했다. 세상 대부분이 아예 그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세상이 아니었고, 정작 텔레비전도 등장하기 이전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영화 음악 시장이 활성화된 미국이나 영국 정도에서 이들 토픽에 약간의 관심을 가졌을 정도였을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정은 절대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것은 스캔들의 대상이 시몬 시뇨레라는 사실 때문이었으며, 하필 그 상대가 이브 몽땅이라니....... 이건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땅(좌) 시몬 시뇨레와 이브 몽땅(우)
흔히들 프랑스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프랑스인 특유의 정서가 따로 있다고들 말한다. 똘레랑스를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뭔가 딱 꼬집어서 무엇이라 딱 말할 수 없는 그런....... 묘한 무엇인가가 있기는 있다. 그런 프랑스인들의 정서 안에서 ‘적어도 프랑스 여성’ 하면 어떤 확고하게 고정된 여성상 같은 이미지를 가진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메스미디어가 활성화된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유명세를 톡톡하게 떨치는 코코 샤넬이나 카트리느 드뉴브에 이르기까지 여성 스타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지만, 프랑스인의 정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두 여성에게는 감히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는 세계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의 상흔과 황폐화된 경제 복구의 시련기에 프랑스인들의 영혼을 위로해준 실로 위대한 가수이다. 파리의 가난한 노동자 구역인 베르빌에서 거리 가수인 어머니와 거리 곡예사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으나 부양할 수 없는 생활형편으로 알콜 중독자인 할머니 손에서 창녀촌에서 자랐다. 15세 무렵부터 생계를 위해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가 그녀의 노래 솜씨를 눈여겨보던 사람에 의해 카바레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랜 무명의 시절을 보낸 끝에 자신이 직접 작사한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를 불러 실로 어마어마한 히트를 시키며 명실상부 위대한 가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여기까지의 모든 것이 참으로 묘하게 ‘포르투갈의 영혼’으로 추앙받는 <검은 돗배>를 부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ália da Rodrigues)와 너무도 닮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마도<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여사를 나는 꼽겠다. 그렇게 최정상 가수의 반열에 오른 피아프가 마르세유에 체류하는 동안에 한참 연하의 한 남자에게 시선이 꼽혔다.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마르세유로 이주한 이브 몽땅 이었다. 워낙 어려운 생활 형편으로 어려서부터 빵집에서 심부름하고 누이의 미용실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청년이 되어 마르세유 항구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며 밤이면 인근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고난의 시절이었다. 피아프는 그런 이브 몽땅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가수가 되는 것에 관하여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다가 이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처절하게 가난 속에서 힘들게 성장해야만 했던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이내 쉽게 두 사람을 하나로 엮이게끔 만들어 주었다. 피아프는 이브 몽땅에게 진심이었다. 그의 후견인이자 헌신에 가까운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그러자 점차 이브 몽땅의 처지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무대에 올라 노래했고 영화로 데뷔도 하였다. 3년 정도 지났을 때 이브 몽땅이 <밤의 문>이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주제가로 <고엽>을 불렀는데 그만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고 말았다. 거기까지였다. 이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이브 몽땅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파리로 가버리면서 피아프를 차버린 것이다. 피아프가 받은 상처는 컸고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브 몽땅을 비난했지만, 이상하게 비난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인기는 상승하는 기현상을 낳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다시 몇 년이 지나 새롭게 그의 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는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모두 가진 금수저 출신의 프랑스 국민여배우이다. 육군 장교출신으로 국제연맹에서 일하는 통역관 아버지와 폴란드 유대인 출신의 매우 부유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침묵의 살인> 등으로 승승장구 하였으며, 그녀에게는 비영어권인 프랑스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명실상부 국민배우로 추앙받고 있은 대배우이다. 영화 감독인 이브 알레그레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느닷없이 1949년 이혼 소식이 널리 알려졌으며, 당시 그 배경에 이브 몽땅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꼬득여 실컷 단물만 모두 빼먹고는 차버린 천하의 거랑말코 이브 몽땅이 또 이번엔 국민배우 시몬 시뇨레를 꼬득였단 말이야? 그건 안되지. 절대로 안될 일이지. 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말고.’ 어디를 가든지 프랑스인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번 스캔들에 대해서 험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설마....... 피아프야 그놈이 불쌍해 보여서 뒷바라지 해주다가 당한거지만...... 시몬이 뭐가 아쉬워서 한참이나 연상인 그런 거랑말코에게 관심을 갖는단 말이야? 이혼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그런 상황에서 빼도박도 못 하는 증거가 대서특필 신문 일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자존심 시몬 시뇨레가 생폴 드 방스에서 이브 몽땅과 비밀리에 결혼’ 프랑스인들이 받은 상처는 컸으며 이 휴유증은 한참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온갖 억측과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그런데 왜 하필 생폴 드 방스야? 거기가 도대체 어디야? 사진에 나오는 결혼식 장소가 어디야? 배경에 나온 액자가 클림트의 그림 아니야? 그럼 생폴 드 방스가 갤러리야?’ 이브 몽땅의 스캔들은 이번엔 전혀 엉뚱하게 번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폴 드 방스가 도대체 뭔데? 어차피 들통 날 결혼식을 왜 거기까지 가서 하냐고? 파리에 넘쳐나는 게 성당인데? 생폴 드 방스에 가면 뭔가 다른게 있나?’ ‘생폴 드 방스가 엄청난 사랑의 도시래. 적당히 좋아하는 사이도 생폴 드 방스에만 가면 갑자기 사랑병이 돋아서 열정이 타오르고 결혼하고 싶어서 미치게 만드는 묘약이 그곳에는 있대. 누군가를 미치게 사랑한다면 무조건 생폴 드 방스로 데려가면 된대.’ 이제 스캔들은 전혀 엉뚱한 상황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면서 뭇 사람들의 가슴속에 신비한 사랑의 지상낙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피카소며, 샤갈이며, 피츠제럴드며, 찰리 채플린 등 수많은 화가와 유명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수도없이 생폴 드 방스에 드나들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 생폴 드 방스에 가고 싶어.’ ‘죽어도 생폴 드 방스에서 죽고 싶어.’ ‘신혼 여행은 무조건 생폴 드 방스야.’ '생폴 드 방스는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의 도시야.' 그렇게 전혀 엉뚱하게 요상한 열풍이 생겨났고......... 그 요상한 열풍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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