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별이 아빠의 학산국민학교 시절의 특별한 추억…
마음이 통하는 고향 친구를 만나 회포를 풀고 추억을 끄집어내며 호탕하게 웃는 시간이 보장되는 삶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요?
또 그런 친구들을 3개월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요?
지금 나의 추억 속 1970년대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 밖에 보이지 않는 내 고향 안동군 북후면 신전동 시골마을이였다. 내 어린 시절의 저녁은 그리움 그 자체였지요.
보리밥 한 사발을 시원한 냉수에 말아 고추장과 된장을 알맞게 섞은 양념장에 풋고추를 푹 찍어 먹던 저녁 밥상은 식구들과 함께 치익 치익 소리가 나는 흑백텔레비전을 보며 지냈던 내 유년의 흐릿한 기억들을 추억하게 한다.
푸짐한 밥그릇에 반찬은 보잘것없어도 배불리 먹고 부모님만 곁에 있으면 마냥 좋았다. 부모님은 농사일로 대화를 나눴고, 우리는 감자나 고구마를 후식으로 구워 먹으며 소박한 저녁 시간을 즐겼다.
저녁을 먹은 후 잠자리로 이어지기까지의 저녁 시간은 고단함을 푸는 쉼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훌쩍 흘러 버렸다. 나는 아직도 추운 겨울날 난로에 넣을 장작을 들고 학교에 가는 꿈을 자주 꾼다. 가끔씩은 숙제를 해 놓고 깜빡 잊고 친구의 공책을 빌려 숙제를 해 왔다고 선생님을 속이며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초딩 시절의 달콤한 꿈을 꾸다가 깜짝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런 단꿈은 내가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게 틀림없다.
초등학교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지난밤 꿈에 꾸었던 감미로운 꿈처럼 아침이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오랫동안 남아있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도시생활의 피곤함은 몸이 젖은 솜처럼 항상 무겁고 피곤하기만 하다.
내 몸이 피곤하고 허전할 때 이 살 붙지 않는 도시에서 고향이야기를 하고 친구를 그리워하며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옮긴다는 건 이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50대 남자에게 얼마나 가슴 벅차고 행복한 일인가?
아무도 봐 주지 않을 것 같은 내 글이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렸다는 이 황홀한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보았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게다.
학산 초딩 모임이란 현실에 갇혀 사는 우리 고향 사람들에게는 낯선 공간으로의 탈출이다. 그곳에 가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고 잊혀진 고향의 추억이 있고 마음 놓고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과 고향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다닐 땐 내가 중간학교의 교장이었지... 아이들이 나의 말을 교장선생님 말씀처럼 인정해 주고 말없이 따라 주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구먼…” 이날 모임에 제일 먼저 도착한 병태가 말했다.
“집에서 40분도 넘게 걸어야만 새마에 있는 학산국민학교까지 갈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중간학교는 먼 길가서 공부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여간 매력 있는 일이 아니였지… 허허허”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없었던 그 시절엔 나도 그랬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학교 가기가 싫은 날이 많았고, 그런 날은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 학교교실 지붕이 모두 날아가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 바람에 학교 벽이 무너지고 바람에 날린 기왓장에 선생님이 다쳐 겨울방학 때까지 병원에 입원을 한다면 좋을 텐데…
그래서 학교가 문을 닫고 긴 방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었다.
병태는 중간학교 교장시절의 추억담을 몇 일 전에 있었던 일처럼 술술 현실감 있게 잘도 풀어 나갔다.
“내가 중간학교 교장이 되면 6학년 친구들은 선생님이 되었고, 자연스레 저학년 후배들, 자품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학생이 될 수 밖에 없었지…허허” 병태는 갑자기 40년 전으로 돌아간 사람처럼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자그마한 시골 학산국민학교의 추억과 동심을 회상하는 듯 지긋이 눈을 감으며 술잔으로 또 손이 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밤거리, 팍팍하게 살아온 도시사람들이 쏟아놓은 이야기와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좁은 골목을 어지럽게 가득 메운다.
신도림역만큼이나 사연 많은 사람들이 만나 쏟아 붓는 이야기로 이 골목 저 골목은 넘칠 만큼 분주하다. 오늘은 불금이다.(불타는 금요일)
새삼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누구나 가슴속에 자리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하나 둘 떠올려보게 되는 계절 봄이다.
학산25를 만나는 날은 도시에서 찾은 고향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곳에 가면 나는 많은 것을 그리워하게 된다. 떠난 사람들, 잃어버린 추억, 어머니의 정이 깃든 음식들, 그리고 속절없는 웃음과 한숨들… 사라진 것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리움이 되는 법 그래서 우리 학산25는 만나고 또 만난다.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는 나는 지금도 아이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의 가난을 자주 고백하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의 이 슬픈 고백이 이젠 싫증나고 그만했으면 하는 눈치다.
가난의 냄새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들만큼 어렵다. 어린 시절 그 냄새는 어쩌면 찌든 때처럼 나의 삶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씻어 내기 힘들 것 같은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며 가난을 탈출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였다.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가족과 함께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는 것은 70년대 후반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서울로 탈출한 사건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비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도시인들의 비틀거리는 모습이 도시의 밤거리를 가득 메우고 이렇게 부슬부슬 비까지 내려주는 밤이면 고향친구를 만나 한 잔 하는 술맛은 분명 다른 날과는 다른 특별한 맛이 술잔에 남아 있다. 그것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집에서 먹는 것과 학가산에 가서 숨어서 라면을 끓여 함께 먹는 맛의 차이와 같을 것이다.
기분 좋게 한 잔을 꺾고 나훈아의 고향역을 흥얼거리는 기분은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아련한 추억처럼 다가온다.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을 아버지 대신 내가 궤도열차를 타고 가는 모습 같다.
신도림역 먹자골목에서 돼지 껍데기를 노르스름하게 구워 참이슬을 한 잔 쭈욱 걸치고 기분이 썩 좋아진 고병태가 기억의 저편에 숨겨놓았던 이젠 안개처럼 가물거리는 초등학교 시절의 가슴 저린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친구들과 학교에 가다가 다람쥐를 포위해서 잡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나눠 갖던 일도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군… 진달래 만발하는 이맘때쯤이면 약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도 모른 채 배가 고파서 진달래 꽃잎도 엄청 따 먹었지,
찔레순도 많이 꺾어 먹었고…그런 것 먹고도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야… 그 시절은 왜 그리 배가 자주 고파오는지 먹어도 먹어도 배 고프고 꼬로록 소리를 달고 다녔으니까… 건빵은 그 당시 최고로 귀한 간식거리 과자였지, 배고픔을 달래주기에는 최고의 인기였으니까…”
은별이 아빠의 40년 전의 초딩 추억은 밤을 새도 다 듣지 못할 것 같다. 영화처럼 녹아 흐르는 유년의 추억을 학산25는 끄덕 끄덕 대신 빙그레 미소로 대신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내 말이 공감받고 있다는 표정을 읽게 되면 더욱 신이 나서 떠드는 법이다. 그것은 졸리면 하품이 나오는 것처럼 감추기 힘든 인간의 본성이다.
병태는 계속 추억을 이어간다. 친구들 시선은 자연스레 은별이 아빠의 입으로 쏠렸다. 시선집중, 최면 걸린 사람처럼 몰입되는 광경은 흔한 장면은 아니었다. 오늘처럼 내 얘기를 이렇게 관심 있게 들어주고 웃어준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었고 또 그런 날은 언제쯤이였던가? 병태는 짧은 순간 이런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 수준까지 도달한 병태는 신이 났다.
병태는 가끔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 미화와 200미터 달리기 선수로 뽑혀 학교에서 달리기 연습을 했던 숨은 이야기도 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지나칠 정도로 병태가 미화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게 혹시 우정을 넘은 사랑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지우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의혹이 오늘에서야 시원하게 풀린 셈이다.
고병태, 그의 입담은 금방 학산25의 서먹한 분위기를 한꺼번에 뒤엎고 마치 성난 불길처럼 타 올라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절정을 향했다. 조금 전 소고기 맛이 없다고 투덜거리던 친구들의 푸념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지고 단숨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한 모드로 바꿔 버렸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참이슬의 빈 병도 자꾸만 늘어갔고 힐끔 힐끔 곁 눈질을 하며 학산25를 바라보는 술집 아주머니의 표정에도 흐뭇한 미소가 얼굴 전체로 번졌다.
능력자 고병태, 그는 분명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사람이다. 서른을 바라보는 두 아들 다음으로 늦둥이 은별이를 낳았다.
행복은 돈을 많이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 그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병태는 사람을 몰고 다니는 힘도 있다. 학산25 모임에서 병태가 참석한 날은 출석률이 100%다.
“은별이는 어디에서 살다가 병태네 집으로 온 걸까?” 초딩 때 청군 백군 달리기 선수로 한 시절을 주름잡았던 영락이가 참이슬 한 잔을 병태에게 슬며시 건네며 물었다. 이미 병태는 얼굴에 취기가 돌아 기분이 완전 업 된 상태였고, 이런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2013년 5월에 나의 딸로 이 세상에 태어나려고 예약하고 있었겠지? 아마 이 외로운 사람에게 아들과는 또 다른 딸 키우는 행복감을 안겨 주기 위해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을까?”
병태는 취했지만 갑자기 은별이 생각이 난 듯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행복 바이러스 은별이가 천사같은 모습으로 내게 태어나려고 사주 팔자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을 걸” 병태는 이왕 은별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은별이와 자신의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운명이라는 것을 합리화 시키려고 노력하는 듯 했다.
애초부터 이야기를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은별이는 병태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딸로 자리매김 했다. 다이야몬드도 진주도 사파이어도 은별이와는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학산25에서는 은별이 아빠가 대세다. 병태는 단숨에 소주잔을 홀짝 비워 버리고 자연스레 중학교 시절 옹천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중학교 때 옹천 자취시절, 선 잠결에 듣는 화물열차 소리는 고향을 떠난 객지의 설움과 고향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소리없이 흘렀던 눈물은 얼마만큼이나 될까?” 병태는 가슴 아팠던 그 추억에 몸서리가 나는 모양이다.
비수처럼 가슴을 할퀴고 찔렀던 외로움과 고독이여…
“옹천 광신상회 앞에서 팔던 풀빵이 먹고 싶어 연탄까지 팔아 풀빵을 사 먹고는 얼음장처럼 냉기가 흐르던 방에서 덜덜 떨며 겨울밤을 지샜던 가슴 쓰리고 모질고도 괴로웠던 추억이여…” 창살 없는 감옥처럼 사춘기도 잊은 채 보내버린 우리의 중학시절이여… 철없던 자취시절, 북후중학교나 북후실업중학교를 다니며 굶주림과 추위에 몸서리쳤던 이제는 세월속에 묻혀버린 40여 년 전의 아스라한 추억이여…”
은별이 아빠의 거침없이 토해내는 입담은 진행형이였다. 그의 말에 우리 모두는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장마철 쏟아지는 폭우처럼 병태는 철철 흘러넘칠 만큼 시원스럽게도 토해냈다.
그렇다. 유년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되돌리기 위해 학산 25는 지난 달 29일 신도림역 천하일품 소고기집에서 또 만났다.
“오늘이 내 생일인데…” 돼지 껍데기 집을 나오며 병태는 중얼거렸다.
“야 맛있는 케익을 2개씩이나 사왔네” 학산25가 지하 노래방을 찾아 뽕짝을 몇 곡조 뽑았을 때 달호와 영락이가 동시에 사온 케잌을 보고 병태가 외친 말이다.
갑작스런 친구들의 케잌 선물을 받은 병태도 놀란 표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물에는 약한 법이다. 좋아진 기분을 억제하려고 병태는 노력했지만 이미 벌어진 입은 쉽게 다물어지지 않았다. “친구들아 정말로 고맙다”라는 말을 수십 번은 더 했다.
병태는 딸 은별이는 없었지만 샴페인을 터트리고 촛불을 켜고 생일축하 송을 부르는 친구들의 분주함에 금방 감동을 받았다. 이럴 땐 눈물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눈치였다. 병태는 은별이와 함께하는 세상은 황홀하다며 딸이 없는 친구들의 맘을 괜히 건드렸다. 그게 흠이라면 작은 흠이였다.
“얼마나 이쁜지 모르겠어 아주 환장 하겠어” 병태는 요즘 이런 말을 자주 한다. “깨물어 뜯고 싶을 만큼 이쁘다”고 더 보탠다. 은별이가 이쁘다는 표현은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다. 병태에게는…
병태는 요즘 행복에 푹 빠져 산다. 입에 미소가 떠날 날이 없다. 올 부럽다. 그 미소의 중심에는 천사 같은 은별이가 있다. 병태의 중년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은별이는 어느 별에서 내려온 천사일까? 그게 한 없이 궁금해진다.
다음 달이면 은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일 년이 되는 날이다.
은별이 아빠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학산25는 은별이의 첫 돌을 축하하기 위해 다음 달에는 선물을 가득 안고 남양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은별이가 끝없이 만들어 내는 미소의 정체를 밝히고 말 것이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땀에 흠뻑 젖어 노래방을 나오던 3월 29일 밤 11시 30분, 은별이와 은별이 엄마가 신도림역으로 자가용을 몰고 나타났다. 은별이 아빠를 모시기 위해서다.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아들 키우는 재미마저 잊고 살았던 지난날을 보상 받기라도 하듯 병태는 은별이를 낳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은별이 아빠가 은별이를 사무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년이 되면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얼굴에는 세월의 강이 흘러 여기 저기 패이고 주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시간이 싱싱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낡고 늙게하여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은별이 아빠가 만들어 가는 사랑은 이 4월의 자연처럼 참으로 아름다고 감탄을 할 정도다.
형형색색의 꽃 나무들이 죽었던 가지에서 새 움을 틔워 새로온 삶을 시작하는 희망의 계절 봄이다.
사랑과 희망을 품고 부러울 정도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의 자랑스런 친구 병태에게 학산 25는 이 아름다운 부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마음을 다해 응원할 것이다.
병태가 늘 하는 말처럼 “은별이는 내가 지킨다”는 철석같은 약속을 꼭 지켜주길 바란다. 또 병태가 아름다운 봄날의 꽃 향기처럼 향기롭게 살아가는 지금의 이 행복을 끝없이 이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행복을 꿈꾸고 행복하기 위해 살고 있다.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며 중년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우리의 아름다운 친구 병태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첫댓글 왜 공감이 갈까.....수채화 같은 풍경들이 가슴 속으로 스며듭니다.....언제나 행복하세요.
어린 시절을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겠지요? 추억은 지난 밤 꿈처럼 다시 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아쉬움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공감해 주셔서 용기를 갖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자품에서 중학교는 옹천으로 가는군요..공감가는 이야기에 찬찬히 읽어보며 생각에 잠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자동차가 다니지도 않는 마을에서 살고 있던 아이들에게 옹천이라는 거대한 도시는 희망이자 아픔과 추억을 남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도시였지요.
공감이 가는
시골 향수 입니다
임무기 님
내고향은 죽전리
입니다
비슷한 연배 입니다
고향을 떠나온지도
벌써 46 년이나
되었 습니다
지금은 양천구에
자리잡고 있지요
고은글 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편안한 밤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가는 겨울이 아쉬운 듯 오늘은 겨울비가 내렸네요.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마음은 늘 고향 하늘아래에서 영원한 초등학생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문득 문득 놀라곤 합니다. 북후중 입구 다리 밑에 새까맣게 웅크리고 겨울을 견뎌내는 송사떼가 오늘은 너무 그립네요. 무심한 세월처럼 그 물고기 떼 들도 세월과 함께 모두 사라지고 없겠지요? 얼굴에 하나 둘 주름에 패이는 모습을 보며 잊혀진 고향친구에게 "쐬주나 한 잔 할까?" 이 말이 자꾸만 생각나네요.
동심을 엮은 파노리마입니다
저는 장작불만 봐도 향수에잦습니다ㅡㅎ
김상진의 '고향이 좋아' 이 노래만 들어도 고향 안동이 영화처럼 펼쳐지는 저랑 너무 닮았네요. 고향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 아닐까요?
반가워요! 억수로
북후중학교 동문입니다
신전에 신운현이랑
중학교.고등학교 동창이시더
여기는 용인입니다
서울에서 용인에서 또 부산 대구에서 언제 어디에서 만나더라도 반갑고 늘 그리운 사람은 고향 사람이겠지요. 지하철에서... 혹은 버스에서... 거리에서 ... 된장찌개처럼구수한 안동 사투리만 들려도 손을 잡고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고향 사람이 주는 친밀감 때문이겠지요? 마음 같아서는 옹천 소전에서 국수와 찐빵을 시켜 놓고 추억을 이야기 하고 싶어 지네요. 아름다운 고향... 안동
저는 신전과 석탑담당 면서기였습니다. 몇개월만에 그만두고 서울로 왔지만 어린저를 따뜻하게 보살펴 주시던 어른들이 신전에 계셨지요. 꼭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용인수지에 살고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아주 공부를 잘 하셨던 분이셨군요. 우리마을을 담당하셨다니 더욱 반갑고 달려가 손이라도 덥석 잡고 지난 추억을 이야기 하고 싶어 지네요. 아무런 걱정없이 살았던 나의 유년시절은 가버린 꿈처럼 돌아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움이 커 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