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레위기 25,1.8-17
마태오 14,1-12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저들의 최후는 비참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열하고 사악한 악인들이 활개를 치며 떵떵거립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끝도 없는 사리사욕으로 가득합니다.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편법과 불의한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비굴하게도 강자 앞에는 바짝 자세를 낮추고, 약자 앞에서는 한껏 거드름을 부립니다.
자신의 약점과 비리를 감추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일삼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가 그랬고, 6백만명을 학살한 히틀러가 그랬으며,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그랬으며, 오늘 백주대낮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횡포와 만행을 저지른 군국주의자의 후손 아베가 그렇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그가 보인 처신의 내막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전 세계가 웃을 것입니다.
세상에 개그도 이런 개그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웃기는 일이 확실합니다.
물건을 생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백퍼센트 딱딱 제값 주면서 사가는 고객이 있다면, 생산자의 태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눈만 뜨면 감사하다고, 몇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최고의 VIP 고객에게 앞으로 거래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세상에 이런 바보 얼간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오늘 저지른 희극이자 비극은 머지않아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1세기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다고대사’에 의하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이의 인기가 높아지자, 혹시 정치적 선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그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를 체포한 후, 사해 동쪽에 있는 마케루스 성채에 감금했다가,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최근 동북아 지역에 조성된 화해와 대화의 국면에서 남북한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부상하는 반면, 자국은 소외되는 느낌(Japan Passing)을 받은 아베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타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
극단적 노령화, 오랜 저성장, 성장 동력의 상실 등으로 인해 국가 경쟁력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자국에 비해, 대등해져가는 경제력,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우위를 보이는 민주화와 성숙한 시민의식,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한류 문화, 오랜 세월 보여온 굴욕적인 대일외교를 성찰하며, 역사 바로잡기에 애쓰는 노력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의 뒷통수를 치고 있다는 느낌.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사후(死後), 아버지의 유언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가에 따라 16세의 나이에 갈릴래아 지방과 페레아(현재 요르단 왕국의 일부)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해 동쪽에 위치해 있던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과 결혼했었는데, 머지않아 그녀와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윤리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끝도없이 타락했던 헤로데 안티파스 인생의 결말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가 버린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이었던 아레타스 4세가 군사를 이끌고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토를 쳐들어왔습니다.
AD 37년 그를 영주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며, 칼리굴라 황제는 그를 갈리아로 추방시켰습니다.
사악하고 비열한 혈통을 물려받은 헤로데 가문의 사람들은 다들 비슷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애를 썼으며, 베틀레헴의 무죄한 아기들을 살해했습니다.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갖은 불륜을 다 저질렀으며 세례자 요한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지난 역사 안에서 자신들이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저지른 만행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매년, 매일, 참회하고 또 참회해도 부족할터인데, 또다시 무리수를 둬가면서 개헌을 획책하고, 군비 확장을 통한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저들이 참으로 사악합니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저들의 최후는 비참할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을 정치적, 경제적 재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이 추구하는 정신이 무엇입니까?
지구촌의 평화와 일치입니다.
그리고 페어플레이(Fairplay)입니다.
그런데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 건설의 암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틈만 나면 편법을 일삼고, 죽어도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또 다시 군국주의화를 꿈꾸는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라니 자다가도 웃을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8월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레위기 25,1.8-17
마태오 14,1-12
<작은 죄도 짓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영국 성공회는 헨리 8세가 현 왕비와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종교입니다.
왕이 재혼을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번 혼인하면 그 혼인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의 연을 끊고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모든 전례나 예식은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따르지만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분열이라는 것이 그의 작은 욕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짓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에 적극 반대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 성인입니다.
영국의 대법관까지 역임하고 높은 지위의 정치인이었던 그는 왕의 그러한 행위를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멈추지 않고 충언을 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헨리 8세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모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물론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은 헤로데 왕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구원받고 싶어서 믿으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헤로데 왕도 세례자 요한의 쓴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목을 베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혀 믿는 하느님은 언제나 우상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부처나 알라신 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을 믿지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모습이 그들의 죄에 가려진 눈 때문에 변형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렇듯 죄를 지으면 믿고 싶어도 눈이 가려져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자아의 판단을 더 믿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라고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건 죄다, 아니다”만을 말해줍니다.
마치 도로의 중앙선과 같습니다.
넘었는지, 넘지 않았는지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책감을 주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자아’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믿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아를 믿었기에 죄책감이 생겨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다면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아를 믿는 이를 에덴동산에 두실 수 없으십니다.
자아가 또 다른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믿고 싶어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자아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됩니다.
죄에 자꾸 빠진다면, 자아가 “거봐. 용서해 주면 뭐하니? 또 죄를 짓잖아.
너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예수님을 정신병자처럼 이상하게 바라본 것처럼, 죄에 빠진 우리들도 각자가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만들어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이 죄책감은 나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이 정해주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리 행복이 오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 행복을 스스로 차버리게 됩니다.
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용서를 해 주어도 화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그들을 지나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도와주면 더 큰 만족이 온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더라도 그들이 정해 놓은 행복은 그저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운데 얻는 보람 정도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그에 합당한 행복을 받을 그릇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이거구나!”라고 외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사랑실천을 통해 오는 만족감이 자신이 잘 살아온 상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 “하느님께서 상을 언제 주실까?”라는 마음이어야지 행복이 오는 순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같은 행복을 부어주시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행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준비란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3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4,1-12 :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목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 그는 요한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들추어내며 비난을 퍼부을까 불안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행한 일이 없는데 요한의 힘이 예수님께로 들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간하였다.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으나, 처남과 다투는 바람에 장인은 딸을 데려갔고, 형인 헤로데가 그 여자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따라 이방민족들처럼 되지 말고 불신앙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도덕적 훈계를 함으로써 헤로데를 자극하였다.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절)라고 말함으로써 요한은 즉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악한 사람을 훈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은 율법이 말하는 것, 구원에 합당한 것, 사랑에 합당한 것을 이야기 했지만, 그 대가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며 죽음만이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을 바로잡고 죄가 되는 행실을 물리치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뿐이다. 요한이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헤로데의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있다. 사람들은 그 춤에 빠져들었다. 관능적 쾌락이 매우 잔인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죄와 세상의 쾌락에 빠져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팔아버렸다. 딸은 제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율법의 영광을 상징하는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겨 소녀에게 주어졌다(11절 참조). 잔치는 살인 현장이 되고 생일은 장례 날이 되었으며 그 식탁은 원형경기장이 되었다.
헤로데는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괴로워하는 척 했을 뿐이다. 그는 교활한 사기꾼이며, 능숙한 암살자이기 때문에 속마음은 기쁘면서도 괴로워하는 척 했던 것이다. 헤로데는 참으로 잔인하고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괜한 맹세를 하여 소녀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 그래서 괴로워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미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무엇을 괴로워했던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불법이라고 말한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헤로데였다.
이렇게 하여 헤로데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선은 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를 유혹함으로써 불길한 길에 들어섰고, 그 여인에 의해 세례자 요한은 죽음을 당했으며, 또 얼마 안 가서 평판이 나빠져 자신의 왕위도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봉사직은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 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진리를 전하는데 굴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또한 참된 봉사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권능이 다른 사람들 앞에 더욱 드러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