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심성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Ahn Jum-Shik, www.gmtc.or.kr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인간이 연약하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일들(the unknown)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통제 불가능한 미지의 일들은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은 미래를 미리 알고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통제 가운데 두기를 원한다. 이처럼 인간의 안전(security)과 번영(prosperity)에 대한 욕구는 미래에 대한 예지와 통제의 욕구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디에 땅을 사야 땅값이 올라가는지, 어느 대학교에 지원서를 내야 합격할 수 있을지, 직장에서 언제쯤 승진할 수 있을지, 주식을 언제 팔고 사야 유리한지, 어느 사람과 언제쯤 결혼을 해야하는지, 어떤 사업을 해야하는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지, 앞으로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과 불행은 어떤 것들이며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지 등을 인도받고 싶어한다. 따라서 인류의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없었던 적이 없다. 어떤 사회든지 예기치 않은 사건, 보이지 않는 어려움과 위험을 피하고 성공을 얻기 위한 여러 가지 술법들을 강구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포스트 모던 시대에 이러한 각종 점술이나 운명감정술이 더욱 성행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시대가 더욱 급격한 변화를 하고 있으며 따라서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과거, 전통적 사회에서는 사회변동의 속도가 완만했고, 또 신분, 직업, 거주 등에 있어서 훨씬 덜 유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오늘날은 이러한 기초적인 영역들조차 매우 유동적이어서 불안정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급격한 사회변동에 의해서 더욱 불안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전보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방향으로 결정하고 무엇을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인도하심에 대한 욕구는 더욱 높아진다.
우리 한국 사회도 90년대 이후에 이러한 점술, 운명감정술 등이 더욱 활개를 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무속인들이나 역술인들이 "인생상담"이라는 광고문구를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싣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사주팔자, 궁합, 관상, 성명학, 점성술, 동물점, 숫자점, 수상술, 풍수, 토정비결, 꿈풀이 등이 성행할 뿐아니라 "오늘의 운세"를 일간신문이나 스포츠신문 등에서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인터넷에서도 이러한 운명감정술을 전문적으로 서비스하는 사이트들이 늘어나고 있다. 즉 이제는 점술이나 운명감정술을 행하는 중개자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면서도 이러한 것에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이러한 인터넷 사이트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삼십 대들인 것을 볼 때, 전통적인 방법으로 중개자를 만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이러한 점술이나 운명감정술을 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이 늘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상적 풍조는 교회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 중에 적지 않은 수가 점, 사주관상, 점성술 등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의 기층문화에 샤마니즘이 깔려있고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중적 종교 시스템(dual religious system) 1안에서 이중적 충성과 혼합주의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결정을 위해서 "인도하심"(guidance)을 받는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도하심에 대한 신학적 정립과 교회 교육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이중적 충성(dual allegiance) 혹은 혼합주의(syncretism)를 극복할 수 있는 기초가 미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중적 충성과 혼합주의를 비난하기에 앞서서, 고통과 위기에 처한 사람들, 인도함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인도하심"에 대한 기독교 신학, 즉 성경적 설명체계와 구체적인 방법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2
한국인의 심성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논할 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나게 이중적 충성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외적인 종교 행태에 있어서는 기독교적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세계관에 있어서는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적 세계관3을 벗어나지 못하는 혼합주의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홀히 되어서 안되는 것은 한국인의 심성이 긍정적으로 상황화되어서 나타나는 부분들에 대해서 정당하게 평가하고 격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비성경적 세계관이 비록 샤마니즘적 배경에 의해서 강화될 수는 있다할지라도 타락한 인류의 보편적인 면도 있다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한국 기독교인이나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기복주의나 성공주의가 지나치게 한국인만의 문제인 것처럼 과장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교회들이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샤마니즘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코 공정한 태도가 아니며 서구에서 유학한 한국 신학생들이 쓴 학기말 소논문이나 학위논문에서 과장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에서의 점술, 역술의 매카니즘
대부분의 종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이를 대비하는 인도함(guidance)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점술일 것이다. 즉 인간에게는 미지의 영역이 있고 알지 못하는 위험, 고통, 불행이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 인도함을 받으려 한다. 인도함을 받으려는 동기를 보면 우선 불행과 고난이 닥쳤을 때 그 원인을 알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자 하는 면이 있다. 또 하나는 중요한 결정을 위한 인도함인데 결정 사항이 중요할수록 잘못 결정했을 때 고통과 불행이 더욱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에서는 고통이나 불행은 초자연적인 영들의 소행이나 어떤 비인격적인 힘(force)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인생은 더욱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보여진다. 점술은 일상에서의 결정을 위해서 감추어진 미지의 것을 드러내는 방식인데 인격적 존재나 혹은 비인격적 힘들의 영향을 파악하고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것이다.4 인격적 힘이 초자연적인 영들이나 죽은 자들의 영들의 힘이라면 비인격적 힘은 사주나 풍수 등에 나타나는 기의 영향력과 같은 것이다. 즉 사건들을 영적인 인과관계(spiritual causation)으로 보는 것이 전형적인 애니미즘이며, 이것이 조금 발전한 경우가 비인격적 힘의 기계적 인과관계로 사건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과관계를 비과학적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이 점술이라면 과학적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고통이나 불행, 번영이나 성공과 관련해서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 점술, 역술이며, 그 결과에 입각한 처방이 곧 굿하기 등과 같은 주술행위, 그리고 부적지니기, 조상의 묘자리 옮기기 등으로 나타난다.
점술은 어떤 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길(吉)한가 흉(凶)한가를 초자연적인 영이나 힘에 의탁해서 인도함을 받으려하는 방법이다. 점술의 첫 번째 문제점은 충성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보면 길흉화복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우주의 모든 것을 아시며 미지의 것들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다. 점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초자연적인 영에 의탁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실례 중의 하나가 조상과 교통, 조상의 음덕, 조상의 인도함이다. 이처럼 애니미즘 세계관에서는 죽은 자의 인도함에 대한 믿음이 있다.5
성경도 제비를 뽑는 것(잠16:33, 행1:26), 우림과 둠밈을 뽑는 것(출28:30, 민27:21, 삼상28:6)과 같이 점술과 비슷한 신탁(神託)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적 사용과 애니미즘에서의 사용의 차이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께 의탁하느냐 혹은 마술적, 영적 존재들에게 의탁하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6 즉 충성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차이점은 성경의 제비나 우림과 둠밈은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주권적으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미지의 일들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도록 요구받았을 때 언제나 대답하도록 강요되거나 조종될 수 없는 주권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분의 계획에 따라 침묵하실 수 있고 또 우리의 영적 도덕적 상태가 올바르지 못할 때에도 침묵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라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삼상28:6).
성경은 장래사와 미래사를 잡다한 초자연적 영들이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말하고 있다.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사41:22-24).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거짓 예언자들의 징조를 폐하고 점술자를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라고 (사44:25) 지적한다.
그러므로 인도함을 받는 것과 미지의 일을 예지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타내보여 주시지 않는 한 예측 가능한(predictable) 분이 아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물을 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순종할 마음 없이 하나님의 뜻을 점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반 리넨(Van Rheenen)에 의하면, "점을 치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강요하고, 시간이 커텐 배후에 있는 것을 인내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신앙이라는 거만함을 함축한다." "애니미스트들은 하나님의 세계의 영적 힘들을 조종해서 그 비밀을 캐내고 그것을 개인적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것이다."7 그러므로 반 리넨은 점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8:17-20) 말한다.8
인간 중재자를 찾음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에서는 미지에 대한 지식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영들과 교통할 수 있는 특별한 중개자에 의해서 알려진다고 생각된다. 즉 점술은 초자연적인 영들이 알고 있다고 간주되는 미지에 대한 지식을 샤먼, 주술사, 무당과 같은 중개자들을 통해서 알고자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의 세계관은 초자연적인 영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면에서 초자연을 부정하는 세속주의 세계관보다는 기독교 세계관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자연적 법칙을 배제하고 인간사나 자연사의 배후에 일어나는 고통과 불행, 번영이나 성공이 하나님이 아닌 잡다한 초자연적 영들의 소행에 의한 것이라는 관념도 모든 것을 자연으로 설명하려는 세속주의와 정반대에 있는 또 하나의 극단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영을 두려워하는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의 영향권 안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은 인도하심을 받을 때, 비록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는 동기가 개입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별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즉 적어도 세속주의자들처럼 모든 결정을 소위 "합리적인 사고"에 입각해서 처리하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의 기독교인들과 비교하더라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열심인 사람들은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중요한일을 결정해야 할 때 흔히 산기도라든지 금식기도에 들어간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자산의 하나이다.
한편 이러한 긍정적 성향은 부정적으로 왜곡되게도 나타날 수 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격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무속인이나 역술인을 찾는 샤마니즘적 행태에서 연장되는 면이 있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의 문제는 평소에, 범사에 인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신의 노여움을 타는 부정하는 짓, 즉 터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할 뿐이다. 매우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거나 문제가 발생해야 점술가를 찾듯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뜻이다. 성경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할 때 그분의 지도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잠3:6).
샤마니즘과 애니미즘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또 한가지 오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중재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또 성자와 성령의 사역 또한 중보자, 혹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중재자라는 개념이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인간 중재자를 찾는 데에는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의 관념이 그대로 연장되어 나타나는 면도 있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 세계의 사람들은 초자연적 영들의 본질을 사랑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영들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초자연적인 영들은 비우호적이고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달래고 조종해야할 대상이 된다. 초자연적인 영들은 미지에 대한 지식을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중개자를 통해서 어떻게든 그 미지의 지식을 캐내어야 하게 된다. 이러한 세계관에 감염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은 두렵고 비협조적인 존재여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숨기려하고 특별한 매개인에게만 분명하고 신비적인 영적 방법으로 알려준다는 전제를 무의식 중에 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미지의 지식을 캐내기 위해서 하나님과 직통하기 때문에 특별한 영감을 가지고 있는, 소위 "용한" 권사님이나 여전도사님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뜻을 알고자 할 때 협조적이시다. 그분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그 뜻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들에게 기꺼이 주권적으로 당신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영적 지도자의 생각과 충고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가 나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 인도함을 받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영적 지도자는 지도자이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특별한 영매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참 의미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될 것이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에 세계관에 감염되었을 때에는 순종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형통을 위해서 미지의 지식을 캐내려고 하는 경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일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미지에 대한 지식을 캐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강요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인격적 관계에서라면 인도하심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나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이 일방통행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도덕적인 뜻은 우리가 무조건 순종해야 하지만 개인적인 뜻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고 조정받고 하나님과 함께 결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개인적 뜻에 관심을 두고, 인생 전체의 청사진을 요구함
샤마니즘과 애니미즘 지역에서는 인간사와 자연사를 모두 초자연적 영들의 소행으로 간주하는데, 이러한 세계관에 감염되었을 때에는 기독교인이 된 뒤에도 모든 일들을 단순히 성령, 혹은 악령들의 역사로 간주하게 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즉 선과 악의 과도한 이분법이나 악령에 대한 노이로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고 내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퍼즐을 풀어야 하는 것으로 무의식 중에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게리 프리슨(Garry Friesen)의 방식대로 "주권적," "도덕적," "개인적" 뜻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며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뜻은 나 개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뜻인데 상당히 많은 경우는, 우리의 자유에 맡겨진 허용적 영역도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도덕적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지혜롭게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도덕적 뜻보다는 개인적 뜻에 더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과의 영적 도덕적 관계가 더 중요하실 것이다. 여호수아 1장 7절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덕적 뜻을 준행했을 때 개인적 형통이 따라온다. 특별히 "어디로 가야"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즉 특별히 어디로 이사를 가거나, 어느 직장으로 가거나, 어느 학교로 가거나, 어디에 묘자리를 써야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다는 것이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의 세계관에 감염되었을 경우는 모든 것이 초자연적인 영들의 소행이기 때문에 영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감추어진 퍼즐의 정답은 하나이고 나에게 허용된 자유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그 특별한 한 점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 노심초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용하신 자유의 영역을 누릴 수 없게 된다. 만일 어디로 가야한다는 하나님의 정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맞추지 못하면 나의 인생은 차선(次善)이 되거나 차차선(次次善)이 되거나 아니면 아주 못쓰게 되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반적인 도덕적인 뜻을 분별하는 것보다 나의 운명에 관련된 하나님의 특별한 한점, 혹은 정답 하나가 무엇인지 노심초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날마다 영적 성숙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도덕적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운명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싶어한다. 많은 사람들이 역술인이나 무속인에게서 더 속시원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들은 개인의 운명전체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너무 더디고 갑갑하고 애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성경은 형통이 "어디에 가야"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형통의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우리의 영적 도덕적 상태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일반적인 도덕적 뜻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가 올바로 인도함을 받는데 있어서 더욱 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지적해준다.
하나님을 조종하려함
샤마니즘과 애니미즘에서는 고통을 해결하고 불행을 종지부찍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영을 달래고 조종하려고 한다. 따라서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무도덕적(amoral) 이기 때문에 어떤 고통이 왜 발생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 영적 도덕적 상태에 대한 자기성찰적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영적 도덕적 상태를 매우 중요시하시기 때문에 고통과 불행, 그리고 인도하심의 필요에 직면했을 때 먼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도덕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갈등과 영적 고뇌를 수반한다. 즉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징계 등과 같은 신학적 해답을 필요로 한다.
물론 샤마니즘과 애니미즘에서도 초자연적 영들과 관계맺음이 있고 또 도덕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초자연적 영들과의 관계는 성경적 세계관에서 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맺음과는 다르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에서의 초자연적인 영들과의 관계는 사랑과 보편적 도덕에 기초해서 영적 성숙과 성화를 지향하는 인격적 관계라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이 왔다고 할 때 그것은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만일 제사를 도덕의 범주에 넣는다면 이것은 도덕적인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냐 마느냐는 보편적인 도덕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에서는 터부를 보편적 도덕으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
샤마니즘과 애니미즘적 세계관에 감염되었을 때 초자연적인 영들을 조종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치성(致誠) 등의 개념은 원래 "조종적"(manipulative)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개념이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동기로 새롭게 해석되어지고 상황화된다면 매우 바람직한 면을 가진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지극 정성을 다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지성이나 치성이 하나님의 뜻을 변개시키기 위해서 조종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잘못된 지성이나 치성은 하나님에 대한 쓴뿌리를 가져올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조종당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도 응답의 확신에 대한 오해로 나타난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은 언제 어떻게 성취될 것 같은 느낌이나 자기확신이 아니다. 기도응답의 확신은 선하고 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 암시적 확신과 은혜받은 것 같은 감정적 고조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매우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산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등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기도가 응답되는 때와 방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확신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자주 무너지며 오히려 상황이 더 어렵게 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와 방법을 우리가 마음대로 그려놓고 하나님이 거기에 맞추어서 역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조종하는 행위이다.
이런 쓴뿌리는 "용한" 여전도사님이나 권사님을 통해서 며칠 금식, 며칠철야 등의 구체적인 "처방"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 처방을 내려서 작정하여 지성과 치성을 다할 때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물론 작심기도는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도와주고 그 결과로서 신앙을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나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내가 작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즉 공양미 삼백석에 백일기도, 천배(千拜), 굿이나 부적과 같은 처방이 효력이 없을 때 실망하는 것처럼 이러한 치성적 기도가 효력이 없을 때 하나님에 대한 쓴뿌리를 가지게 된다. "믿습니다"라고 힘주어 다짐하는 것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보다는 자기암시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조종하는 기도와 기도응답의 확신을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나타나는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는 점술가들이 즉각적인 답을 주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즉각적 답을 요구하는데서 나타난다. 샤머니즘적인 경향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잘 인내하지 못하게 하고 더딘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즉각적인 해답이나 청사진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영적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 즉 우리의 성화와 영적 성숙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인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성화시켜 나가신다. 집중기도, 금식기도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영성의 바탕은 신앙의 성장을 위한 좋은 상황화의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즉각적 응답, 인도를 기대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쓴뿌리를 가지게 될 수 있다.
기도에 있어서 개입될 수 있는 또 한가지 문제는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도할 때 가급적이면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부정확하거나 구체적이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시며 (마6:8).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신다 (엡3:20). 하나님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로 우리의 필요를 잘못 계산해서 부족하게 구한다하더라도 그대로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맞게, 구하는 것 이상으로 주신다. 우리가 기도를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하면 좋은 이유는 기도가 응답된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유익이 있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강박관념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을 기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에서는 정확한 주문을 외워야만이 초자연적인 영들의 능력을 끌어내어서 나의 필요와 유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영들과의 관계는 사랑에 기초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정확한 패스워드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만이 그 메카니즘에 의해서 능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방식이 관계적이라면 애니미즘의 방법은 조종적이다." 9
환상, 꿈 능력 등의 방식에 권위를 부여함
성경은 복술자들이 거짓된 환상과 꿈을 보고 말한다고 (스10:2) 지적한다. 물론 꿈과 환상 (단2:27) 등은 성경에서도 나타나는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꿈이나 환상은 샤머니즘에서 신봉하는 것처럼 신봉되어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인간의 쪽에서 그것을 추구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로 나타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다 (렘23:6). 즉 꿈이나 환상을 과신하는 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을 수 있다.10
샤머니즘에서는 꿈이나 환상을 더 잘 믿는 경향이 있다. 꿈은 육체적 제한을 넘어서 영들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통로하고 생각한다. 소위 "신령한" 꿈이나 환상을 잘 보는 사람이 더욱 영적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에 더 잘 넘어간다. 샤마니즘이나 애니미즘의 세계관에 감염되었을 경우 인도하심을 받는 데 있어서 신비적 음성이나 꿈, 환상 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도함을 받는 것이 더 영적이고 더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더 영적이지도 않고 더 확실하지도 않다. 초자연적인 영적 세계와 교통하는 것이 곧 성경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지 않고서도 영적 존재들과 교통하는 채널을 가진 샤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거짓 환상과 거짓된 꿈을 경계하고 있다. 초자연적 영들과의 중개자가 영성, 혹은 영적 성숙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미숙할 수 있다. 우리는 교회 안의 지도자들 중에서 아주 "신령한" 방식으로 인도를 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더욱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게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뜻보다 특별한 뜻에 더 관심이 많은데 이러한 면은 샤마니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눈과 심장으로 세계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지 초자연적인 영들과 잘 교통하는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목회자가 직접적으로 초자연적 영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그로부터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할 때 더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권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샤머니즘적 권위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결합되었을 때에는 인도하심에 대해서 지도자의 말을 맹종하거나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꿈이나 환상 등을 동원한다면 더욱더 잘 속을 수 있다. 아마도 한국의 많은 이단들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이런 왜곡된 권위주의가 통하게 되면 심지어 "이 교회를 떠나면 저주받는다"는 식의 협박이 통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영적인 영역이 아닌 것에서 대해서도 지도자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선거에서 누구를 찍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절대적 권위를 행사한다. 물론 지도자의 견해는 존중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도자에 대한 이러한 맹신은 샤마니즘적 능력과 유교적 신분에 입각한 계급구조라는 측면에서 교회의 직분을 보게 될 때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이다.
환상이나 꿈으로 미지의 지식을 캐내려는 태도보다 하나님의 도덕적, 일반적인 뜻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데 있어서 더욱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우리의 자유에 허용되어 있는 뜻들이 있고,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결정하는 경우에도 인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에 대해서 깨어있고 열려있어야 한다.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잠16:9). 사도 바울은 합리적으로 판단으로 로마제국을 선교하는 전략을 세웠지만 성령의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에 열려 있었고 마게도냐의 환상으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었다.
성공주의와 개인주의를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미래를 자신이 알려하고 통제하고자 하지 않는다. 미래를 알고 통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때 그 때마다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인격적 관계를 기초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요청할 때에만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요청하지 않을 때에도 주체적으로 당신의 자녀를 인도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신다 (시48:14).
성경적 인도하심은 영적 도덕적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다. 성경적인 인도하심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롬12:2)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은 단지 미지에 대한 지식만 캐내고, 방향만 제시받고 청사진만 받아내고 내 마음대로 내 명철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특별한 때 뿐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갈 길을 지도받는 것이다 (잠3:6).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우리가 갈 길을 가르쳐보이고 우리를 주목하여 훈계하신다 (시32:8).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 되신다 (시119:105)
성경적 인도하심은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 즉 영적 성숙과 성화의 성취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잘 인도함을 받은 결과는 영적 성숙, 성화가 따라야 한다. 복이나 형통은 인도함을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복 개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도덕적 관계가 올바른 상태를 말한다. 1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일반적 뜻, 즉 영적, 도덕적 뜻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샤마니즘, 아니 타락한 인간의 본능은 영적 성숙과 성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물질적 형통, 행복과 관련된 개인적인 뜻, 특별한 뜻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잘 인도함을 받은 결과가 물질적인 번영이나 행복의 증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부분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어디에 더 우선을 두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적 인도하심과 샤마니즘의 인도하심의 차이점은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은 기본적으로 현세 기복적이다. 샤마니즘, 애니미즘에서는 현세적 형통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공주의로 갈 수 있다.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에서의 형통은 곧 고난과 불행을 피하고 만사형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반드시 편안함이나 쾌락의 증진 쪽으로 가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때로는 고난을 좇는 것일 수 잇다. 하나님은 주권적 인도하심을 통해서 우리를 영적 성숙, 성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의 삶을 살게 한다.
성경적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의 전제는 순종이다. 그러나 샤마니즘에서는 인도하심을 받는데 있어서 자신의 계획이 길하나 흉하냐, 고통이나 위험, 불행이 있느냐 없느냐에 더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과 같이 위험과 고난을 당할 것을 예측하고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20:22-24) 행동은 나오기 어렵다.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에서 주술행위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형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물론 전통 사회에서 샤마니즘의 굿과 점은 공동체적일 수 있지만 실제로 오늘날 행해지는 굿이나 점은 개인의 길흉화복, 형통과 관계되어 있다. 또 유교적 가부장제로 인하여 한국인들은 가족 단위까지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는 공동체 의식이 약한 면이 있다. 그리고 유교의 말폐(末弊)라고 할 수 있는 입신양명적 성공주의는 이러한 개인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개인주의가 전적으로 샤마니즘 혹은 애니미즘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서구적 개인주의의 확산이 미친 영향도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러한 개인의 형통이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있을 때 개교회주의 즉, 개교회의 형통, 성공이라는 면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하지만 보다 큰 그림, 한국교회 전체나, 우주적 교회라는 큰 그림을 보지는 못한다. 그래서 개교회에는 유리해 보일지 모르지만 한국교회 전체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결정을 많이들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미명 하에 이러한 결정들이 행해지지만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보다 큰 공동체의 유익은 뒷전에 남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경적 인도하심의 결과는 개개인이든 혹은 개교회이든 이러한 현세기복적 형통과 성공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영적 성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목회와 신학, 2003년 3월호)
----------------------------------------------------------------------
(각주)
1)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New York: Orbis, 1986), pp.144-158.
2) Paul Hiebert, Understanding folk religion (Grand Rapids: Baker, 1999), pp.192-195.
3) 샤마니즘은 애니미즘의 한 종류로써 특별히 샤만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샤만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로 주술행위를 하였으며 점점 왕으로 발전해갔다고 볼 수 있다.
4) Gailyn Van Rheenen, Communicating Christ in animistic contexts (Grand Rapids: Baker, 1991), p.170.
5) Paul Hiebert, Daniel Shaw, Tite Tienou, Understanding folk religion (Grand Rapids: Baker, 2000), p.191.
6) Van Rheenen, 위의 책, p.193.
7) Van Rheenen, 위의 책, p.192.
8) Van Rheenen, 위의 책, p.194.
9) Van Rheenen, 위의 책, p.192.
10) Van Rheenen, 위의 책, p.187.
11) Van Rheenen, 위의 책, p.185.
12) 안점식, 세계관을 분별하라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8), pp.15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