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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손때가 묻은 칼
이순신 장군의 검은 모두 8개가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아래 여섯 자루지요.
쌍수도 (2자루) - 아산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외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검. 보물 326호. 귀도(2자루), 참도(2자루) - 통영 충렬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두 자루가 더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합쳐서 여덟 자루가 되는 셈이지요. 이 두 자루가 다른 점은... 바로 실전용이 었다는 점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실전용 도검, 쌍룡검. 1910년에 촬영된 흑백 사진이다.
두 자루가 꼭 같지는 않고, 한 쪽이 약간 더 휘어 있다.
위 여섯 자루 중 아산 현충사에 있는 칼은 의장용이고, 실제로 쓰기에도 너무 큽니다. 그런가 하면 통영사에 있는 네 자루는 명나라 황제가 선물로 보낸 것인데, 충무공 사후에 도착했기 때문에 만져 볼 기회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쌍룡검(雙龍劍)이라고 불리는 검 두 자루는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서 사용했던, 한마디로 손때가 묻은 칼입니다. 게다가 이 칼에는 전설도 하나 얽혀 있지요.
쌍룡검(雙龍劍)의 전설
지금은 민족의 영웅으로 평가받는 이순신 장군이지만, 임진왜란 직후에는 그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강조할 경우 조선 국왕인 선조의 정치적인 실책이 강조될 수 있었거든요. 충무공 이순신의 공적이 그나마 제대로 인정을 받고 나아가 구국의 영웅이 된 것은, 숙종(1674 ~ 1720) 중반 이후의 일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거의 100년도 더 지난 후의 일인 셈이죠.
정조가 하사한 제문. 통영 충렬사 소장.
이런 모양이니 충무공의 애검인 쌍룡검 역시 그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따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칼 두 자루가 따로 떨어져서 이리저리 흘러 다녔겠지요. 하지만 이것을 결국 순조 대의 권세가였던 박종경이라는 사람이 모두 찾아내게 됩니다.
전설만큼이나 극적인 이 이야기는 그가 쓴 <돈암집> 6권의 <원융검기>에 나옵니다. 이 기록은 1984년 이순신연구소 소장 이종학 교수가 찾아내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래 번역은 현대어 번역으로, 성균관대학교 조혁상 박사가 한 것입니다.
병부상서 심두실 공이 나에게 검 한 자루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검은 이충무공이 패용하던 것이오. 내가 간직한 지 오래되었으나 나는 서생이라 쓸 데가 없으니, 상장군이 된 자에게나 어울리겠소." 라 하였다. 나는 그 검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절하고, 그것을 뽑아보니 길이가 1장 남짓이었고, 아득하기가 끝이 없었다. 참으로 좋은 검이었다. 칼등에는 시가 있었는데,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고금에 같도다.
라 했다. 내가 놀라 말하기를, "또 한 자루가 있을 터인데, 어떻게 이것을 구하여 합칠 수 있을까?" 라 했다.
십수일이 지나서, 홀연히 검을 지니고 들어와서 고하는 자가 말하길, "신기하게도 이것을 샀습니다. 장군이 지니고 계시면서 아끼시는 검과 어찌 그리 꼭 같단 말입니까?" 라 하였다. 내가 심공이 준 검과 비교해보니 벽에 걸어놓은 것과 꼭 같았다. 잠자코 한동안 있다가 비로소 검의 출처를 물었더니, 아산현에서부터 차고 온 자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말하길, "믿을 만하다. 지난번 심공의 말이 지금도 어긋나지 않으니, 또 검 한 자루를 얻었구나." 라 했다. ...
(중략) ... 신미년(1811년, 순조 11) 10월 하순에 그 시말을 이상과 같이 기록하노라.
어디로 갔을까?하지만, 안타깝게도 쌍룡검은 현재 그 행적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쌍룡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910년 서울 고서 간행회에서 발행된 <조선미술대관> 이라는 책입니다. 일종의 박물관 도록인데, 이 책에는 쌍룡검의 흑백 사진과 실려 있습니다 - 맨 위에 인용한 사진입니다. 사진에는 "이순신이 항상 차고 다니던 칼" 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는데, 앞에서 인용한 명문이 적혀 있을 뿐 아니라 사진에도 원융검이라는 태그가 달려 있습니다. 기록하고 완전히 일치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칼은 위 기록에서 살펴본 바로 그 쌍룡검인 셈입니다.
이 기록을 찾아낸 것은 역시 이종학 교수입니다. 다만 문제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소장처는 묘연했다는 거죠. 이 책에는 쌍룡검의 소장처가 "궁내부박물관" 이라 되어 있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이종학 교수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이 칼이 소장되어 있는지 문의했다고 합니다만, 없다는 대답만 받았다고 하는군요. 게다가 국립 중앙박물관은 궁내부박물관이라고 불린 적도 없습니다. 어디 소장되어 있었는지조차 묘연해진 것이죠.
통영 충렬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 영정. 1978년 그려진 것으로, 정형모 화백의 작품이다.
좌우에 놓여진 병풍은 제 187대 신관호 통제사가 그렸다.
이렇게 1910년을 마지막으로 쌍룡검은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웃 일본에서는 별 의미 없는 칼들도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칼을 좋아하는 후세인으로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칼이 어서 세상에 나타나길 기원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참고문헌
조혁상, <충무공 이순신의 검에 대한 소고>, 이순신 연구 논총 10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 한문학 전문가가 쓴 이순신의 검에 대한 글. 이 포스트의 메인 소스이며, 인용문도 모두 저자의 것이다. 저자는 검에도 매우 조예가 깊다. 블로그는 바로 여기.
덧붙이자면, 이 학예지를 발간하는 순천향대학교의 노승석 교수는 초서체의 전문가로, 지난 4월 지금까지의 누락과 오독을 교정한 난중일기 완전판을 펴내기도 했다.
노영구, <역사 속의 이순신 인식> :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미지가 임진왜란 직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한 글. 내용도 훌륭하지만 매우 읽기 쉬워 논문이라는 기분이 안 든다는 점도 미덕이다.
저자는 현재 국방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 전통 병서 분야의 권위자다.
한국일보, "이것이 이순신장군 쌍룡검" 2001년 11월 23일 금요일 25면 : 이종학 교수의 쌍룡검 기록 발견에 대한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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