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강서원 동·
서재 건립에 봉급보탤 정도로 열의 보여
유생과 학생 모아
강의…문과 급제자 배출 터전 마련
이임땐 울산사람들 경주까지 따라가 이별의 정 나눠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silbo.co.kr%2Fnews%2Fphoto%2F200912%2F275429_71728_4127.jpg) |
|
▲ 구강서원. |
울산 시민들은 역대 울산 지방관 가운데 누구를 가장 존경하고 있을까. 지역 신문이나 책을 읽어보면, 조선 영조 때 울산부사를 지낸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59년)을 첫 손가락에 꼽는 이들이 많다. 권상일은 어떻게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칭송받는 것일까.
그는 좀 특이하게 스무살 때인 숙종 24년(1698년)부터 시작해 영조 35년(1759년) 자신이 사망하기 10여일 전까지 일기를 썼다고 한다. 무려 62년
동안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일부 전하지 않지만, 1702년 1월2일부터 1759년 7월1일까지 분량이 전해지고 있다. 이 <청대일기(淸臺日記)>는 18세기 조선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권상일은 상주 근암(현재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서 태어나 조부에게 글을 배웠다. 일곱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세 살에는 <논어>, <맹자>, <중용> 등 주요 경전을 독파했다고 한다. 그는 과거(科擧) 준비를 위해 여러
사찰과 서원·향교 등지에서 숙식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32세인 숙종 36년(171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0인으로 급제했다. 벼슬은 성균관 전적(典籍),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silbo.co.kr%2Fnews%2Fphoto%2F200912%2F275429_71729_4127.jpg) |
|
▲ 권상일 시호 교지(경북도청 제공). |
예조 정랑,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1731년 가을에는 도산서원 원장을 맡아,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을 교열하여 간행하기도 했다.
권상일은 57세 때 울산부사에 임명되었다. 영조 11년(1735) 3월 ‘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겸경주진관(兼慶州鎭管)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에 제수되어, 윤4월 울산에 부임했다. 그해 12월에는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영조 14년(1738) 12월20일까지 3년9개월간 울산부사로 재임했다.
그가 울산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우선 행정분야부터 살펴보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부세 행정을 바르게 하기 위해
창고 곡식을 정확히 파악했다. 여러 종류의
토지 현황을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군사 업무에 있어도 군역(軍役)을 정확히 조사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 했다.
영조 13년(1737년)에는 가뭄이 심해 논과 밭의 곡식이 모두 흉작이었다. 이에 권 부사는 이런 상황을 경상감영에 보고하여 진휼을 요청했다. 또 울산 경제를 위해
소금 굽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silbo.co.kr%2Fnews%2Fphoto%2F200912%2F275429_71730_4127.jpg) |
|
▲ 학성지 초고본2(경북도청 제공). |
권상일은 특히 학교 진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울산에는 포은 정몽주와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구강서원(鷗江書院)이 있었다. 이 서원은 숙종 4년(1678년) 설립되어 숙종 20년(1694년)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렇게 성사되기까지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는 영조 12년(1736년) 구강서원의 동재와 서재를 건립했다. 여기에 자신의 봉급을 보탰을 정도로 애정을 가졌다.
건물을 완성한 후에는 울산의 여러 선비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으며, 그날 밤 서원에서 묵었다. 그리고 그는 서원의 여러 건물에 편액을 써서 걸었다.
그는
교육에 힘써, 각 면의 훈장과 도훈장(都訓長), 서원에 있는 유생과 각 면의 학생을 모두 모아놓고 강의하기도 했다. 각 면의 학생들에게는 우열을 가려 상을 주었다. 또 객사 남문루에서 시사(試射)를 벌여 우승자에게 화살과 쌀을 상으로 주기도 했다. 이렇게 권상일은 울산의 청년들이 학문에 더 힘쓰도록 독려했다. 이후 울산에 문과 급제자가 나오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권상일이 울산부사로 왔을 때 이미 영남의 유명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었다. 울산 사람들은 이런 점에 큰 기대를 했을 것이며, 그를 통해 울산의 문풍(文風)이 진작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권상일은 울산 최초의 읍지(邑誌)를 만든 공이 크다. 울산 읍지인 <학성지(鶴城誌)>는 울산 사족들이 요청하여 시작했지만, 편찬 책임자는 권상일이었다. 편찬 실무를 담당한 사람은 박민효(朴敏孝·1672~1747년)와 이현담(李玄聃·1682~1752년)·이원담(李元聃·1683~1762년) 형제 등이었다. 이들이 읍지 편찬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이것을 권 부사가 검토했는데, 재임 시기에 완성하지 못했다.
권상일은 울산부사에서 물러날 때, <학성지> 초고본을 비롯하여 읍지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가지고 고향 상주로 돌아갔다. <학성지>는 그로부터 11년 뒤인 영조 25년(1749년) 그의 나이 71세 때 완성됐다. 권상일은 울산 사족의 연락을 받고, 초고본을 수정하고 서문까지 써서 울산으로 보냈다고 한다.
<학성지> 완성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초고본은 문경의 권 부사 후손집에 소장되어 있다. 일찍이 이수봉 교수가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소개한 바 있다. 반갑게도 이 <학성지>가
번역 출판을 앞두고 있다.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채은 소장이 울산시의 지원을 받아 그 작업을 진행했다. 울산 역사문화가 하나하나 정리되는 것 같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학성지>에서도 권상일의 울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인물조’에 울산의 효자·효녀·열녀 같은 인물을 많이 수록했으며, ‘충열조’ 항목을 설정하여 임진왜란 때의 공신(功臣)을 수록했다. 경북대 우인수 교수는 이런 것은 울산을 선양하려는 의미가 컸다고 분석했다. 또한 <학성지>에는 민간의
풍속인 정월 대보름의 매귀악(煤鬼樂), 2월의 영등신(盈騰神), 5월 단오의 마두희(馬戱) 등을 소개했다. 풍속과 놀이를 수록한 것은 다른 지역 읍지에서 잘 볼 수 없는 이례적인 것이라 한다. 이것도 울산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는 울산의 여러 명소를 찾아 많은 시를 지었다. 반구대·곡연·태화강·선바위·반고서원·동축사 등등. 이들 시를 해설한 글은 울산대 성범중 교수가 <울산문학> 2009년 여름호에 발표했다. 권상일은 반구대에서 정몽주를
추모했고, 태화루 옛터를 보면서 다시 세우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때로는 태화강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그는 울산을 떠난 뒤에도 울산을 추억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한편, 권상일은 울산부사로 재임시 ‘겸관(兼官)’ 제도에 따라, 언양겸관과 경주겸관을 동시에 맡기도 했다. 겸관은 어느 지역 수령의 유고시에 인근지역 수령이 그 기간 동안 ‘겸읍(兼邑)’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1736년 1월 언양겸관을 맡았다. 그런데 또 경주지역을 겸임하라는 명을 받고 경주겸관을 맡았다. 권상일은 언양현과 경주부를 모두 겸임하게 되어, 상당한 부담을 느꼈으며 업무가 과중하다고 생각했다. 경주 겸임은 두 달이 지나 새로운 경주부윤이 임명되어 부임함으로써 그만두었다.
그런데 권상일은 몇 차례의 지방관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결국 부사직을 물러나야만 했다. 그가 울산을 떠나가면서 경주 원원사(遠願寺)에서 하루
숙박했는데, 이때 많은 울산 사람들이 그를 따라와서 시를 주면서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때 권상일은 시를 지어 답하거니와, 현인과 성인을 모범으로 삼고 본원(本源)을 밝히는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당부했다.
이후 권상일은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영조 34년(1758년) 1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5월에는 특명으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관직에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silbo.co.kr%2Fnews%2Fphoto%2F200912%2F275429_71731_4127.jpg) |
|
▲ 신형석 울산시 박물관추진단 학예사 |
그의 사후 얼마 지나, 정조 14년(1790년) 4월에는 희정(僖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문경 근암서원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와 유품은 현재 ‘문경 근암서원 소장유물’이란 명칭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77호로 지정되어 있다.
권상일은 울산을 사랑했고, 울산의 문화 창달을 위해 노력한 지방관이었다. 그의 울산 사랑은 퇴임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이에 대해 울산 사람들도 보답하듯이 진심으로 그를 따랐고, 존경했던 것이다.
신형석 울산시 박물관추진단 학예사
<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