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무마다 자기의 모습이 따로 있다.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연의 이치를 가르치는 모양이다.
결국 그들 속에서 나를 만나곤 한다.
오.그래,그런 거야. 정말 그렇구나,라며 맞장구를 치게 된다.
나무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내 인생이 마치 어떤 구도자처럼 보인다.
분재는 천시지리인화(天時地理人和)가 이뤄져야 아름답다.
나무는 천기를 받아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자연의 시련를 겪는다.
인간의 마음과 우주의 시간이 머무른 자리에 연륜을 따진다.
아프며 조화하며 이루어진 것이 분재예술이 아니겠는가."
지난 가을 제주도에서 <생각하는 정원>을 만든 성범영을 만났다.
그는 "자연과 식물을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격찬받은 인물이다.
그가 가꾼 <생각하는 정원>은 "한국의 한 농부의 위대한 지혜와 창의력,
강의한 의지가 만든 놀라운 곳"이라고 지구촌 사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더 할 수 없이 위대한 낙원이다."
모로코의 나왈 엘 우타와켈 IOC위원이 격찬한 <생각하는 정원>이다.
그 정원을 만든 성범영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나무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내게 묻는다.
어떤 나무가 제일 좋은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식이 어렷이라고 대놓고 내가 누가 더 좋다고 말을 할 수는 없지 않냐고.
특히 우리 예술원의 분재를 두고 내가 어느 나무가 좋다고 말하면
자연히 그 나무에만 시선이 집중되고 결국엔 죽이게 된다고.
속으로 더 아끼는 자식이 있더라도 결코 표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나무에서 배운 철학이다.
그의 말은 세파(世波)에 찌든 우리에게 주는 청량제였다.
"만들 수 있는 것이 나무의 얼굴이라면 돌은 만들 수 없는 얼굴이다.
대신 돌은 제자리를 찾아 놓아주면 그것이 돌의 얼굴이 된다.
돌을 옮기고 자리를 잡아주면
나무와 돌이 자연이 정한 짝궁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제 자리 제 짝궁을 찾아야 나무도 빛이 난다."
그는 계속 나무를 말한다.이어갈수록 우리 인간의 삶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삶 인생을 살다가 마음을 다 비웠다, 다 털렸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가 있지만
그 비운 마음도 몇년이 지나면 분갈이한 화분 속에 뿌리가 꽉 차듯 차버린다.
왜냐하면 살아있기 때문에, 인생에서 완성을 이룬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부 크렉 알렉스는 성범영이 가꾼 그 정원을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 나는 위대한 철학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은 열정과 오감의 연결장입니다.
이 장소에서 나는 카톨릭 교회 성인이신 성 베르나도(14C경) 성인께서 말씀하신
다음의 문장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책보다도 숲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위와 나무들은 그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비밀>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성범영은 우리에게 낯익은 평범한 농부였다.
나무와 돌과 40여년 연애하듯 살아온 그는 자연을 말하였다.
그 자연을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서는 삶의 의미를 진하게 느끼게 하였다.
"나무는 뿌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죽고,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늙는다."
자연과 호흡하는 나무가 아릅답다고 했다.
자연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더불어 함께 누리는 조화의 대상으로 보는 따뜻한 시선이 숨겨져 있다.
우리 삶의 공간 속에 담긴 자연의 위대함과 함께
그 조화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자연과 호흡하며 한껏 멋있게 자라는 나무처럼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성범영은 강한 메세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