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경관
이신열 교수(고신. 조직신학)
조정이론 (accommodation theory)
칼빈은 무지와 육체의 연약함에 얽매여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결코 올바르게 그리고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신적 불가완해성(incomprehensibility)의 입장을 견지한다:
모든 사람은 신적 은혜를 통하여 조명함을 받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신비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저함 없이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이 어두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이 이를 더 잘 이해한다는 생각에 빠진 자들은 그 눈이 더욱 어두움에 처하게 된다.1)
그렇다면 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무한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인간에게 전달될 때 이는 인간의 이해력에 맞추어서 조정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를 칼빈의 신학에서 흔히 ‘조정이론 이라고 부른다. 이는 칼빈이 자주 사용하는 주해에 있어서의 도구 또는 수단에 해당되며 여기에서 강조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 (scaling down)의 개념이며 이는 주로 신인동형적 (anthropomorphic) 표현을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입, 귀, 손 그리고 발을 지니고 계시다는 표현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격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좁은 능력에 맞추는 것이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장엄하심의 높이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오셔야만 한다.”2)
이러한 하나님의 낮추심을 잘 드러내는 구체적 성경 본문은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 자 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 같이 일어나사”라고 기록하는 시편 78:65인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술 취한 자’로 묘사되어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술 취한 사람이라는 비유가 물론 약간 지나친 것도 사실이지만 공연히 제시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백성의 우둔함에 맞추어 조정된 것이다. ... 따라서 그가 자신을 술 취한 사람에 비유할 때, 그로 하여금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시도록 만든 것은 백성들의 술 취함, 즉 그들의 무감각이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훨씬 더 엄청난 부끄러움이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어떤 것도 저하시키지 못한다.3)
조정이론은 하나님께서 혀가 짧은 소리로 말씀하셔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혀가 짧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 또한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겨지도록 기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이 내세웠던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의 무용성(uselessness)을 인간의 왜곡적 무지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자연신학은 인간 이성의 우월을 내세우지만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무효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칼빈은 비판하였다. 피조세계에 드러난 일반계시 (general revelation)가 존재하지만, 인간은 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자신의 죄악 때문에 전적으로 상실하였다.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사람이 책의 글자를 읽기 위해서 안경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은 상태가 인간이 계시를 대하는 상태라고 칼빈은 설명한다. 피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을 분명하게 그리고 참되게 볼 수 있고 이에 근거하여 피조세계에 주어진 계시에 관하여 올바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의 도움을 통하는 방법 밖에 없다.4)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진리의 모든 영역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이 ‘공적 기록 (public record)으로 옮겨지도록’ 작정하셨던 것이다.5)
만약 우리가 인간 마음의 변화무쌍함을 고려하고 얼마나 쉽게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가를 생각한다면, 모든 종류의 잘못으로 치닫는 경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고려한다면, 새롭고 잘못된 종교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인간의 열광이 얼마나 맹렬한 것인가를 알고 있다면, 천상의 교리가 망각되어 상실되거나 실수로 인해 물거품이 되거나 인간의 무례함에 의하여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문서로 작성되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다.6)
조정은 성경의 계시가 진리와 비진리가 서로 혼합된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진리이다. 모든 사람들이 악질적이며, 무지하고, 전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참된 계시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뿐 아니라, 이 계시가 인간적 수단 (즉, 인간의 손에 의해 기록된 책)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어야 하므로, 이에 관해서 잘못된 오해를 불러 일으킬 만한 모든 인간적 요소들이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에 이러한 인간적 요소가 존재하는 적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려 하였지만 이 사실이 조정 이론과는 상관이 없다고 보았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할 때 비록 그가 인간적인 것을 전혀 선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는 슬픔과 두려움을 포함한 육체적 감정으로부터 전적으로 면제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선지자와 사도들이 순수하고 모든 불완전함이 없는 진리를 말할 때와 그들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를 항상 구별하여야 한다.7)
성경의 어떤 저자도 완전하고 완벽하여서 육체의 잔재가 모두 깨끗이 사라진 경우는 없었으며, 이로 인해 이사야는 곤고함과 걱정으로 가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감정에 사로 잡혔는데 이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간적인 것이 전혀 없도록 그의 마음과 언어를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모든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왔다.8)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근거할 뿐 아니라 이 진리의 하나님이 참되게 전달된다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제안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성령의 도구로서, 그들이 하늘로부터 선포된 것만을 선언하였다.”9)
결론적으로, 성경 그 자체의 권위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10)
성경의 권위와 성령
신적 지식이 어떻게 선택된 자들에게 전달되며 또 그들이 어떻게 이를 신뢰할만하게 오류를 범하지 않고 기록하였는가의 문제에 관해서 칼빈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을 소개한다. 이 문제에 대한 칼빈의 주요 관심사는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완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결코 굽히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으며 어떤 사람도 자신의 기민함으로 믿음을 지닐 수는 없다.11)
칼빈은 이를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는 태양과도 같지만 눈 먼 자 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따라서 내적 스승인 성령이 조명을 통하여 방법을 만드시지 않는 한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 수 없다.12)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많은 잘못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실수하기 쉽다. 그 결과 인간은 너무 아둔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지도, 인식하지도 못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증거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가 반드시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확증과 성령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the knowledge of God)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문제는 어떻게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한 믿을 만한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도 역시 성경을 극구 찬양하지만 단지 교회의 판단에 근거하여 성경의 권위를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에게 이것은 입증하기 불가능한 입장이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신적 권위를 인간의 판단 아래 복속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일한 이유로 칼빈은 성경의 신성을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저함이 성경의 신적 기원성 자체를 최소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 정반대로 칼빈은 성경의 권위가 인간들의 이성에 근거해서는 아니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칼빈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 (엡 2:20)이지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3)
만약 반대의 경우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우스꽝스럽고 “불확실하고 지레짐작에 근거한 권위, 즉 인간의 선의에 근거한 권위를 지닌” 믿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14)
그는 어거스틴 (Augustine)의 주장, 즉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면 성경의 권위를 믿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즉 성경에 대한 믿음이 교회의 권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가 개별 신자들이 믿음을 확증함에 있어서 소중한 도움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의도는 우리도 사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뿐이었다. 즉 아직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을 자세를 지니게 되며, 이로 인해 복음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을 배우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권위를 통해서 우리가 인도함을 받아 복음을 믿는 믿음을 지니도록 준비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15)
성경의 권위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 - 그것이 교회든 인간의 이성이든 간에 - 을 피하기 원한다면, 성경의 신성에 대한 확신은 반드시 인간적인 것보다 더 높은 근원, 즉 “성령의 비밀스러운 증거”에 의해 주어져야 함을 뜻한다.16)
어떤 측면에서 살펴보면 합리적 논증이 교회의 선언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이라고 판단될 수도 있지만, 이 논증이 아무리 결정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그들의 마음속에 참된 경건에 필수적인 확신을 심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17)
인간의 이성은 오류를 지닌 것이며 더욱이 이성 작용에 의해 소위 ‘확신’을 지니게 된 인간의 마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변덕스러운 것이다. 의심을 제거함에 있어서 단지 한 가지만이 확실하다. 즉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셨다면, 하나님 자신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증하셔야 한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 홀로 그의 말씀에서 자신에 대한 필요 충분한 증인이시다.”라고 주장한다.18)
이는 하나님의 엄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 올바로 인식될 때 인간의 모든 교만이 사라지게 된다고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깨끗한 눈과 편견없는 판단을 갖고서 성경을 바라본다면, 그 즉시 하나님의 위엄이 시야에 들어오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의 교만한 반대가 무너지고 결국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될 것이다.19)
따라서 칼빈은 성경이 “자증적 (self-authenticating, autopiston)”이라고 말한다.20)
이는 성경이 그 자체로서 자신에 대한 증거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칼빈은 성경의 신적 기원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속에 있는 신적 행위, 성령의 증거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설명한다.21)
그러나 이 사건을 인간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즉 칼빈은 자신의 ”언어가 이 주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너무나 부족한 것”이라고 느끼지만 그가 이렇게 부족을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모든 신자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2)
이 지식이 단지 성령의 증거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는다고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이는 단지 이 경험을 지닌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인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론을 따지지 않는 확신이요, 동시에 최고의 이성이 동의하는 그런 지식이다. 어떠한 이론을 가질 때보다 더 안정되고 더 든든하게 마음이 안식을 누리는 그런 지식이요, 또한 끝으로 오직 하늘의 계시에서만 나오는 그런 느낌인 것이다. 물론 나의 표현으로서는 사실을 그저 설명하는 데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것은 신자들이 각자 자기 마음 속에서 체험하는 현상이다.23)
그러므로 만약 성령의 역할이 우리의 믿음을 진작시키는 (arouse) 것이라면, 성령께서 우리가 성경의 신적 기원성을 믿도록 만드는 것이 특별히 놀랄만한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을 확증함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을 지니게 된다.
첫째, 성령께서는 이 사역을 통해서 신자에게 지식을 부여한다. 칼빈은 믿음을 지식으로 말하고 있지만, 이 사역의 경우에 지식이란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자세한 것이어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이 사역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바로 성경의 실제적 저자 (real author)임을 확신시킨다. 물론 이 사실이 성경의 인간 저자들의 역할과 그 진정성을 부인하거나 저하시키는 아니한다.
셋째,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는 언어는 내적인 언어로서 주관성을 지닐 수도 있지만, 이 사역을 통해 주어지는 산물 (product)은 오히려 객관적인 것에 해당된다.
이러한 사역이 아무런 의심없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취된다면, 그들은 성경을 논박할 수 없는 지식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믿음을 부여함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자신과 관계되는 확고한 논증을 부여하신다.
성경의 영감
칼빈은 기계적 영감설 (mechanical theory of inspiration)의 입장을 취하는 데 이 입장은 앞서 언급된 성령의 사역과 분명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성경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게 이끄시는 성령의 영감과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은 분명히 동일한 사역은 아니지만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의 사역이 성경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과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유사점이 발견된다. 먼저 영감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마치 펜처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서 저자가 지닌 모든 인간적 편견, 선입관 등이 제거되며 순전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경에 객관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기록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칼빈은 영감의 이러한 측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사고가 개입되지 않은 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기록되도록 만드는 차원을 ‘기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영감에 대한 확신은 전적으로 개인인 인간이 성경을 대하고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주관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인간의 저자들을 도구 (organ)로서 사용하심을 가리킨다.24) 그들은 성령께서 불러 주시는 대로 성경을 기록한 “확실하고 순수한 성령의 필경사”들이었다.25)
칼빈은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기록한 것인데 성령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그들이 기록한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말한다. 즉 “베드로가 증언하듯이, 옛적 선지자들도 사도들의 경우나 또한 그 이후 하늘의 도리를 섬긴 모든 사람들의 경우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했던 것이다.”26)
그는 이를 베드로전서 1:11을 주해하면서 동일한 사실을 더욱 자세하게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한다:
동시에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그것이 거룩한 성령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설교자들과 사역자들은 사람이었지만 성령의 교사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다스리셨으며 하늘에서 보낸 성령을 복음의 교사들의 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이치에 맞게 설명한다. 그는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옛적 예언들은 그리스도께서 받아 적게 하신 것임을 보여준다.27)
여기에 칼빈의 영감설을 기계적 영감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 또는 이유가 발견된다.28)
이는 전적으로 이 저자들이 성경의 기록에 있어서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려 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음을 뜻한다.29)
성령의 영향력 아래 주체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성경에 대한 이해는 객체로서의 성경의 내용 자체에 관해서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성경의 영감은 성령의 사역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성경을 읽는 자, 즉 주체의 이해는 단지 객관적 사건에 대한 인식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주어져서 자신이 이를 신뢰하게 된다는 인식을 동반한다. 성경에 대한 확신을 설명하면서 칼빈은 이를 받아 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즉 교회에 속한 자들뿐임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깨달음의 보화를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만 보존하시기를 기뻐하셨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무지하고 어리석다는 것이 결코 놀랍거나 불합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무수한 사람들 속에는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교회라는 몸에 접붙임을 받기 전에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무지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30)
성경과 조명: 스승으로서의 성령
칼빈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눈에 띄는 표현 중의 하나는 그가 성령을 ‘스승’으로 뵤사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칼빈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성령 하나님을 가리켜야 할 것을 자유롭게 제 1위나 제 2위 하나님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에 의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기록된 시편 119:25 주석에서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은 “건전한 지식을 통하여 조명하심으로서” 그리고 우리를 “성령의 비밀스러운 영향을 통하여 유순하게” 만드신다.31)
즉 ‘조명 (illumination)’의 결과로 인간의 마음에 주어지게 되는 것은 ‘유순함’ (docility)인데 이 두 가지 개념은 칼빈이 성경에 대한 확신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자주 등장하는 개념에 해당된다. 이 경우에 성령의 사역은 확증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사야 54:13 주석에서 칼빈은 외적 설교와 성령의 내적 효율성을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32)
칼빈은 종종 성령의 가르침이 말씀과 별도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암시하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칼빈은 재빨리 바로 잡는다. 시편 94:12에 언급된 “주의 율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주: 영역본과 불가타 (Vulgata, 라틴어 성경)는 이를 “주님으로부터 교훈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로 번역하고 있다.) 라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훈 (가르침)이 말씀과 별개의 것으로 잘못 판단하도록 인도하기도 한다. 따라서 칼빈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의 주석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 “그 후에 선지자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의해 내적으로 부여된 이 지혜가, 또한 동시에, 성경 [율법]에 설명되어져 있으며 성경[율법]에 알려져 있는 것이다.”라고 밝힌다.33)
또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영론주의자들 (spiritualists)과의 논쟁에 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성령이 자신에 대하여 일관적이지 않을 수 없으신 분이시므로, 그는 어떤 경우에도 그의 말씀과 상반되거나 대립되는 내적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으시며, 더욱이 말씀 안에 주어진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결코 그의 말씀에 첨가될만한 어떤 가르침도 주시지 않으신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성령은 스승이시지만, 자신이 이미 말씀을 통해서 제공하셨던 것만을 가르치신다. “교리의 진리를 발견함에 있어서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실 것이라는 사실 외에 그 어떠한 것을 기대해서도 아니 된다.”34)
“만약 우리가 마땅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면, 그가 우리를 떠나신 상태에서 그 곳이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인 것처럼 우리는 멈춰서야만 할 것이다.”35)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 어떤 것도 첨가하시지 않으시지만, 이는 그가 단순히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주어진 말씀을 인식하도록 이끄시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본성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졌으므로”,36)
우리가 말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건전한 마음” 을 허락해 주셔야 한다.37)
그렇다면, 그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실 것이라고 그는 확증하며 우 리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눈이 어둡다는 것과 또한 악마에 의해 눈이 어두워지게 될 때, 인간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 설 수 없다는 것과 성령에 의해서 그들을 조명하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빛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38)
이런 측면에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다 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에 비취심을 받고 어두움이 물러가기 전까지는 이를 마음속에 다 이해하지 못하였던 그의 제자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39)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스승이셨지만, 그도 역시 “성령의 비밀스러운 계시”를 사용하셨다. 즉 “그가 사도들을 효과적으로 (efficaciously) 가르치셨다.”고 볼 수 있다.40)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회복시키심에 있어서 성령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신다. 교회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남용할 때, 하나님 자신께서 스승의 직분을 취하시어 성령의 비밀스러운 활동과 더불어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외적 말씀을 허락하신다.41)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며 항상 실수하며 잘못된 의미를 말씀에서 도출하면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은 반드시 성경을 확증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셔야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 책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이 반드시 우리의 “이해를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42)
분별의 영: 해석자로서의 성령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에게도 성경은 분명하고 명료한 책이었지만 이 사실 자체가 성경의 해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분별의 영으로서의 성령이 성경의 해석자라는 확신 속에서 성경 해석에 임하였다: “복음의 교리가 주어진 하나님의 영이 성경의 참된 해석자이시며 성경을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분이시다.”43)
이런 방식으로 칼빈은 성령과 말씀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렇게 성령은 말씀을 분별하는 분별의 영에 해당된다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경은 모든 교리들이 테스트되어야 할 참된 시금석에 해당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이 종종 의심스러운 것처럼 이런 테스트가 의심스러우며,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이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분별의 영이라고 불리워지는 성령의 판단을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실한 사람들은 성령을 그들의 지도자와 안내자로 삼고 있기에 모든 교리를 성경으로부터, 그리고 성경에 근거하여 판단해야 한다.44)
신자는 그의 손에 쥐어진 말씀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초월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인해 성경 이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성령의 조명에 더욱 의지하게 되며 진정으로 해석자이신 그분의 도우심을 갈구해야 한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여 이르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앉으라 하니라.”라고 기록된 사도행전 8:30-31에서 성경의 뜻을 깨닫기를 원했던 에디오피아 (Ethiopia) 내시에게 하나님께서 빌립을 보내주셨던 사실이 교훈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를 원하는 자는 하늘의 직접적 영감과 계시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이미 주어진 도움 (e. g. 성경주석, 콘코던스 (concordance), 신학사전 등)에 유의하고 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45)
이는 성경의 해석이 전적으로 그리고 주로 개별 신자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회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성경을 해석하는 과제를 지닌 특별한 사람들, 목사와 교사들이 존재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우리를 돕는 해석자와 교사들이 추가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46)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해석하셔서 보여주셔야 하지만, 그가 “가시적 임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므로, “그는 그가 대표자로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사역을 사용하시는데 이는 그의 권한과 영광을 그들에게 이양시키시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그가 스스로 그의 일을 하시고자 함이다.”47)
따라서 교회와 지도자는 칼빈의 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모든 자들은 “배교자이며 종교에 대한 변절자이다.”라고 칼빈은 주장한다.48)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의 품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진리를 항상 지닐 수 있다.”고 칼빈은 믿었기 때문이었다.49)
이런 이유에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경청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50)
교회와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가 이렇게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교회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에게 말씀 그 자체에 부여된 권위에 필적하는 권위가 부여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목사의 설교를 자신의 영과 연결시키셨기 때문이다.51)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구원을 베푸는 기능이 자신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까지 말했던 것이다 (고전 3:9ff). 이는 사도된 자신에게 어떤 놀라운 능력이 내재해 있음을 내세우고 의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기념비 (monument of grace)’를 세우려는 것이다.52)
즉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능력이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도인 자신에게 임했으며 자신을 통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 드러나게 되므로 사도의 권위는 사실상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된 것이며 단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해서 사도의 권위는 비로소 복음 그 자체의 권위와 필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 높이 세우지 않기 위해서, 그가 영예의 최고 정점에 도달하였던 것이 결코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제 그의 사도됨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보다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 데에는 더 많은 것이 암시되어 있었다.53)
칼빈이 이렇게 사도의 권위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것으로 삼은 이유는 설교자의 권위가 자신의 비참함에서 비롯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정반대로 이는 설교자의 권위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위엄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54)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위엄은 불가분하게 공적 설교와 관련되어 있다.”라고 칼빈은 선언한다.55)
따라서 설교자나 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이러한 영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 교회에서 교사가 되려고 하는 자는 누구나 이러한 인 (seal)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부여하심을 덧입어야 한다.”56)
칼빈은 이렇게 설교자와 교사들에 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논한 후에 일반 평신도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고찰한다. 칼빈은 모든 개인이 해석된 말씀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믿는 개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정도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요한일서 2:27 주석에서 “그는 우리에게 판단력과 분별력을 부여하시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거짓에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칼빈은 설명한다.57)
또한 이 구절의 주석에 있어서 칼빈은 성령께서 우리의 교리 이해에 있어서 확실성을 주신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리에 대하여 유일하게 수정하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신 분은 우리의 마음에 이를 인치시는 성령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58)
1) Inst., 2. 2. 21.
2) Inst., 1. 14. 1.
3) CO 31, 742. 포드 배틀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간의 한계에 맞춰 조정하셨다.” 도날드 맥킴(편),『칼빈 신학의 이해』, 이종태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1), 46에서 재인용.
4) Inst., 1. 6. 1.
5) Inst., 1. 6. 2.
6) Inst., 1. 6. 3.
7) CO 38, 231 (사 15:18 주석).
8) Ibidem.
9) CO 52, 383 (딤후 3:16 주석).
10) CO 55, 219 (벧전 1:12 주석).
11) CO 47, 161 (요 6:65 주석).
12) Inst., 3. 2. 34.
13) Inst., 1. 7. 2.
14) Inst., 1. 7. 1.
15) Inst., 1. 7. 3.
16) Inst., 1. 7. 4.
17) Ibidem.
18) Ibidem.
19) Ibidem.
20) Inst., 1. 7. 5.
21) Ibidem. 같은 곳에서 칼빈은 이를 또한 ‘성령의 조명’ (illumination)이라고 밝힌다. 성령의 증거와 조명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더욱 자세히 다룬 글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이신열,『칼빈신학의 풍경』(서울: 도서출판 대서, 2011), 15-36.
22) Inst., 1. 7. 5.
23) Ibidem.
24) CO 52, 383 (딤후 3:16 주석).
25) Inst., 4. 8. 9.
26) Inst., 1. 13. 7.
27) CO 55, 217 (벧전 1:11 주석). 도날드 맥킴, “칼빈의 성경관”, 맥킴 (편),『칼빈 신학의 이해』, 78, 각주 55에서 재인용.
28) 많은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의 영감설을 기계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한다. A. D. R. Polman, "Calvin on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in Jacob T. Hoogstra (ed.), John Calvin: Contemporary Prophet (Grand Rapids: Baker, 1959), 101; Philip Edgcumbe Hughes,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in the English Reformers Illuminated by John Calvi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3 (1960-61): 144; John T. McNeill, "The Significance of the Word of God for Calvin," Church History 28 (1959): 140;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Edinburgh: Olive and Boyd, 1953), 108. 이를 기계적 영감설로 이해하는 연구가들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6), 64; A. Mitchell Hunter, The Teaching of John Calvin (Glasgow: Maclehose, Jackson, 1920), 68ff; John Murray,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 (Grand Rapids: Baker, 1978, reprint ed.), 제 1장; Kenneth S. Kantzer, "Calvin and the Holy Scriptures," in J. F. Walvoord (ed.), Inspiration and Interpret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57), 140-41.
29) CO 55, 458 (벧후 1:21 주석).
30) Inst., 1. 7. 5.
31) CO 32, 270.
32) CO 37, 276: “ ... atque exteriori praedicationi verbi coniunxit interiorem spiritus efficaciam.”
33) CO 32, 24: “... sed mox addit propheta sapientiam hanc, quam Deus nobis intus inspirat, simul in lege proponi et patefieri.”
34) Inst., 4. 8. 13.
35) CO 49, 231 (롬 11:34 주석): “Iam si praeeuntem spiritum sequi oportet: ubi ille nos destituit, illic resistendum est et veluti figendus gradus.”
36) Inst., 3. 2. 34.
37) CO 38, 674 (렘 31:19 주석): “Summa est, non ante fuisse tactum vero timore Dei, quam praeditus fuit sana mente ... ”
38) CO 38, 463 (렘 24:7 주석).
39) CO 47, 161 (요 6:65 주석): “ ... quia ad fidem sua perspicacia nemo hominum perveniat: omnes enim caecos esse, donec a spiritu Dei illuminentur, ... ”
40) CO 47, 390 (요 17:26 주석): “... sed ad patrem manifestandum arcana spiritus revelatione, ... Intelligit ergo se efficaciter docuisse apostolos.”
41) CO 47, 149 (요 6:45 주석): “Docendi ratio de qua loquitur propheta non in externa tantum voce sita est, sed in arcana etiam spiritus sancti operatione. In summa, hoc Dei magisterium est interior cordis illuminatio.”
42) CO 52, 175 (살전 5:19 주석).
43) CO 49, 344 (고전 2:14 주석).
44) CO 48, 400-401 (행 17:11 주석): “Scriptura enim vere lydius est lapis, ad quem examinandae sunt omnes doctrinae. Si quis excipiat, hoc genus examinis fore ambiguum, quum saepe obscura sit scriptura et in varios sensus flectatur: dico simul adhibendum esse iudicium spiritus, qui non abs re vocatur spiritus discretionis. Caeterum duce ac directore spiritu, non aliunde quam ex scripturis iudicium facient fideles de qualibet doctrina.”
45) CO 48, 192 (행 8:31 주석).
46) Ibidem.
47) Inst., 4. 3. 1.
48) Inst., 4. 1. 10.
49) Inst., 4. 1. 3.
50) Inst., 4. 1. 5.
51) Inst., 4. 1. 6.
52) CO 47, 347 (요 15:16 주석): “Interea quo quisque ad altiorem honoris gradum evectus est, meminerit se magis Domino esse devinctum.”
53) CO 50, 48 (고후 4:1 주석): “Ideo ne se ipsum nimis extollere videatur, praefatur, non sua industria se, non suis meritis ad tantum honoris fastigium conscendisse: sed provectum sola Dei misericordia. Plus autem fuit misericordiam Dei quam gratiam apostolatus sui causam facere.”
54) T. H. L. 파커, 『하나님의 대언자』, 황영철 역 (서울: 익투스, 2006), 76.
55) CO 37, 622 (렘 5:13 주석).
56) CO 43, 329 (미 3:8 주석).
57) CO 55, 328.
58) CO 55, 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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