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지 벗기기
추석을 걸판지게 지낸 흔적이 지낸 흔적이 곳곳에 넘쳐납니다.
좋기로는 타관살이 오랜만에 이룬 출세와 성공들을 싣고 고향에 들른 중늙은이들의 득의만만한 표정입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여적도 서광이 남은 듯합니다.
그 잘난 자식들을 바라보는 어버이들의 주름살도 앞으로 몇 날은 더 보름달 같이 훤할 겁니다.
이면들도 있습니다.
마흔 여섯 추석날 아침에 세상을 버린 남동생이 서러워 추석마다 눈물짓는 여인의 올려 뜨지 못하는 눈매가 안타깝습니다.
추석이 여름을 가져가면서 슬며시 가슴에 풀어 놓은 냉기를 마땅히 건사할 곳 없는 이들의 서성거리는 발걸음도 눈에 듭니다.
돈 모자라는 거야 하도 여러 해를 지나다 보니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꼴불견으로 남는 것들도 있군요.
추석을 지내느라 서로 나눠 가진 선물 보따리들로 추석을 지내고 나서 집집마다 넘쳐나는 그 선물의 포장지들입니다.
과일, 과자, 통조림, 여러 종류의 음료수, 식용 기름, 육류, 생선, 비누, 치약 세트, 가전제품 등속의 포장지들이 수북이 쌓여 곳곳에서 명절 뒤풀이입니다.
이것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면 모두가 과대포장의 산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엌에 환풍기를 다시 달았습니다.
창틀에 다는 것이니 환풍기 달고 남은 자리를 메워야 합니다.
마땅한 자재를 찾다가 과일상자를 쓰기로 했습니다.
두툼한 골판지에다 기가 막힌 색감으로 사진을 인쇄한 겁니다.
견고하기도 하지만 그 그림이 예뻐서 안성맞춤입니다.
과일상자만이 아니라 모든 포장지들이 한 번 쓰고 버리기는 아깝게 화려하고 비싸게 만들어졌습니다.
낱 과일을 예쁜 띠로 감고 금색 상표를 붙였습니다.
그걸 얇은 스티로폼 좌대에 담아 박스에 넣습니다.
박스는 종이로 만든 건데 두껍고 튼튼한데다 언뜻 보아서는 종이라고 단정 짓지 못할 만큼 화려하지요.
그 위에 다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덮개 한 장을 씌우고 비닐 막을 친 후에 박스 덮개를 덮었습니다.
그 박스를 다시 한 번 포장지고 싼 다음, 부직포로 만든 가방에 담았으니 미상불 속에 든 과일보다 포장지 값이 덜 든다고 단언할 수 없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포장을 잘 하는 이유는 두 가지랍니다.
먼저는 속에 든 물건이 매우 귀중한 것이니 포장에도 정성을 드리는 경우이고 다른 경우는 속에 든 물건이 별 볼일 없으니까 포장이라도 화려하게 해서 상품성을 높이는 경우인데요.
일컬어 과대포장이라 하지요.
명절이 되면 시장에서 고기 한 칼을 뚝 끊어 신문지에 둘둘 말아 목사님 댁으로 가져가시던 어머니의 선물도 결코 정성 모자라는 것은 아니었지요.
마을에 잔치가 열리면 집에서 낳은 달걀 한 꾸러미를 짚으로 예쁘게 묶어 들고 가셔도 정성스러웠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속까지 정성이었으니까요.
‘초록이 지쳐 단풍’으로 드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은 또 온 세상을 따듯한 빛깔로 포장하고 계십니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눈이라도 시원하라고 천지를 푸르게만 포장하시던 하나님의 마음은 여름내 속까지 푸르셨습니다.
서늘한 가을을 실어 오시니 사람들의 서늘한 가슴에 오색빛깔 온기를 들이시느라 세상을 또 그렇게 따순 빛으로 포장하시는 것이지요.
김제 만경 너른 들에서 익어가는 곡식들은 지으신 하나님을 닮아 반드시 속까지 누렇습니다.
손 높이에 벌겋게 달린 대추 한 알을 입에 넣어 보세요.
따듯한 단맛이 속까지 스몄습니다.
대추 한 알이 익어가는 색깔은 당최 포장이 아닙니다.
잘 익어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들이니까요.
호박도 속에까지 구수한 단 맛이 찬 다음에야 누렇게 포장 됩니다.
밤도 그 고소한 맛이 충분히 밴 다음에야 밤송이를 열고 진한 ‘밤색’ 알밤을 배시시 내 미는 거구요.
포도, 사과, 배, 감 모든 과일들이 저마다 제 맛을 충분히 들인 다음에야 제 각각의 익은 색으로 포장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솜씨이기 때문입니다.
성급한 마음으로 노랗게 익은 걸 찾아보지만 그 알싸한 향기는 한 뼘 더 가을볕을 받아야 만들어 지는 것이어서 탱자는 아직도 탱글탱글 푸르기만 합니다.
9월이 다가도록 도도하게 푸르기만 한 탱자는 하나님의 진실입니다.
미리 익은 색깔을 갖추고 나무 아래 떨어진 것들요?.
그건 스스로 만들어가진 병든 포장일 뿐입니다. 속내는 전혀 볼 것이 없어요.
익은 것이 아니라 썩어가는 변절입니다.
우리 속에 든 신앙은 잘 영글었는지요.
그걸 포장하는 것은 언어입니다.
속에 든 신앙이 값비싼 것이어서 언어도 값비싸게 골라다 쓰는 경우라면 성숙한 신앙이니 참 좋습니다.
반대로 속에 든 것이 빈약하니 포장이라도 잘 해야 할 입장이어서 현란한 언어들을 가져다 싸발림을 했다면 과대포장이겠지요.
그 포장지들을 모두 벗겨 내고 진솔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성숙을 책임지는 성도들의 기쁨입니다.
첫댓글 껍떼기가 아닌 알맹이^^^사랑의 열매 . 승리의 열매. 영광의 열매를 10월에 많이들 맺히고 거두세요
그렁게 말입니다. 목사로 이름 걸고 사는 한 평생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외화내빈"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늘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알맹이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성숙 자꾸 이 모습이 부끄럽지 않나 늘 생각하지요 저도 역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