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이네를 보내는 마음
오늘 오후 늦게 땅거미가 깔릴 무렵 남태제씨가 찾아왔습니다.
반갑게 맞아들이니 손에 두 장의 CD가 들려있었습니다.
#1 김애마을 기록영상 1<김애마을의 일상>
#2 김애마을 기록영상 2 <도농교류>,<마을회관이야기>
이환의 선배님께
p.s : 컴퓨터로 보세요~
<남태제 드림>
<농가소득 2400만원의 의미>에서도 이 후배의 영농이야기를 다뤘지만
우리 마을로 안내하여 2년반 가까이 살다가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는
심정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본래 제가 이별을 잘 하는 편인데 석주네도 그렇고 아름이네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모두들 ‘잘 되는 꼴을 보고 싶은데…. 농촌에 내려와서
몸고생, 마음고생 많이 하고 수업료도 적잖이 치루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상담을 하거나 매뉴얼을 쓸 때는 이런 부분을 감안하여 좀 더 정교하게
안내하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맡겨두었던 예취기를 찾아가면서 ‘형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그간은 마음쓰지 말라고 했는데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떠나는 이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홍성을 떠나지만 종종 들를 일이 있답니다.
창구형님과 연진이 집짓는 과정을 촬영하기로 했답니다. 아직 미진한 우리
동네이야기도 좀 더 찍고….
지난 3년간 어려움도 많았지만 시골살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 생생한
농촌의 이야기와 풍경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하니 후배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줘야겠습니다. 어디가서든 열심히, 잘 살라고 말입니다.
남태제씨 부부
나,이장님,남태제씨와 함께 우리집 화단에서 한 컷
남태제씨 부부
나와 남태제씨
아내와 신나영씨
남태제씨 큰 아이 운형이
남태제씨 가족,아내가 무얼 갖다주고 있네요.
*이제는 홍동귀농사에 추억이 될 아름이네 이야기
<남태제씨가 귀농운동본부 게시판에 올린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44기 남태제입니다.
수료하고 그 다음주 월요일에 홍성군 홍동면 금평리 김애마을로
온 가족이 이사를 왔습니다.
정말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네요.
며칠 전에 근황을 올리라는 회장님의 문자를 받고서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싶었습니다.
운좋게 좋은 농가주택을 전세로 얻게 되어서 집수리 크게 안 하고 큰 불편없이 살고 있습니다. 윗집이 이장님 댁이고요, 그 옆집이 귀농지원센터 이환의 오미정씨 댁입니다.
이장님과 이환의 오미정 양 선배님들이 이사오기 전부터 이것저것 챙겨주고 도와주셔서
편안하게 마을 생활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이사온 다음주 화요일에는 집들이를 마을회관에서 했는데, 마을 30가구 주민들이 거의
다 오셨고홍성에 살고 있는 귀농 선배들도 한 서른 다섯 분 오셔서 정말 거하게 인사를
차렸습니다. 음식 장만하는데 마을 부녀회 회원들께서 갖은 고생을 함께 해주셨고요.
얼마전에는 이장님의 주선으로 밭 300평을 빌려서 거름을 펴고 로터리를 치고 고추와 토마토를 심었습니다. 심을 씨앗들과 모종들을 사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하면서 그럭저럭 텃밭농사를 준비하고 있고요
풀무학교에서 분양하는 병아리 10마리를 분양받아서 열심히 기르고 있습니다.
삽살개 복실이도 이사오면서 한 식구가 됐고요...
안하던 육체노동을 하느라 온 몸이 성한데가 없고, 마을 어르신들이 이래저래
농사일에 잔소리도 많이 하시지만, 그래도 일단은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곱살 네살 두 아이들은 갓골 어린이집에 잘 다니고 있고요
막내 갓난아이는 엄마에게 안겨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에 접속 중인 이곳은 저희 집 문간방인데요
제 작업실(다큐멘터리 제작소?)로 활용하면서 사랑방으로도 쓰려고 정리중입니다.
정신 없는 나날들이지만, 농촌으로 내려오면서 제가 구상했던 삶을 위해
착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려 합니다.
조만간에 사진을 찍어서 올려놓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동기님들을 초대할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 제가 쓴 아름이네 이야기
귀농, 그 뿌리내림의 진통
마당가 작은 화단의 목련이 크고 하얀 꽃망울을 피워낼 무렵 우리 마을에 한 도시인 가족이 둥지를 틀었다. 우리 소개로 사십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갓난애와 일곱 살, 다섯 살 아이들을 데리고 언덕 아래 정자나무집에 이사를 온 것이다. 전직 다큐멘터리 PD였던 남편보다 아내가 더 시골살이에 적극적이었던 아름이네가 농촌에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은 이웃 주민이나 귀농 선배인 우리 부부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아름이네의 농사채는 밭 삼백평이 전부다. 집에 딸린 논과 밭이 꽤 있지만 연말까지는 도시에서 하던 일을 그만둘 수 없어 그중 일부만 짓기로 했다. 하지만 백여일을 조금 넘긴 지금 이들 부부의 농사는 늘 버거워 보인다. 진작에 풀매기와 작물 돌보는 법을 알려주었지만 갓난아이 때문에 아름 아빠 혼자 해야하는 텃밭은 늘 풀이 무성하다. 이따금 언덕아래로 고개를 돌려보면 밭 어딘가에 호미를 든 아름 아빠가 엎드려 있지만 주민들의 평가는 이곳 말로 ‘개갈 안나는’ 편이다.
농촌에서 부산한 봄 한 철을 보낸 이들 부부는 얼마전에 큰 싸움을 했다. 첫농사로 지은 감자를 보관하는 문제로 다툼이 생겨 급기야 서울의 장모님까지 내려오셨다. 아름이네 엄마는 얼마 안되는 감자를 제대로 갈무리 하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아름 아빠는 풀매느라 지친 자신을 채근하는 아내가 야속했단다. 뒷날 저녁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터져나온 이들 부부의 첫마디는 “농사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주말농장을 경험했지만 삼백여평 텃밭의 풀을 감당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논밭을 합해 그집의 스무배가 넘는 우리집은 어떨까? 나름대로 십년 노하우가 있다지만 봄부터 찬바람이 이는 처서까지는 말그대로 풀과의 전쟁이다. 더욱이 올해처럼 찜통더위가 일찍 찾아온 해는 농부들, 특히 우리네 유기 농가는 죽을 맛이다. 될 수 있으면 한낮의 뙤약볕을 피하려 하지만 일이 밀렸을 때는 도리가 없다. 어떤 날은 땀에 절은 작업복을 세 번이나 갈아입기도 한다.
며칠전 일찍 찾아온 무더위를 탓하며 논속에 엎드려 풀을 매다가 문득 ‘어떤 이들은 유기농산물이 비싸다 하는데 이런 수고를 알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속에 잠겼다. 아마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때로 몸이 지쳐올 때면 도시인이 되어 누군가가 땀흘려 가꾼 농산물을 편안히(?) 받아먹는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정작 그런 날이 오면 그땐 또 다른 생각을 하겠지…. 이런 때에는 곧 기쁜 맘으로 농사를 지어야 그 논에서 나오는 쌀이 기쁨쌀이 된다는 이웃 마을 농부의 충고를 떠올리며 부질없는 상상을 하늘로 날린다.
보도에 의하면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기고픈 도시인이 67%라고 한다. 하지만 그중 얼마가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아름이 엄마 아빠가 고백한 것처럼 농촌에서 삶을 꾸려가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귀촌이 아닌 귀농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농사는 패기만만했던 삼십대 초반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녹록치 않을뿐더러 워낙 힘든 일이어서 농업, 농촌에 대한 속깊은 애정없이는 지속하기 어려운 업이다.
해마다 초봄이면 이른바 명문대학 입학을 축하하는 면사무소 사거리 현수막의 글귀가 <OO리 000군 00대 합격!>이 아닌 <경축, 00마을에 농사꾼이 났습니다!>로 바뀌는 꿈을 꾼다. 아울러 어려운 시기에 농촌으로 향한 아름이네 가족의 삶과 꿈이 4월의 목련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그날을 고대해본다.
첫댓글 이번에 내걸 현수막은 이때부터 꿈꿔온 것이네요. 이제 꿈이 현실로 바뀌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