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 교향곡 9번 라단조 "합창" Op. 125
Beethoven /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Cho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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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iana Troyanos(Contralto)
Karl Ridderbusch (Bass)
Jess Thomas (Tenor)
Dame Gwyneth Jones(Soprano)
Karl Bohm (conductor)
Wiener Philharmoniker Orchestra
Konzertvereinigung Wiener Staatsopernchor Choir, Chorus
1.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2. Molto vivacce
3. Adagio molto e cantabile
4. Presto
5. Presto -'O Freunde nicht diese Tone'
베에토벤은 이미 고향에 있던 본 시절부터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이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1793년 1월 26일, 피쉐니히라는 사람이 쉴러의 부인이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환희를, 그것도 한 음절도 놓치지 않고 곡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
1798년의 스케치북에는 이미 이 長詩장시의 일부가 선율과 함께 쓰여져 있었고
1809년의 스케치북에도 우리가 지금 알고있는 9교향곡의 1악장 1주제의
도입 보형이 이미 쓰여져 있었고
1812년의 스케치북에도 시의 첫구절이 선율없이 쓰여져 있고 라단조 교향곡이라는
말이 또한 기입되어 있다.
1815년에는 2악장 스케르쪼의 주제가, 1817년에는 1악장의 일부 악상이,
그리고 1818년 후반의 스케치에는 옛 교회선법에 의한 "주 되시는 신이여, 우리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할렐루야"의 가사를 쓴 합창을 교향곡에 삽입하려는
구상을 보이고 있고 3악장에는 희랍신화에서 따온 가사를 넣으려던 흔적도
남아있다.
1822년부터는 '환희'의 선율이 여러 곳에서 보이기 시작했고 합창 등의선율도
같이 등장하고 있다.
1822년 10월 10일, 런던의 필하모닉 협회에서 작곡 의뢰가 들어온 것을 계기로
베에토벤은 구상 중이던 합창 교향곡을 실현에 옮기기 시작했다.
1824, 1825년 경에 이 작품이 완성 되었으니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 실로 3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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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제1악장은 서주부는 관악기 소리 위로 현악기들이 드문드문 출현하며 마치 오케스트라가 음을 조율하듯 시작하는 도입부분을 지나면, 압도적으로 덮쳐오는 주제가 굉장히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주제 동기의 단편이 4도, 또는 5도로 하강하는데 이것은 막연한 분위기를 지니며 이후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어 힘을 증대시켜 가면서 단편을 모아 모든 악기의 합주로 제1주제가 장대하게 연주된다.
천지가 창조되는 듯한 그 서주부의 묘사 음악을 듣는 순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모나리자 같은 예술작품을 불태우던 프레스턴은 머리를 쥐어 짜며 격정적인 감정을 느끼기에 이른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낭만주의 사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시대의 결과물이다.
낭만주의는 획일화와 전제정치에 반대하고 개인의 해방을 주장한 예술사조였다.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였으며 개성을 존중하였다. 이 때문에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은 프레스턴을 자극하는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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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의 하나였다. 세계인은 철옹성과도 같았던 베를린 장벽에 붕괴에 대하여 갑작스러운 변화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환호하였다. 그러나 붕괴 이전 사회적, 정치적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도모하던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핀연적인 귀결이라 하겠다. 예술인들도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동참하였다.
1989년 9월 18일 동독의 록 뮤지션 백명이 반정부 서명에 동참했다. 이들의 요구사항에는 서독 그룹인 스콜피온즈의 곡을 방송 허용해달라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3일에 이르러서는 서명자가 1500명을 넘어서는 등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간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공연에서 다시 한 번 음악인은 대대적으로 반정부 선언문을 낭독한다. 당국은 관계자를 체포했으나 이를 계기로 곳곳에서 30만여명의 대규모 시위대가 반정부 투쟁에 나선다. 결국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고 세계사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89년 12월 25일 독일 분단의 상징이자 현실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 기념으로 그해 성탄을 맞아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영국의 런던 심포니, 미국의 뉴욕 필하모닉, 소련의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 오케스트라와 패전국 독일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나치 치하에서 해방을 맞은 프랑스의 파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연주한 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었다. 번스타인은 4악장에 붙어 있는 실러의 시인 환희의 송가에서 환희 대신 자유라는 제목을 바꾸어단 설명을 한다. 냉전 체제를 종식을 축하하고 음악을 통해 인간의 화합을 도모한다는 구상을 곡 선택에서 분명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1989년 12월 25일 동베를린 가극장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상징이자 현실이던 베를린의 장벽이 붕괴되고 통일을 앞둔 독일에서 프라이하이트(자유)의 이름으로 하나의 형제가 되자는 호소가 널리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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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거를 10개월 정도 남기고 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춤추는 지휘봉은 허공을 가르고 때로는 지휘대를 마구 발로 밟는 열정적인 몸짓에 따라 오케스트라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낙관의 기대와 무한한 희망이 깔려 있는 번스타인의 연주는 그의 보편주의적인 해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토스카니니가 어떻게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가를 가장 고민했고, 스토코프스키가 음악이 어떻게 들리는가를 고민했다면 번스타인은 음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 ‘왜 그런 음악이어야 하는지’를 가장 고민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의 오락성과 진지함을 모두 잘 살려낸 지휘자였다. 작곡가의 내면을 투영해 낼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을 소유한 세밀한 스캐너와도 같은 번스타인은 특히 낭만주의 음악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번스타인에 있어 음표는 악보 위에 그려진 가시적 표시 이상의 함의를 띄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해석의 폭넓음에 국한하지 않고 연주 당시의 현장감에도 주목하여 청중과의 소통성을 높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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