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관련 음악 두 곡 : 가곡 두 명의 척탄병과 오페레타 파가니니 >
두 명의 척탄병(Die Beiden Grenadiere)은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작시, 로베르트 슈만 Robert Schumann 작곡으로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황제를 기리는 노래이다.
오페레타 파가니니(Paganini)는 프란츠 레하르 Franz Lehár 작곡으로 당시 나폴레옹 여동생 엘리자(당시 이탈리아 루카와 토스카나의 통치자)와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의 연애 얘기를 담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결국 나폴레옹 황제에 의존하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유럽을 프랑스 제국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제도화하고 프랑스 국가를 통합하고 프랑스인들에게 영광을 선사해 주었으며, 전 유럽에 특권 폐지와 자유의 정신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전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희생을 요구하였다.
역사적 배경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프랑스 국민공회 테르미도르 파는 총재 정부를 수립하고 공화제를 유지였지만, 더 이상 혁명의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프랑스 공화국은 길을 잃고 모든 계층이 불행해졌다. 혼돈의 순간 왕당파의 공격을 제압한 나폴레옹이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는 총재정부의 야비함과 부패로부터 자유로웠고, 특권 폐지의 혁명을 지지하면서, 대립적 당파를 초월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 프랑스의 영광을 실증할 능력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군을 이끌고 풍요로운 이탈리아에 출정하여 오스트리아와 겨루었다. 나폴레옹은 한 달 만에 빈약한 급식에 누더기를 걸친 군인들을 자부심이 충만한 최고의 군대로 만들었다. 더욱이 이탈리아인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나폴레옹 군대를 환영하였다(앙드레 모루아, 프랑스 사, 신용석 역, 김영사 제1판 3쇄, 2016, 475쪽 491쪽).
나폴레옹은 1799년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새로운 리더십을 수립하였다(소위 ‘브뤼메르의 쿠데타’, Coup d'État du 18 Brumaire, 이 쿠데타에 동생 루시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1통령 나폴레옹 헌법은 국민투표의 승인을 받았다. 이제 프랑스 공화국은 ‘위로부터의 권위와 아래로부터의 신뢰’라는 새로운 헌정 원리에 의해 움직였다. 나폴레옹은 곧 황제가 될 것이었으며, 프랑스 국민들에게 조국의 영광으로 보답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벨기에를 병합하고 라인강을 자연 국경으로 하는 프랑스인들의 오랜 염원을 성취했다.
나폴레옹은 또한 프랑스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나폴레옹은 혁명가들에게 증오감을 버리라고 주문하였다. 가톨릭 신도들에게 평화와 신앙을 보장토록 하였다. 혁명기 핍박당하고 추방되었던 이들에게는 복수심을 버릴 것을 주문하였다. 교회는 다시 열리고 망명자 명부는 사라질 것이라고 보장하였다(앙드레 모루아, 프랑스 사, 신용석 역, 김영사 제1판 3쇄, 2016, 502쪽). 교황과 정교협약을 맺어 가톨릭을 국민 대다수의 종교로 복원하였다. 그리고 교황을 임석케 하고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프랑스는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바뀌었다(프랑스 제1제정).
나폴레옹 황제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였다. 혁명은 귀족제를 폐지하였지만, 나폴레옹은 모든 용기있는 이들이 귀족이 될 수 있게 하였다(조르주 보르도노브, 나폴레옹 평전, 나은주 역, 열대림, 초판 2쇄 2009, 316쪽). 나폴레옹은 프랑스 민법전(Code Civile; 공식 명칭은 나폴레옹 법전)을 제정하여 봉건적 특권을 없앤 자리에 만민평등과 능력주의를 심었다.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은 유럽을 휩쓸었고, 프랑스 민법전과 혁명의 정신은 유럽 자유의 정신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가 병합한 라인강 좌안은 물론이고 이후 나폴레옹이 지배하게 되는 독일의 라인 연방에서도 신분제가 타파되었다. 유대인들도 직업 선택의 자유를 향유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나폴레옹은 메시아와 같았다. 라인강변 뒤셀도르프 Düsseldorf에서 태어난 독일의 문호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도 나폴레옹의 해방공간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유대인 하이네에게 파리는 ‘새로운 예루살렘’이었으며, 라인강은 자유과 해방을 위한 요단강이었다(윌리엄 카, 독일근대사, 이민호/강철구 역, 탐구당, 1996, 34쪽). 하이네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러나 영국은 패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영국 정벌 계획은 현실성이 없었다. 나폴레옹의 육군은 무적이었지만, 영국의 해군 또한 무적이었다. 나폴레옹은 대신 대륙 봉쇄, 즉 전 유럽을 프랑스 패권 하에 두고자 하였다. 나폴레옹 일가를 권자에 앉혀 단속과 충성을 기대하였다. 형 조제프 Joseph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의 왕으로 앉혔다가 이후 스페인의 왕으로 격상시켰다. 동생 루이 Louis는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 막내 동생 제롬 Jérôme도 독일 베스트팔렌 Westfalen 공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첫째 여동생 엘리자 Elisa는 이탈리아 북부 루카와 피옴비노 Lucca and Piombino의 대공 그리고 이어서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 Toscana의 대공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엘리자를 ‘여군주’로 높게 평가했다. 엘리자 Elisa는 음악가 파가니니 Paganini를 그녀의 궁정에 고용하였다. 둘째 여동생 폴린 Pauline은 이탈리아 도시국가 구아스탈라 Guastalla의 대공이 된다. 셋째 여동생 카롤린 Caroline은 오빠 조제프에 이어 나폴리 왕국의 왕비가 된다. 바로 아래 동생인 루시앙 Lucien은 나폴레옹 제국에 가담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루시앙이 형 나폴레옹이 제1통령 집권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등 가장 유능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길을 갔다(이상은 조르주 보르도노브, 앞의 책, 나폴레옹 평전, 347-352쪽).
유럽은 넓었고 나폴레옹 일가는 무능하거나 무책임하였다. 스페인에서 최초의 좌절을 겪었고, 교황청도 대륙봉쇄에 반기를 들었다. 오스트리아도 다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와 재혼하였으나 유럽의 연대는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가 문제였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스페인의 빨치산 전법을 보면서 나폴레옹에 대한 해법을 깨달았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무모한 출정이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진할수록, 전쟁에서는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겨울의 혹한 속에서 부상병들을 이끌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스웨덴 등이 대군을 형성해서 총반격에 나섰고, 나폴레옹의 군대는 마침내 무너졌고 유럽의 나폴레옹 제국도 해체된다.
2. 노래 설명
(1) 두 명의 척탄병(Die Beiden Grenadiere)
* 이 게시판에 이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cafe.daum.net/epistle/IfQN/12?svc=cafeapi
이 노래는 하인리히 하이네 작시, 로베르트 슈만 작곡이다. 척탄병 Grenadiere이란 가장 용감한 정예 군인들을 말한다.
하이네의 초창기 시로 알려져 있으며 하이네의 유명한 <노래의 책 Buch der Lieder>의 제1부 젊음의 고통 Junge Leiden 편에 실려 있다. 창작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하이네가 청년 시절 고향 뒤셀도르프에서 러시아 원정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가는 프랑스 군인들을 떠올리며 1822년에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다(엄현지, 슈만의 가곡집 <로만체와 발라드 II, Op. 49> 분석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21, 26쪽).
슈만의 가곡집 <로만체와 발라드 2 Romanzen und Balladen II>(작품번호 49)에 실려 있으며 1840년 작곡으로 알려져 있다. 슈만은 음악가이면서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독일의 자유와 정신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주의 혼란에는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프랑스 1830년 7월 혁명에는 동조적이었다고 한다(이정환, “낭만주의 시대 ‘전형적 낭만주의자’ 의 탈피를 위하여: 비더마이어 음악사의 교육시민계급 음악가 슈만”, 음악이론포럼(연세대학교 음악연구소), 제24권 1호, 2017, 53쪽).
이 노래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돌아가는 프랑스 병사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프랑스 병사의 나폴레옹에 대한 숭배와 헌신이 유려하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슈만은 노래의 후반 절정 부분에는 프랑스 혁명의 노래 ‘라 마르세예즈’의 선율을 차용하였다. 슈만이 하이네의 염원에 공감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래 노래 영상과 가사 번역을 올린다.
<두 명의 척탄병(Die Beiden Grenadiere)>
작사 :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작곡 :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번역 : 정태욱
Nach Frankreich zogen zwei Grenadier’, Die waren in Russland gefangen. Und als sie kamen ins deutsche Quartier, Sie liessen die Köpfe hangen. Da hörten sie beide die traurige Mär: Dass Frankreich verloren gegangen, Besiegt und geschlagen das tapfere Heer— Und der Kaiser, der Kaiser gefangen. Da weinten zusammen die Grenadier’ Wohl ob der kläglichen Kunde. Der eine sprach: „Wie weh wird mir, Wie brennt meine alte Wunde!“ Der andre sprach: „Das Lied ist aus, Auch ich möcht mit dir sterben, Doch hab’ ich Weib und Kind zu Haus, Die ohne mich verderben.“ „Was schert mich Weib, was schert mich Kind, Ich trage weit bess’res Verlangen; Lass sie betteln gehn, wenn sie hungrig sind— Mein Kaiser, mein Kaiser gefangen! „Gewähr mir, Bruder, eine Bitt’: Wenn ich jetzt sterben werde, So nimm meine Leiche nach Frankreich mit, Begrab mich in Frankreichs Erde. „Das Ehrenkreuz am roten Band Sollst du aufs Herz mir legen; Die Flinte gib mir in die Hand, Und gürt mir um den Degen. „So will ich liegen und horchen still, Wie eine Schildwach, im Grabe, Bis einst ich höre Kanonengebrüll Und wiehernder Rosse Getrabe. „Dann reitet mein Kaiser wohl über mein Grab, Viel Schwerter klirren und blitzen; Dann steig ich gewaffnet hervor aus dem Grab— Den Kaiser, den Kaiser zu schütz | 두 명의 척탄병이 프랑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포로로 잡혔던 이들이다. 독일 땅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슬픈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패배하였고, 포위되었으며, 용감한 군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황제가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그 비참한 소식에, 척탄병들은 함께 울었다. 한 명이 말했다: “이 얼마나 비통한가, 지난 상처가 다시 살을 에는구나” 다른 병사가 말했다: “우리 노래는 끝이다. 나도 당신과 함께 죽고 싶다. 하지만, 집에 처자식이 있다. 그들을 어찌할꼬” “아내도, 자식도 아무래도 좋다” 더 귀한 것이 있다. 굶주릴 때면, 빌어먹으면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황제, 우리 황제가 잡혀있다! 형제여, 내 부탁을 들어주게: 내가 여기서 죽거든, 내 시신을 프랑스에 가져다 주게, 그리고 프랑스 땅에 묻어주게. 붉은 리본의 명예의 십자가를 나의 가슴에 얹어 주게. 나의 손에는 총을 쥐어주고, 나의 몸에는 칼을 채워주게. 마치 무덤을 지키는 침묵의 보초처럼, 그렇게 고요히 누워 들으리라. 그리하여 대포 소리 천둥처럼 울리고, 힘찬 말발굽 소리 대지가 진동할 때, 황제가 탄 말이 내 무덤 위를 지나고, 수많은 칼들이 서로 부딪히며 번득일 때, 나는 무기를 들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황제를, 황제를 지키리라. |
(2) 오페레타 파가니니 Paganini
프란츠 레하르 Franz Lehár 작곡이며 대본은 파울 크네플러와 벨라 옌바흐 Paul Knepler and Bela Jenbach가 썼다. 1925년 오스트리아 빈 Wien 요한 슈트라우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오페라 파가니니는 젊은 시절 파가니니와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서 보았듯이 나폴레옹은 첫째 여동생 엘리자에게 이탈리아 소 공국 루카 Lucca와 피옴비노 Piombino의 지배를 맡겼고, 엘리자는 그 지역의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를 궁정 연주자로 고용하였다. 또한 엘리자의 남편은 바이올린에 취미가 있어 파가니니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나폴레옹은 엘리자를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 공국의 대공직도 맡기었다. 나폴레옹의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엘리자는 루카와 토스카나 지배 10년 동안 통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파가니니는 엘리자의 남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엘리자와 연인관계를 맺었다. 루카와 토스카나의 통치권은 엘리자에게 있었으며, 엘리자와 남편은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다.
오페레타 각본은 파가니니와 엘리자의 첫 만남에서 시작하여 엘리자와 파가니니가 연인관계로 이어지다가 결국 파가니니가 프리랜서로 독립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전체 흐름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오페레타에서 파가니니는 엘리자와 연인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엘리자 남편의 정부(情婦)와도 연애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엘리자의 오빠 황제 나폴레옹이 파가니니와의 관계를 청산할 것을 요구한다. 결말에서 파가니니는 엘리자도 또 다른 여인과도 작별하고 떠날 결심을 한다. 어떤 여인도 자기를 소유할 수 없고, 자신의 재능은 모든 이들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실제 파가니니는 엘리자 남편의 정부와 연애를 한 것이 아니라 엘리자의 동생 폴린과 연애를 하였다. 나폴레옹의 둘째 여동생 폴린은 자유분방한 여인으로 유럽 사교계의 총아였다.
아래는 오페레타 제2막의 엘리자의 아리아 “사랑이여, 지상에서의 천국 Liebe, du Himmel auf Erden”을 소개한다. 엘리자가 자신으로부터 마음이 떠나는 파가니니에게 사랑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오빠 나폴레옹 황제의 요구에도 자신은 사랑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보여준다.
<사랑이여, 지상에서의 천국 Liebe, du Himmel auf Erden>
오페레타 파가니니 제2막 엘리자의 아리아, 번역 정태욱
Ich kann es nicht fassen, nicht glauben, daß grausam mein Traum ist zerstört, man will dem Geliebten mir rauben, dem ganz mein Herz gehört! Das Glück will ich halten, das lauenhaft, das Schicksal gestalten mit eig´ner Kraft, und stünd´ ich auch gegen die Welt allein, er sei mein, er sei mein! Liebe, du Himmel auf Erden, ewig besteh´! Liebe, du Traum aller Träume, niemals vergeh´! Du sollst mich umschweben holdselig im Leben, nur du gibst unserm Sein Inhalt allein! Liebe, du Himmel auf Erden, ewig besteh´! Liebe, du Traum aller Träume, niemals vergeh´! Du schenkst alle Freuden, du heilst alle Leiden, dein, dein ist die Macht über jedes Herz! | 나는 믿을 수 없어요. 내 꿈이 잔인하게 파괴되는 것을. 사람들은 내 사랑, 내 온 마음이 속한 사랑을 강탈해 가려고 합니다. 나는 내 행복, 아무리 변덕스러워도 그것을 지키겠소. 내 운명 조금의 힘으로라도 만들어 가겠소. 나는 세상에 홀로 맞설지라도 그대여 내 사람이 되어 주오. 내 사람이 되어 주오. 사랑이여, 지상에서의 천국이여, 영원히 이어지길! 사랑이여, 모든 꿈들의 꿈 영원히 사라지지 말지어다! 사랑이여, 언제나 내 생에 내 곁에, 사랑만이 우리 존재에 의미를 줄 수 있소. 사랑이여, 지상에서의 천국이여, 영원히 이어지길! 사랑이여, 모든 꿈들의 꿈 영원히 사라지지 말지어다. 사랑은 모든 기쁨을 주고 사랑은 모든 고통을 치유하고 사랑은 모든 가슴을 지배하는 힘이어라. |
3. 이후의 전개과정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나폴레옹은 유럽 연합군에 패배하고 실각한다.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엘베 섬으로 유배당한다. 나폴레옹은 곧 국민적 여망을 등에 업고 엘베섬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환한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군에 종국적으로 패배한다. 나폴레옹은 아프리카 동쪽 대서양의 고도(孤島)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생을 마감한다.
프랑스에서는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가 군주제를 회복한다. 루이 18세의 후계자 샤를 10세는 다시 절대왕정을 도모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자유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1830년 7월혁명으로 입헌주의가 확립된다. 또 1848년에는 2월 혁명이 일어나 군주제를 폐지하고 다시 공화정(제2공화국)을 수립한다. 하지만, 공화정의 토대는 여전히 빈약하였고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조카(동생 루이 나폴레옹의 아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곧 이어 다시 황제로 등극한다(프랑스 제2제정, 나폴레옹 3세).
프랑스 제2제정은 1870년까지 지속되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종식되고, 프랑스는 다시 공화국(제3공화국)으로 이행한다. 이후 프랑스는 제2차 대전 이후 제4공화국에 이어 현재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공화제가 지속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에 발발하여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왕정이 복고된 1814년 끝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후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을 거쳐 1871년 제3공화국 수립까지 100년 가까이 장기지속한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