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기의 생애 2
그렇게 하여 박철희와 송덕기의 인연이 시작되었으며, 송덕기를 경무대에 있던 경호원들의 도장인‘상무관’으로 자주 초청하여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경호원들이 택견의 술기를 지도 받기도 하였다.
1960년에는 ‘제 17회 로마올림픽’때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하나로 전통무예인 ‘택견’을 채택하기도 하여 문교부 체육과의 요청으로 택견동작을 송덕기와 박철희가 경복궁에서 사진촬영을 하였다. 이때 찍은 사진들이 송덕기가 남긴 사진들 중 가장 오래된 택견 하는 모습이다.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 둔 후에도 개인적으로 택견을 좋아하여 송덕기와 함께‘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 당시 막강한 힘을 지녔던‘수박도협회’의 방해공작(박철희 증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박철희는 미국으로 건너가 인연이 끊어졌지만, 박철희의 조교로 있던 김병수는 1958년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창설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블랙벨트(Black Belt)’의 한국기자를 하면서, 1964년에 ‘블랙벨트(Black Belt)’ 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라는 미국의 유명한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도 있는데, 공식적으로 처음 택견이 외국에 소개된 기사라 할 수 있다.
1972년도에는 태권도계의 사범 임창수가 송덕기에게 2달여 정도 본격적으로 택견을 지도받기도 하였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는‘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게 되면서 태권도계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택견을 배워 태권도와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택견을 제대로 배우는 사람은 없었으며 실질적인 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스쳐가는 인연이 되었다.
그 외에도 어떤 단체나 언론 등에서 송덕기를 전통무예의 고수 내지는 우리문화의 산증인으로 소개했고, 1981년에는‘제 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 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슬하에 자녀도 없고 송덕기를 모시는 제자들도 없어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손재주가 좋아 연을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복덕방 일을 하기도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렸다. 1979년에는 서로 의지하며 노년기를 보냈던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더욱 외롭고 쓸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70년부터 신한승은 전통무예인 택견을 바로 세워보고자 충청북도 충주에서 찾아와 택견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다. 신한승은 택견이 살길은 택견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받게 하기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전통무예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문화재관리국 조차 택견의 가치를 모르고 다른 무술 체계의 많은 양의 자료를 요구하였다. 신한승은 전국각지를 돌며 자료를 수집하면서 택견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요구하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송덕기는 그러한 신한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신한승은 굳은 신념과 의지로 문화재관리국이 요구하는 체계를 만들어 보고서를 작성하여 결국에‘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받게 한다. 비로서 택견이 일백년만에 세상의 밝은 빛을 보게 되는 쾌거를 이룬 셈이다. 그러나 택견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한편으로는 택견을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택견의 변형을 초래하게 되면서 송덕기 택견의 원형을 크게 훼손하게 되었다.
이후 송덕기는 1983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 76호 인간문화재’지정되었고 그것을 기념하기 어린 제자들과 함께‘택견보존회’라는 조그마한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현재 사)결련택견협회의 모체라 할 수 있다. 1984년도에는 택견을 좀 더 본격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박민태권도장’을 새벽에, 후에는 저녁시간에 임대하여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이후 맏형격인 도기현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체계적으로 조직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 모임이 위축되었지만, 1986년 서울 신촌로타리 부근에 막내격인‘최유근’이‘택견보존회’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송덕기 택견의 맥을 잇는 택견전수관을 개관하였다. 송덕기는 몹시 기뻐하며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셔서 제자들을 돌봐주시며 택견의 맥을 이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어린 최유근이 체육관을 운영하기에는 힘에 부쳐 1년이 못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면서 제자들도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1987년쯤에는 거의 지도할 제자들도 없고 활도 놓고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을 만나면서 지내다가 감기 몸살로 입원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1987년 7월 22일 홀로 쓸쓸하게 세상과의 인연을 끝마치게 되었다.
송덕기는 일반인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다 가셨지만, 우리민족의 상무정신이 깃든 온전한 전통무예 택견을 후손들에게 이어주었기에 그 하나로만도 소중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2018년 7월 22일 송덕기 스승님을 추모하며...>
첫댓글 택견을 배우면서 좋은 자리에 참여할수있어 감사했으며 우리의 전통을 더많이 알리고 더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택견이 우리의 문화제로 더많은 자리매김을 할수있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함께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친구분의 멋진 공연도 추모제를 빛내게 해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