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장 기독교인의 자유
19장에서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첫째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다. 이 자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칭의)를 얻는다. 이 칭의가 양심의 자유의 근거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를 믿음으로 마음에 평안을 누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발적, 기꺼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또한 모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의식적 율법에서의 자유만이 아니다. 또한 이 자유는 방종이나 악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약한 형제를 고려하여 자유를 쓰지 않은 자유가 있다. 율법은 교육적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율법을 통하여 착한 양심을 실천한다.
1. 복음의 가르침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 제목에 대한 설명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이것을 모르고는 양심은 거의 아무 일도 확신 있게 행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일에 머뭇거리고 위축되며 항상 불안과 동요를 느낀다. 자유는 특히 칭의에 따르는 것이 그 칭의의 힘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어떤 자는 이 자유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복종을 버리고 거리낌없는 방탕 생활에 뛰어든다. 또 어떤 자는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혼란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적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이런 위험 사태의 원인을 일소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를 모두 바르게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교리의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보통 제기되는 어리석은 항의에 대처하는 것이다.
2. 성도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는 데 있어서 율법에 의한 의를 일체 잊어버리고 율법을 뛰어넘어 더욱 전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논의할 때에, 율법을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행위에 대한 생각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받아들이며,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무가치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양심에 확신을 얻고 싶으면 율법을 일체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것은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며 권고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매우 다르므로, 우리는 바르게 또 양심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살전 4 : 7, 엡 1 : 4, 살전 4 : 3 참조). 이 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 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갈 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며 어떤 확신으로 설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양심이 고민할 때에는,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완전성이 전연 미칠 수 없는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로서 제시해야 한다.
3. 의식에서 해방되는 자유 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해석가들이다.
4.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지배하에서는 양심은 항상 전전긍긍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꺼이 순종할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뜻을 곧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서 예를 들겠다.
5. 요약하면, 율법의 멍에를 짊어진 사람들은 주인으로부터 매일 일정한 일을 하도록 명령을 받는 종과 같다. 종들은 명령받은 일을 정확하게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인 앞에 감히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너그럽고 솔직한 대우를 받는 아들들은 불완전하고 흠이 있는 일까지도 아버지 앞에 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일을 완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순종한 행위와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봉사가 아무리 사소하며 졸렬하고 불완전 할 지라도,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6.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7. 단 포도주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양심에 꺼림직해서 맛없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결국 보통 보다 맑고 좋은 물까지도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8. 이런 혼란 가운데서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행하는 사람들은 대담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반대되는 여러 가지 일을 강요에 못 이겨 할 때에, 큰 두려움으로 마음이 압도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에 의해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증거한다(딤전 4 : 4-5). 그런데 내가 말하는 이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와 양선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좋은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셨다는 명확한 신념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이 자유가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따라 아무 양심의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모든 의식이 포함된다. 이런 의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양심은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요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의식들이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 되도록 자신의 주관 하에 두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9.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 자유의 힘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떠는 양심을 진정시키는 데 있다. 이는 신자들의 양심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혹은 우리가 끝내지 못한 일이나, 우리의 육의 허물로 더러워진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해서, 혹은 무해 무익한 것들의 사용 문제에 대해서 불안과 동요와 고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의 정욕대로 악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런 자기의 욕망을 변호하는 구실로 삼는 자들이나, 자유는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약한 형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10. 그들은 자유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새 것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그것을 얻는다는 것과,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사하지 않는 것도 자유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약한 자들을 돌보라고 특별히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므로, 우리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서 이 한도를 지켜야 하겠다.
11. 성경의 분명한 지지가 있고 말의 뜻을 바르게 표현한다는 한도에서 "걸리게(걸림을 준다) 한다"는 것과 "걸린다(걸림을 받는다)"는 것을 보통 구별하는데, 나는 이 구별을 찬성한다. 바리새인들의 걸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다.
12. 우리가 누구를 약한 자로 보며 누구를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냐 하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로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로 조절하며 어느 정도로 걸림의 대가로 치러져야하는 가에 대해서 바울은 교훈과 실천으로 가장 분명한 정의를 내렸다고 나는 본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때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 : 3).
그러나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다(갈 2 : 3). 그가 한 행동은 다르나 목적은 같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를 적당히 제한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 : 23-24).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13. 우리의 자유를 사랑보다 아래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랑 자체는 믿음을 완전히 지키면서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 때에 교황주의자의 미사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있었다면, 바울은 젖을 주기 위해서 희생을 드렸을 것인가? 그랬을 리가 없다. 젖은 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14. 우리가 이미 서술한 자유의 특권을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양심이 이제 한 경지에 도달했다. 즉,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자유롭기를 원하시는 문제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 관례의 올무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권한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큰 은혜를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양심도 그 받은 유익을 빼앗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큰 희생으로 얻어 주신 것을 우리가 경시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가 금이나 은이 아닌 자신의 피로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벧전 1 : 18-19). 바울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사람에게 예속시킨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갈 2 : 21 참조). 갈라디아서의 몇몇 장에서는,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 자유를 확고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희미하게 되며 심지어 말살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우리의 양심이 법과 규칙에19 얽매인다면(갈 5 : 1,4 참조), 양심은 확실히 자유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므로 더 자세하고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규정한 것을 폐지하는 문제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말이 나면, 마치 인간의 모든 복종이 동시에 제거되고 타도되는 듯이, 한편에서는 선동적인 사람들이, 또 한편에서는 중상자들이 즉시 큰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먼저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영적인 통치로서 여기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통치로서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또 시민으로서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배운다. 보통 이 두 방면을 "영적" 및 "세속적"인 관할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적당한 명칭은 아니다.
이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양심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원을 더듬어 정의를 내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과 이해력으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며, 그 사물을 "안다"고 하는 것이 "지식"이란 말의 유래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사람에게 결합된 증인같이,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할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할 때에, 이 감각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양심은 사람이 마음속에 아는 것을 숨기지 못하게 하며, 도리어 그것을 추궁해서 드디어 유죄를 선언하기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이다. "양심은 일 천명의 증인이다"라고 하는 옛 격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16. 그러므로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다(딤전 1 : 5 참조). 후에 같은 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착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딤전 1 : 19) 말함으로써, 바울은 양심과 이해력이 얼마나 다른가를 가르친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활발한 심령과, 경건하며 거룩하게 살려는 진실한 노력을 의미한다. 이따금씩 양심을 사람들에게도 상관시키는 일이 있다. 누가가 전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언명한다(행 24 : 16). 그러나 이것은 선한 양심의 결과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한 말이고, 원래는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 그 자체로는 무해 무익한 일들에 대해서는 다른 고려를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남을 넘어지게 만들 일을 일체 하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양심은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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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라벤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