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영 (1316~1388)
고려말의 장군이자 충신으로 일평생을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싸운 명장이다.
어릴 때부터 얼굴에 위엄이 있고 몸집이 큰 장사였으며, 15세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남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평생의 신조로 삼아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그가 활약한 고려 말기에는 안으로는 간신들이 판을 치고, 밖으로는 왜구와 홍건적이
쳐들어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 때 최영은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안팎의 적들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특히 1376년 홍산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이 때부터 왜구는
최영을 몹시 두려워 하였다. 1365년 승려 신돈의 모함으로 관직을 빼앗긴 적이 있으나,
신돈의 음모가 밝혀진 뒤 복직되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여 북쪽의 루리 땅을 랴오동에 귀속시키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랴오둥 정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성계 등이 4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
회군을 실행하여, 랴오둥 정벌의 꿈은 실패하였다.
이성계의 군대가 개경으로 돌아오자 최영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고려 왕조를 충성으로 지키려 했던 고려의 마지막 명장으로 유명하다.
"덕봉사" 는 강릉시 두산동 반갓마을 입구에 세워 졌으며,
이 영당은 동주최씨 시조의 10세 손이신 고려 충신 최영장군
의 존영을 봉안한 곳이다
장군은 서기 1316년 에 출생하여 "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는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강직하고 청벡하였으며 오직 위국 충심의 높은 뜻으로 일생을 몸 바치셨다.
장군은 서기1361년 10만 홍건적을 격퇴 하고 서기 1376년 에는 침입한 왜군을 점멸한 홍산대첩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또한 지위가 문하 시중과 팔도 도통사에 이르러 출장입상 하신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인물이다
이 영당는 영동지역 후손들이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져 서기 1959년 8월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최영장군 노래
1)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2) 이 겨레 이나라 바로잡고자 3) 요동땅 너는 알라 장군의 뜻을
이르신 어버이 뜻을받들고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시고 위화도 회군의 원한을 품고
한 평생 나래위해 바치셨으니 북으로 오랭케를 무찌르시니 조용히 참형으로 돌아가시니
겨레에 스승이라 최영장군 장하다 그 이름 최영장군 슬프다 붉은무덤 최영장군
14 세기 후반 고려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저 가던 원나라 윗땅 요동땅을 편입시키려 대망을 꿈꾸던 우국충정 최영장군은 이성계일파의 정권창탈
의 희생양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1388녀) 망나니 들의 칼춤속에 마지막 읊은시가 이러하다
# 북소리 두리둥둥 내목숨 앗아간다
충신의 죽는길이 이다지도 어려우냐
천하를 호령하던 토패왕의 기 개세가
황구유아(黃口幼兒)한테 적인줄을 어찌알리#
"이성계" 네이놈 듣거라!
만약 너의 말대로 내가 이나라 역적이라면 내가죽어 내무덤에 풀이 돋아날것이고
내가 역적이 아니라면 내무덤에 풀한포기 나지않으리라
** 최영장군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에 있으며 경기 기념물 제 23호로 지정되어있다
덕봉사 입구의 두산동 "반갓마을" 표지석이다
덕봉사의 표지석인데 어째 오랍드리가 좀 어저분 하여, 기분이 좀 그렇다
덕봉사 입구 표지석과 주변 소나무 가 잘 다듬어 졌다
덕봉사의 안내 표지문. 동주최씨 영동지역 후손들이 세웠다는 글귀가 보인다
사당의 대문과 안내문이 보인다
사당의 담장과 대문의 보습이 단아하고 아담하게 보인다
덕봉사 대문과 담장 그주변의 모습이다
비문과 주변의 전경이다 단풍든 나무가 가을임을 알리고 있다
입구에 있는 비문이다
덕봉사 안채 사당의 전경이다
덕봉사 사당이 맛배 지붕을 한 한옥의 형식이 돋보인다
2009 최영장군 위령 굿’ 행사 개최
![]() |
◇ 최영장군위령굿보존회 회원과 소마니 정해사 만신들이 장군묘로 넋을 모시러 떠나고 있다. |
![]() |
◇ 지정자 만신이 주민들을 위해 액을 쫓고 복을 빌어주는 부정을 치고 있는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