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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방랑기(3)
- 태안반도를 돌며 ( 2000. 7. 15 - 2001. 12. 31 )
본격적인 더위가 막 시작하려던 7월 15일 태안에 도착하였다. 태안은 충남에서 제일 끝 동네 다. 황해를 접하고 있으며 해안선이 요철이 심해 리아스식 해안으로 알려져 있다. 대전에서 따진다면 차령산맥을 넘어야 하므로 3시간 거리다. 누구든 수행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꺼리는 지역이다. 과거에는 중앙 세력에서 밀려난 관리들이 갈 수 있는 지역들 중에 하나다. 흔히 유배지를 거론할 때 태안을 빠트리지 않는다. " 하필이면 내가 왜 이곳까지 와야 하는가 ? " 자책감에 압도되고 있었다.
태안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았다. 교육장의 일성은 " 태안은 울고 왔다, 울고 가는 곳이다 "라고 지역소개를 하였다. 처음에는 유배지 같은 곳이라서 한번 " 울고 " 그리고 살다보면 인심이 풍성하여 떠날 때 아쉬움 때문에 또 한번 " 운다 "는 말이다.
태안중학교는 시내 중앙에 있다. 도시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울창한 플라타나스 숲이 진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본관 앞에는 고목이 된 은행나무와 키가 이층 옥상에 닿는 향나무가 건장하게 학교를 지켜 주는 듯하다. 운동장에는 운동부 선수들이 열심히 야구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씨름연습도 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학교가 도시의 중심에 있어서 크고 작은 행사가 자주 열렸다. 이를테면 " 태안 군민의 날 " 행사 같은 주요 행사가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베드민턴 동호회도 매일 저녁 체육관에 모여 연습을 한다. 방과후에는 갈 데가 없는 고등학생들이 현관 입구에 모여 남녀 랩댄스 연습에 열을 올린다. 게다가 학교가 지름길이어서 교문과 후문이 주요통로가 되고 있다. 사람은 물론 차들까지 학교를 관통하여 지나다녔다.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동네 분들이 늘 나와 앉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식을 만들어 취사를 하기도 한다. 학교가 마치 공원처럼 휴식공간으로 애용되고 있었다.
학교 근처에 방을 정하였다. 골목이 거미줄처럼 많은 마을이었다. 처음에는 골목이 많아 이사온 집을 찾느라 마을을 헤매었다. 골목을 돌다보면 여기저기 기와집들이 눈에 띄었다. 돌담길 혹은 토담길이 있어 옛 향수를 느끼게 하였다. 고개를 들면 해묵은 은행나무를 여럿 거느린 향교가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으로 태안읍사무소가 있고 그 경내에는 이조시대 목애당이라는 관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선비들을 위한 경이정이라는 정자가 마을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유년시절 상동에 살 때, 우리 집도 구래초등학교 뒷골목에 있었다. 학교를 다녀와서 늘 골목에서 친구들과 놀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이웃으로 이준근, 홍재근, 권영식, 이동명, 지윤환, 김동우, 홍석원, 김현동, 김혜선, 신정숙, 정혜옥, 김정숙, 이영숙, 권정숙 등이 생각난다. 별도의 놀이터가 없던 시절 비포장 도로 바닥에서 금을 긋고 놀았다. 사다리 타기, 재기차기, 구슬치기, 줄넘기, 고무줄놀이, 오자미 던지기 등 아이들은 각자 제 좋은 대로 놀이를 했다.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우리들은 사회생활과 공동체생활을 배워 나갔다.
유년의 추억이 담긴 골목길을 태안에 와서 다시 만나고 있다. 방을 정한 마을이 유독 골목이 많아서 좋다.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그리고 마을에는 고색 창연한 고택들이 여기저기 있어 조선말기 역사의 현장에 와 있는 기분이다. 역사를 말하지 않아도 이 동네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조상들의 지혜와 빛난 얼을 배우고 있다.
행정실 직원은 6명이다. 그중 나이가 45세이면서도 아직 가정이 없어 동생 집에 얹혀 사는 친구가 관심을 끈다. 그는 매사에 자신이 없어 보였다. 외형도 나처럼 어딘가 약해 보였다. 힘도 없는 듯 일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허파를 하나 도려내어 숨이 차기 때문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이 괴로운 듯 아침부터 술을 마신 얼굴이다. 식사 후에는 반주로 소주를 주로 마신다. 몸도 약하니까 근무 중에는 자제할 것을 주지시켰지만 그 말은 이틀 밖에 효력이 없었다. 그는 겸허한 사람이라서 자신의 부족을 항상 시인하였다.
실장에 대한 예우로 어머니회장은 난 화분을 보내왔다. 그리고 세모시 흰색 한복차림으로 행정실을 찾아 왔다. 흰 피부여서 화장이 잘 받는 형이었다. 앞니가 많이 나온 것과 몸집이 커 보여 여장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말도 걸쭉하여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어 보였다. 우리 동창들 중에 주정숙이 생각난다. " 왈패 " 그는 매우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외모도 뚜렷하였지만 성격이 남자 같은 부분이 많았다. 예상되는 텃세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하여 " 태안에는 미인들이 많은 것 같다 " 는 묻지도 않는 칭찬을 하였다. 적들이 많아지면 입지가 좁아질 것이기 때문에 선수를 써야 했다. 그렇다고 어머니회장만 미인이다고 칭찬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를 것이고, " 미인이 많다 "는 말은 " 동네가 좋다 "라는 의미에서였다.
마침 코앞에 여름 방학이어서 어머니회에서 직원 회식 초대가 있었다. 나는 시내 고기집 정도로 생각하였다. 왼 버스가 왔다. 그리고 버스는 언덕 위 전망이 좋은 바닷가로 우리를 데려갔다. 아찔한 벼랑 위 횟집으로 안내되었다. 앞이 탁 트여 드넓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지만 다분히 아래를 내려다보기에는 공포감이 생겼다. 태안에서 만리포를 거의 다 가다가 왼쪽에 의항이라는 곳이 있다. 규모는 포구(항구보다 작음)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횟집들이 언덕 위에 드문드문 자리하고 있다. 귀한 손님들은 대개 시내 식당이 아니라 주로 의항으로 모시는 것 같다.
직원 40명, 어머니 30명 한 70명이 식당을 점령하였다. 머리를 맞댄 긴 식탁에는 스끼다시를 기초로 어물전을 옮겨 놓은 듯한 식탁이 식욕을 돋우게 하였다. 시식 선언과 함께 소주잔이 돌려졌다. 그리고 술잔이 무섭게 비워졌다. 쓴 소주 한 잔에 선생님들은 어머니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자식 칭찬을 하고 있다. " 그 놈은 공부는 그래도 인물이 좋다는 둥, 머리는 좋은 데 노력만 좀 하면 되겠다는 둥, 성적은 그래도 인사를 잘 하기 때문에 사람이 됐다는 둥 " 알고 보면 본전 밖에 안 되는 이야기에 흥분이 되어 있었다. 그 한마디에 어머니들은 선생님들이 지극히 자기 자식에게 관심이 있다고 판단하여 " 선생님 덕분이지요 "라고 말하며 수줍어하며 존경을 나타낸다. 발그레한 얼굴들이 새신랑 또는 새댁 같아 보였다. 주변이 매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빈 술병이 뒷자리에 쌓인다. 그 빈 병의 수는 식탁에 앉은 사람 수만큼은 되는 것 같다. 각 일병씩 마신 셈이다. 실내가 술기운에 무르익어 갈 무렵, 먼바다 수평선 위에는 넘어가는 석양이 화려한 빛을 발하며 아쉬운 듯 손짓을 한다.
몽롱해진 의식 속에 그 손짓을 따라 간 곳은 희미한 조명의 노래방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 사랑의 미로 "를 선두로 2회전에 진입하였다. 처음 멤버가 반으로 줄었다. 어차피 70명이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 멤버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대게 반 정도는 정 코스인 2차 전까지 간다. 일부 열성 멤버는 격렬한 몸 동작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 가족인양 끌어안는다. 화면에는 신청곡 번호가 두 줄로 여러 곡이 쌓인다. 기교 섞인 큰 목소리가 분위기를 주도한다. 노래방 덕분에 요즘 사람들은 노래를 잘 한다. 80년대에 동전을 넣고 부르던 가라오케가 90년대 초에는 노래방으로 확산이 되었다. 반주와 함께 가사가 자막으로 나오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다. 가사를 외우지 못해도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배경화면까지 추가되어 분위기에 유혹된다. 주위의 권유에 따라 18번지인 " 해변의 여인 "을 불렀다. 해변의 여인은 곧 비키니의 여인을 말한다. 창 밖의 여인은 버림을 받은 여인이다. 빗속의 여인은 실연을 당한 여인이다. 그러나 비키니의 여인은 추억의 여인이다. 추억 만들기가 바다가 가까운 이 태안에서 어떻게 가닥을 잡아갈 지 궁금하다. 칠십년대 초 나훈아가 해변의 여인을 불렀다. 그 가사 내용으로 보면 텅 빈 바닷가에서 쓸쓸히 머리카락을 날리며 걷는 슬픔을 머금은 여인이다. 최근에 통화를 했던 홍양옥이 이에 해당되는 것 같다. 어딘가 우수에 젖은 듯한 슬픔을 머금은 추억 속의 여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춘봉 선배님은 나훈아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노래가 끝나자 누군가의 입술이 내 볼에 와 닿는다. 분명 여인의 입술이었다. 스스로 신바람에 취해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우매한 여인의 소행이다. 왜 그 입술이 정면을 향하지 못하였을까 ?
어차피 군살은 빼야 한다. 두세 곡 씩 부르면 세 시간이 간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아도 열한시를 가리킨다. 가정이 있는 분들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직원들은 제갈 길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네 명이 남는다. 정예부대만 남았다. 교감선생님은 육십이 가깝지만 자신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싶어했다. 교무부장은 교감의 체면을 봐서 자리에 남아 있다. 나와 행정실의 45세인 노총각이 그 다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엄연히 가족이 있지만 현재 이산가족이다. 그리고 노총각은 결혼을 하기 전까지 무소속이다. 실은 독방 외에는 딱히 갈곳이 없어 남아 있는 셈이다. 목이 열을 받아 컬컬하다. 다음 차례는 호프집이다. 생맥주로 목을 축여야 감정을 추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침침한 불빛의 목로주점 같은 호프집에는 느린 박자의 대니보이가 실내음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일을 곁들여 500cc 생맥주가 한 컵씩 배당되었다. 교감은 크게 맥주를 들이키고는 무용담을 꺼냈다. 안흥항에서 신진도까지 100미터를 물살이 빠르지만 단숨에 헤엄쳐 건너간 이야기다. 지금은 공중다리가 놓였지만 과거에는 배를 타고 건너다녔던 곳이다. 그리고 물때를 맞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던 이야기며, 제자들이 출세한 이야기 등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그저 두꺼비처럼 눈만 깜작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이런 때에 김혜선이 있었더라면 -. 그는 달동네에 사는 여반장 같았다. 목소리가 꾀 친근하고 다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달맞이꽃은 밤에 꽃이 핀다. 대부분의 꽃은 햇볕을 받아 아침에 피지만 달맞이꽃은 달빛을 받아 밤에만 핀다. 밤 8시경에 꽃밭에 나가면 사방 달맞이꽃잎이 피는 장면을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소쩍새가 운다. 뻐꾸기처럼 울지만 소쩍새는 밤에만 운다. 야행성인 올빼미와 친척간이기 때문이다.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자연은 외롭지 않다. 소리가 있고, 밝은 색깔이 있고,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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