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31:1-15
깨끗한 성도
##### 1.발길이 깨끗해야 합니다
5, 7절...<언제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 것을...>
에수님도 마태복음 18:8절에서 <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발을 헛디뎌 몸을 상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
하물며 신앙과 정신 차원의 일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 2.눈길이 깨끗해야 합니다
욥은 자기의 행위를 고백하면서 본문 7절에서 < 언제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기에 앞서 1절에 보면 <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들은 자기의 눈길을 한번도 음탕과 탐욕에 빼앗겨 본 적이 없었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은 절대로 음탕과 탐욕으로 향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눈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사실 우리의 눈처럼 범죄에 재빠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5:28절에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내 눈만은 깨끗하다고 말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도 따지고 보면 깊은 의미를 지닌 고사성어(古事成語)입니다.
이와 같은 눈으로부터의 범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강력히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 눈으로 범죄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음욕을 품고 범죄한 <다윗>이 있고,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눈으로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따먹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죄된 곳에다 눈길을 두어 마음을 파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 3.손길이 깨끗해야 합니다
욥은 자기의 행위를 변론하면서 본문 7절에서 <언제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자기의 손길 역시 한번도 더럽혀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를 감행하는 것은 사람의 손입니다. 물론 어떤 범죄거나 몸의 지체가 다 협동합니다만 그 범죄를 앞장서서 도맡아 저질러 대는 주범은 손입니다. 그러기에 각별히 손을 깨끗이 쓰는 일에 유의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30절에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몸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손을 씻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빌라도까지도 자기는 예수의 일에 관해서는 무죄하다면서 옳지 못한 재판을 하고 난 후 손을 씻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인은 언제나 손을 깨끗하게 사용하여 주의 일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지체 중에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손발과 눈은 매우 중요한 지체입니다. 이것들이 없으면 몸 전체가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만 보아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깨끗하게 쓰지 못하면 몸 전체를 지옥에 던져 버리는 불행을 불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체들을 깨끗하게 써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정결한 곳에 사용함으로 깨끗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욥 31:16-23
불쌍한 사람을 도웁시다
어떤 독실한 신자 한분이 주님을 몹시 그리워하다가 어느 날 밤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 주님!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뵙게 하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을 그를 향하여 내일 중에 내가 찾아 갈테니 잘 맞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그를 찾아온 것은 어떤 절뚝발이 거지 하나였을 뿐 하루 종일 기다려도 주님은 오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그 날밤 그는 주님께 어찌하여 약속을 어기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내가 너를 찾아갔었지만 너는 나를 냉대하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마태복음 25:40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이지만 참으로 실감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도와야 할 자는 누구입니까?
##### 1.가난한 자를 도와야 합니다
본문 16절...<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내가 언제 빈궁한 자를 입히지 않았던가?>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사실 욥이 큰 자라고 알려졌던 것은 그가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소유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물은 모으는 것보다 나누어주는 데에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들려 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자의 죄는 재물을 많이 가진 그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죄는 불쌍한 나사로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빈궁한 자들의 어려움에 대해 별로 아는 바도 없이 돈이 현명하게 쓰여지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도움을 베풀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이 베푼 도움을 다시 되돌려 줄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일 3:17...<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 2.고아(孤兒)를 먹여야 합니다
본문 17절...<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욥은 자신이 젊었을 때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불쌍한 자들이 많이 있지만 고아처럼 가련한 존재도 없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어린 자식이 고아가 되어 이 삭막한 세상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굶주리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어느 부모든지 그런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고아들이 많고 이 순간에도 그런 아이들이 무수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대에는 결혼 생활을 부실하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많은 아이들이 길거리에 그대로 버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란의 팔레비왕은 우리 나라 예산의 3년분에 해당한 돈을 축재해 두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 망명 다닐 때에 가발을 쓰기도 하고 수염을 붙였다 뗐다 하기도 하고, 눈알을 까맣게도 하고 노랗게도 하며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에 암에 걸려 시카고 어느 병원에서 수술비용도 못낸채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돈을 모아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성도의 참된 의무입니다.
##### 3.과부를 인도해야 합니다
본문 18절...<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본래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께서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살도록 짝지어 주신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남편을 잃음으로써 파탄이 났을 때 아내의 그 처절한 심경이 어떠하겠습니까? 오죽했으면 '과부의 사정은 과부밖에 모른다'는 속언이 생겨났을까요?
그러기에 신구약을 막론하고 고아의 이야기 나오면 거기에는 반드시 과부도 따라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초대교회는 과부의 명부를 만들어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훌륭한 전통을 세웠습니다.(딤전5:9). 그런데 오늘의 우리 교회는 그런 전통을 얼마나 살려 가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람이란 누구나 오늘 잘 살고 있다고 하여 항상 그렇게 되는 것만은 절대 아닙니다. 내일이 되면 오늘의 부자가 얼마든지 가난한 자가 될 수 있고, 내 자식이 고아가 될 수 있으며, 그리고 나 역시 과부의 신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불쌍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11:1절에서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선행은 반드시 보상이 따라 온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불쌍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이 어렵다는 걱정만 하기에 앞서서 나보다도 약한 자를 도우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정신을 드러내는 생활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 31:24-40
돈에 대해 깨끗하십시다
디모데 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특히 성도들은 돈에 대해서 순결해야 한다. 깨끗해야 한다. 돈에 대해 약점이 없어야 한다.
본문은 욥의 그런 고백이다. 돈에 대해 부그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 1.돈으로 나를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
본문 24-25...<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 2.불쌍한 자를 돕는 데에 돈을 썼다는 고백이다
본문 31-32절...<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돈만 보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돈의 노예가 있었다. 그는 샤일록처럼 돈을 벌 줄은 알았지만 쓰는 기능은 아예 마비되어 버린 수전노였습니다. 그가 모은 돈은 어느새 궤짝에 가득해져서 그는 저녁만 되면 그 돈궤를 들여다보며 만족해 하였다. 그러나 보관하기가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여러개의 돈보다는 한 덩어리의 금이 보관하기에 간편하리란 생각이 들어 그 돈을 거기에 해당하는 값어치 만큼의 금덩이로 바꿔 버렸다. 그는 그 금덩이를 매일 꺼내 닦고 만지며 시간을 보냈다.
행여나 도둑을 맞지나 않을까하여 걱정이 태산이었다. 전전긍긍 궁리 끝에 이 금덩이를 땅에 묻기로 하였다. 담장 밑 으슥한 곳에 구덩이를 파고, 아무도 모르게 금덩이를 묻었다. 그리고 꺼내 확인하곤 하였는데, 금덩이가 그대로 있으면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날, 이 구두쇠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용케도 금 냄새를 맡고, 구덩이에 있는 금덩이를 모조리 꺼내 도망을 쳤다. 다음날 아침, 금덩이가 없어진 것을 안 구두쇠는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염병할 도둑놈!"
"육실 할 도둑놈!"
"삼대를 멸할 도둑놈!"
그는 입에 담지 못할 저주의 욕설을 퍼부으며 금구덩이만큼 패이도록 땅을 치면서 애통해 하였다. 그러나 금덩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구두쇠의 통곡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돈의 노예가 되어 허우적거리더니, 결국 한 푼도 써 보지 못하고, 도둑에게 진상을 했군."
사람들은 귀속말로 주고받으며 구두쇠의 행위를 비아냥거렸다.
한 친구가 와서 그를 위로하였다.
"여보게 그렇게 슬퍼한다고 금덩이가 저절로 굴러오겠나. 자네가 안쓰러워 도둑이 도로 짊어지고 오겠나. 진정하게 진정해."
"모르는 소리 말어! 그 금이 어떤 금인데....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꼬박꼬박 모은 것인데..!"
"아 그걸 누가 모르는가? 이렇게 울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일세!"
구두쇠는 입에 거품을 물며 도둑놈 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 친구가 말했습니다. "정 그렇게 억울하면 금덩이 대신 돌멩이라도 구덩이에 채워 넣어 놓게. 금이건 돌이건 쓰지 않고 보기만 하는 데야 생각하기 나름이지 다를 것이 뭐 있겠는가?"
즉 쓰지 않는 돈은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 3.정당한 거래를 했다는 말이다
본문 39-40절...<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돈은 깨끗이 벌고 깨끗이 써야 합니다. 더러운 돈은 돈으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한 것입니다.
돈에 대해 깨씁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