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12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 이동원 목사
지금부터 저는 현대인들을 광범하게 공격하고 있는 한가지 질병에 대하여 묘사하고자 합니다.
이 병이 무슨 병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병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일상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가 마침내 일상을 위협하게 되는 질병입니다.
이 병의 원인은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병은 별 특별한 이유 없이도 발병할 수 있습니다.
이 병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인류의 약 15%정도가 경험하고 있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보다 발병율이 2배나 더 높습니다. 이 병은 약 50%이상이 50세 미만의 사람들에게 더 위협적인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체중이 급격하게 증가하거나 감소합니다. 이 병에 걸리면 몹시 피곤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에 대한 무가치감, 무력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고 만사가 귀찮아 집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감을 느끼며 수면 장애를 경험하고 자주 격한 짜증과 슬픔을 느낍니다. 좀 더 증상이 심해지면 자살을 생각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의 약 15%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이 병은 치료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의 80%이상이 완치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병의 이름은 우울증 다시 말하면 디프레숀(depression)입니다.
시편기자는 선한 목자의 사역가운데 하나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일"이라고 노래 합니다.
소생의 반대는 낙심 혹은 낙망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소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낙망한 까닭입니다.
낙심을 다른 말로 하면 우울 곧 디프레숀인 것입니다. 마음이 눌려있고 의욕이 상실된 상태입니다. 더 이상 움직이조차 싫어지고 더 이상 살기조차 싫어집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서 이런 낙심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의 거인들 조차 이런 낙심에 빠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시편기자도 한때 이런 우울증 곧 낙심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시42:11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독백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영웅이었던 바울도 이런 낙심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후서 1:8-9절에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자기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열왕기상에 보면 구약의 영웅이었던 엘리야도 이런 낙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오늘의 본문에서 그만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 달라"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조상이 바꾸지 못한 이 나라를 내 힘으로 어쩔수 없다" 고 독백합니다.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이 이런 낙심에 빠질때 어떻게 소생이 가능할수 있을까요?
도대체 무슨 일 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경우 우리의 낙망해버린 우울한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선한 목자의 처방은 무엇일까요?
1. 육체의 피곤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낙망은 반드시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원인이 원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때로 아니 많은 경우 우리가 정신적으로 낙망하는 때문은 신체적인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을 예방하는 모든 안내 책자들을 읽어 보면 예외없이 등장하는 수칙이 무엇이냐 하면 "과로를 피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 영양관리와 자신에게 맞는 수면 습관을 유지할 것. 경쟁적인 생활태도를 버리고 즐겁게 살아갈 것."등이 반드시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꾸로 경쟁적인 라이프 스타일, 휴식의 부족, 그리고 육체의 학대가 우울증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도 아마 이런 삶의 정황이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이 디프레숀을 경험하게 한 것이라고 진단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엘리야는 너무 바빴습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싸움으로 탈진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마무리되고 엘리야의 승리가 확실해진 시점에서 그는 오히려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게 된 많은 소위 성공자들이 성공 다음의 순간 우울증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 그러나 여기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선한 목자이셨기 때문입니다.
목자였던 필립 켈러는 양의 낙심의 순간을 양이 뒤집어 지는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양들에게 경험될 수 있는 매우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지적합니다. 양들은 때때로 문자 그대로 뒤집힙니다. 그리고 일단 뒤집힌 양들은 네 발을 허공에 뻗치고 허우적거리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비단 연약한 양만 아니라 힘이 세고 건강한 양들도 때로는 너무 빨리 뛰다가 뒤집힌다고 합니다. 원인은 몸의 중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뒤집힌 양들은 맹수,독수리,말똥가리, 들개, 이리의 표적이 되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임무의 하나는 매일같이 자기의 양들의 숫자를 헤아리며 뒤집힌 양들이 없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목자는 뒤집힌 양들을 발견하자마자 일으켜 세운다음 맛사지를 해주어 혈액순환을 돕습니다. 그 다음 편히 쉬게하여 그를 소생시킵니다. 혹시 최근의 나는 뒤집어진 양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에 뒤집어진 엘리야의 소생을 위하여 선한 목자이신 주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5절에 보면 그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것이 목자의 맛사지가 아닙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쉬게 하셨습니다.(6-7절)
하나님의 치유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것이었습니다.
왜요? 그가 육체적으로 탈진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먼저 내리신 처방은 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낙심을 영적으로만 치유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잠간의 휴식, 잠간의 산책, 잠간의 침묵, 잠간의 낮잠이 우리의 낙심을 치유할수 있습니다.
성도의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육체를 학대하지 마십시오.
육체에 쉼을 주십시오.
오늘의 본문의 하나님의 치유를 6절의 순서대로 정리하면 어떻게 될까요?
제일 먼저 할일은--먹는 일입니다.
다음은--마시는 일입니다.
그 다음은 누워 자는 일입니다.
"먹자-마시자-쉬자-자자"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상식에 충실한 처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처방의 전부는 아니지요. 이렇게 엘리야의 소생을 도우신 하나님은 이제 그를 육체적으로 회복시킨 다음 그를 호렙산으로 가게 하십니다. 둘째 처방을 위해서 였습니다.
2. 영적인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낙심에서 소생하는 길이 육체적인 관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소생을 시작한 엘리야를 위해 하나님은 다음 처방을 준비하십니다. 곧 영적인 처방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두가지 방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제 엘리야로 쉬게 하신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또한 그로 하나님에게 응답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말씀을 읽고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서가 아닙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말합니까?
기도함이 그분에게 아뢰이는 방법이 아닙니까?
그동안 엘리야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여 왔습니다. 그는 결코 말씀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는 말씀없이 행동합니다.기도없이 행동합니다.
아합왕의 왕후였던 이세벨이 엘리야의 목숨을 노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흔들립니다.
3절에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다"라고 기록합니다.
엘리야 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말씀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로뎀 나무아래 주저 앉아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고, 죽고 싶다고 투정합니다.
그런 엘리야를 하나님이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로 하여금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절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저가 대답하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교제요, 교통이 아닙니까?
영적인 교제가 회복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인 교제가 회복되는 거기서 엘리야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필립 켈러는 그가 목자시절 뒤집힌 양을 바로 일으켜 세운 다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부드럽게 음성을 들려주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조심해야지 왜 뒤집혔어? 이제 내 곁을 떠나면 안돼~~"
그러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고 즉각적으로 안정감을 되찾는 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분이 다시 좋아진 양은 음매애~하고 화답한다고 합니다. 그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목자와 양 사이에 교제가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소생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아무도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가 회복되기 까지 우리가 영적으로 소생되었다고 선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내 영혼의 귀가 열려있고 내 기도의 숨결이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라면 이제 시편기자와 더불어 이렇게 고백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도다"고
3. 주님의 임재가 경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엘리야의 사적을 읽어 내려가며 떠오르는 피할 수 없는 의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갈멜 산정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합하면 850대 1의 결전에서 그렇게도 당당했던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서는 왜 이리도 비참하게 자기 생명을 포기할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저는 부분적으로 그 원인이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갈멜 산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에 하늘이 창을 열었습니다. 비가 쏟아 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드라마같은 상황의 막이 내리고 엘리야가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가 로뎀 나무 아래 주저앉은 그곳은 적막이었습니다. 소리칠 힘도 없이 쓰러졌을 때 하늘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의 기적은 없었습니다. 그가 갈멜 산에서 체험한 모든 것은 한순간의 허망한 꿈처럼만 느껴지고 있었을때 갑자기 그는 외로웠습니다. 그는 혼자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거나 외출중인 지금 여기에는 부재중인 분으로만 느껴진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그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였으나--이스라엘 자손은 주의 언약을 버렸고--이제는 나만 남았나이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전형적인 우울증의 증세라고 할만 하지 않습니까?
가을에 우울증을 앓게 된 어떤 환자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몇날 몇일을 즐거운 생각만 했다./
그래도 어쩔수 없었다./
이 가련한 가을--/
몇 날 몇 밤을 외면하고 보냈다./
그래도 어쩔수 없었다. 이 끈질긴 가을--/
마침내 바다를 보지 않으려 책상을 돌려 놓았다./
후훗, 어쩔까나--/
맞은편 창에 , 지난 태풍에 물들지도 못하고/
헐벗어 버린 나무가 안타까이 떨고 섰다./
까르르 웃어도/
두눈으로 쏟아져 내리는 가을--/
조잘 조잘 떠들어도/
가슴으로 녹아 내리는 가을/
어쩔까나--이 기막힌 가을을 어쩔까나/
어쩔까나 어쩔까나--/
기어이 스며나는 이 가을을 어쩔까나--."
그래서 우울증을 멜랑콜리아(Melancholi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울증 환자들은 가족중의 한 사람이라도 아니면 친구라도 누구든지 그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고 곁에 있어주면 놀랍게도 급격하게 증세가 호전된다고 합니다. 오늘 엘리야에게 이런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하나님은 아주 특별하신 방법으로 당신의 임재를 엘리야에게 계시하십니다.
우선 엘리야에게 산에 서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지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지나가실지 궁금하지 않았겠습니까?
처음에 큰바람이 지나갔습니다.
다음에는 지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불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선 곳은 호렙 산이었습니다. 과거 이곳에서 선배 모세에게 가시 떨기 불꽃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당연히 그렇게 나타나실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불 가운데도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무엇이 있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세미한 소리였습니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습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놀라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은 바람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마치 에덴의 동산 범죄한 첫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른 새벽 추운 아침이나 뜨거운 낮이거나 무서움의 밤이 아닌 저녁 서늘한 시각에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조용히 속삭이십니다. "넌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함께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분은 먼 훗날 비슷한 방법으로 인류를 찾아 오셨습니다.
범죄한 인류를 위해 그가 친히 속죄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때 그는 진정한 왕 이시면서도 힘센 제왕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인류의 심판자가 되실 분이면서도 처음 오실 때 그는 재판관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실로 만인의 주인이면서도 주인의 모습이 아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별명은 임마누엘이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는 범죄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우리를 안고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두려워 말아. 나는 네가 걸은 길을 동일하게 걸었던 나와 같은 너를 이해하는 인간이었어.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너의 넘어짐도 이해할 수 있어. 내가 너를 바로 세워 줄거야. 내가 너를 씻겨 줄거야. 내가 너와 함께 하는 거야. 이제는 내가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너를 결코 버리지 않을 거야."
주님의 임재의 경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었습니다. 바로 이 선한 목자의 사랑을 경험하는 그 순간 주님의 양들은 낙심에서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때 그분의 양들은 기쁨으로 이 노래를 노래할 것입니다. "그가 내 영혼을 소생 시키셨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