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는 것처럼 존 웨슬레(John Wesley)는 감리교회의 창시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를 개혁시키는 힘으로서의 기독교와 그 구성원들을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느정도까지 가능한가를 논할때에 빠지지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특별히 웨슬리는 그가 일으킨 복음운동이 부패한 사회를 변혁시켰다는 운동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그가 견지한 신학적 입장이 탁상의 추상적 신학이 아니라 목회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고 활용될 수 있는 산 신학(living theology)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하퍼(Steve Harper)의 주장처럼 웨슬리가 교회일치운동의 구심점이자 신앙과 실천상의 제 문제들을 이끌어주는 안내자요 교인의 성장과 교회의 개혁이라는 현대교회의 관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끄는 인물이다. 미 남감리교회대학(SMU)의 역사신학 교수였던 아우틀러(Albert Outler)가 내리는 웨슬레에 대한 평가는 그가 지니는 중요성의 일단을 잘 웅변해 준다: "웨슬레는 전형적인 전도자요 조직가요 영국을 도덕과 종교를 통해 구원한 사회개혁가였다. 신학자로서의 웨슬레는 문화신학자였다. 특히 그는 복음을 그 시대의 일반 민중들에게 어려운 사상의 내용일지라도 평이한 표현방법으로 소개하였으며 복음전도자의 메시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민중신학자(Folk- theologian)였다. 웨슬레는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두가지 방법으로 그의 사상을 전달했는데 하나는 설교였고 또 하나는 교육이었다. 그의 설교내용은 복음이었으며 교육내용은 자유(liberal)사상이었다. 일반 민중들은 설교와 교육을 통해 일치된 경험으로 웨슬레의 사상을 함께 공감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웨슬레의 역사적 중요성과 그의 신학적 특징을 학문적으로 제기함으로서 웨슬레 르네상스의 불을 밝힌 것은 미국의 역사신학자 알버트 아우틀러라 할 수 있는데, 그가 지적한 것처럼 웨슬레는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쳐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 관한 해석도 매우 다양하다. 특히 조지 셀(G. Cell)이 1935년에 쓴 "요한 웨슬레의 재발견"(The Rediscovery of John Wesley)에서 웨슬레의 신학적인 경향이 반칼빈적이라는 기존의 해석을 부정하고 오히려 칼빈적이며 자유주의자가 아닌 은총의 신학자 즉 계몽주의 시대의 타락된 은총의 신학을 시정한 신학자라고 주장한 것을 필두로 웨슬레를 신학자로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가령 움페리 리(Umphery Lee)는 그의 저서 "존 웨슬레와 현대종교"(John Wesley and Modern Religion 1936)에서 웨슬레를 자유주의자로 해석하고 있는가 하면 힐데브란트(Franz Hildebrandt)는 "루터에서 웨슬레까지"(From Luther to Wesley 1951)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에 서서 웨슬레를 루터반열에 놓고 해석하려 하기도 했다. 또한 레오 콕스(Leo Cox) 톰프슨(Claude Thompson) 그리고 터머(George Tumer)등은 웨슬레를 성결의 전통에서 해석하려 하였다. 한편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엘비 할레비(Elie Halevy)가 웨슬레를 18세기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이끈 위대한 사회운동가로 평가한 이래 웨슬레 신학의 사회윤리성이 논의되어왔다. 가령성결과 해방(Sanctification and Liberation)의 편집자인 런연(Theodore Runyun)은 1970년대 이후의 해방신학의 제반 양상들을 웨슬레의 방법으로 조명하려 했고 보닌노(Jose Miguez Bonino)와 콘(James H. Cone)등은 웨슬레가 주창한 사회적 성결이 해방신학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밝히려 시도하였다. 최근에는 마르쿠아드트(Manfred Marquardt)는 "존 웨슬레의 사회윤리"(John Wesley's Social Ethics: Praxis and Principles)라는 저서에서 웨슬레의 운동을 기독교윤리와 실천의 합일체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웨슬레를 보는 해석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계 일반이 보여주는 웨슬레에 관한 연구 경향과 별도로 성결교단이라는 차원에서 웨슬레는 새롭게 연구되어야 할 당위가 있는 인물이다. 더욱이 교단 신학의 존재유무와 정체성의 역사적 뿌리를 놓고 여전히 열린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 성결교회의 입장이고 보면 우리 자신의 존재됨을 분명히 해야한다는 기본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새로운 한 천년에 복음사역을 위한 경쟁력있는 교단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적극적 이유에서도 이 질문들은 촌음을 다투는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결교회가 이땅에 뿌리내리던 시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단의 신학적 입장과 방향설정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바로 요한 웨슬레이다. 교단 교역자 양성기관인 서울 신학대학교에서는 요한웨슬레 신학을 의무적으로 수강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타교단 출신의 교수들에게도 이 과목의 이수를 권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웨슬레 지향현상은 이미 교단이 배태되던 초기부터 자리잡아 온 것이다. 성결교회의 사부로 추앙받고 있는 이 명직 목사는 그의 "성결교회 략사"에서 한국성결교회를 동양선교회와 동일한 노선에 선 것으로 간주하면서 양자의 신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우리 동양선교회는 ... 오직 감리교회의 개조(開祖)인 요한 웨슬네를 니어 니러나 곳 초시대(初時代)의 감리교회와 갓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고됴하며 미신자의게는 진격덕으로 전도하야 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저 함이니 곳 우리의 교리나 정신이 순 초시대 감리교회로 인뎡하야 틀림이 없을지니라"
또한 한국성결교회의 헌법은 서문에서 "성결교회 신앙교리의 근간은 요한 웨슬레의 복음적 성결의 주창을 배경으로 하여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으로 요약된 교리적 정신"으로 밝히면서 교회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곧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하에서 본 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여, 모든 사람을 중생하게하며 성도들을 성결한 신앙생활로 인도하여 주의 재림의 날에 티나 주름잡힘없이 영화로운 교회로 서게 하려는 것이다". 헌법에 적시된 것처럼 한국성결교회는 그 태생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요한 웨슬레의 신학과 정신을 모토로 하고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성결교회가 그 본래 교회됨의 정신과 정체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이 웨슬레에 대한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만일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자신있는 대답을 던져 줄 수 없다면 이 작업은 한시라도 늦출 수 없는 작업이다: 과연 한국 성결교회가 이야기하는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던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그 교회사명의 인식과 웨슬레 자신이 주장하고자했던 성결의 도리 즉 그의 신학과 정신의 방향간에 괴리나 편차가 존재하지는 않는가? 과연 성결교회는 요한 웨슬레가 주장했던 그 신앙과 신학을 제대로 붙들고 있으며 그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반경과 내용을 확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박 명수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 성결교회가 웨슬레를 말할 때 웨슬레의 전통을 이어받은 19세기의 복음주의적 감리교의 신앙을 두고 말하면서 명목상으로만 요한 웨슬레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理想으로만 남아있는 허울로서의 웨슬레를 여전히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한두번 걸르고 걸러서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웨슬레에 대한 신학에 기초함'으로 우리의 헌법 전문을 수정할 것인가를 정직한 자세로 판단해야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웨슬레의 신학과 사상일 것이다. 요한 웨슬레의 진짜 관심은 무엇이었고 그가 주장하는 성결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작업을 위해 우리가 본 연구에서 치중하려고 하는 것이 웨슬레의 설교에 대한 연구이다. 리스쳐(R. Lischer)가 그의 저서 "설교의 신학"에서 설교를 일컬어 "설교는 신학의 최종 표현"이라고 말했고 로이드 존스 역시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언어"라는 표현을 썼는데 -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설교란 단지 신학뿐 아니라 설교자의 사상적 경향성 지적 성숙 멘탈리티 그리고 그를 감싸고있는 삶의 정황(Sitz im Leben) 및 교회와 사회의 상황 전체를 포괄하는 것지만 - 이것은 그만큼 설교를 연구한다는 것이 한 설교자의 신학과 사상적 경향성을 파악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요한 웨슬레의 '표준설교'를 연구할 것이다. 여기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표준설교란 웨슬레의 설교중 가장 대표적인 것 44편과 그밖의 설교 9편을 더한 총 53편의 설교와 신약성서에 나타난 기독교 도리를 전 4권으로 편집하여 1771년 감리교회의 표준도리로 인정된 설교로 웨슬레의 신학적 입장의 정수가 다 들어있는 설교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 있어 감수할 수밖에 여러 난점들이 있음을 인정하지않을 수 없다. 우선, 웨슬 리가 직접 설교했던 그 당시의 '선포된 설교'(gesprochene Predigt)와 활자로 전해진 '기록된 설교'(gedchrebene Predigt)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구체적인 대상을 목표로 작성되고 구체적인 장소에서 선포된 설교가 갖는 현장성과 거기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을 활자로 읽혀지는 설교에서 동일하게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둘째 오늘 우리에게 전해오는 웨슬레의 설교가 과연 옥외설교자로 특징지워지는 웨슬레의 설교를 대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표준설교에 수록된 53편의 설교는 감리교 교역자의 교육을 위해 정선된 설교이고 그 내용이 대단히 신학적, 교리적이며 문체역시 건조하여 이해가 쉽지않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영적 정열과 단순함'으로 그의 설교를 특징지운 캐롤(H. K. Carroll)의 진단 사이에는 적지않은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웨슬레의 설교무대가 방파제 경기장등 야외였고 때때로 '설교를 방해하는 무리들'이 끼어들었던 상황이었음을 보면 그의 전도설교가 표준설교집에 수록된 설교와는 분명 달랐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청중의 회집을 위한 조직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2-3만명의 회중이 운집하여 웨슬레의 설교를 경청했고 그들중 많은 결신자들이 나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는 차원을 차치하고라도 지적 수준이 높지않았던 당시 청중에 대한 설교의 접합성(Predigtmäßigkeit)과 전달상의 수사학적 전제가 고려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여러 사항을 염두에 둔다면 본 소고에서 얻어지는 소득이 웨슬레 설교의 일부를 밝혀 줄 수 있겠지만 "웨슬레 설교 전체의 특징"으로 명명하기에는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연구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
II. 웨슬레 설교를 결정짓는 틀
요한 웨슬레의 설교를 연구함에 있어 전제되어야 할 것은 그를 위대한 설교자로 만들었던 신앙형성의 개인적 배경과 그가 지고 갈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이다. 개인적 차원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주어진 성경본문이 설교자라는 관을 통과해 나올 경우 매우 다양한 설교가 만들어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교자가 곧 설교의 결정요인이고 그런 설교자가 만들어지기까지에는 그의 성장배경과 신앙 체험들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설교라는 것이 진공의 상태에서 행해지는 독백이 아니라 복음을 시대와 상황속으로 해석해 넣는 작업이기 때문에 상황은 설교의 전제가 될 수밖에 없고 설교는 상황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II. 1. 웨슬레의 신앙형성 배경
웨슬레의 신앙경향성과 관련하여 세가지 사항이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는 그의 성장배경이다. 비록 웨슬레가 끝까지 국교도로 남아있었지만 참회 회심, 신생등으로 일컬어지는 웨슬레의 신학적 경향은 청교도의 강조점과 동일한 궤도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 가운데 하나가 웨슬레 가계의 청교도적 흔적이다. 차마우스와 카터스톤 교구장을 역임했고 1662년 알정톤 교구에서 추방당했던 그의 증조부 바톨로메(Batholomew Wesley)는 열정적인 청교도였으며 부당한 의식주의와 기도서 사용을 거부하여 1616년 투옥, 해직당했던 그의 조부 존 웨슬레역시 카녹(Nehamiah Carnock)의 표현처럼 '용감하고 재치가 있으며 학자적이고 단백한 순회전도자'였다. 부친 사무엘은 조상들과는 달리 성공회의 감독제도를 지지하여 비국교도이면서 국교에 마물렀지만 신학적 확신에 있어서만큼은 진정한 친구였다. 말하자면 가계의 피속에 청교도적 경건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웨슬레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이 그의 어머니인 스잔나이다. 그녀는 영국의 성 바울로 알려진 청교도목사 사무엘 아네슬리(S. Annesley)의 24자녀중 막내딸로 13살부터 교회론 교리문답을 탐독하는 등 부모로부터 철저한 청교도적 신앙을 전수받았다. 몽크(Robert C. Monk)가 주장하는 것처럼 '교육적 표준과 엄격한 종교적 도덕적 교육을 병행하는 청교도 가정의 탁월한 본보기 가정'에서 성장한 스잔나는 '모유와 함께 청교도의 영향'을 웨슬레에게 주임시켰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주기도문 소교리문답 성서구절등을 일상적으로 가르쳤으며 특히 주일은 평일과 엄격히 구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가벼이 부르지 못하도록 교육하였다. 이처럼 혈통적으로 이미 경건의 피가 흐르고 있는 바탕위에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교육은 웨슬레로 신앙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유년시절의 이러한 신앙교육은 웨슬레로 하여금 그의 차터하우스(Charter House) 중학교시절에 스스로 경건의 훈련속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즉 웨슬레는 중학교시절 스스로 1. 다른 사람들 처럼 나쁜 사람이 되지 말 것 2. 종교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가질 것 3. 성서를 읽고 교회출석을 정기적으로 하며 기도생활할 것이라는 신앙훈련계획을 스스로 세워 여기에 몰입하게 하였다. 이런 훈련은 옥스퍼드 대학시절로 이어졌는데 그는 3-4명으로 이루어진 신앙그룹을 만들어 성서와 고전을 읽는 한편 감옥에 갖힌 자와 병자를 방문하여 위로하며 성서와 기도서를 나누어줌으로서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안에 있는 좋은 기질을 함양하며 이를 위해 서로 협력하는 동시에 교회의 모든 절기를 엄숙히 준수한다는 행동강령을 만들어 이를 행동화 하였다. 특히 웨슬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영향아래 목사가 되기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반 훈련과 모임은 성직자를 꿈꾸는 웨슬레로서는 당연한 수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런던대학 조교수 시절 1727-1729년까지 약 2년 3개월간 부친의 목회를 조력한후 1729년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챨스가 조직한 신성클럽의 지도자가 되어 성경연구와 기도생활 금식과 선행 감옥과 빈민굴 방문등 기도생활과 경건생활에 몰두한 것 역시 이러한 그의 학창시절의 당연한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학창시절에 이르기까지 목사가 되는 교육과 신앙훈련과정에 일관된 열심과 경건성을 견지한 것이 웨슬레의 이후 사역에 중요한 바탕을 제공했던 것이다.
둘째, 웨슬레에게 영향을 끼친 두 번째 요소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를 사사했던 스승들의 영향이다. 웨슬레는 그의 대학시절 그라브(John Ernst Grabe, 1666-1711)의 70인역 연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는 위간(George Wigan) 교수를 사사했는데 이 만남은 웨슬레로 하여금 주석 설교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웨슬레가 신구약을 주석함에 있어 지나치리만치 성서본문을 세분하여 다루는 것은 바로 위간교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웨슬레는 다양한 신앙 선조들의 서적을 읽었는데 가령 1726년 읽은 토마스 아켐프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그로 부터 1-2년 후 접하게 된 윌리암 로우의 '그리스도의 완전'(A Serious Call to a Derout and Holy Life. A practical Treatise on Christian Perfection) 그리고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거룩한 삶 원리와 실천'(The Rule and Exercises of Holy Life)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셋째, 웨슬레의 신학적 경향성을 이해함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우리는 그의 두 차례에 걸친 신앙체험을 빼놓을 수 없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 올더스케잇 거리의 한 모임에 참석하여 로마서 주석의 서문 읽는 것을 듣는 중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믿는 자의 마음속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논하는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나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를 가져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는 소위 올더스케잇 체험 사건과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739년 1월 1일 챨스와 휫필드 및 60여명이 런던 패터레인(Fetter Lane)집회소에서 애찬겸 철야 기도회를 가질 때 "새벽 세시경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여러사람이 땅바닥에 쓰러졌던" 경험이 그것이다. 웨슬레는 이 두가지 사건에 관해 "올더스케잇에서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과 함께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식과 그의 구주되심을 체험했을 뿐이요 위로부터의 능력의 입히움(눅 24, 49; 행 1, 8)은 이때와서 비로소 받았다"고 평하고 있다. 이러한 웨슬레의 체험은 그의 신학사상의 변화에 매우 중요한 분깃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웨슬레의 회심체험은 웨슬레의 사상적 변화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회심전 웨슬레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그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깊은 관심에서 기인했으나 회심후에는 그리스도안에서 알게된 새로운 애정의 힘으로 타인을 위해 자기자신을 내어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회심전에는 펠라기아니즘(Pelagianism)적인 동기 즉 자신이 성도가 되기 위해 기도 순례 금식을 통해 그리고 가난한 자 병든자 옥게 갖힌 자들을 돌보아주는 봉사를 통해 거룩한 삶에 도달하려 애썼다. 그는 이미 회심전에도 매일 2시간 이상씩의 묵상, 성경탐독과 기도 매주 2회의 성만찬 참여 매주 2회의 금식 철저한 금욕 절약을 통한 빈민구제와 감옥심방 및 전도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마음의 확신을 갖지 못했었다. 그러나 회심후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으로 변하였고 따라서 그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되었다. 즉 그의 선행이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갖게 된 믿음이 사랑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웨슬레 자신의 일기(1739년 9월 13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첫째로 그들은(그와 견해를 달리하는 성직자들) 의인을 성화와 동일한 것 또는 의인을 성화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나는 의인은 성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것으로 믿으며 또 성화는 의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믿는다. 둘째로 그들은 우리 자신의 거룩함 또는 선행을 우리의 의인의 원인으로 말한다... 나는 우리 자신의 거룩함이나 선행을 우리 의인의 한 원인으로 믿지않는다... 셋째로 그들은 선행을 의인의 조건으로 반드시 의인전에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행위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믿는다". 상술한 것처럼 웨슬레는 신앙체험이전부터 경건한 신앙훈련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이 말은 어려서 부터의 경건한 신앙훈련이 웨슬레에게 규칙적이고 행동하는 신앙을 습관화시켰다면 그의 신앙체험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진정한 신적 의미를 제공했다는 이야기이다.
II. 2. 웨슬레와 당시의 상황
난세(亂世)가 영웅을 만든다는 평범한 역사적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기독교 역사의 한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요한 웨슬레의 등장 역시 그 개인의 출중한 소양외에 그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맥락이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흔히 웨슬레가 활동했던 18세기를 가리켜 3R시대(Reason-이성시대, Revolution-산업혁명시대, Revival-종교적 부흥의 시대)라 부르는데 이것은 그만큼 영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모든 면에서 격동의 시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선 그 당시는 자연신론의 합리적 종교가 범람한 시기로 17세기부터 불기 시작한 문화의 세속화가 신앙의 세속화와 맞물려 그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폴란드 토론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이 지동설을 주장한 이후 영국의 정치가요 웅변가인 근대경험론의 선구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경험론을 제창하면서 신 경험보다 인간 경험을 상위에올려놓을 것을 주장하였는가 하면 요한 케플러(John Kepler)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일반화하여 베이컨의 귀납법을 일반화시켜 범신론적 우주관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아이삭 뉴톤(Issac Newton, 1642-1727)에 의해 지동설이 일반인들에게 증명되면서 우주는 하나님의 단독 무대가 아니라 엄격한 인과법칙을 따르는 법적 세계로 변했으며 지구도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 많은 천체중에 지극히 작은 한 점으로 불변의 법칙을 따라 운행되고 있음이 인식되었다. 한편 네덜란드의 유태인 철학자인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 범신론을 제시하면서 만물은 무한한 본질인 신과 자연(all is God or Nature)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인식론적 경험철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종교가 반드시 합리적이어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자들의 영향으로 대개의 경건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은 일원론적-범신론적 경험쪽으로 빠져들었으며 종교가 이성의 초월한 경험 저편일 수 있으나 이성에 배치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런 사상적 경향속에서 특히 기독교에 심각한 위해를 끼친 것으로 이신론(Deism)을 들 수 있는데 철학적인 신은 인정하되 그 신은 창조주일뿐 이 세상에는 관여하지 않고 우주 그 자체에 일임되어있다고 주장하는 이 자연신론자들은 기독교를 자연주의화 하는 한편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하는데 주력하였다. 이 운동의 대표자인 틴달(Mattew Tindal)는 1730년 '창조시기로부터의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 자연종교란 순수한 것으로 어떤 종교가의 교리나 농간에 의해 변경되지않음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1. 신은 완전하다. 완전하신 신이 주는 종교 역시 완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계시는 불필요하며 이 종교에 어울리지 않는다. 2. 성서는 불완전한 책으로 성서기록에는 오류가 많으며 무가치한 것이 많다. 3. 인간에게는 이성이 궁극적 기준이다. 이성이 계시의 기초이며 신앙의 표준이 된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성 아래 교회가 영적인 힘을 잃고 무능력의 상태로 빠져들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존 웨슬레의 재 발견'을 쓴 셀(G. Cell)은 자연신론자들을 위시해 인본주의가 지배하던 그 당시에 영국 교회는 개혁자들의 노선을 떠나 인본적 아르메니아주의로 기울어졌고 따라서 복음주의에서 떠난 영국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채 선포해야 할 복음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진단한다. 프랜시스 맥코넬(Francis J. McConell)감독의 시대평가 역시 동일한 동일한 궤도를 그리고 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보다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복음을 나쁜 소식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합리성의 추구는 교회로부터 역동적 성격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으며 골드 스미쓰(G. Smith)가 지적한 것처럼 설교자들의 설교는 "일반적으로 메마르고 방법론적이며 사랑이 결핍된 열정부재 그 자체였으며 회중보다 원고와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설교하느라 조는 청중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따라서 성직자들에게서 교회밖의 사람들에 대한 구령운동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고 빈민 노동자를 비롯한 많은 대중이 교회의 목회권밖에 방치되고 있었다.
둘째로 18세기의 영국은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변화하는 산업혁명의 전야시기로 급격한 사회구조의 변화가 몰아친 대변혁의 시기였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 1819)가 1769년 증기기관차를 발명하였고 제임스 하그레이브스(J. Harhreaves, ?-1778)는 방적기를 발명하여 섬유공업의 전기를 마련함으로 1778년 영국 전역에 이 기계가 2만여대나 보급되었다. 또한 다알비(Abraham Darby)는 1708-9년에 철제련에 석탄사용하는 방식을 개발하여 석탄생산이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필연적으로 농업 위주의 사회를 산업사회로 급격히 변화하게 하는 토대를 제공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신흥 산업도시들이 등장과 인구의 도시집중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랭커셔(Lancashire) 지방의 인구가 8천명에서 9만5천명으로 급증한 것은 그 한 예라 할 것이다.이러한 변화는 수공업자들과 농민들의 파산을 몰고 왔으며 중산층 농민 대부분이 생산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존하는 많은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보장없는 도시빈민층의 자립기대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국국교회는 아무런 전도활동도 전개하지않았고 따라서 도시빈민층과 하류계층민들의 영적인 삶은 점차 황폐해져 갔다. 이러한 영적 피폐가 도덕적인 무질서로 연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트레블리안(Trevelyan)의 지적처럼 그 당시의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도박장과 다를 바 없었고 닭싸움 개교미등 잔인하고 성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내기 경기가 범람하였는가하면 웨슬레가 술을 '유행하는 독약'(fashionable poison)이라 부를 만큼 전 영국이 음주와 도박으로 찌들어 있었다.
셋째는 18세기는 분파와 부흥 그리고 선교의 시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18세기는 종교적 도덕적으로 병든 세기였다. 특히 영국 국교인 성공회는 사회를 개혁시켜나가는데 아무런 주도적 역할도 하지못한 채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병든 교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다양한 각성운동이 18세기들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것은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다양한 군소 교단의 출현과 다양한 선교단체의 설립이 그것이다:
1) 분파운동의 시효는 에베네저(Ebenezer, 1680-1754)와 그의 동생인 에르스킨(Ralph Erskine, 1685-1752)의 지도아래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개혁장로교회를 들 수 있는데 이교파는 군중집회를 통해 대부흥 각성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두 번째 각성운동은 1730년대 중반 하웰 해레스(Howel Harris, 1714-1773)와 다니엘 로우렌즈(Daniel Rowlands, 1713-1790)의 주도하에 일어났는데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칼빈주의적 감리교회이다. 이들은 웨슬레 형제의 운동에 동참하였지만 그들 자신의 칼빈주의적 성향이 웨슬레와 맞지않자 1740년 결별을 선언하고 스코틀랜드에 칼빈적 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한편 웨슬레는 야곱 스페너(Phillip Jacob Spener)가 경건동지회(collegia pietatis)를 조직한 것처럼 영국 국교안에 머물면서 교회안에 작은 교회들(ecclaesiolae in ecclesi)로 소집단을 구성하여 교리공부 성경공부 성도의 삶, 신생, 봉사활동등 훈련을 통해 교회안에 작은 누룩의 역할? 감당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영국국교가 이 작은 누룩을 수용하려하지않자 이들중 일부는 성공회로부터 이탈하여 1779년 헌팅턴(Huntingdon)파에 의한 웰쉬감리교회(Welsh Methodist Church)를 설립하였다. 웨슬레가 이끄는 신도들은 끝까지 성공회안에 머물려 하였으나 웨슬 리가 사망한후(1791년) 웨슬레안 김리교회(Weslyan Methodist Church)를 설립하여 국교회로부터 분리하게되었다.
2) 이시기는 또한 다양한 선교단체가 설립되어 활발한 선교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1701년 제임스 오글톱(James E. Oglethorpe)장군은 해외복음선교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를 설립하였는데 웨슬레 형제가 미국의 조지아주 선교를 위해 1735년 미국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선교회의 선교사 자격에 의해서 였다. 1649년에는 뉴잉글랜드선교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가 설립되었는데 이 단체는 토인들의 선교를 목적으로 존 엘리오트(John Eliot, 1604-1690)가 조직한 단체였다. 또한 영국국교회측에서도 선교에 대한 비젼을 가지고 선교단체를 구성하였는데 1699년에 세워진 기독교 지식보급회(Society for Prompting Christian Knowledge)가 그것이다.
이처럼 웨슬레가 활동했던 18세기의 영국은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혼란과 계층간의 격차가 극대화되던 시기였고 도덕적 기강이 땅에 떨어진 문란한 시기였다. 기독교 역시 철학적 이성적 신앙이 주류를 이루었고 따라서 신앙적으로 영적 침체가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여러 분파활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무능한 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복음을 복음되게 하려는 일단의 각성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던 영적 염원기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한가운데에서 웨슬레는 사회를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복음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