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은 극심한 권력 투쟁을 하여 폼페이우스-시이저-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로 차례로 권좌가 이어졌다.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승인을 얻은 총독들이 지역들을 다스렸다. 헤로데스(헤롯 대왕)는 기원전 37년에서 기원전 4년까지 권좌에 있으면서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였다. 예수 탄생 시 유아살해를 명령하였고, 이두매(에돔)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고, 가족들까지 제거하였으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고, 도시를 건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에드워드 로제 지음, 박창건 옮김의 『신약성서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를 타자쳐서 올린다.
유대에서 서로 대립하여 있던 두 파벌은 폼페이우스의 호의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하여 애썼다. 처음에는 아리스토불이 좀 더 유리한 기회를 가져 그의 계획이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틴에 대한 결단을 미루자 아리스토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사적인 수단으로 그의 지배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의심을 하게 되어 예루살렘까지 진격하였다. 다마스쿠스는 로마의 경고로 물러났다. 아리스토불과 그의 추종자들은 도시 안에 보루를 쌓고 항거하였으나 3개월 동안의 포위 후에 그들의 저항은 무너졌다.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갔으며 또한 지성소(至聖所)를 실제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성소에서 아무것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곧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명하였다. 대제사장만이 접근하는 지성소 앞에서 이방인이 멈추어 서지 않았다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죄를 지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전에 대한 무서운 모독으로 보였다. 바리새인들의 무리 가운데서 유래된 솔로몬의 시편에는 폼페이우스를 통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풍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인이 교만하게 망치로 튼튼한 성벽을 무너뜨렸으며 당신은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 당신의 제단에 올라가 거만하게 신발을 신고(제단을) 짓밟았습니다. 하나님의 제물을 불신앙으로 더럽힌 예루살렘의 아들들이 주의 성소를 모독하였기 때문입니다”(Ps. Sal. 2:1-3). 이러한 탄식에 이어서 곧 다음과 같은 기도가 계속된다. “주님, 이방인들이 쇄도할 때 예루살렘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당신의 손을 거두어 주소서”(Ps. Sal. 2:22).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틴의 상황을 정리하였다. 아리스토불은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안티고누스와 함께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히르칸은 다시 대제사장의 직위에 임명되었다. 경계가 새롭게 그어졌다. 해안 지역에 있는 도시들은 독립하였다. 즉 하스모네어 왕국에 종속되었던 동부 요르단 땅의 헬라주의 도시들은 북부의 다마스쿠스에서 남부의 필라델피아(오늘의 암만)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운 도시 동맹으로 통합되었다. 데카폴리스라고 불리는 이 동맹은-즉 열개의 도시들-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신약성서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막 5:20, 7:31, 마 4:25). 사마리아에도 독립이 주어졌다. 그래서 대제사장에게는 예루살렘 제의(祭儀) 공동체에 직접 소속하여 있는 지역, 즉 유대와 동부 요르단 땅의 갈릴리와 베뢰아의 내륙 지역만이 남게 되었다. 시리아에 있던 로마의 식민지 총독 가비니우스(Gabinius)는 기원전 57년에 팔레스틴을 직접 식민지 총독에 예속되는 다섯 개 행정 구역으로 분할하였다. 유대는 예루살렘과 가자라(Gazara)와 여리고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갈릴리는 세포리스(Sepphoris) 구역으로, 베뢰아는 아만투스(Amanthus)구역으로 정해졌다. 이러한 질서는 상당히 잘 고려된 것이어서 나라의 내부에서 계속되는 불안과 외부에서 오는 충돌이 새로운 동요를 심하게 야기하지 않는다면 평화로의 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불과 그의 아들들이 로마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후에 곧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히르칸의 나약한 직무수행에 불만을 품고 그 때문에 아리스토불에게 동정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무력으로 그가 팔레스틴에서 그의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게 저지하였다.
로마 제국의 극심한 권력 투쟁은 팔레스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의 통치하에 있던 히르칸과 그의 백성들은 폼페이우스와 시이저(Caesar) 사이의 싸움에 휩쓸렸다. 그 후 시이저가 승리하고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48년에 살해되자 히르칸과 안티파테르는 재빨리 그리고 운 좋게 승리한 쪽 파벌에 가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시이저를 위하여 이집트에 원군을 보내서 그의 호의를 샀다. 시이저는 예루살렘 제의(祭儀) 공동체에 지금까지 누려오던 권리를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특권을 부여하였다. 즉 욥페(Joppe)시를 다시 대제사장의 통치 영역으로 편입시켰으며, 히르칸은 대제사장의 직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고 로마의 동맹자와 대공(大公)으로 불렸다. 안티파테르는 세습적인 로마 시민권을 받았으며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서 로마 제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보증인으로서 로마에 충성하는 총독의 직위가 옛부터 전해오는 대제사장의 직위에 대항하게 되었다. 유대는 로마 군대를 월동시켜야 하는 의무에서 풀려 자유하게 되었다. 방해 받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성전 공동체뿐만 아니라 제국 내에 있는 회당 공동체에도 보장되었다. 그래서 유대교는 이때부터 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안티파테르는 이러한 조정을 통하여 강력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는 파자엘 (Phasaël)에게 유대의 통치를 위임하고 헤로데스(Herodes)에게는 갈릴리의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그의 이 두 아들들을 그의 세력에 참여시켰다. 헤로데스는 갈릴리에서 소위 도둑떼라 불리던 유대 민족주의 일파의 폭동을 진압시키고 본래 사형 판결에 대한 최고의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던 예루살렘의 산헤드린과 상의도 없이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려 하자 그는 친위병들을 대동하고 산헤드린에 나타났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그에 대한 논의를 하지 못하였다.
시이저가 암살됨으로써(기원전 44년) 로마 제국 안에 새로운 혼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히르칸과 안티파테르가 시이저 암살자들의 편에 섰으나 그들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기원전 42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필립비 전투에서 그들에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 후에 안토니우스는 제국의 동부를 통치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거주하였다. 안티파테르는 살해 음모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히르칸과 안티파테르의 두 아들들은 안토니우스에 의하여 그들의 지위가 보장되었다. 그 이후 히르칸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헤로데스와 파자엘은 그 땅을 다스렸다. 안토니우스는 언제나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와 팔레스틴에 대하여는 많이 돌아볼 수 없었다.
그때 파르테르 유목민이 동부에서 침입하여 왔다. 아리스토불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 때까지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권력을 쥐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그는 그의 소원이었던 목표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파르테르 유목민은 히르칸과 파자엘을 사로잡았다. 파자엘은 자결하였으며 히르칸은 안티고누스에게 넘겨졌다. 안티고누스는 그의 큰아버지인 히르칸의 두 귀를 잘라 버렸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직위를 수행 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안티고누스가 그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의 직위를 넘겨받았으며 파르테르 유목민은 그의 직위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그는 3년 동안 그들의 도움을 받아 대제사장과 유대왕으로 통치하였다(기원전 40-37년). 이렇게 하여 히르칸과 파자엘은 제거되고 헤로데스만 남게 되었다.
헤로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행동을 취하였다. 즉 그는 로마로 도망가서 로마의 도움과 보호로 안티고누스와 파르테르 유목민에 항거하였다. 기원전 40년에 그는 로마로 와서 거기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신뢰와 도움을 받았다. 원로원의 공식적인 결정으로 그는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땅 없는 왕이었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는 그의 원수들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파르테르 유목민을 몰아낼 수 있었던 시리아에서부터 그는 로마의 도움으로 팔레스틴에 진격하여 갔고 기원전 3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는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이로써 지배권을 한 번 더 장악하려던 하스모네어의 마지막 시도는 분쇄되었다. 헤로데스가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헤로데스는 로마의 지지 아래 권력을 다시 찾은 것처럼 로마의 도움으로 지위를 확고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하였으나 과감한 결단을 하고 단호히 행동하는 대담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이집트에서 로마 제국의 동부를 다스리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비록 자기의 이익에 어긋나더라도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래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간청으로 해변가의 도시들과 여리고를 그녀에게 주었을 때에도 싫어하는 기색을 띨 수가 없었다. 그는 영리하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로마 지배자의 지지를 얻는 것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였다. 후에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굴복하자 헤로데스는 가능한 한 빨리 제국의 이 새로운 지배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였다. 그는 로도스(Rhodos)에 머물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서 지금까지 안토니우스의 편에 가담했었음을 분명하게 자백하고 그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말과 행동들은 빗나가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스를 유대의 왕으로 확정하여 주었으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던 도시들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헤로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호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를 교묘하게 유지시켜 나갔다. 아우구스투스 통치와 함께 로마 제국에 찾아 온 평화는 팔레스틴에도 찾아 왔다. 마침내 이 땅은 전쟁으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헤로데스는 우정이나 가족에 관계없이 그의 통치의 적들과 자기의 세력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였다. 하스모네어 가문의 출신인 마리암네 (Mariamne)와의 결혼을 통하여 옛날 왕족과 유대를 맺었다. 그는 이두매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동족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염려로 늘 불안해하였다. 비참한 불구자가 되어 더 이상 대제사장의 직위에는 쓸모가 없게 된 늙은 히르칸은 살해되었다. 헤로데스 자신은 제사장의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에게 순종을 잘하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 후 그의 장모와 하스모네어가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간청에 못 이겨 그의 젊은 처남 아리스토불에게 대제사장의 직위를 주었다. 그러나 헤로데스는 하스모네어가(家)가 그에게 위험스러우며 그를 몰아내려 할 것이라는 염려를 버리지 않았다. 1년 후에 아리스토불이 목욕탕에서 살해되었을 때 암살범은 헤로데스가 고용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공개된 비밀이었다. 그러나 왕은 대중들 앞에서 대제사장의 죽음에 대하여 몹시 슬퍼하는 체 하였다. 하스모네어 가에 대한 그의 질투는 마침내 극에 달하여 그의 부인인 마리암네 마저 죽여 버렸으며 그 얼마 후에는 그녀의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도 죽여 버렸다. 그는 큰아들 안티파테르를 사랑하였으나 그가 죽기 직전 그 아들마저 배반자와 내란의 선동자라고 하여 죽여 버렸다. 헤로데스의 행위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들레헴의 유아 살해에 관한 신약성서의 이야기는 이러한 그의 성격의 모습과 일치한다(마 2:16). 헤로데스는 그의 지배가 어느 편으로든지 위협을 받을 때는 언제나 감시를 하였으며 가혹하고 포악한 조치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왕국에 적으로서 위험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헤로데스의 왕국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특히 옥타비아누스의 선물로 그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된 그 지역 안에 살던 이방인들도 속하였다. 헤로데스는 이방인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던 하스모네어의 정책을 계속하지 않고 희랍인과 유대인을 서로 동등하게 취급하였으며 왕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희랍인들에게는 희랍인이 되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주변을 교양 있는 헬라주의자들로 에워쌌으며 희랍 도시들 안에는 목욕탕, 극장, 체육관, 성전 등의 건축 활동을 장려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대인 왕이 희랍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에 격분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성전을 확장하고 개축하면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성전은 옛날 솔로몬 왕 시대에 가졌던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거대한 성전 건축에 있어서 왕은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건축되도록 배려하였다. 성소는 조심스럽게 덮여있어서 아무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디아스포라에게도 헤로데스는 유대교의 보호자로 등장했으며 회당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을 장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그의 엄격한 통치와 그를 반대하는 활동을 무너뜨리기 위한 테러로 말미암아 그는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에 반하여 그는 헬라주의화된 주민들에게서는 유대인들에게서보다 훨씬 지지를 받았다. 파괴된 도시 사마리아 자리에 아우구스투스의 영예를 위하여 세바스테(Sebaste)라는 이름이 붙여진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희랍어 Sebastos=라틴어 Augutus=존엄자). 바닷가에는 항구가 건설되었다. 이 항구는 바다로 내뻗은 제방을 통하여 모래 더미를 보호할 수 있었다. 이 도시에는 많은 건축물들이 세워졌으며 그의 고귀한 은인의 이름을 따라 카이사레아(Caesarea)로 명명되었다. 온 나라가 튼튼한 성곽으로 둘러쌓였다.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아 성이 성전 지역 바로 옆에 세워져서 헤로데스는 늘 이곳에서 성소 주변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감시할 수 있었다. 그는 사해(死海)의 서쪽 바닷가에 가장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였다. 즉 마사다(Masada) 성은 거의 난공불락으로 산의 정상 위에 세워졌다. 헤로데스는 여리고에 겨울에 머무를 수 있는 궁전을 세우게 하였다. 이러한 건축 활동의 증거들을 지금도 그 땅에서 볼 수 있다. 소위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건물이 헤로데스 시대의 성전 건물로 남아 있고 안토니아 성의 기초가 지금도 남아 있다. 여리고, 카이사레아, 마사다와 그외 다른 지역에서의 발굴로써 거대한 건축의 전체 규모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이러한 요새의 건축은 그의 지배를 안전하게 해 주었다. 헤로데스는 그의 영예를 위하여 건축을 할 수 있도록 외국의 도시들에 희사를 하면서 그의 명망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이교적 제의(祭儀)들을 장려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자기네들의 관용을 명백히 나타내고자 하였던 헬라주의 왕들의 선례를 따라서 행동하였다.
첫댓글 기다리던 좋은 시리즈입니다. 로마 역사부터는 조금 더 친근한 것 같습니다.
네, 로마부터는 친숙하지요. 클레오파트라, 시저 영화도 많이 보았고요.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나 후에는 정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아프리카 부대에 의해 마그누스(대왕)라는 칭호로 불렸다.
정치가로서 무능했는데 그 까닭은 음모나 무자비한 행동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에서 솔직함과 일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군사지도자로서 폼페이우스는 진정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했지만, 용의주도하고 철저했으며 완벽한 행정가였다. 그가 가슴에 품은 제국의 포부는 결코 카이사르보다 협소하지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전략구상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카이사르에게 넘겨주고 제해권과 동방의 자원에 의거하여 이탈리아의 카이사르 세력을 고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고,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루스 평원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3p3654b
황제가 되지는 못 했으나 대왕으로는 불리는군요.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 역사에 영향을 끼친 것이 조금 신기하게 느겨집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린 최후의 내전에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패배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하 장교가 되어 갈리아 중부·북부에서 카이사르가 벌인 정복사업의 마무리 단계와 그후 활동에 참여했다. 카이사르 사후, 동방 속주의 행정기구를 장악했고, 클레오파트라와 정략적 연인 관계를 맺었다. 로마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서 삼두정이 끝나자,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대패했으며,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로 달아난 뒤, BC30년 목숨을 끊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3326b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원작이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는 잘 알려진 스토리입니다. 성경 배경사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발견되는 것이 조금 흥미롭습니다.
@에이프릴 네...어릴 때 TV 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로 나오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는데 당시 장면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에이프릴 공감합니다.
옥타비아누스? 이 사람 인명과 호칭이 조금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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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Divi Filivs Augvstvs,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Gaius Octavius Thurinus,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로마의 초대 황제.
Octavianus라고도 함(~BC 27). 본명은 Gaius Octavius.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된 후의 이름은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4a1996b
초대 황제라면 이 사람이 로마 제국 초기의 권력 투쟁에서의 최후 승자였네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성경에도 등장을 하는 인물입니다.
누가복음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노베 잘 참고합니다.
@노베 가이사 아구스도가 옥타비아누스군요.
본문 2번째 문단의 안티고누스는 아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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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노스 2세 마티아스(Antigonus II Mattathias, 히브리어: מתתיהו אנטיגונוס השני, 재위: 기원전 40년 - 기원전 37년)는 고대 이스라엘을 통치한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 대제사장이다.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기원전 63년 아버지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요한 히르카노스 2세와 다투다 로마 장군 그나에우스 폼페이우스에 의해 퇴위당하자 아버지 및 자매와 함께 안티고노스는 로마로 보내졌다.아버지와 함께 한 차례 탈옥해 유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됐다.안티고노스와 자매들은 유대에 남도록 허락받았다.그 사이 안티고노스의 형제 알렉산드로스는 종종 로마와 히르카노스 2세에게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우루스 가비니우스에게 패배했다.
이하 아래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D%8B%B0%EA%B3%A0%EB%85%B8%EC%8A%A4_2%EC%84%B8_%EB%A7%88%ED%83%80%ED%8B%B0%EC%95%84%EC%8A%A4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이군요. 뭔가 정통성이 약한 하스몬 왕조가 사라지고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 같습니다.
통치자들에 대한 글을 링크하여주셔서 흥미롭게 잘 보았습니다. 지식이 더 풍성하여지네요.
이 포스팅에서 도움 되는 배경사를 읽고 성경을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로마의 지배권 아래에 들어간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내용들이 신약에 더러 나오기 때문에 이 시대 역사를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