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은 1604년(선조37년)에 류성룡이 완성한다.
그후 1633년(인조11년)에 그의 아들 류진이 집필하게 된다.
1647년 16권7책으로 간행되었으며,1695년 일본경도(교토)의 대화옥(야마토야)에서 재간행되었다.
류성룡은 스승인 퇴계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쫓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기대승의 7정(희노애락애오욕)은 4단(인의예지)이 아니면 나오지 못한다.
이이의 정신,넋,혼백,영혼은 물질,육체,자본,하느님(종교)이 없으면 나오지 못한다.
정이,주자의 학설을 이어받은 이황의 지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주리론을 그대로 이어 받은 학자였다.
류성룡은 이황의 제자로 도학에 치우쳐 있는 성리학을 하였으며
정통 성리학에 벗어난 학설을 신봉하였음을 알수가 있다.
화담의 주기설,기대승의 주정설,이이의 이기 이원론적 일원론은
정이, 주자학의 주리론을 뒤집어버린 정통 개혁 성리학이었는데,
유교 원리주의를 주장하며 정이학, 정주학, 주자학의 이론적 원리에 충실하려 하였다.
그래서 이황은 서원을 지어 인간성 회복을 통한 수양철학으로 해탈하려 하였으나,
대실패를 하고 서원의 난립 현상만 벌어지는 원인이되어 흥선대원군 때 가서
서원을 철폐하기에 이르른다.
주자학을 배우려는 유생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서원이 교회 역활을 하고 돈만 내고 몸을 서원에 맡겨 스승들이 대리 해탈해 주기만을
바라였기 때문에 깨닫고 해탈하기는 커녕 유교 원리주의 시대로 회귀해버리는 역퇴보 현상만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징비록은
1936년 조선사 편수회, 195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 연구원, 2003년 최병헌 교수가
영인본을 출간하여 알려지게 된다.
여러차례 간행되면서 징비록 내용이 수정되어 류성룡에게 불리한 내용은
삭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정적이었던 서인, 동인(북인)의 내용은 빠져 있고,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남인으로 분열한 류성룡이 속해있던 서남인의 이순신 내용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은 명실공히 호남과 왜군과의 전쟁이었다.
1593년 3월의 행주대첩도 전라 관찰사 권율,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1만2천명]김천일 호남 의병총대장
창의사겸 수원부사,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의 1천 승병은 모두 호남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라 순찰사 이광의 전력 집중화 전략으로 용인 수지 광교산 전투, 김량장리 전투에서 선봉대가 패하자,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 광주 목사 권율,담양부사겸 창의사 김천일 의병은 퇴각을 못하고
수원 행고산성으로 들어가 왜군의 한양 입성을 저지시키려 북상하였고, 나머지는 호남 수성을 위해
전주성으로 근왕군들이 산개하여 전략적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종대로 북상하였기 때문에 8십리에 걸쳐서 조선군들이 늘어서 있어서
왜군과 맞딱뜨렸다면 몰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왜군은 경기 광주와 에버랜드 방향에서 용인으로 포위하려 들어오고 있었으나,
유격전으로 병력을 나누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산개하여 퇴각하였기 때문에
전주성과 남원성으로 병력을 5만씩 나누어 다시 배치시켰다.
순창의 조인, 남원의 형대원이 주장한 전략대로 돌아간 것이었다.
조인, 형대원은 곡성, 남원성에서부터 전주성을 사수해야 한다며 선조 어가호송을 반대하며
한양방어 [용인 전투]를 거부하고 전주 한옥지구 향교 인근에서 객기를 부리며 난동을 일으켰다.
웅치 [진안 곰티재/모래재]아래에서 1천여 명이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에게 진압당하고 참수당했으나
결과적으로 조인, 형대원의 말대로 된 것이다.
수원 행고산성에서 쉽게 왜군에게 격파당하였고,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 김천일은 강화도로 들어가 왜수군의 한양입성을 차단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그후 최원 병력 8천을 인수받은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가 수원 부사 김천일과함께
전주에서 특별 사수부대를 편성한 부대를 이끌고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이 이끄는 승병1천과 함께
행주대첩을 치루게 된다.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는 전주에서 6천을 이끌고 수원에서 한양 탈환작전을 벌이기 위해
시흥으로 병력을 전진 배치시켰다가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4천을 이끌고 들어간다.
최원은 2천을 이끌고 강화도에서 전주로 내려와 이치, 웅치, 슬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쫓아
최경회와 함께 경북 영덕, 영해까지 추격하여 왜군을 섬멸하고 2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돌아와
직급 강등되었다가 상호군(정3품)으로 다시 승진한다.
이때 최경회가 남원부사에 이어 영덕, 영해부사로 오르게 된다.
화약이 떨어진 소조총융경(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왜군 제6군을 울산까지 추격하여 울산전투를 치룬다.
개전 초기에 선발대로 이일 순변사, 조경 경상 우도 방어사는 상주에서 대패하게 된다.
정기룡은 훈련원 봉사로 조경 휘하에서 참전하였으나 조경이 가평을 거쳐
선조가 있는 곳으로 도망을 가자, 따라가지 않고 경상도에 남아 진주성으로 들어왔다가
장윤과 김면을 따라 고령, 거창 의병을 모집할 때 따라가서 고령, 거창 의병300명을 배정받는다.
조경은 패전책임을 지지않기 위해 선조어가를 호송하여 살아남아 정승반열에 오르는 인물이다.
이런 자들이 선조 곁에서 전략 전술을 지휘하였기 때문에 왜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평에서 변응성등과 함께 왜군을 막는다며 호언장담했다가 왜군의 조총 소리에 놀라
임진강으로 달아나 가평 군민들이 안심하고 있다가 대거 희생된다.
이산해의 7대조가 목은 이색이다.
영덕, 영해출신인 이색은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수장으로 있었다.
이산해는 동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할 때 대북 영수로 있다가
대북, 소북의 부패로 대북은 골북, 중북(유몽인), 육북(홍여순)으로 분열할때 골북의 수장으로 있었다.
골북은 경북 북동부지방, 중북은 중부지방(대구), 육북은 서부지방을 말한다.
소북은 초기 남이공, 김신국(청풍)등이 이끌었다.
소북은 청소북(청송~청도) ,탁소북(마산, 창원, 진해, 거제)으로 분열한다.
동인 소북은 유영경, 유희분, 박승종 등이 이끌어 가게 되고
대북파로부터 유영경이 계축옥사로 사사당하는 정치공작을 당한다.
대북파는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며 역모로 몰아
계축옥사를 일으켜 소북 영수 유영경이 사사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성리학의 이단파인 도교의 노장철학, 제자백가 철학의 계승자 남명 조식학파의 제자인
이산해 [동인 주리학파], 정인홍, 이이첨, 홍여순, 허균(대구)등이 무서운 정치보복을 해대자,
이이, 이항의 제자였던 서인 주기학파 40여 명이 현실론을 내세워 대북파 정권에
일시 가담하여 협력하여 살아 남는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후 사태 수습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 된 것이었다.
곽재우만 나중에 대북을 버리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고 소북에 힘을 실어주며
은둔생활로 들어간다.
징비록 사극에서 이산해 묘소와 사당이 용인, 예산에 있는 것을 보여 줘서
마치 이산해가 서인 출신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뼈속부터 경북 영덕, 영해 출신이었던 이산해는 고향을 버리고 묘소와 사당을 서인 지역에 두고 묻혔다.
자신의 잘못으로 임란, 정란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죽어서는 속죄하고 서인으로 살고 싶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대목이다.
경기 광주군 낙생면(분당 )출신으로 동인이었던 이완용도 죽어서는 익산에 와서 묻히지 않았던가?
흥선 대원군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전주로는 차마 오지 못하고, 익산에 와서 묻힌 것은,
죽어서는 죄업을 씻어 보고자 하는 기초 성리학적 사고에서 나왔다는 것을 쉽게 알수가 있는 것이다.
[살아서 지은 죄에 대해서 죽어서는 나의 묘를 마음껏 밟으라는 속죄의 의미로 서인 지역이나
해당지역에 묻히는 것임].
요즘 논란이 되었던 예원 vs 이태임 논란에서 보듯이
서인의 성리학적 사고와 동인의 성리학적 사고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원은 죄가 없기 때문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
서인의 주기론적 성리학적 사고는 서경덕,기대승,이이,성혼,박순,김인후,이항,조헌,윤증 철학으로 대변되고,
동인의 주리론적 성리학적 사고는 이언적,이황,조식,류성룡,김성일,윤휴,허목,허적 등으로 대변된다.
서인의 성리학은 주자학을 혁명적으로 혁파하여 근대 이성철학으로 발전하는 학문이고,
동인의 성리학은 도학에 치우친 유교 원리주의에 충실한 학문이었다.
이미 이성적으로 정도를 넘는 욕설을 하였기 때문에
예원이 눈을 치켜 뜨던 반말을 하든 가고 난뒤 혼잣말로 욕을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현대법적으로 봐도 예원은 무죄다.
이에 비해서 상대방은 공갈죄, 협박죄, 모욕죄, 살인 미수죄까지도 추가할 수가 있다.
수영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물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닷물에 들어가면 죽게 되므로, 거기에 신경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반말했다고 촛점을 맞추는 게 말이 되는냐 이말이다.
본인에게는 생존이 달려있는 문제라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과거 군부 독재시대 당시 마음에 드는 연예인이 있으면
가쉽거리를 만들어 도덕적으로 매장시킨 후 화면에서 멀어지게 만든 다음 조용해지면
매파를 보내 그녀를 이용하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원이 죽으면 상대방은 아에 일어설 기회 마저 사라지게 된다.
예원이 살아야 상대도 살아날 기회가 있는 것이다.
만약 우결에서 예원이 하차한다면 인권 침해로 그동안 패러디로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한
소송전이 벌어지게 될수도 있다.
제3차 예송논쟁을 벌여야 할 판이다.
SNL개그쇼에서 나르샤가 한 것이나 궁예 VS 왕건의 페러디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피자, 화장품, 닭을 비유한 패러디 광고는 반드시 인권 침해로 문제가 되고도 남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구분해 놓고 패러디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예원이 잘못한 것인 마냥 일방적인 패러디는 후일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용히 지나가는 길은 예원이 우결에 남는 것이 둘다 사는 길이다.
오히려 이것으로 상대방은 살아날 구멍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징비록은 교훈의 대상이 되지만,
그 근원의 본질은 성리학의 정통파와 이단파와의 싸움이 근원이었다.
현대 역사와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나마 주리학파 이황의 제자였던 류성룡이 남인을 대변하며 가장 뛰어난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징비록은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사용할때 리(사단/물질,육체,자본,하느님(종교))쪽에 치우치지 않고,
기(칠정/정신,넋,혼백,영혼)쪽에 약간 더 치우쳐서 사고하는 체계를 갖춰
상호통제해야 한다는 이론적 확립을 통해 널리 국민들에게 가르치려 하였던 것이
기대승, 이이의 주기학파 성리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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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계속 학설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며 발전해온 학문이기 때문에,
주자학을 고수하는 것이 정통 성리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