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남성에서 5일(4)
(2024년 1월 3일∼7일)
瓦也 정유순
3-1. 낙양 주왕성 천자가육박물관과 관림(2024년 1월 5일)
밤늦게 도착하여 아침에 눈을 뜨니 낙양이다. 뤄양[낙양(洛陽)]은 황허[황하(黃河)]의 지류인 중국 하남성 서부 뤄허강[낙하(洛河)] 유역에 위치한다. 중국 역대 아홉 왕조의 고도로 역사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중국 속담에 ‘살아서는 소주 항주에 있고, 죽어서는 낙양의 북망산천에 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 민요에도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 명이냐”라는 노랫말이 있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주(鄭州)와의 거리는 140km이다.
<낙양의 딩딩먼[정정문(定鼎門)야경 - 네이버캡쳐>
한편 정식명칭은 전한(前漢) 때 낙읍(洛邑)으로 불리다가, 후한이 AD25년에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 명칭인 낙양으로 고쳤다. 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평정하자, 493년에 효문제(孝文帝)가 산서(山西)의 대동(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하였다. 호수(戶數) 약 11만, 불사(佛寺) 1,378을 헤아렸던 당시의 모습이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기술되어 있다.
<천자가육(天子駕六)>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605년에 병란으로 황폐한 북위의 낙양성 서쪽 15km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로운 성을 건설하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낙양의 전신이다. 당(唐)나라도 부도로서의 낙양의 지위를 이어받아 동도하남부(東 都河南府)라고 불렀으나, 수·당시대에는 서쪽의 장안이 정치도시인데 대하여 낙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 쇠퇴하여 오대(五代) 때에 후당(後唐)의 국도가 되고, 북송(北宋) 때까지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나 원(元)·명(明)·청(淸) 때에는 지방 도시로 전락하였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한때 성도가 되어 1948년에 시(市)로 승격하였고, 성도인 정주(鄭州)와 더불어 하남성의 2대 공업도시가 되었다. 삼문협(三門峽)댐과 미사일·항공기지 등이 있어 군사적으로도 크게 중요시된다.
<낙양 신시가지 - 네이버캡쳐>
조반을 마친 발걸음은 톈쯔자류박물관[천자가육박물관(天子駕六博物館)]을 찾아간다. 이 박물관은 역사박물관으로 2002년 낙양 문화광장을 조성하다가 발견된 1만 6000㎡ 규모의 동주(東周)시대 거마갱(車馬坑) 유적 위에 지하박물관을 만들어 2004년 문을 열었다. 주(周)나라 천자(天子) 능묘에 함께 순장된 거마갱으로 알려졌으며, 모두 18기의 거마갱이 발견되었다. 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시대별로 고분의 형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천자가육(天子駕六)박물관 입구>
박물관을 복도를 따라 관람하는 중에 세 발 달린 솥과 함께‘열정제도’라는 안내판이 눈에 띤다. 열정제도(列鼎制度)는 신분 계급에 따라 청동기의 매장 수량을 달리한 제도다. “천자는 9개의 정과 8개의 궤를, 제후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한다.”라고 춘추공양전에도 나온다.<天子九鼎, 諸侯七, 卿大夫五, 元士三 : 천자구정, 제후칠, 경대부오, 원사삼>
<세 발 달린 솥>
이 박물관은 ‘樂者 天地之和也(악자 천지지화야) 禮者 天地秩序也(예자 천지질서야)’를 강조한다. ‘예를 아는 자(禮者)는 천지간의 질서를 지키는 일이요(天地秩序也). 즐거운 자(樂者)는 예를 지킴으로서 천지간의 화합을 이룩하는 것(天地之和也)’이라는 뜻 같다. 즉 주나라의 예악(禮樂)제도는 천자와 제후 등이 마땅히 따라야할 계층(階層)제를 향유하여 노예제도를 공고히 하는 규범 같다. 이는 무덤에서 발굴된 순장(殉葬)유물에서 나타난다.
<순장된 유물>
<출토된 도자기>
박물관을 나와 바쁘게 관림으로 이동한다. 관림(關林)은 삼국지의 영웅으로 촉(蜀)나라 무장인 관우의 수급(首級)이 묻힌 곳이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관우는 낙양을 베게삼아 잠을 자고 몸은 당양(當陽)에 누웠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800여 년 전 관우(關羽)는 손권에 사로잡혀 참수당한 후 조조에게 목을 보네고, 시신은 당양에 묻었다. 조조도 향목(香木)으로 몸을 만들어 왕의 예우를 갖춰 낙양에 장사를 지낸다.
<관림 입구>
대문 우측에는 충의(忠義), 좌측에는 인용(仁勇)이라고 써 놓았다. 이는 황제로 추존될 때 부여된 시호의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에서 따온 문구(文句) 같다. 관우는 송나라 휘종 때인 1102년 충혜공의 공작 작위를 받았고, 1107년 무안왕에 봉해졌으며, 명나라 신종 때인 1613년 관성대군, 청나라 선종 때인 1828년에는 관성대제에 봉해진다.
<충의>
관우는 사후에 민간의 존중을 받는다. 민간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되어 ‘관공(關公)’으로 존칭된다. 역대조정에서는 그에게 작위를 봉한다. 청나라 때 광서제는 ‘무성(武聖)’으로 받들어 ‘문성(文聖)’인 공자(孔子)와 같은 반열에 올렸으며, 묘호도 공자는 공림(孔林)으로, 관우는 관림(關林)으로 하였다. 나중에는‘개천고불(蓋天古佛)’에 봉해서 불교에서도 그를 ‘가람보살(伽藍菩薩)’이라고 부른다.
<인용>
대문으로 들어서니 충의와 인용을 쓴 깃발이 펄럭인다. 처음 지을 당시엔 대문이었는데, 바깥에 대문이 생겨 의문(儀門)이 됐다. 의문을 통과하니 너비 4m, 길이 35m의 석사어도(石獅御道)가 이어진다. 양쪽에 돌로 만든 사자가 52개씩 모두 104개가 도열해 있다. 이는 사당 건립 27년 후 낙양 상인들이 사업이 번창하고 재물이 확충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담아 기금을 모아 만들었다. 그래서 관우는 어느 순간 민간 신앙의 주인공이 됐다.
<의문(儀門)>
어도 끝에는 대전인 계성전(啓聖殿)과 딱 붙은 곳에는 제사를 지내는 배전(拜殿)이 있다. 향불 사이로 대전에 앉은 관우가 보인다. 웅장한 기세가 높고도 높다는 기장숭고(氣壯嵩高) 편액도 보인다. 이 편액은 서태후(西太后)가 용문석굴과 함께 관림을 찾았다가 관우에게 분향한 후 현장에서 직접 써서 하사한 것이다. 관우는 황제의 격식에 맞게 12줄 면류관을 쓰고 황금빛 비단 용포를 입었다. 북두칠성이 그려진 칠성판(七星板)을 들었다.
<관우 상>
계성전 뒤는 재신전(財神殿)이다. 언제부터 재물의 신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명나라 중기에 상업의 발달과 관련하여 관우가 재신이 됐다고 추정한다. 신전에는 관우를 중심으로 주창과 관평이 있고, 재물과 이익을 불러온다는 동자 둘이 나란히 붙어있다. 중앙에 걸려 있는 광소일월(光昭日月)이란 편액은 ‘해와 달처럼 그 빛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서태후와 함께 왔던 광서제(光緖帝)가 썼다고 전해진다.
<광소일월(光昭日月) 편액이 걸린 재신전>
재신전 왼쪽 건물은 삼국지의 관우·장비·조운·황충·마초 등 오호장군을 위한 오호전(五虎殿) 있고, 오른쪽에는 부인인 호씨와 아들 관흥, 딸 관봉을 위한 성모전(聖母殿)이 있다. 아들 관흥은 제갈량의 총애를 받고 북벌에 참여한다. 딸 관봉은 손권이 사돈을 맺자고 했으나 관우가 거절했다. 혼란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래서 오히려 신이 됐는지도 모른다.
<오호전(五虎殿)>
재신전 뒤는 침전인 춘추전(春秋殿)이다. 관우가 역사책인 춘추(春秋)를 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정사 삼국지에 대한 배송지(裵松之)의 주석에 따르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밤새 촛불을 켜고 즐겨 읽었다고 나온다. 관우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나름 역사에 정통했다. 공자가 편찬했다는 춘추를 노나라 학자 좌구명(左丘明)이 주석서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춘추(春秋)를 들고 있는 관우>
묘역 앞 패방 중앙에 ‘漢壽亭侯墓(한수정후묘)’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황제로부터 받은 한수지역을 다스리는 정후라는 관리의 묘라는 뜻이며, 정후는 황족이 아닌 사람에게 내리는 최고의 벼슬이다. 한때 조조는 관우의 마음을 끌기 위해 헌제(獻帝)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얻은 벼슬이다. 그 당시 한수지역은 오나라의 영토라 실권이 없었지만, 관우는 처음으로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벼슬을 소중하게 여겨 인장도 만들어 간직했다.
<漢壽亭侯墓(한수정후묘)라 쓰인 패방>
패방과 무덤 사이에 팔각정에는 4.8m의 비석이 있다. 비문에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림(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林)이라 새겼다. 팔각정은 강희제가 세운 비석을 보호하려고 건륭제가 세운 정자다. 강희제보다 앞선 순치제가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를 하사했다. 강희제는 따로 봉호를 하지 않았다. 옹정제를 건너 건륭제는 순치제의 봉호 뒷자리에 영우(靈佑), 가경제는 인용(仁勇), 도광제는 위현(威顯)을 추가했다.
<관성대제(關聖大帝)비>
관림에는 수령이 대부분 300년이 넘은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있는데, 가장 오래된 나무는 700년도 넘었다. 묘역은 전사후묘(前祠後墓)의 형태로 앞쪽에 사당을 배치하고 뒤에 묘를 안치했다. 무덤은 담장으로 에워싸고 높이가 10m, 넓이가 250㎡정도다. 많은 사람들은 사당 앞에서 향을 사르고 소원을 빈다. 무덤 위에 나무가 많은 것은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팔각정 비각과 숲이 무성한 관우 무덤>
관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유비(劉備)·장비(張飛)와 마을 대장간에서 만들었고, 무게는 82근에 달한다. 관우가 죽은 후 오나라의 장수 반장(潘璋)이 손권(孫權)으로부터 관우를 잡은 공로로 하사받아서 사용하다가, 관우의 차남 관흥이 반장을 죽임과 함께 원수도 갚음으로써 아버지의 청룡언월도를 되찾았다. 그 청룡언월도를 2012년에 민간인의 기증으로 지은 도정(刀亭)에 전시되어 있다.
<청룡언월도를 전시한 도정(刀亭)>
대충 둘러보고 나오는데 들어갈 때 스쳤던 대리석에 새겨진 비문에 관심이 간다. 관우가 조조에게 붙잡혀 있을 때 자신의 충성심을 댓잎에 몰래 표현하여 적은 ‘관제시죽(關帝詩竹)’은 관우의 굳은 본심을 보는 것 같다.
동군(조조)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고(不謝東君意 : 불사동군의)
붉고 푸르게 홀로 이름을 세우리니(丹靑獨立名 : 단청독립명)
고엽(관우)의 퇴색됨을 미워하지 않기를(莫嫌孤葉淡 : 막혐고엽담)
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終久不凋零 : 종구불조령)
<관제시죽(關帝詩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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