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길목
양미경
봄이다.
노랑나비들이 들판을 수놓는가 싶더니, 어느새 벌들이 날개를 붕붕거리며 이 꽃 저 꽃 넘나든다. 진달래를 따라 연산홍이 무리지어 핀다. 연분홍 꽃에는 아침에 친 듯한 거미줄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 이름모를 풀꽃들이 덩달아 햇살을 즐기며 있다. 봄 햇살 때문이었을까. 비 온 뒤라 풀밭은 초록 냄새로 가득하다. 나는 풀밭에 앉아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모양을 관찰한다.
저 안쪽에 개미의 집이 있는 모양이다. 풀꽃 사이로 개미떼들이 지난겨울의 게으름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바지런하다. 그들은 숙련된 일꾼들처럼 줄을 따라 움직이다가, 반대편에서 거슬러오는 개미를 만나면 자기네들끼리 무슨 정보라도 나누는가 싶더니 다시 줄을 따라 간다.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흰개미집이 생각난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쌀알 만 한 몸집에 각질층조차도 없는 흰개미들의 집을 보면서 그들의 건축기술에 감탄하고 말았다. 거대한 탑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높이가 무려 9m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부드러운 피부를 지닌 흰개미는 밖에 나가면 쉽게 말라 죽기 때문에 지하에 집을 짓거나 땅위에 흙을 모으고 타액으로 굳혀서 오랜 세월에 걸쳐 단단한 '빌딩'을 만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구조는 낮에는 열을 발산하고 밤에는 열을 모아두어 개미가 살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최상의 과학적 구조물이라 한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지역에는 '개미의 사원'으로 불리는 흰개미가 지은 수 천 개의 탑이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들은 이들 흰개미의 집을 헐어 소의 분비물과 섞은 후 그들이 기거할 움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또 벌들은 어떠한가. 벌집의 육각형구조는 오랫동안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었으며, 그것이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구조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벌집의 육각형은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는 가장 경제적인 구조로서 자체 중량의 무려 30배에 가까운 꿀을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 생활을 하는 벌들의 사회적 규칙 또한 엄격하다고 한다. 여왕벌을 선두로 수벌과 일벌이 있는데, 여왕이건 일꾼이건 병정이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여 다른 역할을 탐내거나 시기 하지 않는다 한다. 개미나 벌의 사회성! 그것이야말로 수억 년 동안 그들의 사회를 유지해온 그들만의 특별한 비결이 아닐까.
비록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곤충들에게서 배울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동물의 왕국'프로에서 곤충들이 새끼를 키우는 모습과 공동체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사랑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곤충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부류가 없다는 것이다. 곤충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이나 악감정으로 다른 곤충들에게, 혹은 다수 공동체에 해가 되는 일을 꾸미는 사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만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회는 어떤가. 한편에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범죄가 난무한다. 기억조차도 싫은 버지니아 공대의 총기난사 사건을 야기 시킨 미국 같은 선진국은 극단적 이기주의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후진국은 각기 다른 이익집단의 무력충돌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 받게 한다,.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니다. 부실공사로 건물과 다리가 주저앉는가 하면 이유 없는 불만으로 지하철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곤충보다 찬란한 문명을 만들었지만 어찌 보면 곤충사회보다 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인간은 살고 있지 않은가.
벌처럼, 개미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층 건전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오늘 이 봄볕처럼 나 자신부터 누군가를 따뜻하게 비춰주는 사랑을 하고 있는지를 자문해본다. 자리를 뜨는 내 등 뒤로 '영차, 영차!' 개미농군들의 구령소리가 봄의 길목을 닦으며 밀려오고 있는 듯하다.
양미경 |경남 통영 출생
수필집 《외딴 곳 그 작은 집》
신곡문학본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우수도서 선정, 경남문인협회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