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양척왜(斥洋斥倭)를 외친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
뉴스버스/ 김 준 혁 (역사학자, 한신대 교수)
해월 최시형, 동학의 포교자
..... 동학(東學)..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수운 최제우이다. 또 동학이 천도교(天道敎)로 바뀐 후 사람들은 3.1만세 혁명시 민족대표 33인의 수장 손병희를 떠올리기에,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사람들의 뇌리에 잘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운 최제우가 대구 감영에서 혹세무민 죄로 사형 당하고 동학의 교세가 사라질 즈음, 목숨을 건 최시형의 포교 활동이 있었기에 역사 속에서 동학은 존재할 수 있었다. ... 그의 헌신적인 삶이 아니었다면 동학의 부활과 포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을 만들다
『동경대전』, 『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동학의 기본 사상은 ‘포덕천하(布德天下)’에 의한 보국안민의 후천개벽을 전제로 하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신앙의 대상을 천주(天主, 天, 上帝, 한울님, 하느님)로 하고 마음을 닦아 정성과 공경 그리고 신의를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제우는 깨달음을 얻은 지 4년 만에 ...사형 당하였기에, 동학의 세력을 크게 키우지 못하였고 이론의 체계를 확실하게 다지지도 못하였다.
동학의 이론 정립과 세력을 확장하여 1894년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힘을 키운 이는 바로 최제우가 아닌, 그의 제자이자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다. 그는 최제우가 강조한 시천주 사상을 뛰어넘어, 인간이 곧 하늘이요, 인간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확대하였다.
최제우에 이루어진 유교와 불교 선교(仙敎)의 합일은, 최시형에 의해 한 단계 높은 동학의 도(道)로 만들어졌다. 『동학사』를 저술한 오지영은 그 동학의 도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동학의 도는 유교 같아도 유교가 아니오, 불교 같아도 불교가 아니요, 도교 같아도 도교가 아니오, 정치 같아도 별다른 정치가 아니오, 다만 사람에게 있는 도를 사람으로 하여금 찾게 하여, 사람과 사람이 다 같이 잘 살아 나갈 것을 말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곧 사람이 세 가지 잘 먹고 사는 법을 이름이니, 한 가지는 그 마음을 잘 먹어야 사는 것이오, 한 가지는 그 기(氣)를 잘 먹어야 사는 것이오, 한 가지는 그 밥을 잘 먹어야 사는 일이라 하는 바이며, 사람이 그 세 가지를 잘 먹고 사는 다하고 보면, 도는 스스로 원만대도(圓滿大道)가 될 것이오, 세상은 비로소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될 것이다.”
즉 동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여 사람을 다 같이 잘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학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해월 최시형이다.
- 해월(海月)이란 호를 받다
최시형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용살이 등을 하고 살았다. 최시형의 본명은 경상(慶翔)으로, 최제우가 사는 용담에서 25리 떨어진 경주 검곡에 살고 있었다. 최시형은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17세부터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19세 때 밀양 손씨와 결혼하여, 처가 근처인 경상도 흥해 매곡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8세 때는 경주 신광면 마복동으로 이사하여 화전민 생활을 하며 마을 집강일을 보다가, 33세 때는 다시 검곡으로 이사했다.
최시형은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고 본격적으로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6월 동학에 입교했다. 설교를 듣고 동학의 규범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한울님'의 말씀을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체험했다고 한다.
1862년 3월 최제우는 자신을 체포한다는 소문이 돌아, 경주에 숨어 지내며 거처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최시형이 최제우를 찾아왔다. 최제우는 이에 놀라 말했다.
“그대는 소문을 듣고 왔는가?”
“소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저절로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때 최시형은 그동안 동학의 사상을 공부했음을 말하고, 기름 반 종지로 밤을 새워도 기름이 다 닳지 않았다며 이적(異蹟)이 있었던 일을 전했다. 실제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깊은 수행을 하다 보면 작은 일이 기이한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해 최제우는 '조화의 큰 징험'이라고 최시형에게 일러주었다.
이때부터 최제우는 최시형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시형은 최제우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영해· 영덕· 상주· 흥해· 예천· 청도 등지를 다니면서 포교를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63년 7월 '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었고, 8월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 이때 최제우는 최시형에게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해월’이란 ‘모든 바다를 비추는 달’이란 뜻이다. 즉 .. 최시형이 바다의 달처럼 모든 백성들의 빛이 되어 동학을 널리 포교할 것이고, 백성들을 기득권과 외세로부터 구제하는 사람이라고 천명해 준 것이다. 이는 최제우가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최시형을 미리 후계자로 정하고 이를 선포한 것이다.
“참으로 이른바 첫 공을 이룬 사람은 갈 것이다. 이 운(후천개벽의 운을 뜻하는 듯하다)은 반드시 그대에게서 나올 것이다. 이 뒤로 도의 일을 신중히 간섭하여, 나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라.” 《도원기서》
이는.. 도통의 전수를 뜻한다. 이후 최제우는 경주 남쪽의 포덕에 전념하면서, 그 북쪽은 최시형에게 맡겼다. 그 뒤 최시형은 ‘주인’, 최제우는 ‘대주인’으로 불렸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그는 관헌들 눈을 피해 옥바라지를 하다가 태백산· 안동· 평해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1864년 3월 최제우가 처형되자, 다음 해 1월 평해에서 울진으로 거주를 옮겨 최제우의 부인과 아들을 보살폈다. 같은 해 6월 영양으로 이사한 후 수도에 힘써, 1년에 4차례씩 49일간 기도했으며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외워 받아쓰게 하여 교도들에게 전했다.
사실 그는 한문을 몰랐다. 너무도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여서 한문을 배울 수가 없었다. 수운 최제우는 비록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 최옥(崔玉)의 아들이었다. 최옥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그대로 이은 영남지역 사대부의 최고 학자로 대산 이상정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서자이지만 유일한 아들인 최제우를 사랑해서 아들에게 열정적으로 글공부를 시켰다. 하여 최제우의 학문은 영남 남인의 적통을 잇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시형은 너무도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최제우의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고, 최제우의 죽음 이후 동학의 2세 교주가 된 후 자신의 기억을 ...제자들에게 기록하게 하였다. 그의 기억으로 다시 기록된 것이 오늘날 동학의 모든 경전이다. 여기서 .. 최시형이 진정 한울님을 몸과 마음으로 받들고, 그러한 섬김이 특별한 지혜를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운 최제우의 사후 해월 최시형이 포교를 하러 다니던 시절, 별명은 최보따리였다. 등에 개나리봇짐을 들러메고 전국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숨어서 도(道)를 전파하러 다녔다 하여 ‘은도시대(隱道時代)’라 불리던 시절, 최시형은 보따리 괴짐 하나를 메고 산천 방방곡곡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동학의 세력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최제우의 죽음 이후 산산이 흩어져 가던 동학교도들을 모은 것은 전적으로 최시형의 헌신과 겸손하면서도 강인한 영도력 때문이다.
- 해월의 사상
동학사상 핵심은 ‘생명’을 중시한다는 데 있다.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사람은 누구나 하늘을 모시고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하늘의 도를 추구했다.
최시형은 동학교도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무고히 해치지 말라. 만물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자는 사람을 존중하지 못한 것과 같다.”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라는 최시형의 사상은 특별한 것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탐욕에 의해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져 인간의 생명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최시형은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자연 그 모든 것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한 것이다.
최시형은 이미 100년 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던 여성을 ‘한울님’이라고 높여주었고,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면서 어린아이가 상하면 하늘이 상한다며 ‘어린이 사랑’을 역설했다. 또한 ‘땅에도 하늘이 담겨 있고,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에는 모든 생명이 담겨 있다’며 생태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100년 전 가르침이라고 하기엔, 놀라운 통찰과 철학적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사상은 신(神)만을 공경하는 여타의 종교 사상을 넘어, “사람과 자연을 아끼고 만물을 공경”하는 삼경사상(三敬思想)으로 일체화되기에 이른다.
최시형은 반상과 적서의 차별을 타파하고, 종을 잘 대우하고 노인과 청년을 동등한 예우로 대하라고 했다. 그는 “길가에서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의 뜻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가르쳤고, “부인, 소아의 말이라도 이를 배우라”고도 했다.
또 “집안사람을 한울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우마, 육축을 학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하시니라.”라고 〈내수도문〉에서 일렀다.
최시형은 제자들이 포교를 하느라 너무 고생하였으니 쉴 것을 권유할 때면, “한울님이 쉬는 것을 보았느냐”고 꾸짖으며 나무를 심고 새끼를 꼬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한 최시형이었기에 베를 짜는 며느리를 보고 ‘그가 바로 한울님’이라고 강조하는 ‘일하는 한울님’ 사상을 역설하였다.
해월은 노동의 신성함과 함께,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바로 진리를 아는 것이라는 ‘밥사상’을 널리 강조하였다. 즉 ‘밥 한 그릇’은 우주 대자연의 미물인 곤충들, 그리고 인간들의 협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바로 밥 한 그릇에 진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이다.
이처럼 최시형은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道統)을 계승한 후, 그 교리를 보다 폭넓고 심오하게 체계화시킴과 함께 동학 조직의 재건과 각 지역 기반의 확대, 동학 경전의 집성, 동학의 각종 제도와 종교의례를 제정하였다.
- 동학을 조직화하다
1866년 10월에 최시형은 교조 최제우 탄신일에 모여든 교도들과 함께 계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1년에 2차례의 모임을 통해 흩어진 교도들을 재결속시키고 신앙을 다져나갔다.
1871년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에 영해부에서 '이필제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에 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이후 다시 심한 탄압을 받게 되자, 도피생활을 계속하면서 동학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875년 ‘도(道)’는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최경상에서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1878년 동학의 접소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의 통문을 돌려, 최제우의 뜻에 따라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5월 인제군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했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83년에는 목천군에서 ‘동경대전’ 1천여 부를 간행·보급했다. 1884년 교장·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의 육임제(六任制)를 정하여, 교단을 정비했으며 교세로 확장하였다.
1892년, 1893년 걸쳐 동학교도들은 교조신원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면서 시위를 벌였다. 최시형은 1894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갑오농민전쟁에 처음엔 때가 아니라 하여 반대하다가, 5월에 전주화약을 맺고 일단 해산한 농민군이 10월 다시 봉기할 때, 전체 동학교도에게 총기포령을 내렸다.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것이 천운소치(天運所致)니, 지금은 도인들이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해서 교조의 원한을 펴며 우리 도(道)의 대원을 실현하라”고 하며, 대통령기(大統領旗, 큰 통령의 상징 깃발)와 벌남기(伐南旗, 남쪽을 치는 깃발)를 주어 공주와 이인에서 전봉준과 회동하게 했다. 이에 손병희는 논산에서 전봉준을 만나, ‘척왜양창의기(斥倭洋倡義旗)’를 내걸고 연합전선을 폈다.
최시형은 1894년 12월 말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1897년 손병희에게 도통(道統)을 전수했다. 당시 일본은 최시형을 체포해야만 더 이상 일본에 대한 조선인의 항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학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해월의 최측근 권성우가 강원도 이원에서 체포되었다. 권성우는 엄청난 고문에 시달린 끝에 최시형의 거처를 알려 주고 말았다. 군사들이 최시형의 거처로 체포하러 왔으나, 당시 해월이 너무 심한 병을 앓아 평상시 모습이 아니어서 군사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체포하지 못했다.
체포를 모면한 해월은 강원도 치악산 일대로 숨어들어 갔으나, 목숨이 두렵고 상금이 탐난 동학교도 송경인이 밀고하여, 끝내 원주 서면 송골에서 1898년 3월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72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최시형은 마지막으로 “나 죽은 후 10년 후에 주문 읽는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10년 후 갑진 개화혁신운동이 일어났고, 다시 1919년 3.1만세 혁명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 해월은 다시 태어난다
최시형의 시신은 ... 동학교도들에 의해 여주의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최시형이 ‘유령에게 빼앗겼던 밥그릇을 되찾아, 대낮의 산 사람 앞으로 옮겨놓는 역사’를 한 이천시 설성면 앵산동에서 멀리 보이는 곳이다. 최시형의 묘소 아래에는 손병희의 여동생이며 세 번째 부인인 손시화의 묘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해월 최시형은 ... 수운 최제우에 이어 백성들을 현혹하여 사교(邪敎)를 널리 퍼뜨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그의 포교로 동학은 한 말에 더욱 확대되었다. 천만 명 가까이 동학의 교도가 되어, 외세에 대한 항거를 시작하였다.
그로 인하여 죽은 자의 부활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동학사상은 한반도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반일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어갔다.
이제 해월 최시형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거짓 사이비종교가 난무하고, 검찰을 비롯한 특정세력들이 온 나라의 권력을 독점하고, 미국 일본이 다시 제국주의 국가처럼 한반도에 압력을 넣어 우리 민족의 자산을 수탈하려는 상황이 된 오늘날, 다시 최시형은 부활할 것이다.
최시형이 주장한 여성과 어린이를 존중하는 사회와, 모든 이들이 공평한 대우를 받고 진실된 자유가 넘치는 사회로 발전되는데, 그의 사상이 기반이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진정한 자주의식으로 더 이상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게 될 것이다.
출처; https://www.newsverse.kr/news/articleView.html?idxno=3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