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우주전횡(宇宙專橫)
밤이 깊어갔다.
허나 형운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그는 마검 유장령과 겨루어야 한다.
그가 과연 유장령의 악마같은 검을 막을 수 있을까?
백발을 휘날리며 살인적인 검을 휘둘러대던 유장령의 모습을 생각하자 그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패천검 위지천승... 청학 조맹견... 일검구주섬 마립... 철봉황 곽채릉...
실로 일세(一世)에 보기 힘든 무림의 최절정고수들이 유장령의 손에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형운비보다 약하거나 만만히 볼 사람은 없었다.
아니, 누군가가 그들 중 하나라도 꺾었다면 불후의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것도 한 사람의 손에...
그 사람의 고막을 후벼파는 듯한 괴이한 음향과 함께 뿌려지던 악마 같은 유장령의 검법은 적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막을 수가 없었다.
(내일...)
형운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쩌면 내일이야말로 형운비가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몰랐다.
그럴 확률은 다분히 있다.
이제 겨우 남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던 참인데 여기서 사그러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떠올랐다.
허나 회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실 좌혼지를 만난 이후의 그의 생활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고통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죽기 전에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이 꿈꿔왔던 삶을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죽든 살든 그는 내일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보람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형운비는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운비, 자느냐?"
방문 앞에서 좌혼지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형운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닙니다. 사부님! 들어오십시오."
방문이 열리며 좌혼지의 준수한 모습이 들어왔다.
"내가 너의 단잠을 방해한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형운비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고 있던 참이에요."
좌혼지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 일이 걱정되느냐?"
형운비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좌혼지가 갑자기 엄격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어라!"
형운비는 어리둥절했으나 그의 음성이 너무도 진지한지라 엉겁결에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좌혼지는 쉬지 않고 다시 말했다.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라!"
형운비는 좌혼지가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좌혼지는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그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다시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됐다. 손을 내리거라."
형운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세를 풀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사부님?"
좌혼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일 유장령과 맞서게 되면 너는 무조건 조금 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라."
"예?"
"그가 무슨 행동을 하던 일체 움직이지 말고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한다."
형운비는 알쏭달쏭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저를 공격해도요?"
"네가 그 자세를 허물지만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형운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 그러고 있어야 합니까?"
"그렇다. 그가 물러설 때까지."
형운비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굴에 의혹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허나 그는 좌혼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의 말이라면 설사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어요."
좌혼지는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네게는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형운비는 가슴 속에 여러 가지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으나 아무래도 그가 말해줄 것 같지 않아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결전의 날은 밝았다.
형운비는 숨을 힘껏 들이마신 후 방문을 나섰다.
시릴 듯한 푸른 하늘이 그의 눈을 찔렀다.
이상하게도 어젯밤과는 달리 마음이 조금도 격앙되거나 흥분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잘 싸우게!"
형운비는 중인들의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비무대로 걸어갔다.
생각하면 멀고 먼 역정(歷程)이었다.
품검대회의 일차관문인 장력을 시험하는 석벽 앞에서 수치와 좌절을 겪을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그는 어느새 모든 난관을 뚫고 품검대회의 결승전까지 도달한 것이다.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르렀다면 보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이 나타나자 주위에서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힘내라... 흑풍검!"
"이제는 너만을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성원을 보냈다.
형운비는 그 함성을 한 몸에 받으며 비무대의 중앙으로 가서 우뚝 섰다.
그때,
스읏!
눈앞에 백영이 어른거미려 백발청년의 싸늘한 모습이 나타났다.
치렁치렁한 백발이 바람에 날려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유장령은 잔인한 빛이 꿈틀거리는 눈으로 형운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얄팍한 입술에 비정하리만치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강호에 인재가 이렇게 없던가? 이런 어린아이가 결승까지 올라오다니..."
형운비는 별로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
유장령의 얼굴에 악독한 빛이 가득 떠올랐다.
"하긴... 오랜만에 어린아이의 피맛을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의 무시무시한 말에 형운비는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이 자는 정말 살인을 취미로 여기는 자다...)
형운비는 눈앞의 백발청년이 인성(人性)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희대의 살인마(殺人魔)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유장령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미 마음속에 살심(殺心)이 끓어올랐는지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형운비는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부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는 비무대의 어디에선가 좌혼지가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위로 추켜올렸다.
동시에 왼손을 땅을 가리키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유장령은 잔인한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서다가 이 자세를 보자 그 자리에 몸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찌 보면 경악에 가득찬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어이없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장령은 몸을 굳힌 채 형운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형운비는 좌혼지의 지시대로 양손으로 각기 하늘과 땅을 가리킨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의 자세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다.
허나 유장령의 안색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그는 형운비의 일 장 앞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이 석상(石像)이 되어버린 듯 했다.
군웅들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허나 유장령이 무엇 때문에 형운비의 엉성한 자세를 보고 그처럼 경악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토록 공포스러운 마검을 자랑하던 유장령의 손이 굳어 버렸는지 움직일 기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수천 명의 군웅들이 몰려 있는데도 조그마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형운비는 여전히 두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킨 자세였고, 유장령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정적이 감돌고 있는 비무대,
푸른 하늘에 눈부신 햇살만이 대 위를 굽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조차 멈춰버린 것 같았다.
곽지산과 곽소홍 등은 가슴이 터지는 듯 답답하고 긴장되어 손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비무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곽지산이 도저히 애가 타서 못 견디겠다는 듯 좌혼지를 돌아보았다.
"형운비가 지금 펼치고 있는 자세가 대체 무엇인데 검마가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좌혼지는 별로 긴장되지도 않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것은 우주전횡(宇宙專橫)이라는 초식입니다."
"우주전횡?"
곽지산이 금시초문인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견문이 풍부하고 식견이 탁월한 그로서도 처음 듣는 초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주전횡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초식의 하나로 검마의 극성(極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검마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절초가 있는 줄은 몰랐군. 그렇다면 왜 형운비는 그것을 펼치지 않는 건가?"
좌혼지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매달렸다.
"형운비는 그 초식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초식을 펼치는 자세만 익혔을 뿐이지요."
그 말에 곽지산은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는 그 초식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세만 취하고 있단 말인가?"
좌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전횡은 공력의 소모가 극심해 아직 운비의 내공으로는 익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자세만을 가르쳐 주었지요. 검마는 운비가 우주전횡을 익힌 줄로만 생각하고 감히 덤벼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곽지산은 어이없다는 듯 멍하니 있다가 다시 불안한 표정을 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저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좌혼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 싸움은 운비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운비의 지금 실력으로는 도저히 검마를 꺾을 수 없지요."
곽지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아니 그렇다면 뻔히 지는 줄 알면서도 그를 출전시켰단 말인가?"
좌혼지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 이번 기회가 아니고서는 운비가 언제 검마와 같은 고수와 겨루어 보겠습니까? 운비는 비록 패하지만 아주 좋은 경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곽지산은 그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
"허허 참... 자네의 배짱에는 두 손 들었네. 하지만 그러다가 운비가 다치기라도 하면..."
"운비는 무사할 것입니다."
곽지산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나 좌혼지는 그 말을 끝으로 비무대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곽지산은 의혹에 사로잡혔지만 하는 수 없이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돌부처처럼 굳은 듯 서 있었다.
어느덧 태양은 점점 중천에 떠올라 그 따사로운 빛은 더욱 열을 발하며 내리쬐고 있었다. 이렇듯 따가울 정도로 태양빛이 내리쪼이자 긴장된 상태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군웅들은 점점 지루함과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럴 정도이니 당사자들은 어떻겠는가?
형운비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목욕을 한 지 오래였다.
그는 번쩍 쳐들고 있는 오른팔이 거의 감각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쑤시고 아파왔다.
또한 너무 오랜 시간을 꼼짝도 않고 있는 바람에 허리와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저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승부고 뭐고 때려치고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눕고 싶었다.
허나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꾹 눌러 참았다.
(움직이면 안 된다...)
그는 좌혼지의 지시만을 되뇌이며 죽어라고 손을 쳐든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미 오른팔은 아프다 못해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땅을 가리키고 있는 왼쪽 팔마저 부러질 듯 쑤셔왔다.
차라리 두 팔이 없어져 버렸으면 고통도 덜 하련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그는 온 몸이 흠뻑 젖은 채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마침내 그의 육체는 서서히 그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감각이 없어진 오른팔이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지탱하고 있던 두 다리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안 돼...)
형운비는 속으로 신음을 토하며 아래로 내려오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려 했다.
허나 팔은 그의 마음과는 반대로 오히려 더욱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조금씩 떨리던 다리가 후들후들거리며 그의 몸이 금시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휘청!
그의 몸이 비틀거림과 동시에 오른팔이 아래로 축 쳐져 그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다.
순간,
번쩍!
그의 앞에 미동도 않고 있던 유장령의 몸이 희끗 움직였다.
그리고 섬광이 피어올랐다.
츠츠츳...!
악마의 호곡성같은 음향과 함께 섬광은 무방비로 비틀대고 있는 형운비의 몸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짓쳐들었다.
형운비의 몸은 순식간에 그 섬광에 꿰뚫려 버렸다.
최소한 중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앗!"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운비의 검은 얼굴에도 절망에 가득찬 빛이 떠올라 있었다.
헌데, 그 순간,
슉!
대 아래서 하나의 청영이 폭사해왔다.
그 속도는 가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찌 인간의 몸이 이토록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청영은 찰나간에 유장령과 형운비의 사이에 뛰어들었다.
팟!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하던 섬광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유장령은 손을 앞으로 내뻗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손에는 기형의 장검이 들려 있었다.
장검의 끝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형운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목과는 머리카락 한 오라기의 간격이 있을 뿐이었다.
하나의 손이 검 끝을 잡고 있었다.
유장령은 얼굴을 실룩거린 채 그 손을 보고 있었다.
그 손은 길고도 유연해 보였다.
유장령의 기형검은 그 손의 가운데 손가락과 둘째손가락 사이에 끼여 있었다.
유장령의 시선이 천천히 그 손을 따라 손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난생 처음 보는 준수한 청삼문사였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유장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 청삼문사는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는 무서운 고수다!)
자신의 검을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는 자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충격은 컸다.
좌혼지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보며 천천히 검을 잡은 손을 풀었다.
"이번 싸움은 당신이 승리했소."
그제야 유장령은 퍼뜩 정신이 들어 불쑥 물었다.
"너는 누구냐?"
좌혼지는 담담한 눈길로 형운비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나는 이 아이의 사부요."
유장령의 날카로운 눈이 흔들렸다.
한줄기 기이한 전율이 그의 전신을 빠른 속도로 번져갔다.
(이 자가 바로 우주전횡의 주인이다!"
그는 좌혼지를 바라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좌혼지는 슬쩍 그를 쳐다본 후 차분하게 말했다.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면 우리는 이만 물러가겠소."
유장령은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좌혼지는 아직도 비틀거리고 있는 형운비를 데리고 몸을 돌려 아래로 사라졌다.
그래도 유장령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품검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사실 따위는 그의 머리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그의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그자는 바로 금마옥주였다...!)
"괜찮느냐?"
좌혼지는 형운비를 내려보며 조용히 물었다. 형운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전신은 아직도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온 몸이 솜처럼 축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형운비는 그런 채로 잠시 서 있다가 나지가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좌혼지가 그를 내려 보았다.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어요."
좌혼지는 빙긋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잘해주었다."
형운비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좌혼지는 온화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일각(一刻) 이상은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너는 무려 반시진이나 버티었지. 이 사부는 아주 흡족하단다."
형운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제가 패할 거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하하... 그자는 네가 상대할 수 없는 고수다. 나는 이번 기회에 너의 끈기와 참을성을 알아보고 싶었지. 결과를 대만족이었다."
그제야 형운비는 조금 안심이 된 듯 표정이 풀어졌다.
"전 그것도 모르고 제가 지면 사부님께서 실망하실까봐 노심초사했어요."
"승패에 관계없이 네가 최선을 다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승부는 그 다음이지."
형운비는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히죽 웃었다.
"헤헤... 아무튼 그자의 검은 무척 무서웠어요. 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거든요."
좌혼지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형운비는 다시 말했다.
"사부님께서 그자의 검을 손가락으로 잡았을 때 그자의 표정이 아주 볼만하던데요."
형운비는 그의 얼굴을 흉내내 보였다.
좌혼지는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하하..."
곽지산과 좌혼지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결국 백홍검은 검마의 손에 들어갔군.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하려나?"
"우선 그의 뒤를 밟아 다른 신마들의 행적을 추적할 생각입니다."
"듣자하니 검마는 단목산산의 안내를 받아 단목자우가 기다리고 있는 천검동의 입구로 갈 거라는데 설마 그가 천검동에 들어가는 것을 순순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
"..."
"웃지만 말고 말 좀 하게. 검마를 비롯한 십이신마들이 지금까지 뚜렷한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은 천검동의 위치를 모르고 삼대기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세. 헌데 이제 그들이 천검동에 들어가게 된다면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헌데 우리 릉아는 이제 어찌 하려는가?"
"예?"
"예끼 이사람. 설마 이제 와서 자네들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겠지?"
"..."
"아무튼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 릉아는 자네의 여인일세. 그러니 그 아이를 어떻게 하든 나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네."
"...!"
"허헛... 자네가 얼굴 붉히는 것은 처음 보는군. 그런데 일전에 보니 단목소저도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던데..."
"이제 그만 하십시오, 곽노인."
"허허허... 언제까지 노부를 곽노인이라고 부를 건가?"
"..."